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숨이 가빠와 가슴이 심하게 부풀었다가 줄어들며 뺨이 열기로 붉어졌다.한 VIP 병실 문 앞에서 멈춰선 육광태는 문을 가리켰다.“여기예요. 들어가 봐요.”온하랑은 문에 달린 창문으로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침대 머리맡에 수액을 걸려있었고 부승민은 병상에 누워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육광태의 품에 안겨 몸부림치던 부시아가 칭얼거렸다.“삼촌, 저도 들어가고 싶어요.”육광태는 부시아를 껴안으며 말했다.“잠시만, 먼저 삼촌이랑 숙모가 얘기하게 하자.”“알았어요.”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발소리에 부승민은 눈을 감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잖아.”이제 보니 안 자고 있었구나. 온하랑은 침대 옆으로 와서 누워있는 부승민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는 갑자기 마음을 졸이며 숨을 죽였다.며칠 사이에 그는 다시 살이 많이 빠지고 눈두덩이가 움푹 패었으며 얼굴에는 살이 거의 없었다. 턱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고, 얼굴빛은 창백하게 병색을 띠고 있었다.밖으로 드러난 깡마른 양손 손등은 혈색 없이 하얗고, 시퍼런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될 수 있지?오랫동안 알고 지낸 부승민은 항상 기운이 넘쳤다. 온하랑은 이렇게 연약한 부승민의 모습은 처음 봤다. 마치 얇은 종잇장처럼 살짝만 만지면 찢어질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부승민은 다시 말했다.“아직도 안나가?”“나야.”온하랑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부승민은 흠칫하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결국 눈을 뜨지 않았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목구멍 깊숙이 씁쓸함을 삼켰다. 손가락으로 슬며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뭐 하러 왔어?”온하랑은 두 걸음 가까이 다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미안해. 어제는 내가 오해했어.”
두 눈을 꾹 감은 부승민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은 더욱 쓰라렸다.과연 온하랑의 마음속에는 그가 조금도 없었다. 그의 곁에 1초라도 더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온하랑은 부승민이 눈을 감은 것을 보고는 허탈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갈게. 병 치료 잘해.”부승민은 눈을 질끈 감고 커다란 손으로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의 마른 장작에 온하랑이 다시 기름을 끼얹으며 작은 불씨가 튀어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량의 짙은 연기 가스가 심장에 모여 언제든지 폭발 할 위험이 있었다.그녀는 참으로 냉혈하고 모질었다!그러나 하필이면 그는 여전히 온하랑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부승민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위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콜록콜록...”등 뒤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부승민이 침대 옆에 힘없이 엎드려 입가에 묻은 옅은 선홍색 피가 그의 창백한 얼굴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어 더욱 빨갛에 보였다.부승민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얇은 종잇장 같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처럼 여렸다. 온하랑은 마음을 졸이며 재빨리 침대 옆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그의 등을 두드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괜찮은 거야?”부승민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눈시울은 빨갛게 물들고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는 느릿느릿 협탁에서 티슈를 뽑아내 입가를 닦고 휴지통에 버렸다. 등에 놓인 온하랑의 손을 치와버린 부승민은 침대에 등을 대고 평평하게 누웠다. 무덤덤하게 그녀를 흘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나지막이 말했다.“너랑 상관없어.”“...”정말 고집이 장난이 아니었다.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부승민의 고집만은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온하랑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테이블 위에 포트를 들어 뜨거운 물 한 컵을 따라 부승민 앞으로 내밀었다.“입 헹궈.”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부승민은 아무
“너 간 거 아니었어? 다시 와서 뭐 해?”부승민은 냉랭한 눈으로 온하랑을 흘겨보았다.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온하랑은 깨진 유리컵을 쓸며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쳐다보았다.“그렇게 내가 가기를 바라니까 금방 가도록 할게.”부승민은 화가나 웃음이 났다.이 여자는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걸 꺼야!일부러 그를 약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시아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삼촌은 대체 무슨 고집이 이렇게 세지? 왜 말을 이따위로 밖에 못 하는 거야. 숙모를 밀어내고 있잖아. 마른 병아리 민지훈은 누나, 누가 거리며 입이 얼마나 달콤한데?당장 삼촌을 말려야 해. 이러다 숙모가 진짜 화나서 가버릴지도 몰라.“삼촌, 이거 왜 이래요?”부시아는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바닥에 유리 조각을 짚었다. 부승민의 표정은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주먹을 입술에 대고 기침을 하고는 조용히 말했다.“방금 물 마시려다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어.”“삼촌, 나랑 말하며 왜 숙모를 보고 있어요?”부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작은 얼굴에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뜨고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부승민과 시선이 마주치며 온하랑은 얼른 시선을 거두고 유리 조각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부승민은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꼬마는 눈을 떼굴떼굴 굴렸다.“알았어요. 삼촌은 숙모가 보고 싶었던 거죠. TV에서 하루 못 보면 3년 못 만난 것 같다고 했는데 그러면 삼촌은 숙모를 몇 년 동안이나 못 만난 거네요. 그래서 너무 보고 싶었던 나머지 숙모에게서 눈을 못 떼는 거예요...”“부시아!”온하랑은 얼굴을 굳히며 정색했다.이 꼬마는 평소에 어떤 드라마를 보길래 나이도 어린 게 어른보다 아는 게 더 많은 거야.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어.부시아는 얼굴에 미소가 굳으며 입술을 꼭 다물고는 검지를 맞대며 애교를 부렸다.“삼촌, 살이 엄청 많이 빠졌어요.
