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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유나은은 의기소침해서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김준희는 전혀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두 사람 잠도 잤겠다. 이 3년 동안 너 정말 아무것도 건지고 싶지 않아? 명분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엄마!”

유나은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 해요.”

하지만 김준희는 진작 마련한 옷을 그녀의 손에 쑤셔 넣었다.

“원우 3층 침실에서 쉬고 있을 거야. 내가 다 시간 재서 널 돌아오라고 한 거야. 이때쯤이면 아무도 없을 테니 얼른 올라가 봐.”

유나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한없이 수치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몇 년 동안 그녀는 줄곧 반복해서 생각했다. 만약 그날 밤 그 차를 엄마가 직접 그녀에게 준 게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토록 엄마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적을지라도 그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말의 의심도 없었겠지...

유나은은 시린 마음을 추스르며 옷을 돌려주었다.

“나 안 가요. 엄마도 이만 마음 접어요. 그리고, 한두 번 속지 다음엔 절대 이런 수법 안 통해요. 혼자 생각 잘 해봐요.”

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이젠 더 이상 엄마에게 휘둘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다만 문밖에 나서기도 전에 김준희의 협박이 들려왔다.

“나은아, 어떤 일은 3년이 지났지만 나한테는 평생 넘어갈 수 없단다. 마침 원우도 왔겠다, 공개적으로 말할 때도 됐겠네.”

유나은은 사지가 굳어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김준희의 협박은 유나은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

몸도 마음도 한없이 차가워졌다.

김준희가 쓴웃음을 지으며 경고했다.

“갈지 말지 잘 생각해봐.”

유나은은 주먹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았지만 끝내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알았어요. 갈게요.”

곧이어 명령대로 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김준희는 가슴이 파인 벨벳 드레스를 준비했는데 너무 깊게 파여서 지퍼를 잠그니 가슴이 노출될 지경이었다. 다행히 아직 초봄이라 드레스에 니트 케이프를 매치해 겨우 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다 갈아입은 후 유나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그녀를 본 김준희는 활짝 눈웃음을 지으며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했다.

“우리 나은이는 역시 착해서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봐봐, 엄마가 맞춤 제작한 드레스가 너무 예쁘잖아.”

김준희는 아주 만족하며 따로 준비한 과일 그릇까지 유나은에게 건넸다.

유나은은 아무 말 없이 과일 그릇을 들고 문밖을 나섰다.

그녀는 빨리 걸어가다 보니 김준희가 문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듣지 못했다. 어렴풋이 들린 말은 원우에게 그날 밤 일을 언급하고, 만약 인정하지 않으면 엄마가 대신 앞장서 주겠다고 한 듯싶었다!

유나은의 입가에 야유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 밤 도곡 별장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김준희의 말처럼 그녀는 일부러 시간을 재서 유나은을 불러왔나 보다.

3층까지 순조롭게 올라간 후 모퉁이를 돌면 맞은편이 바로 이원우의 방이다.

유나은은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그의 방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실 그녀는 이원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가 진짜 거부하는 것은 바로 김준희의 의도적인 계략이다.

이원우는 유나은의 명의상 사촌오빠이다. 두 사람은 이씨 일가에서 딱히 마주친 적이 없지만 그녀는 줄곧 이 사촌오빠를 존경하고 단 한 번도 분수에 안 맞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날 밤 그 착오라면...

유나은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하지만 이원우의 방문이 아니라 그녀의 왼쪽에 있는 방문이었다.

유나은은 머리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거대한 힘에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과일 그릇도 쨍그랑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벽 등이 장착되어 있지만 그녀는 남자의 얼굴이 잘 안 보였다. 단지 그 남자에게 끌려오면서 손목의 말라카이트 다이얼 시계만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곧이어 유나은은 문 쪽에 확 짓눌렸고 남자가 몸을 기울이더니 뜨거운 숨결로 그녀의 피부 결을 파고들었다. 코끝에 가득 찬 시더 향이 그녀의 신경을 살살 건드렸다. 더없이 익숙한 느낌과 애틋한 감정이 그녀를 휘감았다.

