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잘 모르겠어.”부승민은 슬그머니 온하랑을 보았다.“의사가 언제 괜찮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온하랑은 현재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대에 오르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회복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삼촌이 수술할 때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요.”“우리 시아 천사네.”“삼촌 손에서 끽끽, 이상한 소리가 나요.”온하랑은 허, 탄성을 내뱉으며 팔짱을 끼고 부승민을 흘겨보았다.“손에 뼈만 남았는데 소리가 안 날 수 있어?”“...”부승민은 할 말을 잃었다.“숙모, 삼촌한테 너무 못되게 굴지 마요! 삼촌도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요...”“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고? 그럼 위가 약한 걸 알면서 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그날 밤 삼촌이 너무 슬펐으니까요!”부시아는 그럴싸하게 한숨을 쉬며 눈썹을 찡그렸다.“삼촌이 숙모를 정말 사랑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부시아.”온하랑은 부시아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부시아는 얼른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깜빡이며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시아한테 왜 그래. 다 맞는 말인데.”부승민이 온하랑의 눈을 보며 말하자 온하랑은 가슴이 살짝 먹먹해졌다.“그래서 뭐? 우린 이미 끝났어. 오빠가 자해한다고 해서 내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이것으로 너를 협박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나를 너무 멀리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마... 나에게도 민지훈과 경쟁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부승민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삼촌, 아파요.”부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부승민은 얼른 부시아의 손을 놓았다. 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그녀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다시 제자리에 놓고 부시아에게 말했다. “시아야, 넌 여기 삼촌이랑 있을래? 고모는 먼저 갈 거야.”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거야?“안 돼요!”침대에서 뛰어내린 시아는 온하랑의 다리를 잡았다.“가지 마요! 숙모가
온하랑은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거렸다. 부승민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그녀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하랑은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무슨 조건인데?”부승민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온하랑이 한마디를 보탰다.“적당히 해!”부승민은 그윽한 눈빛으로 마치 매우 경건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아주 간단해. 일부러 나를 멀리하지 말고 나한테도 공정한 기회를 주는 거야.”온하랑이 침묵하자 부시아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숙모, 들어줘요? 네?”온하랑은 눈을 치켜뜨고 부승민을 노려보았다. 부승민은 언제부턴가 꾀가 정말 많아졌다. 온하랑이 여전히 말이 없자 부승민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며 미간을 찌푸리고 복부를 감쌌다.“쓰읍...”“삼촌, 왜 그래요? 위가 많이 아파요?”부시아는 즉시 침대 옆으로 달려가 관심 어린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괜찮아.”고통을 참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이 짧은 시간에 벌써 두 번이나 아팠는데 의사 불러줄까?”부승민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아파서 죽게 내버려둬. 어차피 넌 관심도 없는데.”“...”“그래, 그래. 승낙할게. 됐지?”그녀는 짜증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공정한 경쟁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부승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진짜지?”“거짓말이길 원해?” “당연히 아니지. 약속 지켜. 다시는 날 피하지 않을 거지?”“나도 조건이 있어. 이번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앞으로 민지훈을 겨냥하지 마. 그리고 내가 민지훈과 있을 때 와서 방해하지 마.”온하랑은 민지훈이 그녀가 부승민과 엮인 걸 알게 될까 봐 불안했다. 부승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부시아는 미친 듯이 부승민에게 눈짓했다.어차피 부시아라는 스파이가 있으니까, 그녀가 마른 병아리를 주시할 것이다. 부승민은 마지못해 승낙했다.“그래, 겨냥하지 않을게. 그런데 나한테도 단둘이 있을 시간을 줘.”“있을 거야. 미리
