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잘 모르겠어.”부승민은 슬그머니 온하랑을 보았다.“의사가 언제 괜찮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온하랑은 현재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대에 오르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회복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삼촌이 수술할 때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요.”“우리 시아 천사네.”“삼촌 손에서 끽끽, 이상한 소리가 나요.”온하랑은 허, 탄성을 내뱉으며 팔짱을 끼고 부승민을 흘겨보았다.“손에 뼈만 남았는데 소리가 안 날 수 있어?”“...”부승민은 할 말을 잃었다.“숙모, 삼촌한테 너무 못되게 굴지 마요! 삼촌도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요...”“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고? 그럼 위가 약한 걸 알면서 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그날 밤 삼촌이 너무 슬펐으니까요!”부시아는 그럴싸하게 한숨을 쉬며 눈썹을 찡그렸다.“삼촌이 숙모를 정말 사랑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부시아.”온하랑은 부시아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부시아는 얼른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깜빡이며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시아한테 왜 그래. 다 맞는 말인데.”부승민이 온하랑의 눈을 보며 말하자 온하랑은 가슴이 살짝 먹먹해졌다.“그래서 뭐? 우린 이미 끝났어. 오빠가 자해한다고 해서 내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이것으로 너를 협박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나를 너무 멀리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마... 나에게도 민지훈과 경쟁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부승민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삼촌, 아파요.”부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부승민은 얼른 부시아의 손을 놓았다. 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그녀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다시 제자리에 놓고 부시아에게 말했다. “시아야, 넌 여기 삼촌이랑 있을래? 고모는 먼저 갈 거야.”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거야?“안 돼요!”침대에서 뛰어내린 시아는 온하랑의 다리를 잡았다.“가지 마요! 숙모가
온하랑은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거렸다. 부승민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그녀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하랑은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무슨 조건인데?”부승민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온하랑이 한마디를 보탰다.“적당히 해!”부승민은 그윽한 눈빛으로 마치 매우 경건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아주 간단해. 일부러 나를 멀리하지 말고 나한테도 공정한 기회를 주는 거야.”온하랑이 침묵하자 부시아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숙모, 들어줘요? 네?”온하랑은 눈을 치켜뜨고 부승민을 노려보았다. 부승민은 언제부턴가 꾀가 정말 많아졌다. 온하랑이 여전히 말이 없자 부승민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며 미간을 찌푸리고 복부를 감쌌다.“쓰읍...”“삼촌, 왜 그래요? 위가 많이 아파요?”부시아는 즉시 침대 옆으로 달려가 관심 어린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괜찮아.”고통을 참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이 짧은 시간에 벌써 두 번이나 아팠는데 의사 불러줄까?”부승민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아파서 죽게 내버려둬. 어차피 넌 관심도 없는데.”“...”“그래, 그래. 승낙할게. 됐지?”그녀는 짜증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공정한 경쟁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부승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진짜지?”“거짓말이길 원해?” “당연히 아니지. 약속 지켜. 다시는 날 피하지 않을 거지?”“나도 조건이 있어. 이번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앞으로 민지훈을 겨냥하지 마. 그리고 내가 민지훈과 있을 때 와서 방해하지 마.”온하랑은 민지훈이 그녀가 부승민과 엮인 걸 알게 될까 봐 불안했다. 부승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부시아는 미친 듯이 부승민에게 눈짓했다.어차피 부시아라는 스파이가 있으니까, 그녀가 마른 병아리를 주시할 것이다. 부승민은 마지못해 승낙했다.“그래, 겨냥하지 않을게. 그런데 나한테도 단둘이 있을 시간을 줘.”“있을 거야. 미리
