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서윤이 촬영할 때 온하랑은 현장 스태프를 찾아 스케줄표를 받았다. 오늘 추서윤은 두 장면을 촬영해야 했는데 첫 번째는 지금 찍고 있는 장면이었고, 두 번째 장면은 오후에 촬영이 있었다.첫 번째 장면을 촬영하는데 대략 한 시간 정도 들었고, 감독이 드디어 컷을 외쳤다. 추서윤이 입을 열기 전에 온하랑은 얼른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어깨에 패딩을 걸쳐주었다. 추서윤은 눈썹을 치켜들며 온하랑을 바라보고는 밖으로 걸어갔다.“내 분홍색 물병 세트장에 있을 거야. 가서 따뜻한 물 받아서 차에 갖다줘.” “그래.”세트장에 가서 물병을 찾은 온하랑은 추서윤이 뚜껑을 열다가 뜨거운 물방울이 몸에 떨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입구에서 2센티미터 아래까지 물을 받았다.물병을 받아 든 추서윤은 뚜껑을 열며 온하랑을 흘끗 쳐다보더니 말했다.“난 차에서 쉴 테니 넌 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일이 있으면 불러.”말을 마친 추서윤은 문을 닫았다. 온하랑이 시간을 보니 한 시간 뒤면 점심이었다. 그녀는 밴에 기대서서 휴대폰을 놀다가 다리가 저릴 때면 쪼그리고 앉았다.점심이 되자 온하랑은 가서 도시락 두 개를 받아왔다. 결벽증이 있는 추서윤은 자기 수저를 사용하여 밥을 먹은 후 온하랑에게 수저를 던져주며 가서 깨끗이 씻어 오라고 했다.추서윤의 지적을 피하고자 온하랑은 여러 번 씻어서 추서윤이 꼬투리를 잡을 빌미를 주지 않았다.잠시 휴식을 취한 후 추서윤은 차에서 내려 세트장으로 돌아와 메이크업 아티스트한테 메이크업을 수정받고 스타일리스트한테 헤어 스타일과 의상을 정리 받으며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그리고 촬영 현장에서는 소품팀과 조명팀이 디버깅하고 있었다. 온하랑은 옆에 서서 기다렸다. 이때 스타일리스트가 근처 옷걸이에서 추서윤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드레스를 꺼냈다.그녀는 바로 온하랑에게 걸어가서 의아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며 옷을 건넸다.“하랑 씨,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세요.”온하랑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와 옷을 번갈아 보았다.“제가요? 이 옷으로 갈아입으라고요?
온하랑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다음 장면 혹시...?”스타일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바로 구미호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정기를 빼낸 후 죽이는 장면이에요.”“...”그 순간 온하랑은 마음이 미치도록 복잡해졌다. 지금 거절하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스타일리스트는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방통위가 엄격해져서 조금만 심해도 방송이 금지당해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만 가요. 얼른 머리도 정리해야죠.”온하랑은 제자리에 서서 패딩을 입고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나갔다. 추서윤의 시선이 잠시 온하랑의 몸에 머물렀다. 그녀는 다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부러워하는 눈을 바라보더니 속으로 비꼬았다.온하랑은 애까지 낳았는데 어떻게 크지 않을 수 있겠어?!스타일리스트는 온하랑에게 추서윤과 같은 헤어스타일을 해주었다. 분장실에서 나오니 찬바람이 불어왔다. 윗몸은 패딩으로 감싸고 있어 그나마 괜찮았지만, 종아리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온하랑은 추서윤의 뒤를 따라 감독을 찾아갔다. 송재열은 두 사람을 힐끗 보더니 온하랑에게 물었다.“대본은 봤어요?”“아니요.”송재열 감독은 온하랑에게 대본을 건네며 말했다.“줄거리는 아주 간단해요. 대화 부분은 다 서윤 씨가 연기하니까, 당신은 클로즈업 부분만 찍으면 돼요.”온하랑은 대본을 읽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정말 간단했다. 상처를 입은 구미호가 도관의 어린 도사를 유혹하여 정기를 빼내는 장면이었다.여기서의 유혹은 언어와 신체적인 유혹이 포함되어 있었고, 몸매를 드러내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었다.당연히 온하랑은 신체적인 부분을 담당해야 했다. 상대역은 한 도사였고, 구미호의 사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등장한다.그 도사역을 맡은 배우는 보조출연자였으며 외모가 꽤 괜찮은 청년이었는데 이미 메이크업을 받고 설명을 들으러 왔다. 송재열은 표정부터 몸짓, 카메라 위치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설명을 마친 후 추서윤은 어린 도사와 두 번 합을 맞춰보고 송재열의 지시하에 정식
