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너 아직도 못 믿는 거야?”안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만약 정말 안 믿으면 그러면 그냥 출국했다고 생각해.”안나가 하예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믿게 하고 싶었지만, 원준은 이 모든 것이 안나와 하예가 짠 판이라고 생각했다.“허안나,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응, 내가 그냥 거짓말한다고 생각해. 어차피 안 믿을 거잖아.”안나는 더 이상 설명하기 싫었다. 하예의 일로 뒤처리하느라 힘들어서 임신 때문에 동글했던 얼굴이 갸름해졌다.안나가 가려고 하자, 원준이 안나의 손목을 잡았다.“이거 놔!”“안 돼. 송하예 일 제대로 얘기 안 해주면 가려고 하지 마!”원준이 목소리가 떨렸고 호흡도 가빠졌다.“나 말할 건 다 말했어. 너 남은 인생 송하예 볼 생각도 하지 마, 겁쟁이 자식!”“너 이렇게 말하고 입 다물지 마, 송하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나 다 얘기했어.”안나는 힘겹게 원준의 손을 떼내고 물티슈를 꺼내 원준이 만졌던 부분을 닦았다.“서원준, 나쁜 자식. 너희 엄마, 아빠가 전부터 감정이 안 좋은 줄 알면서 가정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 너희 아버지께서 재혼한 게 하예랑 무슨 상관인데? 아버지를 탓하지는 못하면서 하예만 뭐라고 했잖아. 하예가 전생에 너한테 뭐 빚진 거라도 있어? 너 같은 걸 좋아한 하예가 무슨 죄야?”안나의 말은 점차 빨라졌고 점점 듣기 거북한 말이 나왔다. 그러나 안나는 말하다가 울기 시작했다.“서원준, 다 너 때문이야!”안나가 간 뒤, 원준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주위의 시끄러운 소리에 원준은 정신을 차렸다.하예는 순서에 따라 원준과 유미의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목사가 유미를 한평생 사랑할 거냐는 질문에 원준은 세 번째에서야 쉰 목소리로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원준의 대답에 하예는 자신의 몸이 더욱 투명해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곧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그날 밤, 원준은 혼자 서재에서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다.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듯 서랍에서
원준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서은택이 원준과 재혼에 대한 말을 꺼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서은택은 원준에게 자신과 이수지는 원래 계약 결혼이라 사랑하는 감정이 없었다고 얘기했다.그때 이수지가 여행을 가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이혼하자고 얘기해서 서은택이 동의했다. 그리고서 서은택이 김설아를 만났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혼인 관계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서은택의 말을 들은 원준은 눈이 빨개져 이를 악물고 서은택의 얼굴에서 거짓말을 한 흔적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서은택이 처음으로 원준에게 진지한 말을 꺼냈는데, 이 말에 원준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그래서 아줌마를 만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어머니랑 이혼하신 상태였던 거예요?”서은택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가 아직 어려서 말 못 했어. 근데 나랑 아줌마 곧 여행 가기로 했고 유학간 하예도 보려고.”“네.”원준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 아줌마랑 잘 놀다 오세요. 전 일 때문에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원준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차 키를 들고 급히 저택에서 도망쳤다.원준은 차를 엄청나게 빨리 몰아, 안나의 집에 도착했다.문이 열렸을 때, 두꺼운 옷을 입은 안나가 잠에 덜 깬 모습으로 서 있었다.원준이 찾아온 것을 보고 안나는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원준이 문을 못 닫게 팔로 막았다.“왜 왔어?”안나는 짜증이 난다는 듯 물었다.“너 아내랑 가서 놀지 여긴 왜 왔냐고?”“송하예 어디 갔어? 어디 숨은 거야?”원준은 하예가 정말 죽었는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안나는 원준이 물은 의도를 파악했다.안나는 원준을 비웃으며 말했다.“서원준, 너 마음속에 답안 다 있잖아. 아니야?”“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잖아.”원준의 입술이 떨렸다. 원준은 안나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원준의 차갑던 목소리가 갈라졌다.“송하예가 그렇게 아줌마를 사랑하는데, 왜 죽은 거 얘기 못 하게 했어?”하예는
