나는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씁쓸한 기분이 마음속을 맴돌고 있었다.“그래요, 잠깐만 기다려요.”나는 전화를 끊고 그 반지를 찾아서 끼고는 급히 이우범을 찾으러 내려갔다.북쪽 게이트 밖에 이우범의 차가 세워져 있었지만, 안에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차 밖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이우범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니 그가 내 뒤에 서 있었다.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이우범은 아직도 얇은 그레이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하얀 피부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불그스름해졌다. 특히는 코끝이 더 빨갰다.“요새 어디 간 거예요? 우범 씨 집에서 애타게 찾고 있어요. 나도 병원이랑 아파트 다 가봤는데, 없던데.”이우범을 보자 조여왔던 마음이 다시 풀리는 듯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하면 된 거다.“반지는요?”이우범은 그저 머리를 숙이고 내 손을 보고 있었다.나는 반지를 낀 손을 들어 그에게 보여주었다.“여기요.”내 손은 매우 예쁜 편이었다. 가늘고 긴 손은 어떤 반지를 끼나 다 괜찮아 보였다.이우범이 내 손을 살며시 잡더니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쁘네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돼요?”나는 그의 이런 요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된다고 했다. 고작 사진 한 장인데 말이다.이우범이 사진을 찍더니 그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설정하고는 나에게 물었다.“혹시 신경 쓰여요?”“괜찮아요. 그냥 다시 가출만 하지 마요. 이러면 우범 씨 부모님이 너무 상심이 크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가출하라고 한게 하닌가 오해할 수도 있어요.”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독였다.이우범의 표정이 살짝 차가워졌다.“집에서 도시아랑 약혼하라고 하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그래서 바람 좀 쐬러 나온 거예요.”이우범 집안은 도시아를 확실히 아주 좋아했다. 집안도 잘 맞고 아직 미혼이니 나보다는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나는 이우범 집안의 이런 행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한참 후 냥이가 고맙다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대화가 끝난 셈이었다.나는 저릿한 목을 돌려 풀어주고는 물건을 정리해 퇴근했다.“지영아, 우리 집 와서 해물 샤부샤부 먹자, 빨리!”회사에서 나오는데 마침 정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래.”나는 단번에 동의했다. 지금 집에 가도 별 의미가 없었다. 텅 빈 집은 외로운 기운으로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틈만 나면 정아와 애들을 찾아서 모이려고 했다. 그러면 혼자서 잡생각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세희는 얼마 전 이모건과 사귀게 되었고 민정은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아네 가족도 따듯하고 화목해 보였다. 셋 다 행복한데 나만 불쌍한 느낌이었다.“성민 씨는?”인사를 하고는 집을 둘러봤는데 노성민이 보이지 않아 물었다.“배인호 씨가 불러서 나갔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정아가 답답한 듯 말했다.“어젯밤에 이우범 찾느라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아침에 이우범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문자를 받았다고 그러더라고.”배인호는 아까 샤인 코스메틱트로 갔는데 노성민까지 불러낸 거 보면 진짜 무슨 일 생긴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마음속 깊이 샤인 코스메틱에서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해서 우리 회사에 영향 주지 않을까 걱정되었다.“인호 형, 아마 가짜일 거예요...”정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노성민은 이렇게 말하며 나타났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앉은 우리를 발견하고 멈칫했다.뒤따라 들어오는 배인호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였다. 그는 짜증이 담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노성민이 절반쯤 말하다 말았다. 그는 외투를 벗으며 헤헤 웃었다.“아, 다들 밥 먹으러 온 거구나. 우리 자기가 말 안 해줘서 몰랐네요.”정아가 나와 배인호를 번갈아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난 배인호 씨 오는 줄 몰랐어.”요새 배인호와 만날 기회가 많아지면서 밥 한 끼 같이 먹는 건 아주 평범한 일이 되었다. 나는 현실을 잘 파악해야 했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상, 그리고 같은 계층에 있