온하랑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추서윤은 마음이 몹시 통쾌했다. 그녀는 자기 몸을 희생하여 늙은 남자의 비위를 맞춰야만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데, 왜 온하랑은 아무것도 안 하고 부승민의 보호 아래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부승민은 온하랑이 해외에서 아이를 낳은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그렇게 관대하다면 추서윤은 그가 대체 어디까지 관대할 수 있는지 지켜볼 참이었다.온하랑은 그녀의 말만 따르면 그녀가 나서서 범인을 지목할 거라는 멍청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몇 장면의 클로즈업을 촬영한 후 감독은 컷을 외쳤다. 온하랑은 돌아서서 재빨리 패딩을 입었다. 추서윤이 말했다.“너 이제 가도 돼. 내일 일찍 우리 집에 와서 스케줄 반 시간 전에 날 깨우고 아침 준비해.”온하랑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추서윤을 바라보았다.“이제 내가 필요 없어?”“그래.”온하랑은 탈의실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발을 벗었다. 정리를 마친 후 그녀는 촬영장을 떠났다....부승민은 하루 동안 바삐 돌아쳤다. 두 눈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무겁고 온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드디어 잠깐 시간을 내서 휴식할 수 있었다.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두 눈을 감고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휴식을 취했다. 갑자기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 소리가 울렸다.그는 천천히 휴대폰을 들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흠칫 놀란 부승민은 액정에 나타난 화면을 응시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이를 악물었다.화면 속에는 노출한 의상을 입고 있는 온하랑이 한 도사 복을 입은 남자에게 친밀한 자세로 안겨 있었다.부승민은 눈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흉악한 눈빛으로 화면 속의 남자를 보며 산채로 그의 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문자가 잇달아 들어왔다. 상대방은 그에게 알려줬다. 이건 드라마 촬영 현장이고 온하랑은 지금 추서윤의 매니저 겸 대역을 도맡았다고 했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왜 추서윤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지 이내 짐작할 수 있
온하랑은 내려가서 추서윤의 아침을 준비하여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하얀빛이 온하랑의 눈을 찔렀다. 엎드려 보니 남성 시계 한 개가 테이블 모서리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남자가 여기서 밤을 보낸 듯했다.온하랑은 못 본 척 슬며시 발로 시계를 차서 소파 아래에 넣었다. 머리는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추서윤이 몸을 팔 수 있게 할 만한 사람이라면 연예계 혹은 제작사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그녀는 조용히 서우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온하랑은 멍청하지 않았다. 만약 추서윤 밑에서 무의미하게 한 달이나 견뎠는데 그때 가서 추서윤이 번복한다면 누구를 찾아가서 하소연해야 하는가?그러나 추서윤의 약점을 쥐고 있으면 추서윤에게 직접 나서서 범인을 지목하라고 협박하지 않아도 추서윤이 번복하려 할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추서윤은 씻고 내려와 아침을 먹었다. 온하랑은 가서 그녀의 파우치와 수시로 사용하는 거울, 보조배터리, 향수, 콘택트렌즈, 핸드크림 등과 같은 물건을 정리했다.촬영장에 도착하자 스태프들은 마침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스타일링을 마친 두 사람은 감독의 설명을 들은 후 촬영에 들어갔다.추서윤의 촬영 부분은 싸우기 전의 대화 장면이었다. 상대역은 여자 주인공과 그녀의 동문 후배 등 선한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었다. 쌍방은 한참 마주 보며 대치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기 시작한다.“컷.”감독이 외치자마자 배우들은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몸을 풀 사람은 몸을 풀고, 물을 마실 사람은 물을 마시고, 메이크업을 수정할 사람은 메이크업을 수정하며 각자의 활동을 시작했다. 추서윤이 퇴장하고 온하랑이 대신 올라갔다. 감독은 그녀가 익숙하지 않을까 봐 정식으로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여자 주인공과 몇 번 연습하도록 했다.다행히 온하랑이 평소 요가를 하던 습관 때문인지 동작은 아주 표준적이고 힘이 있었다. 민첩한 몸놀림에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송재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옆의 무술 감독과 몇
