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하얗게 질린 임연지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 물었다.“오빠… 그냥 이름만 다시 바꾸면 되는 거 아니에요? 왜 굳이 제가 사과까지 해야 해요?”“쓸데없이 욕심만 많고 본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제대로 책임지려고도 안 하네. 이모가 너 그렇게 가르쳤니?”순간적으로 몸을 흠칫 떤 임연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잘못했어요. 제… 제가 기서 사과할게요. 사과하면 되는 거죠?”“친필 사과문은 안 쓸 거야?”“지금 당장 쓰러 갈게요.”최동철의 사무실을 벗어난 임연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짜증 난다는 듯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눈빛이 암울하게 번했다.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대놓고 사촌오빠한테까지 꼰질러서 좋아하던 오빠한테 혼나기까지 하지?누가 한 짓인지 밝혀지는 순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임연지는 인터넷에서 아무 사과문이나 검색해 대충 이름만 바꿨다.수정을 끝내고 임연지는 곧바로 주최 측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내 사진 말이에요. 원래는 누구 작품이었어요? 이름이 뭐예요?”사과문에 이름까지 써넣은 게 신의 한 수였다.“온하랑이라고 하는 참가자입니다.”온하랑은 실명으로 인터넷 회원가입을 한 터라 그녀의 아이디가 곧 그녀의 본명이었다.다만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별 관심이 없던 주최 측 직원이 온하랑이라는 이름을 아예 몰랐을 뿐이다.임연지는 온하랑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음속으로 어딘가 모를 확신 어린 직감이 생겼다.이 온하랑은 자신이 아는 그 온하랑임이 분명했다.임연지는 곧바로 최동철의 어시인 이석을 찾아가 자세히 따져 물었다. 이석은 아무런 숨김 없이 모든 걸 알려주었다.임연지는 그제야 최동철과 온하랑이 함께 낭천으로 야외 스케치를 나갔던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쩐지!이 일이 어떻게 사촌오빠의 귀에까지 들어갔나 했더니 전부 다 온하랑이 저지른 짓이었다.임연지는 주먹을 힘주어 꽉 쥐더니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온하랑! 대체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부승민은 온하랑 때문에 목숨까지
“저도 이해해요, 동철 오빠가 왜 곤란해하는지. 산하 국제 촬영 대회 대표자가 바로 오빠잖아요. 이 대회의 명성이 다음 시즌까지 이어질 수도 있고 오빠 체면도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저는, 전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네요. 전에도 이런 식으로 수상 했던 사람이 있는데도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묻힌 건 아닌가 싶어서요….”“걱정하지 마, 내가 다시 심사하라고 얘기해뒀으니까. 만약 이런 일이 또 한 번 일어난다면, 그땐 가차 없이 트로피를 뺏을 생각이야.”“그럼 부탁할게요, 동철 오빠.”온하랑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다였다.“괜찮아.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뭘. 이 일로 수치스럽게 된 것도 다 사실이야.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시상식으로 경주에 왔을 때 내가 대표로서 크게 한턱 쏠게.”“고마워요, 동철 오빠. 그럼 저도 딱히 사양하지는 않을게요.”온하랑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수상 사실을 발표하자 이주혁에게서 카카오톡으로 축하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 동시에 자신의 화보를 찍어 달라고 부탁하는 문자도 함께 왔다.온하랑은 이모티콘으로 이주혁에게 답장을 보냈다.“진심이야? 장난치는 거 아니지?”“내가 너한테 이런 장난을 왜 쳐? 난 네 실력 믿으니까 이러지.”“그래, 나 믿는다니까 실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언제 찍을 건데?”“하루 정도는 꼬박 걸릴 것 같은데. 너 언제 시간 돼?”온하랑이 한 주 동안의 스케줄표를 찍어 이주혁에게 전송했다.스케줄표에 의하면 온하랑은 월요일과 화요일에 촬영 일정이 잡혀있었다.이주혁은 바로 자신의 화보 촬영 날짜를 수요일로 잡았다.화요일, 온하랑은 와이어를 매단 채 공중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무려 세 차례의 촬영 스케줄을 소화해내야만 했다.스케줄을 마치자 시간은 이미 저녁 8시가 다 되어있었다. 온하랑은 드라마 하나뿐인 데에다 촬영분도 많지 않아 굳이 매니저를 두지 않고 촬영 이외의 모든 일도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촬영이 끝난 뒤,