온하랑은 점심밥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전부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부시아는 흥분하며 소파에 앉아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난 이거랑 이거 먹을래요...”온하랑은 부승민을 보며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뭐 먹을래? 골고루 담아줄까?”부승민은 고래를 저었다.“아니, 난 음식 못 먹어.”온하랑은 싸늘하게 웃으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못 먹는다니? 그런데 육광태가 왜 나 때문에 단식 투쟁한다고 했을까? 하루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던데?”흠칫 놀란 부승민은 창백한 얼굴에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설마 너 육광태가 뭘 하던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래그래. 내가 졌다 졌어.온하랑은 눈을 꾹 감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짜증도 덜할 테니까.두 사람이 밥 먹고 있을 때 부승민은 옆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점심을 다 먹고 온하랑은 테이블을 깨끗이 치웠다. 이때 문밖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온하랑은 가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중년 남자가 서있었고, 그들 뒤에는 두 젊은이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 과일 바구니와 선물을 들고 있었다.온하랑은 멈칫하더니 두 사람을 행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 이사님, 기 이사님. 안녕하세요.”두 사람은 온하랑을 보자마자 잠시 얼어붙었지만, 얼굴에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하랑 씨, 대표님 안에 계세요?”“네, 들어와서 앉으세요.”온하랑은 옆으로 비켜주었다. 부시아는 소파에 앉아 크고 동그란 눈으로 고 이사와 기 이사를 바라보았다.“두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고승범과 기성윤은 부시아를 본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대표님한테 언제 이렇게 큰딸이 있었지?“그래, 안녕. 아가 정말 귀엽구나.”미소를 지으며 응한 고승범 이사는 시선을 옆에 있는 부승민에게 옮겼다.“대표님.”부승민은 눈을 치켜뜨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온하랑은 그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회사는 두 달 동안 위기를 맞았다. 고승범 이사는 부승민의 경영방식이 독재에 가깝긴 하지만 BX 그룹 경영에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BX 그룹은 그룹 내부에서 단결이 잘 되어있는 직원들, 그룹 외부에서 시장 점유 경쟁력을 확보할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필요했다.부승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내우외환이라고요?”고승범이 설명했다.“부승민 씨는 모르실 겁니다. 최근 두 달 동안 그룹이 C 시에서 계획해왔던 부동산 프로젝트가 다 다른 사람한테 뺏겼거든요. 다른 부서들도 경쟁사들 때문에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보았고요. 이건 분명 의도적이고 계획된 공격일 겁니다.“일부 회사 임원들은 이 수모를 절대 그저 넘어갈 수 없어 이미 빼앗긴 프로젝트를 다시 뺏어오거나, 아니면 그 경쟁사들에 일종의 보복을 해줄 것을 제안했다.또 다른 임원진들은 지금 회사가 필요한 것이 바로 안정적인 운영이라 판단하고 섣불리 행동했다가 괜히 손해 보는 일 없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부승민의 굴곡진 큰 손이 무릎 위에 얹혔다. 그는 가늘게 실눈을 뜬 채 물었다.“그래서 조사는 해봤어요?”부민재는 자신의 형이니 넘어가 줄 수 있었다.하지만 부승민은 다른 사람이 감히 할아버지가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것에 손대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조사 당연히 해봤죠, 경주 쪽 곽씨 가문 같습니다.”“곽씨 가문?”부승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눈을 내리깐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경주 곽 씨 일가가 왜 굳이 BX 그룹을 건드리지?“그쪽 사람들 만난 적 있나요?“부승민이 물었다.고승범은 한숨을 내쉬더니 답했다.“제가 비서 통해서 곽 씨 일가 사람 좀 만나보려고 했는데 자꾸 뒤로 밀더라고요. 어떻게 해서 겨우겨우 그쪽 매니저 두 명을 만났는데 다들 자세한 얘기는 안 해주고 대충 얼버무리기만 하던데요.”부승민이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아직 우리 그룹 쪽에서 곽 씨 일가 사람들이랑 만나기엔 이른 것 같네요. 따로 조사 좀 더 해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도
