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점심, 온하랑은 부승민과 함께 부시아를 데리고 본가로 향했다.“증조할머니, 저 숙모랑 삼촌 데리고 할머니 보러 왔어요!”부시아는 온하랑의 손을 놓고 안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아이고, 시아야. 증조할머니가 시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집안의 큰 어르신은 베란다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누워 돋보기안경을 낀 채 신문을 읽고 있었다.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 옆에 두었다. 어르신은 거실로 걸어가며 부시아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숙모랑 삼촌도 같이 왔어?”“네.”부시아는 큰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해맑게 웃었다. 아이는 뒤꿈치를 들고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증조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린아이의 밝은 기운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할머니가 허리를 숙여 아이의 키에 맞춰주었다.부시아가 가까이 다가가 증조할머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지금 제가 숙모라고 불러도 딱히 뭐라고 안 해요.”예전에는 숙모라고 하지 말고 고모라고 하랬는데 지금은 헤헤헤…“그래, 그래, 그래.”늙은이는 몸을 일으켜 얼굴에 기쁜 듯 미소를 띠었다.사실 그녀도 두 사람이 다시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어린아이의 영리하고 눈치 빠른 모습을 집안의 어르신이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부승민과 똑 닮아있는 부시아의 생김새에 늙은이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게다가 부시아를 대하는 부선월의 태도까지 더해 부시아의 정체에 대한 늙은이의 의심은 깊어만 갔다.하지만 의심은 의심일 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의혹을 제기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딱히 별다른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의심을 현실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만에 하나 그랬다가는 온하랑과 부승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부승민과 온하랑이 안으로 들어서며 웃는 얼굴로 늙은이에게 인사를 올렸다.“어머, 오늘은 어쩐 일로 둘이 같이 왔어?”늙은이는 눈앞의 한 쌍을 보고 웃으며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둘이 약속하고 온 거야?”늙은이의 말투에 담긴 장
“별말씀을요! 이건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부셔서 헤헤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 내일 학교 가는데 숙모가 저 데려다주실 거에요?”“미안하지만 안 될 것 같은데. 숙모 내일 아침 비행기거든.”부시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부승민이 먼저 물었다.“비행기? 어디 가는데?””경주. 가서 촬영 대회 시상식 참석해야 해서.“부승민이 잠시 멈칫하더니 무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촬영 대회 심사위원 중에 최동철도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최동철도 경주로 갈 것이다.부승민이 입술을 몇 번 잘근잘근 씹었다.“우와, 숙모 너무 대단해요!”부시아가 감탄했다.월요일 아침, 유치원 교실에 도착한 부시아는 짝꿍에게 질문을 던졌다.“오늘 아침엔 누가 데려다준 거야?”“엄마가. 왜?”짝꿍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대답했다.부시아가 일부러 한숨을 깊게 푹 내쉬며 말했다.“난 오늘 아주머니가 데려다주셨어. 엄마는 경주 갔거든.”이 유치원에 등원하는 아이들은 모두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집안에 운전기사가 있다든지 아주머니가 있다 와 같은 일들이 별로 놀랍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역시 예상대로 짝꿍이 다시 물었다.“경주는 왜 가셨는데?”“시상식 참석하러 갔거든. 우리 엄마 작품이 촬영 대회에서 1등 했대.”“우와, 너희 엄마 진짜 대단하시다!”부시아는 살살 올라가던 입꼬리를 애써 다시 내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어휴, 나중에 돌아오면 트로피 보여줄 거래. 그래도 난 엄마가 나랑 조금 더 오래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짝꿍이 바로 대꾸했다.“너희 엄마는 못 하는 게 없구나. 진짜 부럽다. 우리 엄마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매일 쇼핑하고 또 쇼핑만 하는데.”부시아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 말했다.“그럼 너희 엄마는 너랑 같이 있어 줄 시간이 많은 거잖아. 좋겠다.”…강남에서 경주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적어도 3시간 정도는 가야 했다.비행기에서 내린 온하랑은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다시 켜며 짐을 찾으러 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최동철은 온하랑을 데리고 주최 측에서 제공한 5성급 호텔에 도착했다. 오후에 시상식 현장으로 가 리허설을 할 예정이었다.저녁 7시가 되자 온하랑이 시상식 현장에 도착했다.시상식 시작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지만 몇몇 수상자들은 이미 일찌감치 도착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하랑은 자리에 앉아 휴대폰 메모장을 열고 수상 소감을 준비하고 있었다.오른쪽으로 온하랑과 두 자리 정도를 띄워두고 앉은 젊은 사진작가가 온하랑을 한 번 쳐다보고는 주변 사람들과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젊은 사진작가의 옆에는 안경을 낀 남자가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젊은 작가 너머로 온하랑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요, 혹시 옆에 계신 저분이 그 1등인가요? 얼마 전에 우연히 인스타 피드를 봤는데 부승민 회장 전처더라고요.”젊은 사진작가도 조용히 온하랑을 한 번 쓱 쳐다보고 대답했다.“그런 것 같네요.”안경을 쓴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였다.“저는 1등도 돈이랑 권력으로 사들인 거로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그 ‘연철’만 불쌍하게 됐죠. 작품 보니까 진짜 괜찮던데. 어렵게 1등까지 했는데도 다른 사람한테 뺏겨서 오히려 본인이 사과해야 하는 처지가 돼버린 거잖아요.”하지만 젊은 사진작가는 그 남자의 말에 반대 의견을 냈다.“진짜 1등을 사들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연철’도 무죄는 아니죠. 