“나 왔어. 좋은 아침.”촬영장에서는 온하랑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카메라에 찍혀 있던 사진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온하랑은 이주혁을 발견하고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온하랑을 마주친 이주혁의 걸음이 멈칫하더니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좋은 아침. 일찍 왔네?”“그럼. 오늘이 첫 촬영이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지. 열정적으로.”온하랑은 웃으며 다시 카메라를 집어 들고 세트장 이곳저곳을 찍어보며 느낌을 잡아갔다. 한창 촬영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나머지 온하랑은 자신을 보는 이주혁의 눈빛을 미처 신경 쓰지 못 한듯했다.“메이크업부터 받고 올게.”“응, 갔다 와.”온하랑은 카메라의 사진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이주혁은 잠깐 입술을 깨물더니 깊은 눈동자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이주혁은 온하랑과 부승민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묻고 싶었다.부승민이 정말 그렇게도 좋을까?바람까지 피웠던 부승민을 이렇게 쉽게 용서해줄 만큼?“이주혁 씨?”이주혁이 아직도 메이크업을 받으러 이동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 매니저가 그를 재촉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주혁은 다시 한번 온하랑에게 시선을 주고 분장실로 걸음을 옮겼다.이틀 전, 이주혁의 촬영팀이 이미 온하랑에게 구체적인 콘셉트가 적힌 파일을 보내주었다. 이미 자세히 그 파일을 봤던 온하랑이었지만 정식적인 촬영은 그녀도 처음이었던지라 쉽지는 않았다.온하랑과 이주혁의 호흡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찍힌 사진들 속에 담겨있는 이주혁은 전혀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그러다 보니 촬영 속도도 느려지고 효율적인 촬영이 진행되지 못했다.온하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주혁이 촬영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라고만 여겼다. 온하랑은 어떻게든 한 장이라도 건져내기 위해 각도를 바꿔가며 계속해서 촬영을 이어나갔다.이주혁은 눈을 감고 이마를 매만지며 어떻게든 어젯밤에 봤던 그 모습을
쟤 지금 뭐 하는 거지?온하랑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주혁을 바라보았다.이주혁은 이영호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가리켰다.온하랑은 휴대폰 잠금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주혁은 할 얘기가 있으니 온하랑에게 아무 핑계나 대고 밖으로 나오라는 문자를 보냈다.온하랑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두고 이영호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답장을 보냈다.“폰으로 얘기하면 안 돼? 이러다가 또 파파라치한테 찍히기라도 하면…”이주혁이 다시 답장을 보냈다.“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게? 파파라치한테 찍힌다고 우리 다시 안 볼 거야?”이주혁에게서 다시 한번 답장이 날아왔다.“걱정하지 마. 내 일에는 피해 안 갈 테니까.”“알겠어.”휴대폰을 집어넣은 온하랑은 그 자리에 몇 분 정도 앉아있다가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룸을 벗어났다.화장실에서 나온 온하랑은 비상계단에서 이주혁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혁이 다시 걸어왔다.“오래 기다렸어?”“아니, 할 얘기라는 게 뭐야?”온하랑을 바라보는 이주혁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깊은 눈빛에서 진한 감정이 느껴졌다.이주혁의 표정을 본 온하랑의 심장이 철렁했다.이주혁… 너 아직도 나 포기 못 했어?레스토랑에서 이주혁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부터 둘의 연락은 이미 뜸해진 지 오래였다. 온하랑은 진심으로 이주혁을 친구로 두고 싶었다.온하랑은 입술을 몇 번 깨물더니 말했다.“말을 해.”이 좋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 부승민이랑 화해한 거야? 어제 네가 부승민 차 타는 거 봤어.”“…”온하랑이 잠시 머뭇거렸다.온하랑은 부승민과 다시 화해를 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온하랑이 부승민에게 한 스킨쉽을 딱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것들도 다 부승민이 강제로 한 거지 절대 온하랑이 좋아서 한 건 아니다. 온하랑이 아니라면 아닌 거다.온하랑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이주혁은 상처받은 듯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과는 반대로 마음속에서는