내 말에 서란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녀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배인호가 나한테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하미선은 그나마 괜찮았다. 서란의 손을 토닥거리더니 상냥한 어머니의 말투로 말했다.“라니야, 너 왜 이렇게 속이 좁아? 허지영 씨 배인호 씨 전처인데 이혼해도 서로 친구 하는 건 정상이잖아. 오늘 너도 여기 왔고.”맞는 말이다. 전에 서란은 유하가든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들어올 수 있다는 건 무조건 배인호가 허락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의미는 그들의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는 거다.배인호는 여전히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웠다. 나는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알겠어요, 엄마.”서란은 하미선의 말을 참 잘 들었고 바로 착한 딸의 모습으로 돌아와 고분고분 대답했다.나는 하미선 말속의 자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곁눈질로 배인호가 걸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우리 집 정원으로 들어갔다.서란의 상큼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기쁜 듯했다.“인호 씨!”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빠르게 거실로 들어가 “쾅”하고 문을 닫아버렸다.옆집에서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질지는 생각하기조차 귀찮았다.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벌거숭이 나무는 이 겨울밤에 더 시려 보였다. 나는 와인 한 잔을 따랐다. 마시고 바로 잘 생각이었다.“딩동!”핸드폰이 울렸다. 냥이가 보내온 메시지였다.확인하기도 전에 냥이의 음성통화가 날아왔다.전화를 받자, 냥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지영 언니, 인호 씨 전에 머리 다친 적 있죠? 어떻게 서란과 하미선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할 수가 있어요?”“어떻게 알았어?”나는 놀라서 물었다.“저 서란 씨 인스타 있잖아요. 인스타에 올렸더라고요. 진짜 답답해요.”냥이가 이렇게 화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언성도 많이 높아져 있었다.털털한 성격이라 거의 충동적이고 격렬한 태도가 없었다. 있는 집 딸이라 있어야 할 기본 매너는 있었다.배인호의 이번 행보가 진
나는 아예 부케를 뺏을 생각이 없었고 그냥 뺏은 체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정은 하필 내가 있는 방향으로 부케를 던졌다.나는 손을 거두려고 했다. 옆에 선 서란이 팔을 높이 뻗으며 부케를 받으려고 하니 받게 놔두려고 했다.이 생각을 굳히기도 전에 부케가 내 품으로 날아들었고 서란은 바닥에 넘어지면서 둔탁한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아!"서란이 고통스럽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마도 다친 듯했다.아래에서 구경하던 민예솔이 이런 상황을 보고는 급히 이쪽으로 뛰어와 서란의 상처를 살폈다.“괜찮아? 왜 갑자기 넘어진 거야?”하객들도 이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 목을 빼 들고 상황을 살폈다. 부케를 안고 옆에 서 있던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아니나 다를까 서란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한번 보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언니, 저 괜찮아요. 올라와서 지영 언니랑 부케를 뺏는 게 아닌데...”부케를 던질 때 열몇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신체적인 접촉도 많아 아래서는 어떤 상황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서란이 만약 나를 저격한다면 나는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부케 뺏을 때 넘어지는 건 원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다친 게 뭐라고?”정아가 직설적으로 말했다.“근데 라니가 이미 부케를 받았는데 허지영 씨가 다시 뺏어가면서 밀친 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민예솔이 서란을 부축해 일으키며 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나는 두 사람의 쇼를 옆에서 냉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래에 있던 하객 중에 서란을 믿는 사람이 무조건 있을 것이다. 하긴 정아와 애들을 빼고는 다 모르는 사람이니 말이다.역시나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저 사람 배인호 전처 아니야? 서란은 배인호 전 여친이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닐까?”“배인호도 있잖아? 봤을까?”“근데 아까 서란이 먼저 부케를 받았는데 허지영이 뺏어간 거 같은데.”나와 서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감
