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서윤의 대역이야.”송재열이 말했다.“그래?”정진석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업계에서는 대역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대중 앞에 설 수 있는 대역은 몹시 드물었다.무술 대역은 대체로 외모가 아쉬웠고 대부분의 대역은 얼굴과 체형이 연기자와 매우 흡사했다. 이미 대중 앞에는 이런 얼굴이 있기에 그 대역은 대체로 이 바닥에서 출세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대역을 맡은 연기자 팬들의 공격을 받기 일쑤였다.정진석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여자 대역 배우를 바라보았다. 조금 서툰 감이 있었지만 매우 대담하고 동작은 아주 힘 있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싸움’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는데 와이어를 담당하는 스태프에 대한 그녀의 신뢰가 느껴졌다. 만약 대역 배우만 아니라면 이 구간의 자신이 직접 연출한 액션 신을 조금만 마케팅하면 분명 좋은 반응이 있을 것이다.송재열도 매우 만족하여 온하랑더러 몇 장면을 더 찍으라고 했다. 감독이 컷을 외칠 때 온하랑은 이미 녹초가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팔은 너무 아파서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옷은 아주 얇았지만, 추위를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온몸의 긴장을 풀며 와이어 담당자가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도록 몸을 맡겼다.카메라 뒤에 서 있던 이주혁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물 한 컵을 받아 온하랑이 내려오면 물을 건네주며 무슨 일인지 물어볼 계획이었다.조금 전에 NG가 났을 때 온하랑은 무술 감독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내려온 적이 있었는데 이주혁은 그때 온하랑인 것을 확인했다.그녀가 왜 여기 와서 대역을 하고 있을까? 그것도 추서윤의 대역을 말이다!커다란 불꽃이 일며 가느다란 와이어가 갑자기 끊어졌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모두가 미처 대응할 수 없었다. 와이어 줄이 하나밖에 남지 않아 온하랑의 몸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온하랑이 땅에 착지하는 순간 다른 줄도 갑자기 끊어졌다. 제일 먼저 반응한 이주혁은 손에 들린 물컵을 버리
온하랑은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추서윤한테 도움받을 일이 있거든.”“대체 무슨 일이기에 하필이면 추서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거야?”“이 일은 정말 추서윤이 아니면 안 돼.”계속 물어보려고 했지만 매니저가 와서 이주혁을 불렀다.“주혁 씨, 촬영 시작해요.”머뭇거리는 이주혁을 보며 온하랑이 손을 내저었다.“빨리 가봐. 나도 옷 갈아입고 집에 갈래.”자리에서 일어난 이주혁은 걱정스럽게 말했다.“오늘 와이어가 끊어진 거 뭔가 의심스러우니까 몸조심하도록 해.”“그래, 알았어. 고마워.”“그럼 난 이만 촬영하러 갈게.”이주혁이 떠나자 온하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추서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급함을 스태프에게 건넨 온하랑은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옷을 정리하며 와이어 담당자를 향해 걸어갔다. 와이어 담당자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에게 사과했다.“하랑 씨, 정말 미안해요. 저희 직업상의 실수로 하마터면 당신을 위험에 빠트릴 뻔했어요. 크게 다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온하랑은 옅게 웃었다.“어쩌다 끊어진 건지 알아냈어요?”와이어 담당자가 말했다.“초보적인 판단으로는 심한 마찰로 인해 한 곳에만 집중적으로 힘이 실리며 와이어가 견디지 못한 것 같아요. 다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저희 탓이에요. 정말 미안해요.”“괜찮아요. 그래도 다행히 큰 사고가 나지 않았으니. 앞으로는 잘 확인해 주세요.”“네, 물론이죠.”온하랑은 촬영장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마자 서우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최근 몇 년간 비슷한 사례의 일을 많이 받았던 지라 서우현은 아주 빨리 알아냈다. 어제 추서윤의 집에서 밤을 보낸 사람은 현재 영화 촬영을 준비 중인 한 보조 감독이었다. 서우현은 감시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온하랑에게 보냈다.그녀는 그에게 와이어가 끊어진 일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사극 판타지 드라마는 와이어를 써야 하는 곳이 많았기에 와이어 담당자가 말한 원인은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온하