천천히 위로 솟아 올라가는 담배 연기가 부승민의 얼굴을 가려 희미하게 만들었다.“당신들”이라는 세 글자에 부승민의 미간이 살살 좁혀졌다. 하지만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추서윤이 말실수를 했거나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막말을 내뱉은 것이라 생각했다.이미 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 부승민은 모든 일을 과거형으로 취급했다. 추서윤과 뒤늦게 다 지나간 일 때문에 싸우고 싶지 않았다.부승민은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말했다.“그래서, 할아버지 뵈러 갔었어? 그날에 할아버지한테 뭔 얘기 하고 왔어?“추서윤의 시선이 부승민의 몸에 고정되더니 이내 그녀의 눈빛에 검은빛이 감돌았다.“궁금해? 알고 싶어? 근데 난 말해줄 생각 없는데!”사실 부승민은 진작 의심하고 있었다.만약 추서윤이 할아버지를 찾아가 부승민에게는 자신밖에 없어야 한다 얘기했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주식 조정으로 미루어 봤을 때 부승민에게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잘 해주고 있었다.게다가 부승민의 연애사는 할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텐데 이 정도로 무너질 리가 있나?부승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머리를 굴려봐도 할아버지의 수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는 해석이 안 됐다.부승민은 더 캐묻지 않았다.“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는 게 좋겠다. 광태한테서 들었는데 계속 나 만나고 싶어 했다며?”“아직도 연기하고 있네? 내가 뭘 알고 있는지는 너도 잘 알지 않나? 하하하, 나도 정말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온하랑이랑 내가 배다른 자매라니, 우리 자매도 참 부씨 가문이랑 인연 깊다, 안 그래?”담배가 끝까지 타자 부승민은 손을 들어 재떨이에담배를 비벼 껐다.추서윤이 헛웃음을 지었다.“너무 오랫동안 안 만나주길래 난 또 내가 쥐고 있는 이 사실이 아무 소용 없어진 줄 알았지. 이렇게 나 다시 만나줄 줄은 몰랐네. 너희 이혼했다며, 아직도 손해 보면서까지 그년 지켜주고 싶어?”추서윤의 질문에
부승민의 표정을 확인한 추서윤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어때? 이 년이 가진 건 다른 사람의 아이야. 이런 온하랑이어도 사랑해 줄 거야? 경고 하나 하는데, 이 사진 한 장 찢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널린 게 복사본이거든.”눈을 질끈 감은 부승민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그는 사진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들어 추서윤을 마주 보았다.“이 사진 어디서 났어?”만약 추서윤이 직접 찍은 거라면 진작 부승민과 온하랑의 이혼을 위해서라도 내밀었을 사진이었다.지금에서야 뒤늦게 꺼내온 걸 보면 분명 추서윤도 이 사진을 손에 넣은 지 얼마 안 됐을 게 뻔했다.어쩐지 급하게 부승민을 만나고 싶어 하더라니.부승민이 추서윤을 잘 달래 원본만 삭제시킨다면 온하랑을 언론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추서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더니 급하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알 필요 없어. 넌 그냥 내가 얘기하는 요구만 들어주면 되는 거야. 그럼 온하랑 신분이고 이 사진이고 밖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만약 안 들어준다면 온하랑은 한순간에 희대의 쌍년으로 남을 거야!”추서윤도 이 사진이 어디서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사진이었다.보아하니 온하랑이 한두 명에게서 원한을 산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추서윤의 손을 빌려 온하랑에게 복수를 하려는 모양이다.온하랑의 어머니부터 불륜녀였다. 애초에 온강호의 친딸도 아닌 주제에 해외에서 함부로 문란한 생활을 즐기며 아이까지 낳았다니!게다가 앞서 공개되었던 그 뉴스 찌라시들까지 더하면 온하랑은 대중들에게 완전히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혀버릴 게 뻔했다.부승민이 추서윤의 말을 듣더니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넌 왜 내가 이 사진으로 하랑이가 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고 나서도 하랑이를 위해 너랑 협상할 거라고 생각해?”추서윤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부승민이 말을 이었다.“넌 날 설득하는 데 성공했어. 온하랑은 나랑 급이 안 맞지