말을 마친 안나는 원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다급히 방에 들어가 우는 아이를 달랬다.그러나 하예와 안나의 예상 밖으로 원준도 따라서 들어간 것이다. 원준은 안나 품속에 있는 아이를 보고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예쁘게 생겼네, 이름 지었어?”“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 송하예에 대한 건 안 알려줄 거니까!”안나는 원준에 대해 경각심을 세웠다.“요 몇 달 너 송하예 보러 가지도 않았잖아. 넌 걔가 너 원망할 거라고 생각 안 해?”원준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송하예 어디다 묻었어? 당장 얘기해.”잔잔했던 분위기가 원준의 고함에 급격히 공포스러워졌다.안나 품속에 안겨있던 아기가 무엇을 감지한 듯 울기 시작했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원준은 정신을 차리고 사과했다.“미,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송하예 보러 가고 싶어서.”원준은 귀여운 아기를 안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안나가 불안한 듯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결국 안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원준에게 다 알려주었다.안나가 원준을 데리고 하예가 묻힌 곳으로 왔을 때, 땅에는 이미 예쁜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하예가 좋아하는 장미였다.하늘에서 갑자기 작은 비가 내려 조금 춥고 스산해 보였다.원준은 무릎을 꿇고 무덤 앞에 앉아 웃으며 말했다.“하예가 정말 아무 말도 안 남겼어?”“몇 번 물어보는 거야? 하예가 너 보고 더 이상 하예 미워하지 말래. 너 할 수 있겠어?”“나 할 수 없어. 어떡해?”원준은 한평생 자신과 함께하겠다던 여자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할 수 없으면 가서 죽던가!”안나는 심한 말을 하려다가 삼켜버렸다.“하예가 너 쫓아다닐 때 너 어떻게 행동했어? 하예가 자존심 다 버리고 했을 때, 넌 어떻게 하예한테 행동했는데? 하예를 비웃었던 것도 너고, 지금 후회하는 사람도 너야. 송하예 돌아오게 하고 싶으면 죽어서 갚아!”안나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다 뱉었다.원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안나는 미쳐가는 남자
‘나 진작에 죽었어. 내가 죽기 전에 나한테 얘기해 줬다면, 너랑 같이 연기해서 내 인생에 후회는 안 남겼을 텐데. 근데 나 이미 죽었잖아, 지금처럼 우는 모습 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하예는 원준이 무덤 앞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혼잣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하예의 영혼마저 이 세상에서 사라지려 했다.하예는 자기 몸이 점점 투명해진 것을 발견했고 꽃이 가득한 길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발견했다. 그 길의 끝에 양갈래를 한 아이가 서 있었다.그 아이는 하예를 향해 엄마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하예는 자기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빛이 나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귓가에는 원준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 하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원준에게 빚진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랑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방향을 잃게 했다.하예가 원준을 오랜 시간 사랑했기에 이번만큼은 자신만을,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사랑하려고 한다.“원준아, 안녕.’...(원준, 그 후의 이야기.)원준은 자신의 여자 친구의 어머니가 자신의 집을 파괴한 여자라는 것을 알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원준은 하예와의 만남이 다 하예가 짠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원준은 하예와의 만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고, 모든 것들이 다 가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원준이 하예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나 하예가 울면서 이유를 물었다.그러나 원준은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김설아가 자신의 집을 망가뜨렸다는 이유로, 서은택을 미워하지 못한 채 하예만 미워했다.하예는 김설아의 재혼 상대가 서은택이라는 것을 모른 채, 대범하게 원준을 쫓아다니기 시작했고 원준은 마음속으로는 모순되지만, 하예와의 시간을 즐겼다. 그러나 하예가 다시 만나자는 말은 계속 무시했다.결국 하예와 김설아가 저택으로 와서 같이 살게 된 날, 모든 일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원준은 하예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처음에