“시아는 알아? 뭐라고 해?”온하랑이 물었다.“내가 물어봤는데 시아는 두 쪽 다 아쉬운 눈치였어. 누군가 결정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아.”온하랑은 잠시 머뭇거렸다.“하지만...”“하지만 같은 건 필요 없어. 우리가 시아랑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모랑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만 봐도 너도 무슨 뜻인지 알잖아?”“알았어.”전화를 끊은 온하랑은 앞 골목에서 차를 돌려 곧바로 부승민을 만나러 관련 부서로 향했다. 그녀는 주차장 입구 근처에 차를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차가 들어왔다.온하랑은 차에서 내려 입구 근처로 걸어갔다. 주차를 마친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는 꼬마를 본 온하랑은 손을 흔들었다.“시아야.”부시아는 뛰어와 온하랑의 손을 잡았다.“숙모.”쾅, 차 문을 닫은 부승민은 차 키를 주머니에 넣고 온하랑을 슬그머니 훑어보았다.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냥 팔만 다친 건가?온하랑은 부승민을 흘겨보고는 부시아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가자.”부승민은 밑으로 늘어뜨린 커다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온하랑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없이 따라갔다. 직원이 다가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부시아는 고개를 쑥 빼 들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시아야. 이틀 동안 뭐했어?”온하랑이 물었다.“삼촌이 날 데리고 두 어린이집을 보러 갔어요.”“시아는 어느 곳을 선택하고 싶어?”해외에 있을 때 시아가 생활한 곳은 코리아타운이었다. 어린이집에도 한국 아이들이 많았던지라 적응을 못 할 걱정은 없었다. 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사실 두 곳 다 선택하기 싫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죠...”온하랑은 꼬마의 볼을 꼬집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부승민은 부시아의 정보 서류와 국적 변경 서류를 직원에게 건넸다.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서류를 들고 나갔다.응접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부시아는 온하랑의 옆에 앉아서 두 어린이집에서 본 것들을 비교하며 설명했다.
부승민은 원하는 바가 있었고, 그녀는 만족시킬 수 없었다. 원래도 부승민에게 밥 두 끼를 빚지고 있는데 그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빚만 점점 싸일 뿐이었다. 게다가 온하랑의 성격상 빚을 지면 무조건 갚아야 했다.정말 부승민과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그건 두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서이지 그에게 빚진 상태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부승민과 재결합할 마음조차 없었다.직원이 들어와서 신청서 두 장을 온하랑과 부승민 앞으로 내밀며 설명했다.“증명서를 작성하려면 부모님의 정보가 필요해요.”“네.”온하랑은 펜을 들고 서류를 작성했다. 부시아는 옆에 엎드려서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숙모, 나 이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부시아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불러. 그냥 호칭일 뿐인데.”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부시아는 금세 얼굴이 빨갛게 물들더니 부끄러운 듯 온하랑의 품에 파고들었다.시아는 숙모가 너무 좋았다. 이제 시아도 드디어 엄마가 생기는 거야!직원은 금방 작성한 서류를 들고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등본을 부승민에게 건넸다.“부승민 씨, 아이의 입양 관계 증명서 입니다.”이제 부승민의 가족관계등록부에는 부시아가 부녀 관계로 기재되었다.“고마워요.”증명서를 훑어보고 서류봉투에 집어넣은 부승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가자.”세 사람은 나란히 걸어 나갔다. 성큼성큼 차 앞으로 걸어간 부승민은 차 문을 열었다. 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걸어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부시아를 차에 태웠다.“시아야, 잘 가. 시간 되면 만나.”“숙모 빠이빠이!”부승민은 운전석 문을 열었지만 차에 오르지 않았다. 온하랑이 가려고 하자 마침내 마음이 약해져서 입을 열었다.“저...”시간되면 같이 밥 먹을까...아직 뒤에 말을 채 뱉지도 못했는데 온하랑은 부시아를 도와 문을 닫아주고 그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잘가.”“...”무표정으로 운전석에 올라탄 부승민은 힘껏 차 문
