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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해졌다.

특히 지금 이동건이 날카로운 눈길로 자신을 훑어보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그녀와 이연준의 은밀한 관계를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문밖의 저 아이를요?”

이연준이 문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유나은을 힐긋 쳐다봤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유나은의 심장이 2초 동안 멈췄다.

이동건은 살짝 의외라는 듯이 그에게 되물었다.

“못 알아보겠어?”

이연준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동건이 담담하게 말했다.

“유나은, 너희 상윤이 형 딸이잖아.”

“아 네, 조카딸이었네요.”

이연준은 느슨한 자세로 뒤로 기대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평상시에 도곡 별장에서 잘 안 보이더라니 대뜸 낯설더라고요.”

그는 지금 둘 사이에 선을 긋고 있다. 유나은은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한 걸까?

이동건이 불쑥 이상야릇한 웃음을 터트렸다.

“낯설면서도 저 아이 대신 편들어주네?”

유나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이에 이연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결국 요 녀석에게 핑곗거리를 찾아주시는 거잖아요. 얘가 방금 누굴 겨냥해서 공을 던졌는지 내가 모를 리 있겠어요?”

이동건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수현이가 방금 널 맞히려고 그랬던 거야?”

이연준은 이수현을 힐끔 째려보고서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직접 물어보세요.”

한편 이동건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수현이 먼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이는 울먹이면서 사과했다.

“흐엉... 내가 잘못했어요 삼촌, 절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앞으로 다시는 함부로 뛰어다니지 않을게요. 엉엉...”

이동건은 그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채고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지난번에 네가 뒷마당에서 처리한 일을 수현이가 본 거야?”

이연준은 눈썹을 치켰다.

이동건의 눈가에 싸늘한 기운이 스치더니 손을 흔들며 집사를 불렀다.

“이 녀석 데려가.”

집사는 재빨리 다가와 이수현의 손을 잡고 나갔다.

유나은의 옆을 지나갈 때 이수현이 불쑥 머리를 돌리고 그녀를 날카롭게 째려보더니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나은은 동생의 태도에 진작 습관 되어 무표정한 얼굴로 있었다.

이수현이 끌려나간 후 방에 있던 이동건이 그제야 말을 꺼냈다.

“계속 문 앞에만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유나은은 시선을 거두고 마음을 다잡고서 안에 들어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할아버지, 삼촌, 잘 지내셨어요?”

이동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이연준은 아무 대답도 없었고 눈길조차 안 줬다.

이동건이 찻잔을 들고 무심코 물었다.

“너랑 너희 엄마 이 집에 들어온 지 몇 년 됐지?”

유나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16년째에요.”

이동건은 줄곧 무덤덤한 얼굴로 질문을 이어갔다.

“우리 집안에서 너한테 푸대접한 적 있어?”

유나은은 곧장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런 적 전혀 없어요. 이씨 일가에서 키워주신 은혜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 우리 집안에서 그토록 정성껏 키워줬는데 정작 너는 어떻게 보답했지?”

이동건의 말투가 좀 전보다 조금 엄숙해졌다.

유나은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다.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묻는 이상 도대체 무엇을 질책하시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

유나은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침착하게 해명했다.

“저희 지도 교수가 지금 제 실력으로 강주 병원에서 일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강주 병원에 이력서를 지원한 거예요.”

“내가 알기로 너희 친아버지 본관이 강주라고 했었나?”

이동건은 찻잔을 내려놓고 탁자 위의 이력서를 들어 올렸다.

유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동건은 이력서를 꼼꼼히 확인했다.

“우리 집안에서 널 키우느라 엄청 고생했지.”

평범한 이 한마디에 극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유나은은 심장이 마구 쿵쾅대서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연준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녀는 감히 이 남자가 편들어주길 바라지 못했지만 마음속 깊이 일말의 기대를 품고는 있었다.

