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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응, 우리 가문 사람이야.”

이연준의 말에 유나은은 조금 놀라버렸다.

설마 그가 직접 그녀가 누군지 밝힐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곱씹어보면 그는 그녀가 조카라는 사실을 인정한 건 아니었다.

윤수경은 유나은의 가운에 적혀진 이름을 보고는 당황함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 나는... 유 선생님이 이씨 집안 사람인 줄은 몰랐어...”

‘이 여자’라고 부르던 호칭은 어느새 ‘유 선생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나은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살짝 웃었다.

“성이 달라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양수경은 좀처럼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성이 다른 걸 보면 핏줄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이씨 가문 사람들을 건드려서 좋을 건 없기에 지금 그녀는 상당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아직 이연준과 결혼한 것도 아니니 더욱더 무서웠다.

그렇게 혼자 초조해하고 있을 때 유나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양수경 씨 맞으시죠? 항상 삼촌 곁에서 같이 사진 찍히는 거 봤어요. 삼촌이 양수경 씨를 매우 좋아하나 봐요.”

그 말에 양수경은 어깨가 으쓱해지며 기분이 들떴다.

이씨 가문 사람에게 이연준의 여자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준 씨가 어디 갈 때면 항상 저만 부르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불편하다나 뭐라나.”

윤수경은 행복한 얼굴로 얘기했다.

유나은은 여전히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미세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면 곧 좋은 소식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윤수경은 볼을 예쁜 핑크빛으로 물들이며 이연준을 바라보았다.

“연준 씨가 대답해줘.”

하지만 이연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몸을 옆으로 틀어 코트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이 각도에서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터에 파란색 불꽃이 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기 전 유나은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삼촌, 여기 병원이에요. 담배 피울 거면 나가서 피우세요.”

그 말에 이연준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마침 유나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밤하늘의 별을 그대로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에 적당히 입꼬리를 올린 그녀는 무척이나 예뻤다.

라이터의 불꽃이 꺼지고 이연준은 담배와 라이터를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부케라도 받고 싶은가 보지?”

“삼촌도 나이가 있는데 언제까지 혼자일 수는 없잖아요.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삼촌 주위에는 벌써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딸들을 둔 분들도 있다면서요. 만약 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결혼했으면 나랑 비슷한 또래의 딸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죠, 삼촌?”

유나은은 그를 향해 눈을 깜빡거리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준은 그런 그녀를 조금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며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그녀는 금세 꼬리를 내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양수경을 보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제 그만 점심 먹으러 가야겠네요.”

양수경은 행복한 단꿈에서 빠져나와 다급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지 말고 셋이서 같이 식사라도 하는 건 어때요?”

유나은은 웃으며 거절했다.

“아니요. 같이 밥을 먹기로 한 동료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어서 식사는 사양할게요.”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실례했네. 연준 씨 조카인 줄도 모르고.”

양수경은 멀어져가는 유나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남자의 팔을 꼭 감싸 안았다.

이연준은 휴대폰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방금 걔가 그런 말 해서 기분 좋아?”

양수경은 민망해진 손을 보며 잠깐 멈칫하더니 그와 거리를 좁히며 다시 한번 그에게 팔짱을 꼈다.

“연준 씨 조카가 날 당신 여자친구로 알고 있나 봐.”

이연준은 휴대폰을 보던 시선을 옆에 있는 그녀에게로 돌렸다.

“잊어버려.”

그 말에 양수경의 마음이 확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녀가 이연준의 여자가 될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그게 절대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연준은 그녀에게 잘해주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딱 거기까지였고 여자친구라는 타이틀은 주지 않았다.

그녀가 은근슬쩍 대화로 유도도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매정하게 이 한마디만 던져주었다.

“나는 네가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해.”

그 뒤로 양수경은 더 이상 그들의 관계를 떠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

유나은은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동료 의사들과 양진수의 입원 전 상태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말을 하다 보니 어느새 양진수의 집안 얘기까지 나왔다.

소식통이 빠른 의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양씨 가문 어르신이 오늘내일한다나 봐. 그런데 아들이라고 있는 것들은 상속 때문에 난리도 아닌 모양이야. 그래서 양진수 씨도 집에 가려는 거고. 양진수 씨 딸도 매일 찾아와서 닦달한대.”

유나은이 물었다.

“뭘 닦달하는데?”

그 의사는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나도 간호사들한테서 들은 건데, 양진수 씨가 집에서 대접도 받지 못하고 그러나 봐. 와이프랑 딸이 재산 상속에 손 떼겠다는 양진수 씨의 말을 듣더니 아주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뭐라고 한 대.”

거기까지 듣고 유나은은 다시 시선을 돌려 식사에만 집중했다.

단지 환자 상태만 확인하려 했는데 의도치 않게 불편한 가정사까지 들어버렸다.

퇴근 후.

유나은은 오늘 다시 한번 임신 테스트기를 사 볼 예정이다.

하지만 병원을 막 벗어나려는 순간 진명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은 씨, 오른쪽입니다.”

이에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거기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값비싸고 화려한 차량이 아닌 그 어디에나 있는 흔한 차량이었다.

불필요하게 사람들 이목을 사는 일이 없어 오히려 다행이었다.

유나은은 전화를 끊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이제 막 허리를 숙여 차에 차려는데 먼저 타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단연코 이 남자보다 더 시선을 끄는 남자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는 그저 아무 말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나은 씨, 어서 타시죠.”

운전석에서 진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은은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아까 병원에서 괜히 남자를 도발했던 것이 지금은 후회로 밀려왔다.

그녀가 차에 타자 뒷좌석 문이 천천히 닫혔다.

차량은 해암 별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연준의 개인 별장이고 유나은이 수도 없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굳이 목적지를 얘기하지 않아도 길만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이연준은 지금 시트에 기댄 채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다.

유나은은 고개를 돌려 그런 그를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챈 남자는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유나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향해 한껏 웃었다. 그러자 이연준은 다시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시간 날 때 웃는 연습 좀 해. 가짜로 웃는 거 다 티 나.”

“...”

이에 유나은은 속으로 그를 한번 째려보고는 다시 한번 더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양수경 씨와 결혼할 거야?”

이연준은 휴대폰 화면을 끄고 말했다.

“네가 궁금해할 사항 아니야.”

“하지만 알고 싶어.”

“그걸 알아서 어쩌려고?”

이연준은 휴대폰을 아예 옆에 내려놓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나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잠깐 고민하더니 적극적으로 그의 품에 안겼다.

이연준에게서 나는 시원한 나무 향이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유나은은 그의 커다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힘차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 사이 정리하자.”

이연준은 시선을 내려 품에 안긴 여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선을 그으려는 거야?”

유나은은 갈등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나를 이만 놓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이연준은 그녀의 턱을 들어 눈을 마주치게 하더니 곧이어 긍정적인 답변을 들려주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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