그러니까 설 전날 겉으로는 부승민이 온하랑을 헤어져라고 몰아붙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온하랑이 물길을 따라 여유롭게 노를 젓고 있던 거였다. 그녀도 분명 민지훈과 헤어지려고 했으면서 일부러 그의 앞에서 헤어지기 아쉬운 척하며 그를 약 올렸다는 말이다.이 여자가 이혼하더니 점점 대담해지네!부승민은 이어폰을 빼서 대충 수납함에 집어 던졌다. 불길이 점점 거세져 와 걷잡을 수 없었다. 마음속의 악마가 당장 온하랑을 찾아가 따지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 침대 위에 깔아뭉개서 울려버리면 감히 다시 기어오르려고 못한단 말이야!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부승민은 간신히 마음속의 악마를 잠재웠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이 부승민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하는 순간 뒷좌석에 앉은 부시아가 생각나 다시 라이터를 집어넣었다.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고 부승민은 다시 액셀을 밟았다. 더윈파크힐에 도착했을 때 담배 필터는 그에게 짓 씹혀 너덜너덜해졌다. 부시아를 집에 보내고 부승민은 다시 회사로 향했다.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자 부승민은 옆에 놓인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받자마자 부선월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승민이 너 시아를 호적에 올린 거야?”“네.”부승민은 짜증이 밀려왔다.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부선월과 말다툼하고 싶지도 않았다. 부선월이 발광했다.“너...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온하랑이 도대체 널 어떻게 꼬셨길래 이러는 거야?! 남자애면 몰라도 시아는 여자애란 말이야...”“고모, 저도 제가 뭘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앞으로 시아의 보호자는 저예요. 시아가 보고 싶으면 와서 봐도 되지만 더 이상 다른 문제에는 끼어들지 마세요.”부승민은 전방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떤 말은 제 앞에서는 해도 괜찮지만, 시아 앞에서는 하지 마세요. 시아가 속상해할 거예요.”“너 정말 내가 화나서 미쳐버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그런 뜻은 없어요.”“내가 왜 계속 너희 둘을 뜯어말
“이 일은 없었던 거로 할 게요. 좋은지 나쁜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죠. 고모, 앞으로 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시는 제 혼인을 파괴하는 일을 하지 마세요.”부승민이 경고했다. 자기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자 부선월은 화가나 피를 토할 것 같았다. 더 이상 부승민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던 부선월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됐어, 네가 알아서 해. 그건 그렇고 다른 주주들한테서 듣기로 요즘 회사가 최씨 가문 사업과 마찰이 있다며? 그들이 우리 프로젝트를 뺏어 갔어?”젊었을 때의 일을 떠올린 부선월은 최동철이 왜 자리에 오르자마자 부씨 가문과 대적하려 드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부선월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네.”“현재 최씨 일가의 주인이 최동철이라며 만나본 적이 있어?”부선월은 떠보는 듯 물었다.“고모도 알고 있어요?”“들은 적이 있어.”“두 번 만났었는데 말은 많이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 부씨 가문에 대적하는지 모르겠어요.”부승민이 말했다.“최동철은 전에 계속 해외에 있었어. 온하랑이 유학했을 때 둘이 친밀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온하랑 때문이 아닐까...”부선월은 자기 생각을 말했다.“불가능해요.”부승민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연민우도 전에 온하랑 때문이 아닐지 추측했지만 부승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만약 최동철이 온하랑을 특별하게 여겼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갑자기 온하랑을 위해 세력이 비슷한 회사를 건든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됐다. 그러나 부선월의 말은 부승민의 마음에 커다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부선월은 온하랑이 해외에 있을 때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부선월이 이어서 말했다.“최동철은 전에 회사에서 근무하지 않았어. 갑자기 귀국해서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올랐으니 최씨 가문 내부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야. 그 또한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갈등을 외부로 돌렸을 거야. 앞으로 계속 BX 그룹