병실에서는 몇 분 간의 침묵이 이어졌다.“작은 아빠! 저 왔어요!”그 순간 앳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부시아가 병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하지만 병실에 부승민을 제외하고도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큰 눈으로 추서윤을 보며 말했다.“아줌마, 안녕하세요?”추서윤이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부시아를 바라보았다.삐쩍 말라 광대가 튀어나오고 움푹 패인 눈꺼풀에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에 부시아가 깜짝 놀러 부승민의 품을 파고들며 작게 말했다.“작은 아빠, 무서워요.”부승민은 아이를 품에 안고 티 안 나게 테이블 위에 널려있던 온하랑의 사진을 치우며 고개를 들어 추서윤에게 말했다.“얼른 가봐, 광태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추서윤은 다시 한 번 부시아를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 밖을 나서다 온하랑과 정면으로 부딪혔다.추서윤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온하랑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섬세한 화장에 파운데이션은 부드럽고 하얀 피부에 밀착되어 갸름란 계란형 얼굴에 있던 흉터들을 모두 가려주었다.털 달린 갈색 겉옷에 옅은 색의 목도리, 체크무늬의 치마에 짧은 부츠를 신은 채 검은 긴생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운 온하랑은 정말 밝고 패셔너블 해보였다.추서윤은 온하랑의 얼굴을 2초 정도 응시했다. 추상훈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여우 같은 그 엄마를 닮은 거겠지!자신의 앞에 읶는 여자를 마주한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2초 가량을 뚫어져라 쳐다본 뒤에야 그 여인이 추서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할아버지를 죽인 추성뉴!온하랑의 눈빛에 분노가 치밀다가 이윽고 놀라움이 스쳤다.추서윤이 어쩌다가 이런 몰골이 된 걸까.부승민에 의해 보호 받던 거 아니었나?온하랑의 눈빛에 추서윤은 조금 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음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쥔채 온하랑의 어깨를 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을 나섰
온하랑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저 자신의 발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미 온하랑은 진작에 부승민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 거짓말로만 느껴졌다.부승민이 여태껏 계속 좋아한다고 얘기를 해도 온하랑은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하니 부승민이 정말로 온하랑을 많이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온하랑은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멎는 듯했다.부승민이 온하랑을 좋아한다. 그럼 결혼기념일에 있었던 일은 대체 뭐지?친구라고 대충 둘러댄 거로 모욕감을 주고, 온하랑이 심한 말로 경고를 했음에도 추서윤을 찾아간 것은 대체 뭐였을까.그날 밤, 온하랑을 뒤척이며 잠 못 들게 했던 그 짜증 나고 억울했던 감정들은 다 뭐가 된단 말인가?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없는 건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만약 부승민이 온하랑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저 좋아하는 것 그뿐이겠지.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시선부터 자연스레 그쪽으로 가게 돼 있다. 마음속으로도 자꾸 떠오르고 보기만 해도 기쁘고 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은 보고 싶지 않고… 이러한 감정들을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추서윤 때문에 온하랑에게 상처를 받은 기억만 벌써 수십 수백 번이다.어쩌면 부승민의 습관일지도 몰랐다. 3년간의 결혼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온하랑과 떨어지기 싫은 게 아닐까.“하랑아, 한 번만 기회를 줘, 제발…”부승민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온하랑을 바라보며 혹시나 싶어 그녀의 손을 잡아보았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부승민이 멈칫하며 내밀었던 그의 손이 공중에 멈췄다. 그는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듯 내밀었던 손으로 주먹을 쥔 채 천천히 내렸다.부승민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지.”온하랑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안 믿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널 잘 몰라서 그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서윤을 좋아하던 너였으니까… 방금 추서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