“추서윤의 대역이야.”송재열이 말했다.“그래?”정진석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업계에서는 대역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대중 앞에 설 수 있는 대역은 몹시 드물었다.무술 대역은 대체로 외모가 아쉬웠고 대부분의 대역은 얼굴과 체형이 연기자와 매우 흡사했다. 이미 대중 앞에는 이런 얼굴이 있기에 그 대역은 대체로 이 바닥에서 출세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대역을 맡은 연기자 팬들의 공격을 받기 일쑤였다.정진석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여자 대역 배우를 바라보았다. 조금 서툰 감이 있었지만 매우 대담하고 동작은 아주 힘 있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싸움’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는데 와이어를 담당하는 스태프에 대한 그녀의 신뢰가 느껴졌다. 만약 대역 배우만 아니라면 이 구간의 자신이 직접 연출한 액션 신을 조금만 마케팅하면 분명 좋은 반응이 있을 것이다.송재열도 매우 만족하여 온하랑더러 몇 장면을 더 찍으라고 했다. 감독이 컷을 외칠 때 온하랑은 이미 녹초가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팔은 너무 아파서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옷은 아주 얇았지만, 추위를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온몸의 긴장을 풀며 와이어 담당자가 천천히 그녀를 내려놓도록 몸을 맡겼다.카메라 뒤에 서 있던 이주혁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물 한 컵을 받아 온하랑이 내려오면 물을 건네주며 무슨 일인지 물어볼 계획이었다.조금 전에 NG가 났을 때 온하랑은 무술 감독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내려온 적이 있었는데 이주혁은 그때 온하랑인 것을 확인했다.그녀가 왜 여기 와서 대역을 하고 있을까? 그것도 추서윤의 대역을 말이다!커다란 불꽃이 일며 가느다란 와이어가 갑자기 끊어졌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모두가 미처 대응할 수 없었다. 와이어 줄이 하나밖에 남지 않아 온하랑의 몸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온하랑이 땅에 착지하는 순간 다른 줄도 갑자기 끊어졌다. 제일 먼저 반응한 이주혁은 손에 들린 물컵을 버리
온하랑은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추서윤한테 도움받을 일이 있거든.”“대체 무슨 일이기에 하필이면 추서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거야?”“이 일은 정말 추서윤이 아니면 안 돼.”계속 물어보려고 했지만 매니저가 와서 이주혁을 불렀다.“주혁 씨, 촬영 시작해요.”머뭇거리는 이주혁을 보며 온하랑이 손을 내저었다.“빨리 가봐. 나도 옷 갈아입고 집에 갈래.”자리에서 일어난 이주혁은 걱정스럽게 말했다.“오늘 와이어가 끊어진 거 뭔가 의심스러우니까 몸조심하도록 해.”“그래, 알았어. 고마워.”“그럼 난 이만 촬영하러 갈게.”이주혁이 떠나자 온하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추서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급함을 스태프에게 건넨 온하랑은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옷을 정리하며 와이어 담당자를 향해 걸어갔다. 와이어 담당자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에게 사과했다.“하랑 씨, 정말 미안해요. 저희 직업상의 실수로 하마터면 당신을 위험에 빠트릴 뻔했어요. 크게 다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온하랑은 옅게 웃었다.“어쩌다 끊어진 건지 알아냈어요?”와이어 담당자가 말했다.“초보적인 판단으로는 심한 마찰로 인해 한 곳에만 집중적으로 힘이 실리며 와이어가 견디지 못한 것 같아요. 다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저희 탓이에요. 정말 미안해요.”“괜찮아요. 그래도 다행히 큰 사고가 나지 않았으니. 앞으로는 잘 확인해 주세요.”“네, 물론이죠.”온하랑은 촬영장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마자 서우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최근 몇 년간 비슷한 사례의 일을 많이 받았던 지라 서우현은 아주 빨리 알아냈다. 어제 추서윤의 집에서 밤을 보낸 사람은 현재 영화 촬영을 준비 중인 한 보조 감독이었다. 서우현은 감시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온하랑에게 보냈다.그녀는 그에게 와이어가 끊어진 일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사극 판타지 드라마는 와이어를 써야 하는 곳이 많았기에 와이어 담당자가 말한 원인은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온하
