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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관계
은밀한 관계
Author: 이수정

제1화

유나은은 요 이틀 구역질이 심하고 생리도 8일이나 미뤘다.

보름 전, 그 남자가 스완 시티에서 돌아온 그 날 밤, 너무 성급하고 사납게 몰아붙여 조치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잘못 걸린 듯싶었다.

병원 동료들이 입방정이다 보니 유나은은 퇴근 후 일부러 길을 에돌아 밖에 있는 약국에 가서 임테기를 구입했다.

집에 돌아온 후 그녀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결과를 기다리는 몇 분 동안, 유나은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하필 이때 밖에 놓아뒀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우우웅...

유나은은 가슴이 움찔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임테기 결과만 기다렸다.

임신 테스트는 5분 뒤의 결과가 가장 정확하다. 유나은은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아직 2분이 더 남아있었다. 확실히 그녀가 조급한 듯싶었다.

그 시각, 밖에 있는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시끄러운 벨 소리와 진동음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혹여나 중요한 일일까 봐 걱정된 그녀는 결국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유나은은 발신자 번호를 본 순간 거부감이 들어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는 받을 때까지 걸어올 기세였다. 그녀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고 수척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전화기 너머로 김준희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은아, 네 아저씨 또 병이 도졌어. 날 유리로 찌르고 불을 달려고 해. 피가... 몸에 피가 너무 많이 나. 나 너무 아파... 얼른 도곡 별장으로 돌아와...”

유나은은 순간 휴대폰을 꽉 잡았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서 숨어요. 나 금방...”

‘돌아갈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제로 통화가 종료됐다.

전화가 끊기면서 유나은은 처참한 비명을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모든 걸 제쳐두고 슬리퍼도 못 갈아신고 허겁지겁 문밖을 나섰다.

그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면대 위의 임테기에 결과가 나왔다.

...

도곡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꽤 멀었다.

유나은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어둠이 드리워지고 하늘에서 장맛비가 쏟아졌다.

차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유나은은 사색이 된 채 차가운 빗줄기를 맞으며 안으로 달려갔다.

익숙하게 김준희의 방문 앞에 도착했고 문틈이 살짝 열렸다. 유나은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문을 확 열어젖혔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았다.

“나은이 왔어?”

데이베드에 누운 김준희는 한창 호박씨를 까먹다가 고개를 들고 초라한 몰골의 딸아이를 쳐다봤다. 그녀는 호박씨를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문 앞에 서 있어? 밖에 추워, 얼른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와서 김준희가 아무렇지 않게 누워있는 걸 본 순간부터 유나은은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아챘다.

유리로 찌르고 불에 태우고, 죄다 그녀를 데려오기 위한 속임수였다.

유나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참으며 짙은 얼굴로 그녀 앞에 다가갔다.

“엄마, 대체 왜 나한테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그래, 알았어. 네가 걱정하는 거 알아. 봐봐, 얼마나 유용해? 이렇게 바로 돌아왔잖아.”

김준희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서 유나은에게 건넸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 무사한 걸 보면 기분 좋잖아, 안 그래?”

김준희는 수려한 미모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1남 1녀를 낳았지만 몸매 관리를 잘하고 탱탱한 피부가 독보적이라 불혹의 나이란 걸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유나은은 시선을 거두고 무덤덤하게 차를 건네받았다.

김준희는 그녀의 차가운 손에 닿자 덥석 잡으며 물었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그제야 그녀는 딸아이의 머리도 축축이 젖은 걸 발견했다.

“너도 참, 비 오는 날 우산 쓰는 것까지 내가 일일이 알려줘야 해?”

말을 마친 후 김준희는 손수건으로 유나은의 얼굴을 닦아주려 했다.

이에 유나은이 피하며 말했다.

“엄마가 걱정돼서 급하게 돌아왔어요.”

김준희는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도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야. 그러게 몇 번을 불렀는데 왜 집에 안 와? 나도 어쩔 수 없어서 이런 방법으로 널 속인 거잖아.”