추서윤은 예전 일을 떠올렸다. 금방 구출됐을 때 그런 일을 겪은 그녀를 보며 부승민은 매우 과묵해지고 헤어지자는 말을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부승민의 좌절과 자책, 괴로움이 느껴졌고 그는 한동안 제대로 잠들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대학교 때, 부씨 가문의 도련님 부승민은 전심전력으로 공부하는 우수한 학생이었다.부승민을 쫓아다닐 때, 항상 자신감이 넘쳤던 추서윤은 큰 좌절을 겪고 나서야 부승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인 재벌 자제와는 완전히 다른 남자였다.그는 자신만의 추구와 신념이 있었다. 그녀는 그가 항상 자신의 원칙을 고수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원칙을 온하랑이 이렇게 쉽게 깨버릴 줄은 몰랐다.부승민은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렀다. 팔을 들어 올리자 코트의 어깨 부분에 자연스럽게 주름이 잡히며 근육의 윤곽이 드러났다.“나서서 증언해.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말해.”부승민의 전화를 받았을 때, 추서윤은 그의 목적을 짐작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질투를 느꼈다. 그녀는 부승민을 바라보며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부승민, 널 열정적이라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싸구려라고 욕해야 할지 모르겠어!”부승민은 온하랑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싫다는 사람한테 매달리기까지 했다.온하랑이 추서윤의 매니저가 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부승민은 온하랑을 위해 추서윤을 만나 협상하고 있었다.온하랑이 대체 뭐라고 그는 자기 마음을 다 퍼준단 말인가?!“네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부승민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으니 빨리 네 조건이나 말해.”“내가 어떤 조건도 싫다면?”추서윤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너에게 그런 선택권은 없어.”부승민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뜻이 담겨 있었다. 추장훈은 추서윤을 신경 써줄 마음이 없었고, 부승민은 손가락만 까닥해도 그녀를 매장 시켜버릴 수 있었다. 추서윤은 양손으로 핸드백 끈을 꼭 잡고 부
온하랑은 추서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 아침부터 왠지 계속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미친 듯이 불러대며 작은 일을 가지고 난리를 쳐댔다.“너 오늘 폭탄이라도 먹었어?”촬영이 없는 틈을 타 온하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넌 참 운도 좋아.”추서윤은 온하랑을 응시하며 뜬금없이 한마디를 뱉었다. 두 자매는 동시에 한 남자를 좋아했지만 그 결과는 아예 달랐다. 손에 대본을 들고 있던 추서윤은 질투심이 마구 솟구쳤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전부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 온하랑은 온강호같은 책임감 있는 아버지를 만나 혈연관계가 없음에도 친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고, 딸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희생했다.그러나 추상훈은 추서윤의 친아버지였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고, 무능하게 죽어버렸다. 추상훈이 그녀를 위해 죽지는 못해도 큰아버지처럼 진취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추서윤의 마음속에는 추상훈에 대한 원망만 가득했다. 온하랑은 어이없어 눈썹을 치켜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왜 너한테 줄까?”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소년기에 아버지마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얼마 전에는 배 속의 아이까지 잃었다. 온하랑은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추서윤이 보기에는 온하랑이 부씨 가문에 들어가고, 부승민한테 시집가서 운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다. 가능만 하다면 온하랑은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있기를 더욱 간절히 바랐다.추서윤이 말했다.“그럼 아니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부러워하는데. 다들 부씨 집안에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추서윤은 도리어 정말 자신이 온하랑이되길 바랐다. 그래서 부승민을 손아귀에 단단히 잡고 싶었다. 온하랑은 담담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스태프가 와서 그녀를 불렀다. 오늘 추서윤은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