하지만 본인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와 심지어 그녀에게 눈길조차 안 주는 모습에 유나은은 심장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촤르륵...

이동건은 그녀에게 이력서를 내던졌다.

“배은망덕한 것.”

얇은 종잇장이 그녀의 얼굴에 스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유나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안색이 그 종잇장보다 더 창백해졌다.

이연준은 시선을 내리고 바닥에 떨어진 이력서를 보더니 대뜸 말을 꺼냈다.

“주워.”

뒤에 있던 진명수가 앞으로 다가오자 이연준이 손을 내밀었다.

“혼자 줍게 해요.”

이동건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눈길로 흘겨봤다.

유나은은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진명수가 뒤로 물러선 후 그녀는 그제야 굴욕을 참으며 허리를 숙이고 이력서를 주웠다.

이건 그녀가 강주 병원에 지원한 이력서이다. 강주의 피드백을 받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건의 손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사실 그녀는 이런 결과가 닥칠 거라고 진작 예상했었다. 다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한 번 더 기회를 잡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는 더 이상 이씨 일가의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리 봐봐.”

이연준이 손을 내밀었다.

유나은은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이력서를 건넸다.

오른쪽 상단의 증명사진 속 그 소녀는 맑은 눈빛이 유난히 눈부셔서 누가 봐도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 조카 공부 꽤 잘했네?”

이연준은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살짝 야유 섞인 말투로 말했다.

유나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

“칭찬 고마워요 삼촌.”

이연준은 시선을 올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방금 너희 지도 교수가 강주 병원에 가는 걸 추천했다고?”

“네.”

유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지도 교수가 우리 집안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알고 있었어?”

이 말을 들은 유나은은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곧바로 말을 바꿨다.

“제가 직접 내린 결정이에요. 교수님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이연준은 차가운 시선으로 되물었다.

“그럼 본인이 배은망덕하다는 걸 인정한 셈이네?”

그는 지금 유나은을 궁지로 몰아붙이고 있다.

짧은 몇 초 사이에 그녀가 갖고 있던 자부심이 전부 무너져내렸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심지어 도리를 따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그녀가 너무 순진했던 탓일까? 하마터면 지도 교수까지 연루될 뻔했다.

현실을 자각한 유나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섣불리 행동했어요. 앞으로 더 신중하게 고려할게요. 할아버지, 삼촌,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뿌리가 박히지 않아서 자꾸 휘청거리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이동건은 전혀 안색이 호전될 기미가 안 보였다.

“네 결혼을 서둘러야겠어. 배현시에 뿌리를 박아야 안심하지.”

유나은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잘못을 인정해도 할아버지는 왠지 전혀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연준이 네 생각은 어때?”

이동건이 머리를 기웃거리며 아들에게 물었다.

이연준은 제대로 듣지 못한 듯싶었다.

“네? 뭐라고요?”

“나은의 결혼을 서둘러야겠다고. 그래야 밖으로 도망갈 생각을 안 하지.”

이연준은 다리를 쭉 펴면서 무관심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알아서 정하세요.”

이동건은 평생 보수적인 관념을 일관하고 있다.

“여자는 일찍 결혼해서 남편을 섬겨야 마음이 안정돼.”

이연준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설마 이미 누구 봐뒀어요?”

이동건도 웃으며 답했다.

“적합한 상대가 있긴 하지. 내가...”

“할아버지!”

이때 유나은이 대뜸 말을 잘랐고 이동건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다만 그가 계속 말하는 걸 성공적으로 가로채긴 했다.

유나은은 이럴 줄을 꿈에도 몰랐다. 결혼이라는 신중한 일이 그들에겐 그저 시장에서 채소를 사듯이 단순하게 진행될 줄이야. 노점상인 그들은 싸게 팔고 싶은 상대에게 그녀를 대충 팔아버리고 있다. 유나은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말이다.

유나은은 이런 비겁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에 찬 이동건의 두 눈을 마주하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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