온하랑은 점심밥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전부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부시아는 흥분하며 소파에 앉아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난 이거랑 이거 먹을래요...”온하랑은 부승민을 보며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뭐 먹을래? 골고루 담아줄까?”부승민은 고래를 저었다.“아니, 난 음식 못 먹어.”온하랑은 싸늘하게 웃으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못 먹는다니? 그런데 육광태가 왜 나 때문에 단식 투쟁한다고 했을까? 하루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던데?”흠칫 놀란 부승민은 창백한 얼굴에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설마 너 육광태가 뭘 하던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래그래. 내가 졌다 졌어.온하랑은 눈을 꾹 감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짜증도 덜할 테니까.두 사람이 밥 먹고 있을 때 부승민은 옆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점심을 다 먹고 온하랑은 테이블을 깨끗이 치웠다. 이때 문밖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온하랑은 가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중년 남자가 서있었고, 그들 뒤에는 두 젊은이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 과일 바구니와 선물을 들고 있었다.온하랑은 멈칫하더니 두 사람을 행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 이사님, 기 이사님. 안녕하세요.”두 사람은 온하랑을 보자마자 잠시 얼어붙었지만, 얼굴에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하랑 씨, 대표님 안에 계세요?”“네, 들어와서 앉으세요.”온하랑은 옆으로 비켜주었다. 부시아는 소파에 앉아 크고 동그란 눈으로 고 이사와 기 이사를 바라보았다.“두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고승범과 기성윤은 부시아를 본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대표님한테 언제 이렇게 큰딸이 있었지?“그래, 안녕. 아가 정말 귀엽구나.”미소를 지으며 응한 고승범 이사는 시선을 옆에 있는 부승민에게 옮겼다.“대표님.”부승민은 눈을 치켜뜨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온하랑은 그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회사는 두 달 동안 위기를 맞았다. 고승범 이사는 부승민의 경영방식이 독재에 가깝긴 하지만 BX 그룹 경영에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BX 그룹은 그룹 내부에서 단결이 잘 되어있는 직원들, 그룹 외부에서 시장 점유 경쟁력을 확보할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필요했다.부승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내우외환이라고요?”고승범이 설명했다.“부승민 씨는 모르실 겁니다. 최근 두 달 동안 그룹이 C 시에서 계획해왔던 부동산 프로젝트가 다 다른 사람한테 뺏겼거든요. 다른 부서들도 경쟁사들 때문에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보았고요. 이건 분명 의도적이고 계획된 공격일 겁니다.“일부 회사 임원들은 이 수모를 절대 그저 넘어갈 수 없어 이미 빼앗긴 프로젝트를 다시 뺏어오거나, 아니면 그 경쟁사들에 일종의 보복을 해줄 것을 제안했다.또 다른 임원진들은 지금 회사가 필요한 것이 바로 안정적인 운영이라 판단하고 섣불리 행동했다가 괜히 손해 보는 일 없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부승민의 굴곡진 큰 손이 무릎 위에 얹혔다. 그는 가늘게 실눈을 뜬 채 물었다.“그래서 조사는 해봤어요?”부민재는 자신의 형이니 넘어가 줄 수 있었다.하지만 부승민은 다른 사람이 감히 할아버지가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것에 손대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조사 당연히 해봤죠, 경주 쪽 곽씨 가문 같습니다.”“곽씨 가문?”부승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눈을 내리깐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경주 곽 씨 일가가 왜 굳이 BX 그룹을 건드리지?“그쪽 사람들 만난 적 있나요?“부승민이 물었다.고승범은 한숨을 내쉬더니 답했다.“제가 비서 통해서 곽 씨 일가 사람 좀 만나보려고 했는데 자꾸 뒤로 밀더라고요. 어떻게 해서 겨우겨우 그쪽 매니저 두 명을 만났는데 다들 자세한 얘기는 안 해주고 대충 얼버무리기만 하던데요.”부승민이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아직 우리 그룹 쪽에서 곽 씨 일가 사람들이랑 만나기엔 이른 것 같네요. 따로 조사 좀 더 해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도