사실 유나은은 겉으론 담담한 척해도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럼에도 눈앞의 이 여자는 그녀를 낳아주고 길러준 엄마이기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유나은은 씁쓸한 마음을 집어삼키고 차를 제자리에 내려놨다.

“아무 일 없다니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이때 뒤에서 김준희가 호통을 쳤다.

“가긴 어딜 가? 여긴 네 집 아니야?”

유나은은 걸음을 멈췄다.

“엄마 집이지 내 집은 아니죠.”

그녀의 친아빠는 유씨 성이고 그녀도 유나은이다. 마땅히 유씨 일가에서 지내야 하는데 김준희가 나중에 이씨 일가로 재가하며 그녀도 도곡 별장으로 따라왔다.

그해 유나은은 8살이었고 김준희는 끝까지 딸아이의 양육권을 고집했다. 이 때문에 유나은은 엄마가 줄곧 자신을 매우 사랑한다고 착각했다.

“유나은, 거기 안 서?!”

김준희가 버럭 화내며 쫓아왔다.

유나은은 듣는 척도 안 하고 이제 막 문을 열고 나가려 하는데 김준희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원우 귀국했어.”

유나은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김준희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문을 안으로 닫았다. 유나은의 무표정한 얼굴을 살펴보더니 김준희가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었다.

“넌 절대 그날 밤 일을 잊을 리가 없지!”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면 한없이 슬픔에 젖거나 몸 둘 바를 모르게 수치스럽거나 둘 중 하나이다.

김준희가 말한 그 날 밤 그 일은 보다시피 유나은에게 후자에 해당한다.

유나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 이미 오래전 일이라 오빠도 잊었을 거예요.”

“잊어? 이원우 그 자식이 티 없이 깨끗한 내 딸과 잠자리를 가졌는데 아무런 책임도 안 지고 해외 나가서 3년이나 지냈어. 이제 드디어 귀국했는데 내가 이대로 관둘 것 같아?”

격앙된 말투로 쏘아붙이다 보니 하마터면 침까지 튀길 뻔했다.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면 김준희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엄마라고 여길 것이다. 딸아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어 딸을 위해 정의를 구현할 기세였으니까.

하지만 유나은은 오히려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날 밤 그 차는 엄마가 나한테 준 거잖아요?”

김준희는 순간 찬물 세례를 당한 듯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건...”

유나은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그날 밤에 난 울면서 엄마한테 제발 내보내 달라고 애원했어요. 그런데 엄마는 끝내 날 원우 오빠 방에 데려다 놨죠. 오빠는 내 명의상 사촌오빠라고요!”

김준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은아, 실은 나도 그게 원우 방인 줄 몰랐어. 휴식실인 줄 알고 잘못 들여놨지 뭐야.”

유나은은 입꼬리를 씩 올리고 야유에 찬 미소를 날렸다.

“잘못 들여놓긴 했죠.”

김준희는 딸아이의 의미심장한 말을 깊게 새겨듣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때 이미 목표에 달성했으니 유나은과 이원우가 잠자리를 가진 건 빼도 박도 못 한 사실이다!

김준희는 원래 이 엄청난 약점을 잡고 공개적으로 이원우를 협박해 유나은과 결혼시킬 목적이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이원우가 뜻밖에도 해외로 나갔고 김준희의 계획도 수포가 되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접을 김준희가 아니지!

그녀는 무려 3년을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이원우가 드디어 귀국했다!

김준희는 잔뜩 흥분한 채 유나은을 흔들어댔다.

“나은아, 그만 얘기하고 얼른 가서 옷 갈아입어. 내가 미리 과일을 준비해놨으니까 네가 직접 원우한테 갖다 주렴.”

유나은은 머리를 홱 돌리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김준희를 바라보며 목소리까지 파르르 떨렸다.

“엄마, 원우는 내 사촌오빠라고요. 게다가 그 일은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이에요.”

이에 김준희가 반박했다.

“넌 유씨 성이야. 신분 명확히 해. 넌 이 집안에서 남이나 다름없어. 네가 무슨 이씨 집안의 혈통이라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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