그 전 시즌 대회에서 2등을 했던 작품의 원작자를 저는 알고 있거든요. 전에 같이 사진 교류회에도 참가해봤어요. 그때 그 원작자분께서 자기 작품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뀐 걸 발견하고 인스타를 포함한 여러 플랫폼에서 제보했지만 얼마 안 가서 모든 게시글이 사라졌어요. 그때는 정말 절망적인 끝이겠구나 싶었는데 이번에 그 ‘연철’이 이런 식으로 불판에 올라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안경을 쓴 남자가 놀란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아, 정말이요?” “제가 그쪽을 왜 속이겠어요? 전에 원작자가 인스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빠르게 타자를 하던 그녀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멈추고 이윽고 온하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연철’이 동철 오빠 사촌 동생이야?"온하랑은 우선 믿지 않기로 택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최동철은 절대 가족을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온하랑이 최동철에게 자신이 모은 증거들을 보여주었을 때 보였던 최동철의 반응은 전혀 그 일을 알고 있던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돈 많은 사람은 다 그래요.” “제가 방금 찾아봤는데 본명이 최동철이더라고요. ‘연철’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쩌면 정말 최동철의 사촌 동생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설마 사촌 동생이 최동철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안경 남이 웃으며 추측을 하였다. 젊은 사진작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닐걸요?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사촌 동생이 어떻게 사촌 오빠를 좋아할 수 있겠어요?” “어휴,” 아저씨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친사촌 사이면 몰라도 이 둘은 친사촌이 아니에요. 이 사촌 동생이라는 사람, 최동철 새엄마의 조카더라고요.” 온하랑은 듣자마자 최동철 새엄마의 고집불통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이 아저씨의 말에 신뢰가 생겼다.아마도 새엄마의 조카라면 사촌오빠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최동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그 ‘연철’이라는 사람의 본명은 뭔지 아세요?” 안경 남이 물었다. “임연지요.” 젊은 사진작가와 안경 남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온하랑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온하랑에게 향하더니 갑자기 대화 주제를 이번 대회에 관한 주제로 바꿨다.온하랑은 한참이나 기침을 하다가 가슴께를 문지른 후에야 멈추었다.온하랑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자신의 오른쪽으로 한 자리 옮겼다.아저씨를 포함한 세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복사 붙여넣기라도 한 듯한 똑같은 표정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온하랑은 괴롭힘을 가장 심하게 당하던 때를 기억한다. 괴롭힘이 가장 심하던 그 며칠 동안 그녀는 꿈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엄마를 만났다. 돌아온 엄마는 온하랑을 품에 꼭 끌어안고 다시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 말했다. 학교에서도 친구가 생겼고 더는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디.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후, 그녀에게는 남은 것은 차가운 이불과 깜깜한 밤뿐이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밀려오는 무기력감에 숨죽여 울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꿈들을 많이 꿔왔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꿈을 꾼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1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예전부터 온하랑은 종종 생각해왔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재혼했을까?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온하랑을 버렸을까? 왜 단 한 번도 온하랑을 보러 오지 않았을까? 그 주변에 이미 다른 아이가 있어서 자신을 버린 게 아닐까? 때로는 자신을 버린 “그녀”를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녀”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온하랑은 더 이상 어머니의 존재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분노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녀”를 아예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아버지가 죽은 후 몇 년 동안, 온하랑은 이미 여러 해 동안 험난한 여정을 걸어왔다.세상은 넓으니 온하랑은 우연히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운명의 장난을 너무 좋아했다.알고 보니 온하랑이 항상 그리워하던 “그녀”는 최씨 가문 옛 주인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녀”는 뉴스를 보았을까? 온하랑이 부씨 가문으로 입양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그녀"가 부하를 통해 온하랑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던 그 날, 온하랑이 바로 자신이 버렸던 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까?온하랑은 병원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부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시아야, 씻으러 가야지.”부시아가 고개를 들더니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저 지금 숙모랑 얘기 중이잖아요!”“씻고 나서 마저 얘기하든지.”큰 손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더니 아이의 작은 머리를 어루만졌다.“시아야, 얼른 씻으러 가. 다 씻고 나와서 다시 통화하자.”온하랑이 말했다.“숙모, 저 기다려 주셔야 해요.”부시아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움직였다.