“시아는 알아? 뭐라고 해?”온하랑이 물었다.“내가 물어봤는데 시아는 두 쪽 다 아쉬운 눈치였어. 누군가 결정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아.”온하랑은 잠시 머뭇거렸다.“하지만...”“하지만 같은 건 필요 없어. 우리가 시아랑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모랑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만 봐도 너도 무슨 뜻인지 알잖아?”“알았어.”전화를 끊은 온하랑은 앞 골목에서 차를 돌려 곧바로 부승민을 만나러 관련 부서로 향했다. 그녀는 주차장 입구 근처에 차를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차가 들어왔다.온하랑은 차에서 내려 입구 근처로 걸어갔다. 주차를 마친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는 꼬마를 본 온하랑은 손을 흔들었다.“시아야.”부시아는 뛰어와 온하랑의 손을 잡았다.“숙모.”쾅, 차 문을 닫은 부승민은 차 키를 주머니에 넣고 온하랑을 슬그머니 훑어보았다.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냥 팔만 다친 건가?온하랑은 부승민을 흘겨보고는 부시아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가자.”부승민은 밑으로 늘어뜨린 커다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온하랑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없이 따라갔다. 직원이 다가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부시아는 고개를 쑥 빼 들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시아야. 이틀 동안 뭐했어?”온하랑이 물었다.“삼촌이 날 데리고 두 어린이집을 보러 갔어요.”“시아는 어느 곳을 선택하고 싶어?”해외에 있을 때 시아가 생활한 곳은 코리아타운이었다. 어린이집에도 한국 아이들이 많았던지라 적응을 못 할 걱정은 없었다. 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사실 두 곳 다 선택하기 싫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죠...”온하랑은 꼬마의 볼을 꼬집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부승민은 부시아의 정보 서류와 국적 변경 서류를 직원에게 건넸다. 직원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서류를 들고 나갔다.응접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부시아는 온하랑의 옆에 앉아서 두 어린이집에서 본 것들을 비교하며 설명했다.
부승민은 원하는 바가 있었고, 그녀는 만족시킬 수 없었다. 원래도 부승민에게 밥 두 끼를 빚지고 있는데 그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빚만 점점 싸일 뿐이었다. 게다가 온하랑의 성격상 빚을 지면 무조건 갚아야 했다.정말 부승민과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그건 두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서이지 그에게 빚진 상태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부승민과 재결합할 마음조차 없었다.직원이 들어와서 신청서 두 장을 온하랑과 부승민 앞으로 내밀며 설명했다.“증명서를 작성하려면 부모님의 정보가 필요해요.”“네.”온하랑은 펜을 들고 서류를 작성했다. 부시아는 옆에 엎드려서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숙모, 나 이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부시아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불러. 그냥 호칭일 뿐인데.”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부시아는 금세 얼굴이 빨갛게 물들더니 부끄러운 듯 온하랑의 품에 파고들었다.시아는 숙모가 너무 좋았다. 이제 시아도 드디어 엄마가 생기는 거야!직원은 금방 작성한 서류를 들고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등본을 부승민에게 건넸다.“부승민 씨, 아이의 입양 관계 증명서 입니다.”이제 부승민의 가족관계등록부에는 부시아가 부녀 관계로 기재되었다.“고마워요.”증명서를 훑어보고 서류봉투에 집어넣은 부승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가자.”세 사람은 나란히 걸어 나갔다. 성큼성큼 차 앞으로 걸어간 부승민은 차 문을 열었다. 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걸어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부시아를 차에 태웠다.“시아야, 잘 가. 시간 되면 만나.”“숙모 빠이빠이!”부승민은 운전석 문을 열었지만 차에 오르지 않았다. 온하랑이 가려고 하자 마침내 마음이 약해져서 입을 열었다.“저...”시간되면 같이 밥 먹을까...아직 뒤에 말을 채 뱉지도 못했는데 온하랑은 부시아를 도와 문을 닫아주고 그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잘가.”“...”무표정으로 운전석에 올라탄 부승민은 힘껏 차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