이 점을 알게 된 원준은 그제야 자신이 미워한 사람이 하예도, 김설아도 아닌 변심한 서은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장기간의 짓누름에 원준은 이 모든 것이 서은택의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원준은 이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서은택의 두 눈을 봤을 때 아무 말도 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원준은 열심히 회사 일을 배워 서은택의 손에서 서강그룹을 빼앗아 오려고 했다.그러나 서은택이 원준이 가정을 이뤄야 원준에게 서강그룹을 넘겨줄 수 없다고 해서 마땅한 여자를 찾아야 했다.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품고 있지만 결혼은 해야 하는 부잣집 여자 말이다.그러나 원준의 결혼식에 하예가 오지 않았다. 원준은 안나한테서 하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하예가 왜 죽어?’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반년이 지났다. 안나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하예는 나타나지 않았다.원준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안나를 찾아가 하예의 소식을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서은택이 원준에게 김설아가 내연녀가 아니라고 얘기했다. 이 말이 원준이 몇 년간 미워했던 하예를, 그리고 모든 것을 장난으로 만들어 버렸다.하예는 종래로 잘못한 적이 없었고 이 모든 것은 다 원준의 잘못이었다.원준은 비석 위 하예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다년간 하예에게 했던 행동들을 후회했다.눈물에 앞이 가려졌지만, 원준은 저승으로 가는 하예를 본 듯 온 힘을 다해 하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하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결국 하예는 정말 사라져 버렸다.원준은 정말 하예를 본 것인지,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원준은 6년이라는 시간을 이용해 서강그룹의 모든 것을 캐냈고, 안나를 도와 하예가 죽었다는 사실을 김설아에게 비밀로 했고 죄를 갚기 위해 그룹의 대부분 자금으로 가정 폭력을 반대하는 재단을 세웠다.이 돈으로 전에 김설아처럼 결혼이라는 진흙탕 속에 빠져 자신을 잃어갔던 여성을 위해서 썼다. 이것은 전에 하예가 원준에게 했던 말이었다.그 뒤로 원준은
송하예가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하예와 서원준이 헤어진 지 6년째 되던 해였고 한가족이 된 지 6년째 되던 해였다.하예는 급히 집으로 가서 원준의 서재로 달려갔다.“정말 고씨 집안 아가씨랑 결혼해?”원준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넌 내가 잘되는 꼴을 못 보니?”하예는 무슨 말로 반박할지 몰라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원준의 차가운 눈빛에 하예는 원준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신을 미워한다고 느꼈다.하예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근데 고씨 집안 아가씨 좋은 사람 아닌데?”하예는 원준을 좋아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원준의 미래 아내는 악명이 자자한 사교계의 꽃이면 안 된다.“너는? 불륜녀의 딸이 그럼 좋은 사람인가?”원준은 마치 하예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그녀를 째려보았다.원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불빛이 그의 몸을 내리비췄다.얼굴이 반만 불빛에 비쳤고 머리에 가려져 하예는 원준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송하예, 서씨 집안의 모든 일은 너랑 상관없어.”“근데 나 한 번도...!”하예는 자신이 서씨 집안의 재산을 탐내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싶었다.그러나 원준은 하예의 설명을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오빠.”정장을 차려입은 원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승냥이처럼 하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방금 뭐라고 했어?”하예는 전에 어머니인 김설아가 재혼한다고 해서 상대방 가족을 만나러 갔을 때, 사람 중에 원준이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그녀는 그 뒤로 원준과 잘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원준이 계속 하예를 미워하고 있었다.원준은 학교의 사람들을 시켜 하예를 괴롭히고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그래도 하예는 자존심 때문에 원준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오빠라고 부르면 두 사람한테 정말 미래가 없을까 봐 두려웠다.“오빠, 우리 그만 싸우자. 응?”하예는