“인호 씨,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서란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눈물이 글썽해서 배인호에게 따질 뿐이었다.배인호만 그녀의 편을 들어준다면 서란은 이렇게 서럽지 않았을 것이다.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 편에 서게 된다. 배인호는 서란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쉽게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한 것이다.“네가 잘못했으니까 사과하는 게 맞지.”배인호의 말투는 엄격했다.“나 잘못한 거 없어요. 지영 언니가 내 부케 뺏은 거 맞고 나를 일부러 밀어서 넘어지게 했어요.”서란이 그래도 계속 바득바득 우기며 반박했다.“인호 씨가 아직 지영 언니한테 미련이 남아서 언니 편에 설 뿐이에요. 그런 거라면 왜 마음 가는 대로 안 해요?”배인호는 끝내 인내심을 잃고 성질을 내며 언성을 높였다.“닥쳐. 내가 네 가르침까지 받으면서 행동해야 해?”서란이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나를 모함하려 했지만 결국 내가 보는 앞에서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서란이 증오의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서란이 또 나에게 책임 전가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서란은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언니, 이제 만족해요? 이런 꼴 보고 싶었던 거죠?”“첫 번째, 날 모함한 건 너야. 두 번째, 난 네 꼴도 보기 싫어. 네가 말하는 이런 꼴은 더더욱 싫고.”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서란이 얼굴을 가리고는 울면서 휴게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민예솔이 뒤따라 나간 것 외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배인호는 이우범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보는 것 같았다.나는 이 두 사람이 내 앞에서 기 싸움을 하는 걸 보기 싫어서 먼저 도망가려고 했다.“지영 씨!”순간 이우범이 나를 불러 세웠다.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다.“왜요?”“무슨 일이 있든 간에 난 무조건 지영 씨 편이에요. 지금 이 말 꼭 기억해요.”이
“지난번에 했던 그 말, 아직 유효한 거죠? ”나는 자존심 같은 건 다 내려놓고 물었다. 배인호가 아빠의 일로 나를 속일 사람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빠가 진짜 누구에 의해 이렇게 된 거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아빠를 만나 일의 자초지종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어떤 말?”배인호의 굳어 있던 얼굴은 순식간에 풀렸고, 내가 뭘 묻는지 알면서 일부러 되물었다.“내가 청담동에 가서 보름 동안 살면 아빠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면서요.”나는 아빠가 나를 탓할지라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빠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거면, 나는 딸로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깨어나면, 아빠가 이 일을 당한 거에 대해 많이 속상해하실 것이다. 배인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 손을 놓더니 내 말을 정정해 주었다.“한 달.”“보름 동안이라면서요?!”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응, 보름은 네가 정한 거잖아? 지금은 네가 나에게 부탁하는 거니까, 내가 그 조건 좀 고치려고.”배인호는 마음껏 뻔뻔함을 드러냈다.나는 몇 마디 반박하려 했지만, 배인호의 눈빛 하나에 제압당해 버렸으며, 지금 나의 위치에 대해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지금 만약 또 그를 거절한다면, 아빠를 벼랑 끝까지 미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그래요. 좋아요. 하지만 3일 이내에 아빠를 만날 수 있게 해줘요.”나도 내 요구를 제기했다.“알겠어.”배인호는 간단명료하게 답했다.“그럼, 지금 청담동으로 가.”“저 아직 짐 정리도 못 했어요!”내가 답했다.“그럴 필요 없어. 청담동에 이미 다 준비해 뒀거든. 넌 몸만 가면 돼. 때마침 오늘 우릴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배인호는 내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끌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의 손은 내 손과 달리 아주 따뜻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손까지 잡을 필요 없어요.”“손이 그렇게나 차가운데 옷 좀 두껍게 입어.”배인호는 내 손을