“손 놔.”온하랑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온하랑을 바라보는 이주혁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그 손 당장 놔주지 못해!”갑자기 코너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목소리에 온하랑의 심장이 철렁했다.큰일이다. 부승민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방금 온하랑의 말을 부승민도 다 들었다는 건가? 설마 무슨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부승민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이주혁이 잡은 온하랑의 손목을 빼냈다. 그는 온하랑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주혁을 노려보았다.“하랑이가 알아듣게 얘기했을 텐데, 이주혁. 하랑이는 넌 안 좋아해. 그러니까 그만 찝쩍대!”“가자.”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고 자리를 벗어났다.온하랑은 잠시 머뭇거리다 부승민을 따라 나갔다.이주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통스러운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코너를 돌자 온하랑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왜? 마음 아파?”온하랑을 바라보던 부승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이주혁은 아직 온하랑을 포기 못 한 게 맞았다.하지만 부승민은 이주혁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이주혁이 온하랑에게 매달리지 않았다면 부승민도 온하랑이 이미 자신과 다시 화해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 사실은 부승민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마음속이 달달한 꿀이라도 삼킨 듯 달콤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기뻐 날뛰고 싶었다.온하랑은 어이없다는 듯 눈알을 굴리더니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네가 왜 여기 있어?”역시, 부승민의 입꼬리를 보니 보나 마나 오해하고 있는 게 뻔했다.“식사 약속이 있어서.”부승민이 말했다.“데려다줄게.”“필요 없어. 나 술 안 마셨으니까.”“그럼 내가 네 차로 갈게.”부승민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너 약속은 끝났어?”온하랑이 물었다.“끝났어.”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온하랑은 오른쪽 위에 있는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바라보며 눈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나랑 화해했다던 그 말이랑, 나 좋아한다고 했던 것들, 다 거짓말이었다는 거야?”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누가 들어도 위험해 보이는 부승민의 말투에 온하랑이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음… 이용했다기보다, 그냥… 대충 도움…”“허.”부승민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온하랑, 너 이 방법에 도가 터도 제대로 텄구나!”이혼 전에는 이주혁으로 부승민을 자극하고, 이혼 뒤에는 민지훈으로 부승민을 멀리했다. 그때도 온하랑은 마치 진심인양 얘기하고 행동했다. 그 말과 행동에 껌뻑 속아 넘어간 부승민은 부시아의 설득만 아니었다면 진작 온하랑과 헤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온하랑이 미안한 듯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빨간 불을 기다리는 동안 온하랑이 부승민을 슬쩍 훔쳐보았다. 타이밍 좋게 부승민과 눈이 마주치자 온하랑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자 온하랑이 다시 악셀을 밟았다.부승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주혁한테 우리가 화해했다고 얘기한 이상, 며칠 동안은 꼭 붙어 지내야겠네. 연기를 해도 제대로 해야지. 들키면 안 되잖아.”“응?”온하랑은 여기까지는 미처 예상 못 한 듯 보였다.“그… 그럴 필요까진 있을까?”“왜 필요가 없어?”부승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이주혁이 했던 말 잊었어? 사랑하던 사람 잊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나 좋아한다고 얘기했잖아. 아직도 완전히 나 못 끊어낸 걸 보면 너도 나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야?”부승민의 말도 일리 있어 보였다.“그치만…”“무슨 그치만이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자. 다음부턴 촬영 끝나면 내가 매일 데리러 갈게.”부승민은 아예 못을 박아버렸다.“그럴 필요까지는…”“있어.”“…”이거 혹시 온하랑이 도끼로 제 발등 찍은 건가?집에 돌아오자 온하랑은 사진 보정을 시작했다. 촬