김설아는 하예한테 원준과 싸웠냐고 물어보지 않고 그저 얼굴에 왜 피가 묻어있냐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하예는 익숙한 듯 무서운 장면이 떠올랐다.그때는 김설아가 재혼하기 전, 친아버지인 송권호가 가정 폭력을 해서 남긴 흔적이었다.하예는 김설아를 걱정시키기 싫어 웃으며 몸에 열이 나서 코피가 난 것이라고 둘러댔다.그 말을 들은 김설아는 한숨을 돌리고 하예 보고 얼른 가서 쉬라고 했다.하예는 고통을 참으며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지만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진통제를 먹고 눈을 감은 뒤, 하예는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잠이 들면 안 아플 거야.’꿈속에는 자꾸 화를 내는 원준도 없을 것이고 자꾸 우는 김설아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얕은 잠에 들자, 하예는 원준과 가장 달콤했던 시기로 돌아간 것 같았다.그때, 하예는 남부의 못 사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고 원준과 순수하게 연애했었다.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목적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하예는 집안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고 원준도 집에 돈이 많다고 얘기하지 않았다.두 아이는 다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서로 의지했다.원준은 자신이 미래에 노력해서 아버지가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들겠다고 했고 하예는 김설아가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송권호와 이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하예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원준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원준은 하예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그녀를 품에 안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원준이 하예에게 맹세했다.“송하예, 내가 있으니까, 앞으로 무서워하지 마.”하예는 그때의 감정을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저 심장이 아주 아팠다.그날 원준의 셔츠가 하예의 눈물에 가득 젖어버렸다.하예는 원준과 이렇게 한평생 행복하게 살 거로 생각했는데, 원준이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다.하예는 헤어지기 싫어 울며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원준은 그저 하예가 싫어졌다고 했다.하예는 이런 말을 믿을 수 없어 다시 원준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산에 가서 밤을 캐다가 손으로 껍질을 깠고 피가
‘원준이 내가 그렇게 죽었으면 하는데, 마지막으로 서프라이즈 해주지 뭐.’“누가 너 다이어트 하지 말래? 굶어 죽어!”원준은 하예를 건너 물 한 컵 떠서 탁자 위에 놓았다.“너 봐서 정말 짜증 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원준은 하예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증오해서 부어놓은 물도 마시는 것을 깜빡하고 급히 외투를 챙겨 저택에서 나갔다.원준의 미움을 받는 생활을 하예는 6년이나 겪었다.‘난 도대체 무슨 힘으로 버텨낸 거지?’컵의 물이 일렁이는 것을 본 하예는 참지 못하고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한 온도였다.그 순간 하예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사실 하예도 원준과 헤어진 뒤에 예전처럼 원준을 따라다닌 이유가 뭔지 알지 못했다.진흙탕 속에 빠져있던 하예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줘서? 아니면 고통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원준이 하예에게 준 일 년이 6년의 고통을 이기게 해 주었다.하예는 자신이 간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정말 원준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곧 죽기 때문에 하예는 그냥 계속 사랑하기로 했다.마치 자신이 쓴 각본처럼,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이 정말 순수한 사랑을 했었다고 소리칠 수 있다고 말이다. 병원의 산부인과에서 원준을 다시 만났다.하예는 친구 허안나의 검진을 위해 왔고 원준은 예비 아내인 고유미의 검진을 위해 왔다.하예는 빛을 보면 안 되는 쥐처럼 숨을 곳을 찾았다. 그러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주위의 사람들이 다 이상한 눈길로 하예를 바라보았다.어떤 사람은 하예를 피하고자 돌아서 갔다.그러나 하예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머릿속에 원준이 웃으며 유미를 바라보던 모습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하예는 아주 오랫동안 원준이 그렇게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원준은 항상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목소리도 차가웠다.하예는 일을 시작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차가워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하예의 착각이었다.원준은 그저 하예한테만 차갑게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