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놔.”온하랑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온하랑을 바라보는 이주혁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그 손 당장 놔주지 못해!”갑자기 코너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목소리에 온하랑의 심장이 철렁했다.큰일이다. 부승민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방금 온하랑의 말을 부승민도 다 들었다는 건가? 설마 무슨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부승민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이주혁이 잡은 온하랑의 손목을 빼냈다. 그는 온하랑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주혁을 노려보았다.“하랑이가 알아듣게 얘기했을 텐데, 이주혁. 하랑이는 넌 안 좋아해. 그러니까 그만 찝쩍대!”“가자.”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고 자리를 벗어났다.온하랑은 잠시 머뭇거리다 부승민을 따라 나갔다.이주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통스러운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코너를 돌자 온하랑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왜? 마음 아파?”온하랑을 바라보던 부승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이주혁은 아직 온하랑을 포기 못 한 게 맞았다.하지만 부승민은 이주혁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이주혁이 온하랑에게 매달리지 않았다면 부승민도 온하랑이 이미 자신과 다시 화해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 사실은 부승민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마음속이 달달한 꿀이라도 삼킨 듯 달콤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기뻐 날뛰고 싶었다.온하랑은 어이없다는 듯 눈알을 굴리더니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네가 왜 여기 있어?”역시, 부승민의 입꼬리를 보니 보나 마나 오해하고 있는 게 뻔했다.“식사 약속이 있어서.”부승민이 말했다.“데려다줄게.”“필요 없어. 나 술 안 마셨으니까.”“그럼 내가 네 차로 갈게.”부승민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너 약속은 끝났어?”온하랑이 물었다.“끝났어.”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온하랑은 오른쪽 위에 있는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바라보며 눈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나랑 화해했다던 그 말이랑, 나 좋아한다고 했던 것들, 다 거짓말이었다는 거야?”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누가 들어도 위험해 보이는 부승민의 말투에 온하랑이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음… 이용했다기보다, 그냥… 대충 도움…”“허.”부승민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온하랑, 너 이 방법에 도가 터도 제대로 텄구나!”이혼 전에는 이주혁으로 부승민을 자극하고, 이혼 뒤에는 민지훈으로 부승민을 멀리했다. 그때도 온하랑은 마치 진심인양 얘기하고 행동했다. 그 말과 행동에 껌뻑 속아 넘어간 부승민은 부시아의 설득만 아니었다면 진작 온하랑과 헤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온하랑이 미안한 듯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빨간 불을 기다리는 동안 온하랑이 부승민을 슬쩍 훔쳐보았다. 타이밍 좋게 부승민과 눈이 마주치자 온하랑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자 온하랑이 다시 악셀을 밟았다.부승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주혁한테 우리가 화해했다고 얘기한 이상, 며칠 동안은 꼭 붙어 지내야겠네. 연기를 해도 제대로 해야지. 들키면 안 되잖아.”“응?”온하랑은 여기까지는 미처 예상 못 한 듯 보였다.“그… 그럴 필요까진 있을까?”“왜 필요가 없어?”부승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이주혁이 했던 말 잊었어? 사랑하던 사람 잊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나 좋아한다고 얘기했잖아. 아직도 완전히 나 못 끊어낸 걸 보면 너도 나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야?”부승민의 말도 일리 있어 보였다.“그치만…”“무슨 그치만이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자. 다음부턴 촬영 끝나면 내가 매일 데리러 갈게.”부승민은 아예 못을 박아버렸다.“그럴 필요까지는…”“있어.”“…”이거 혹시 온하랑이 도끼로 제 발등 찍은 건가?집에 돌아오자 온하랑은 사진 보정을 시작했다. 촬
일요일 점심, 온하랑은 부승민과 함께 부시아를 데리고 본가로 향했다.“증조할머니, 저 숙모랑 삼촌 데리고 할머니 보러 왔어요!”부시아는 온하랑의 손을 놓고 안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갔다.“아이고, 시아야. 증조할머니가 시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집안의 큰 어르신은 베란다에 있는 리클라이너에 누워 돋보기안경을 낀 채 신문을 읽고 있었다.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 옆에 두었다. 어르신은 거실로 걸어가며 부시아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숙모랑 삼촌도 같이 왔어?”“네.”부시아는 큰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해맑게 웃었다. 아이는 뒤꿈치를 들고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증조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린아이의 밝은 기운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할머니가 허리를 숙여 아이의 키에 맞춰주었다.부시아가 가까이 다가가 증조할머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지금 제가 숙모라고 불러도 딱히 뭐라고 안 해요.”예전에는 숙모라고 하지 말고 고모라고 하랬는데 지금은 헤헤헤…“그래, 그래, 그래.”늙은이는 몸을 일으켜 얼굴에 기쁜 듯 미소를 띠었다.사실 그녀도 두 사람이 다시 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어린아이의 영리하고 눈치 빠른 모습을 집안의 어르신이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부승민과 똑 닮아있는 부시아의 생김새에 늙은이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게다가 부시아를 대하는 부선월의 태도까지 더해 부시아의 정체에 대한 늙은이의 의심은 깊어만 갔다.하지만 의심은 의심일 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의혹을 제기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딱히 별다른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의심을 현실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만에 하나 그랬다가는 온하랑과 부승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부승민과 온하랑이 안으로 들어서며 웃는 얼굴로 늙은이에게 인사를 올렸다.“어머, 오늘은 어쩐 일로 둘이 같이 왔어?”늙은이는 눈앞의 한 쌍을 보고 웃으며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둘이 약속하고 온 거야?”늙은이의 말투에 담긴 장