일요일 점심, 온하랑은 부승민과 함께 부시아를 데리고 본가로 향했다.“증조할머니, 저 숙모랑 삼촌 데리고 할머니 보러 왔어요!”부시아는 온하랑의 손을 놓고 안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아이고, 시아야. 증조할머니가 시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집안의 큰 어르신은 베란다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누워 돋보기안경을 낀 채 신문을 읽고 있었다.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 옆에 두었다. 어르신은 거실로 걸어가며 부시아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숙모랑 삼촌도 같이 왔어?”“네.”부시아는 큰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해맑게 웃었다. 아이는 뒤꿈치를 들고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증조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린아이의 밝은 기운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할머니가 허리를 숙여 아이의 키에 맞춰주었다.부시아가 가까이 다가가 증조할머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지금 제가 숙모라고 불러도 딱히 뭐라고 안 해요.”예전에는 숙모라고 하지 말고 고모라고 하랬는데 지금은 헤헤헤…“그래, 그래, 그래.”늙은이는 몸을 일으켜 얼굴에 기쁜 듯 미소를 띠었다.사실 그녀도 두 사람이 다시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어린아이의 영리하고 눈치 빠른 모습을 집안의 어르신이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부승민과 똑 닮아있는 부시아의 생김새에 늙은이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게다가 부시아를 대하는 부선월의 태도까지 더해 부시아의 정체에 대한 늙은이의 의심은 깊어만 갔다.하지만 의심은 의심일 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의혹을 제기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딱히 별다른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의심을 현실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만에 하나 그랬다가는 온하랑과 부승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부승민과 온하랑이 안으로 들어서며 웃는 얼굴로 늙은이에게 인사를 올렸다.“어머, 오늘은 어쩐 일로 둘이 같이 왔어?”늙은이는 눈앞의 한 쌍을 보고 웃으며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둘이 약속하고 온 거야?”늙은이의 말투에 담긴 장
“별말씀을요! 이건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부셔서 헤헤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 내일 학교 가는데 숙모가 저 데려다주실 거에요?”“미안하지만 안 될 것 같은데. 숙모 내일 아침 비행기거든.”부시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부승민이 먼저 물었다.“비행기? 어디 가는데?””경주. 가서 촬영 대회 시상식 참석해야 해서.“부승민이 잠시 멈칫하더니 무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촬영 대회 심사위원 중에 최동철도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최동철도 경주로 갈 것이다.부승민이 입술을 몇 번 잘근잘근 씹었다.“우와, 숙모 너무 대단해요!”부시아가 감탄했다.월요일 아침, 유치원 교실에 도착한 부시아는 짝꿍에게 질문을 던졌다.“오늘 아침엔 누가 데려다준 거야?”“엄마가. 왜?”짝꿍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대답했다.부시아가 일부러 한숨을 깊게 푹 내쉬며 말했다.“난 오늘 아주머니가 데려다주셨어. 엄마는 경주 갔거든.”이 유치원에 등원하는 아이들은 모두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집안에 운전기사가 있다든지 아주머니가 있다 와 같은 일들이 별로 놀랍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역시 예상대로 짝꿍이 다시 물었다.“경주는 왜 가셨는데?”“시상식 참석하러 갔거든. 우리 엄마 작품이 촬영 대회에서 1등 했대.”“우와, 너희 엄마 진짜 대단하시다!”부시아는 살살 올라가던 입꼬리를 애써 다시 내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어휴, 나중에 돌아오면 트로피 보여줄 거래. 그래도 난 엄마가 나랑 조금 더 오래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짝꿍이 바로 대꾸했다.“너희 엄마는 못 하는 게 없구나. 진짜 부럽다. 우리 엄마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매일 쇼핑하고 또 쇼핑만 하는데.”부시아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 말했다.“그럼 너희 엄마는 너랑 같이 있어 줄 시간이 많은 거잖아. 좋겠다.”…강남에서 경주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적어도 3시간 정도는 가야 했다.비행기에서 내린 온하랑은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다시 켜며 짐을 찾으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