배인호 어머니는 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냥이를 쳐다봤다.이렇게나 직접 배인호네 집으로 찾아온 여자는 당연히 보통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냥이는 머리를 검은색으로 바꿔, 많이 차분하고 얌전해 보였다. 코 피어싱이나 입술 피어싱도 다 제거하긴 했지만, 귀에 그 줄줄이 끼여진 피어싱은 제거하지 않은 상태라, 차분함에 약간의 자유분방함이 섞여 있는듯한 모습이었다.내가 잘난 척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배인호 부모님이 어떤 며느리를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지적이고, 외적으로는 심플하고 귀티 나는 스타일을 선호하신다.냥이처럼 귀에 줄줄이 끼워진 피어싱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게다가 그들은 아직 냥이의 신분도 모르는 상태이다.“인호야, 이분은 누구시니?”배인호 어머니는 이런 스타일은 싫어하시지만, 그래도 교양 있고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냥 아는 애예요.”배인호는 간단명료하게 소개했으며, 그 태도는 심지어 무척 차가웠다.냥이는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아저씨. 저는 배인호 씨의 친구입니다. 그냥 냥이라고 불러주세요. 오늘 아주머니 생신이라고 들어서 선물 드리러 왔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가져온 선물을 배인호 어머니에게 내밀었고, 투명하고 정교한 선물상자에는 한눈에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아름다운 비취 관음이 놓여있었다.이 선물을 본 배인호 어머니의 표정은 역시나 밝아졌고, 그녀를 향한 몇 마디의 칭찬에 냥이의 표정도 많이 풀렸다.하지만 배인호 어머니는 그 선물을 다시 냥이에게 돌려줬다.“정말 고맙지만 이렇게 귀중한 선물은 제가 받을 수 없어요. 냥이 씨, 온 김에 그냥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가요. ”냥이는 멈칫하더니 약간의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선물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라도 뻘쭘하긴 하지만, 배인호 어머니가 선물을 거절하는 거도 지극히 정상인 적인 일이다. 배인호의 그냥 아는 일반 친구의 귀중한 선물을 받
“아...”서란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녀가 여기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오른쪽 어깨는 정상으로 보였으며, 전혀 다친 사람 같지 않았다.이때 민예솔이 그녀 대신 답했다.“여사님, 그런 게 아니라 제 동생이 괜한 통증으로 오늘 자리에 영향을 끼칠까 봐, 여기 오기 전 특별히 진통제를 먹고 왔어요. ”이제는 하다 하다 진통제라니...서란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맞아요. 근데 별 큰 문제는 없어요. 지영 언니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면서 왜 날 고소하려 했어?”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입을 열어 되물었다.그 순간 민예솔도 대꾸할 방법이 없는 듯 말문이 막힌 채 멍해 있었다.서란은 촉박해 보이는 표정으로 하미선쪽을 바라봤다.“이건 모두 오해로 초래된 일인 거죠. 오해는 해명하고 고소는 취하하면 되는 겁니다.서로 다 친한 사이라 왕래가 잦다 보니, 이런 갈등은 피할 수 없네요. 양해해주세요.”역시 서란의 뒷배경인 하미선이 전혀 조급해 하지 않고 차분히 얘기를 이어 나갔다.나는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래요, 해명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서란의 표정은 의심이 가득했으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더는 묻지 않았고, 나도 여기까지만 답했다.현재 거실 소파에는 배인호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로 꽉 차 있지만, 서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사람들이었다.때마침, 저녁상이 준비되었고, 저녁을 먹으라는 집사의 말에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풀렸다.원형 식탁에는 때마침 8개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배인호 어머니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지켜본 서란은 그 옆에 다가가 앉으려 했으나, 배인호 어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영아, 내 옆에 앉아.”“네.”나는 그녀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서란은 속상한 듯 배인호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배인호에게 시선이 멈췄다. 아마 배인호가 어디 앉으면 그녀도 그 옆에 가서 앉으려는 듯했다.배인호는 아무 생각 없이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