“별말씀을요! 이건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부셔서 헤헤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 내일 학교 가는데 숙모가 저 데려다주실 거에요?”“미안하지만 안 될 것 같은데. 숙모 내일 아침 비행기거든.”부시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부승민이 먼저 물었다.“비행기? 어디 가는데?””경주. 가서 촬영 대회 시상식 참석해야 해서.“부승민이 잠시 멈칫하더니 무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촬영 대회 심사위원 중에 최동철도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최동철도 경주로 갈 것이다.부승민이 입술을 몇 번 잘근잘근 씹었다.“우와, 숙모 너무 대단해요!”부시아가 감탄했다.월요일 아침, 유치원 교실에 도착한 부시아는 짝꿍에게 질문을 던졌다.“오늘 아침엔 누가 데려다준 거야?”“엄마가. 왜?”짝꿍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대답했다.부시아가 일부러 한숨을 깊게 푹 내쉬며 말했다.“난 오늘 아주머니가 데려다주셨어. 엄마는 경주 갔거든.”이 유치원에 등원하는 아이들은 모두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집안에 운전기사가 있다든지 아주머니가 있다 와 같은 일들이 별로 놀랍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역시 예상대로 짝꿍이 다시 물었다.“경주는 왜 가셨는데?”“시상식 참석하러 갔거든. 우리 엄마 작품이 촬영 대회에서 1등 했대.”“우와, 너희 엄마 진짜 대단하시다!”부시아는 살살 올라가던 입꼬리를 애써 다시 내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어휴, 나중에 돌아오면 트로피 보여줄 거래. 그래도 난 엄마가 나랑 조금 더 오래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짝꿍이 바로 대꾸했다.“너희 엄마는 못 하는 게 없구나. 진짜 부럽다. 우리 엄마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매일 쇼핑하고 또 쇼핑만 하는데.”부시아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 말했다.“그럼 너희 엄마는 너랑 같이 있어 줄 시간이 많은 거잖아. 좋겠다.”…강남에서 경주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적어도 3시간 정도는 가야 했다.비행기에서 내린 온하랑은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다시 켜며 짐을 찾으러 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최동철은 온하랑을 데리고 주최 측에서 제공한 5성급 호텔에 도착했다. 오후에 시상식 현장으로 가 리허설을 할 예정이었다.저녁 7시가 되자 온하랑이 시상식 현장에 도착했다.시상식 시작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지만 몇몇 수상자들은 이미 일찌감치 도착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하랑은 자리에 앉아 휴대폰 메모장을 열고 수상 소감을 준비하고 있었다.오른쪽으로 온하랑과 두 자리 정도를 띄워두고 앉은 젊은 사진작가가 온하랑을 한 번 쳐다보고는 주변 사람들과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젊은 사진작가의 옆에는 안경을 낀 남자가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젊은 작가 너머로 온하랑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요, 혹시 옆에 계신 저분이 그 1등인가요? 얼마 전에 우연히 인스타 피드를 봤는데 부승민 회장 전처더라고요.”젊은 사진작가도 조용히 온하랑을 한 번 쓱 쳐다보고 대답했다.“그런 것 같네요.”안경을 쓴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였다.“저는 1등도 돈이랑 권력으로 사들인 거로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그 ‘연철’만 불쌍하게 됐죠. 작품 보니까 진짜 괜찮던데. 어렵게 1등까지 했는데도 다른 사람한테 뺏겨서 오히려 본인이 사과해야 하는 처지가 돼버린 거잖아요.”하지만 젊은 사진작가는 그 남자의 말에 반대 의견을 냈다.“진짜 1등을 사들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연철’도 무죄는 아니죠. 그 전 시즌 대회에서 2등을 했던 작품의 원작자를 저는 알고 있거든요. 전에 같이 사진 교류회에도 참가해봤어요. 그때 그 원작자분께서 자기 작품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뀐 걸 발견하고 인스타를 포함한 여러 플랫폼에서 제보했지만 얼마 안 가서 모든 게시글이 사라졌어요. 그때는 정말 절망적인 끝이겠구나 싶었는데 이번에 그 ‘연철’이 이런 식으로 불판에 올라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안경을 쓴 남자가 놀란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아, 정말이요?” “제가 그쪽을 왜 속이겠어요? 전에 원작자가 인스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빠르게 타자를 하던 그녀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멈추고 이윽고 온하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연철’이 동철 오빠 사촌 동생이야?"온하랑은 우선 믿지 않기로 택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최동철은 절대 가족을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온하랑이 최동철에게 자신이 모은 증거들을 보여주었을 때 보였던 최동철의 반응은 전혀 그 일을 알고 있던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돈 많은 사람은 다 그래요.” “제가 방금 찾아봤는데 본명이 최동철이더라고요. ‘연철’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쩌면 정말 최동철의 사촌 동생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설마 사촌 동생이 최동철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안경 남이 웃으며 추측을 하였다. 젊은 사진작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닐걸요?