그 순간, 갑자기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윽고 부승민의 화려한 얼굴이 화면에 띄워졌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주는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그는 온하랑의 뒤로 보이는 도로를 보더니 물었다.“시상식 벌써 끝났어?”“참석 안 했어.”“왜?”“일이 좀 생겨, 다른 사람한테 대리 수상 부탁했어.”“무슨 일인데?”부승민이 물었다.“별로 큰일은 아니야.”온하랑이 부승민의 질문에 대답을 피했다.부승민은 화면에 비친 온하랑의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표정 보면 별일이 아닌 게 아닌데.”부승민은 한눈에 온하랑의 기분이 나쁘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렇게나 예리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뜬 온하랑은 잠시 아랫입술을 씹더니 입을 열었다.“걱정할 거 없어. 곧 괜찮아 질 거니까.”“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꼭 기억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나랑 시아는 항상 네 편이야.”부승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 너머의 온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둘은 분명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맞았지만 부승민의 눈빛을 보는 순간 온하랑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안정을 되찾아가는 것 같았다. 부승민의 목소리에 무슨 마법이라도 있는 듯 잔뜩 구려진 온하랑의 마음을 쫙쫙 펴주었다.하지만 온하랑은 차마 부승민의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온하랑이 말했다.“시아가 내 편이니까 넌 필요 없어.”그래도 아직 장난칠 기력이 남아있는 온하랑을 보니 부승민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던 임연지를 알아본 직원은 반갑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게다가 룸을 예약한 사람과도 어느 정도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던 터라 직원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임연지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주었다.“오재원 씨께서 이틀 전부터 비워두라고 하셨던 방입니다. 최동철 씨도 이미 와계시고요.”임연지의 낯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사촌오빠였다고?“다른 사람 더 있어요?”“아마…. 진희성 씨, 전상윤 씨, 그리고 현인호 씨 다 와계실 거예요.”임연지의 얼굴색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방금 직원이 얘기해준 그 이름들은 모두 최동철과 사이가 좋다고 알려진 재벌 집 자제들이었다. 태생적으로 머리가 좋아 사업에 성공한 사람, 빵빵한 집안만 믿고 먹고 마시며 놀기만 하는 사람들 다 섞여 있었지만 모두 보통 인물들은 아니었다.만약 그 사람들과 온하랑을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이 없었다면 온하랑이 저 방으로 들어가 그들과 겸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그 중간 다리 역할을 해준 사람이 바로 최동철일 것이다.사촌 오빠가 온하랑에게 자기 친구들을 소개해줬다고?대체 왜?설마 온하랑을 좋아하는 건가? 그래서 아예 사귀려고?온하랑은 이미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헌신짝인데 그런 주제에 최동철한테 가당키나 할까?임연지는 분노에 가득 차 주먹을 꽉 쥐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에 얼굴이 열이 뻗친 나머지 온하랑은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음속에 맺혀있던 응어리를 풀 만한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온하랑도 주제 모르고 참 잘 까분다. 사촌 오빠가 오라 했다고 진짜 오네?지금 본인이 어떤 꼴인지 주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7층으로 돌아온 임연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방금 온하랑이 들어갔던 그 708번 방으로 향했다.임연지는 꼭 온하랑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말리라 다짐했다.절반 정도 다다르자 임연지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안돼. 만약 이런 식으로 군다면 사촌 오빠가 자신을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눈동자를 도르륵 굴린
“온하랑?”“응, 그 여자.”오재원은 임연지가 의아해하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왜?”“온하랑이 누군지 몰라?”임연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몰라. 내가 알아야 되는 사람이야?”“온하랑은 원래 강남 부씨 일가의 양녀였어. 그런데 부승민의 침대에 기어올라 부씨 일가 어른들의 뒤통수를 쳤죠. 부승민은 원래 그 여자를 엄청 싫어했거든. 그래서 전여자친구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그 여자랑 이혼했어.”임연지는 한숨을 내쉬곤 이어서 말했다.“전에 내가 고모 따라 강남을 갔었거든. 고모가 그러는데 온하랑이 우리 오빠한테 질척거린다고 하더라고. 동철 오빠가 장소 답사하러 갈 때면 무조건 따라붙는대. 동철 오빠 결혼은 고무부가 정해줄 거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서 고모는 그 여자를 설득하려고 만났는데 그 여자가 고모한테 무례한 말을 막 하면서 엄청 예의없이 굴었대. 그 여자 탓에 동림이 천식도 발작을 일으키고.”“그게 전부 사실이야?”오재원은 온하랑을 몰랐지만 부승민에 관해선 잘 알았다.“당연하지.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임연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부승민 전 애인이 연예인이었어. 그것 때문에 온하랑도 전에 기사에 난 적이 있으니까 내 말 밎지 못하겠으면 알아서 찾아봐.”그녀가 이렇게 말하니 오재원은 더욱 믿을 수박에 없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동철이는 모른대? 왜 그런 여자랑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거야?”“나도 몰라. 그 여자 꿍꿍이가 많은 사악한 여자거든. 부승민도 걸려들었는데 우리 오빠라고 뭐 별수 있겠어? 난 지금은 오빠가 제발 그 여자한테 진심이지 않길 바라...”“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동철이한테도 그 여자 진상을 똑똑히 알려줄 거니까.”오재원은 장담하였다.설령 임연지를 위해서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그런 사악한 여자의 술수에 넘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었다.“우리 오빠한테는 내가 이런 얘기했다는 거 말하지 말아줘. 알면 분명 나한테 화 낼 거야.”“걱정하지 마.”오재원이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