“이...”

유나은이 말을 꺼내려 할 때 남자가 불쑥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강제로 머리를 들게 했고 곧이어 차가운 키스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거침없이 퍼붓는 키스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유나은은 감당하지 못하고 남자의 탄탄한 가슴을 내리쳤다.

“으읍... 이연준, 안 돼, 밖에서 다 들린단 말이야!”

여긴 문 앞이다.

밖에서 아무나 대충 지나가도 방안의 인기척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연준이 드디어 동작을 멈췄다.

유나은은 드디어 풀려난 줄 알고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미처 진정하기도 전에 이연준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잡아서 몸을 홱 돌려놓았다.

“뭐가 두려워? 이렇게 잘 신음하는데 목소리 더 높여도 괜찮아.”

남자의 말투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숄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드레스가 걷어졌다.

유나은은 순간 가슴이 움찔거렸다. 이 남자가 무슨 속셈인지 바로 알아채고는 부랴부랴 제지했다.

“안돼, 연준 씨. 나, 나 가능하면...”

“가능하면 뭐?”

이연준의 뜨거운 키스에 그녀의 새하얀 어깨가 움찔거렸다.

유나은은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 너무 급하게 돌아오다 보니 임테기 결과를 확인하지 못해서 그녀 본인조차도 임신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임신했다고 해도 절대 말해선 안 된다. 그녀와 이연준의 관계는 떳떳하지 못하니까. 게다가 이연준처럼 냉정하고 야박한 남자는 그녀가 임신한 걸 알면 절대 이 아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의 키스가 유나은의 목덜미에 닿았다.

유나은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고 이에 이연준이 부드럽게 말했다.

“애기야...”

그 순간 유나은은 심장이 무언가에 쿵 하고 부딪힌 것만 같았다. 이연준은 그녀와 관계를 맺을 때 이 애칭을 제일 즐겨 부른다. 매번 분위기가 농익을 때마다 그는 늘 이렇게 유나은을 불렀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아무런 전주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전율에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하필 또 문 앞이라 유나은은 감히 소리도 못 지르고 꿋꿋이 참아야만 했다.

“왜 참아? 소리 내. 크게 신음하란 말이야.”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의 말투에 담긴 야유에 유나은은 입술을 꼭 깨물고 끝까지 신음을 참았다.

“이렇게 차려입고 누구 만나러 가게?”

남자의 탄탄한 가슴이 그녀의 등에 닿았다.

유나은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으니 이연준은 더욱 발악했다.

한참 후 남자는 몸을 떼어냈고 유나은은 겨우 문을 짚으며 자리에 섰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빨개진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대로는 문밖을 나설 수 없다. 만에 하나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녀가 방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바로 알아챌 테니까.

철컥.

이때 천장의 등이 환히 밝혀졌다.

유나은은 밝은 불빛을 피하려고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서 바닥에 떨어진 숄을 주우려 했는데 앉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앞에 커다란 실루엣이 드리워지고 드디어 이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됐다.

이연준은 보란 듯이 그녀 앞에 서서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유나은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와 함께 이씨 일가에 들어와 수년간 지내면서 이 집안의 모든 사람을 봐왔었는데 남자들이 하나같이 다 잘생겼다. 그래도 굳이 순위를 정하라고 하면 이연준이 단연 1위였다.

그는 이씨 일가에서 외모와 능력이 제일 출중한 후대이고 이동건 어르신이 가장 아끼는 막내며 장차 이씨 일가의 세대주가 될 사람이다. 또한... 유나은의 명의상 셋째 삼촌이기도 했다!

이연준은 처음부터 유나은이 침범할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서막은 3년 전 그날 밤, 김준희가 유나은에게 건네준 그 찻물에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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