천천히 위로 솟아 올라가는 담배 연기가 부승민의 얼굴을 가려 희미하게 만들었다.“당신들”이라는 세 글자에 부승민의 미간이 살살 좁혀졌다. 하지만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추서윤이 말실수를 했거나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막말을 내뱉은 것이라 생각했다.이미 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 부승민은 모든 일을 과거형으로 취급했다. 추서윤과 뒤늦게 다 지나간 일 때문에 싸우고 싶지 않았다.부승민은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말했다.“그래서, 할아버지 뵈러 갔었어? 그날에 할아버지한테 뭔 얘기 하고 왔어?“추서윤의 시선이 부승민의 몸에 고정되더니 이내 그녀의 눈빛에 검은빛이 감돌았다.“궁금해? 알고 싶어? 근데 난 말해줄 생각 없는데!”사실 부승민은 진작 의심하고 있었다.만약 추서윤이 할아버지를 찾아가 부승민에게는 자신밖에 없어야 한다 얘기했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주식 조정으로 미루어 봤을 때 부승민에게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잘 해주고 있었다.게다가 부승민의 연애사는 할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텐데 이 정도로 무너질 리가 있나?부승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머리를 굴려봐도 할아버지의 수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는 해석이 안 됐다.부승민은 더 캐묻지 않았다.“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는 게 좋겠다. 광태한테서 들었는데 계속 나 만나고 싶어 했다며?”“아직도 연기하고 있네? 내가 뭘 알고 있는지는 너도 잘 알지 않나? 하하하, 나도 정말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온하랑이랑 내가 배다른 자매라니, 우리 자매도 참 부씨 가문이랑 인연 깊다, 안 그래?”담배가 끝까지 타자 부승민은 손을 들어 재떨이에담배를 비벼 껐다.추서윤이 헛웃음을 지었다.“너무 오랫동안 안 만나주길래 난 또 내가 쥐고 있는 이 사실이 아무 소용 없어진 줄 알았지. 이렇게 나 다시 만나줄 줄은 몰랐네. 너희 이혼했다며, 아직도 손해 보면서까지 그년 지켜주고 싶어?”추서윤의 질문에
부승민의 표정을 확인한 추서윤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어때? 이 년이 가진 건 다른 사람의 아이야. 이런 온하랑이어도 사랑해 줄 거야? 경고 하나 하는데, 이 사진 한 장 찢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널린 게 복사본이거든.”눈을 질끈 감은 부승민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그는 사진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들어 추서윤을 마주 보았다.“이 사진 어디서 났어?”만약 추서윤이 직접 찍은 거라면 진작 부승민과 온하랑의 이혼을 위해서라도 내밀었을 사진이었다.지금에서야 뒤늦게 꺼내온 걸 보면 분명 추서윤도 이 사진을 손에 넣은 지 얼마 안 됐을 게 뻔했다.어쩐지 급하게 부승민을 만나고 싶어 하더라니.부승민이 추서윤을 잘 달래 원본만 삭제시킨다면 온하랑을 언론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추서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더니 급하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알 필요 없어. 넌 그냥 내가 얘기하는 요구만 들어주면 되는 거야. 그럼 온하랑 신분이고 이 사진이고 밖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만약 안 들어준다면 온하랑은 한순간에 희대의 쌍년으로 남을 거야!”추서윤도 이 사진이 어디서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사진이었다.보아하니 온하랑이 한두 명에게서 원한을 산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추서윤의 손을 빌려 온하랑에게 복수를 하려는 모양이다.온하랑의 어머니부터 불륜녀였다. 애초에 온강호의 친딸도 아닌 주제에 해외에서 함부로 문란한 생활을 즐기며 아이까지 낳았다니!게다가 앞서 공개되었던 그 뉴스 찌라시들까지 더하면 온하랑은 대중들에게 완전히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혀버릴 게 뻔했다.부승민이 추서윤의 말을 듣더니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넌 왜 내가 이 사진으로 하랑이가 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고 나서도 하랑이를 위해 너랑 협상할 거라고 생각해?”추서윤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부승민이 말을 이었다.“넌 날 설득하는 데 성공했어. 온하랑은 나랑 급이 안 맞지