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사촌 동생이 어떻게 사촌 오빠를 좋아할 수 있겠어요?” “어휴,” 아저씨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친사촌 사이면 몰라도 이 둘은 친사촌이 아니에요. 이 사촌 동생이라는 사람, 최동철 새엄마의 조카더라고요.” 온하랑은 듣자마자 최동철 새엄마의 고집불통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이 아저씨의 말에 신뢰가 생겼다.아마도 새엄마의 조카라면 사촌오빠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최동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그 ‘연철’이라는 사람의 본명은 뭔지 아세요?” 안경 남이 물었다. “임연지요.” 젊은 사진작가와 안경 남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온하랑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온하랑에게 향하더니 갑자기 대화 주제를 이번 대회에 관한 주제로 바꿨다.온하랑은 한참이나 기침을 하다가 가슴께를 문지른 후에야 멈추었다.온하랑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자신의 오른쪽으로 한 자리 옮겼다.아저씨를 포함한 세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복사 붙여넣기라도 한 듯한 똑같은 표정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온하랑은 괴롭힘을 가장 심하게 당하던 때를 기억한다. 괴롭힘이 가장 심하던 그 며칠 동안 그녀는 꿈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엄마를 만났다. 돌아온 엄마는 온하랑을 품에 꼭 끌어안고 다시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 말했다. 학교에서도 친구가 생겼고 더는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디.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후, 그녀에게는 남은 것은 차가운 이불과 깜깜한 밤뿐이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밀려오는 무기력감에 숨죽여 울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꿈들을 많이 꿔왔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꿈을 꾼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1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예전부터 온하랑은 종종 생각해왔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재혼했을까?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온하랑을 버렸을까? 왜 단 한 번도 온하랑을 보러 오지 않았을까? 그 주변에 이미 다른 아이가 있어서 자신을 버린 게 아닐까? 때로는 자신을 버린 “그녀”를 원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녀”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온하랑은 더 이상 어머니의 존재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분노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녀”를 아예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아버지가 죽은 후 몇 년 동안, 온하랑은 이미 여러 해 동안 험난한 여정을 걸어왔다.세상은 넓으니 온하랑은 우연히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운명의 장난을 너무 좋아했다.알고 보니 온하랑이 항상 그리워하던 “그녀”는 최씨 가문 옛 주인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녀”는 뉴스를 보았을까? 온하랑이 부씨 가문으로 입양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그녀"가 부하를 통해 온하랑을 병원으로 데리고 갔던 그 날, 온하랑이 바로 자신이 버렸던 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까?온하랑은 병원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부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익숙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시아야, 씻으러 가야지.”부시아가 고개를 들더니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저 지금 숙모랑 얘기 중이잖아요!”“씻고 나서 마저 얘기하든지.”큰 손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더니 아이의 작은 머리를 어루만졌다.“시아야, 얼른 씻으러 가. 다 씻고 나와서 다시 통화하자.”온하랑이 말했다.“숙모, 저 기다려 주셔야 해요.”부시아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움직였다.그 순간, 갑자기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윽고 부승민의 화려한 얼굴이 화면에 띄워졌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주는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그는 온하랑의 뒤로 보이는 도로를 보더니 물었다.“시상식 벌써 끝났어?”“참석 안 했어.”“왜?”“일이 좀 생겨, 다른 사람한테 대리 수상 부탁했어.”“무슨 일인데?”부승민이 물었다.“별로 큰일은 아니야.”온하랑이 부승민의 질문에 대답을 피했다.부승민은 화면에 비친 온하랑의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표정 보면 별일이 아닌 게 아닌데.”부승민은 한눈에 온하랑의 기분이 나쁘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렇게나 예리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뜬 온하랑은 잠시 아랫입술을 씹더니 입을 열었다.“걱정할 거 없어. 곧 괜찮아 질 거니까.”“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꼭 기억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나랑 시아는 항상 네 편이야.”부승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 너머의 온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둘은 분명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맞았지만 부승민의 눈빛을 보는 순간 온하랑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안정을 되찾아가는 것 같았다. 부승민의 목소리에 무슨 마법이라도 있는 듯 잔뜩 구려진 온하랑의 마음을 쫙쫙 펴주었다.하지만 온하랑은 차마 부승민의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온하랑이 말했다.“시아가 내 편이니까 넌 필요 없어.”그래도 아직 장난칠 기력이 남아있는 온하랑을 보니 부승민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