병실에서는 몇 분 간의 침묵이 이어졌다.“작은 아빠! 저 왔어요!”그 순간 앳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부시아가 병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하지만 병실에 부승민을 제외하고도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큰 눈으로 추서윤을 보며 말했다.“아줌마, 안녕하세요?”추서윤이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부시아를 바라보았다.삐쩍 말라 광대가 튀어나오고 움푹 패인 눈꺼풀에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에 부시아가 깜짝 놀러 부승민의 품을 파고들며 작게 말했다.“작은 아빠, 무서워요.”부승민은 아이를 품에 안고 티 안 나게 테이블 위에 널려있던 온하랑의 사진을 치우며 고개를 들어 추서윤에게 말했다.“얼른 가봐, 광태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추서윤은 다시 한 번 부시아를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 밖을 나서다 온하랑과 정면으로 부딪혔다.추서윤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온하랑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섬세한 화장에 파운데이션은 부드럽고 하얀 피부에 밀착되어 갸름란 계란형 얼굴에 있던 흉터들을 모두 가려주었다.털 달린 갈색 겉옷에 옅은 색의 목도리, 체크무늬의 치마에 짧은 부츠를 신은 채 검은 긴생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운 온하랑은 정말 밝고 패셔너블 해보였다.추서윤은 온하랑의 얼굴을 2초 정도 응시했다. 추상훈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여우 같은 그 엄마를 닮은 거겠지!자신의 앞에 읶는 여자를 마주한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2초 가량을 뚫어져라 쳐다본 뒤에야 그 여인이 추서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할아버지를 죽인 추성뉴!온하랑의 눈빛에 분노가 치밀다가 이윽고 놀라움이 스쳤다.추서윤이 어쩌다가 이런 몰골이 된 걸까.부승민에 의해 보호 받던 거 아니었나?온하랑의 눈빛에 추서윤은 조금 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음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쥔채 온하랑의 어깨를 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을 나섰
온하랑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저 자신의 발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미 온하랑은 진작에 부승민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 거짓말로만 느껴졌다.부승민이 여태껏 계속 좋아한다고 얘기를 해도 온하랑은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하니 부승민이 정말로 온하랑을 많이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온하랑은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멎는 듯했다.부승민이 온하랑을 좋아한다. 그럼 결혼기념일에 있었던 일은 대체 뭐지?친구라고 대충 둘러댄 거로 모욕감을 주고, 온하랑이 심한 말로 경고를 했음에도 추서윤을 찾아간 것은 대체 뭐였을까.그날 밤, 온하랑을 뒤척이며 잠 못 들게 했던 그 짜증 나고 억울했던 감정들은 다 뭐가 된단 말인가?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없는 건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만약 부승민이 온하랑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저 좋아하는 것 그뿐이겠지.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시선부터 자연스레 그쪽으로 가게 돼 있다. 마음속으로도 자꾸 떠오르고 보기만 해도 기쁘고 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은 보고 싶지 않고… 이러한 감정들을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추서윤 때문에 온하랑에게 상처를 받은 기억만 벌써 수십 수백 번이다.어쩌면 부승민의 습관일지도 몰랐다. 3년간의 결혼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온하랑과 떨어지기 싫은 게 아닐까.“하랑아, 한 번만 기회를 줘, 제발…”부승민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온하랑을 바라보며 혹시나 싶어 그녀의 손을 잡아보았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부승민이 멈칫하며 내밀었던 그의 손이 공중에 멈췄다. 그는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듯 내밀었던 손으로 주먹을 쥔 채 천천히 내렸다.부승민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지.”온하랑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안 믿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널 잘 몰라서 그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서윤을 좋아하던 너였으니까… 방금 추서윤이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