“아직 잘 모르겠어.”부승민은 슬그머니 온하랑을 보았다.“의사가 언제 괜찮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온하랑은 현재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대에 오르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회복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삼촌이 수술할 때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요.”“우리 시아 천사네.”“삼촌 손에서 끽끽, 이상한 소리가 나요.”온하랑은 허, 탄성을 내뱉으며 팔짱을 끼고 부승민을 흘겨보았다.“손에 뼈만 남았는데 소리가 안 날 수 있어?”“...”부승민은 할 말을 잃었다.“숙모, 삼촌한테 너무 못되게 굴지 마요! 삼촌도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요...”“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고? 그럼 위가 약한 걸 알면서 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그날 밤 삼촌이 너무 슬펐으니까요!”부시아는 그럴싸하게 한숨을 쉬며 눈썹을 찡그렸다.“삼촌이 숙모를 정말 사랑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부시아.”온하랑은 부시아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부시아는 얼른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깜빡이며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시아한테 왜 그래. 다 맞는 말인데.”부승민이 온하랑의 눈을 보며 말하자 온하랑은 가슴이 살짝 먹먹해졌다.“그래서 뭐? 우린 이미 끝났어. 오빠가 자해한다고 해서 내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이것으로 너를 협박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나를 너무 멀리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마... 나에게도 민지훈과 경쟁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부승민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삼촌, 아파요.”부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부승민은 얼른 부시아의 손을 놓았다. 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그녀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다시 제자리에 놓고 부시아에게 말했다. “시아야, 넌 여기 삼촌이랑 있을래? 고모는 먼저 갈 거야.”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거야?“안 돼요!”침대에서 뛰어내린 시아는 온하랑의 다리를 잡았다.“가지 마요! 숙모가
온하랑은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거렸다. 부승민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그녀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하랑은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무슨 조건인데?”부승민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온하랑이 한마디를 보탰다.“적당히 해!”부승민은 그윽한 눈빛으로 마치 매우 경건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아주 간단해. 일부러 나를 멀리하지 말고 나한테도 공정한 기회를 주는 거야.”온하랑이 침묵하자 부시아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숙모, 들어줘요? 네?”온하랑은 눈을 치켜뜨고 부승민을 노려보았다. 부승민은 언제부턴가 꾀가 정말 많아졌다. 온하랑이 여전히 말이 없자 부승민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며 미간을 찌푸리고 복부를 감쌌다.“쓰읍...”“삼촌, 왜 그래요? 위가 많이 아파요?”부시아는 즉시 침대 옆으로 달려가 관심 어린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괜찮아.”고통을 참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이 짧은 시간에 벌써 두 번이나 아팠는데 의사 불러줄까?”부승민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아파서 죽게 내버려둬. 어차피 넌 관심도 없는데.”“...”“그래, 그래. 승낙할게. 됐지?”그녀는 짜증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공정한 경쟁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부승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진짜지?”“거짓말이길 원해?” “당연히 아니지. 약속 지켜. 다시는 날 피하지 않을 거지?”“나도 조건이 있어. 이번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앞으로 민지훈을 겨냥하지 마. 그리고 내가 민지훈과 있을 때 와서 방해하지 마.”온하랑은 민지훈이 그녀가 부승민과 엮인 걸 알게 될까 봐 불안했다. 부승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부시아는 미친 듯이 부승민에게 눈짓했다.어차피 부시아라는 스파이가 있으니까, 그녀가 마른 병아리를 주시할 것이다. 부승민은 마지못해 승낙했다.“그래, 겨냥하지 않을게. 그런데 나한테도 단둘이 있을 시간을 줘.”“있을 거야. 미리
온하랑은 점심밥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전부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부시아는 흥분하며 소파에 앉아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난 이거랑 이거 먹을래요...”온하랑은 부승민을 보며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뭐 먹을래? 골고루 담아줄까?”부승민은 고래를 저었다.“아니, 난 음식 못 먹어.”온하랑은 싸늘하게 웃으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못 먹는다니? 그런데 육광태가 왜 나 때문에 단식 투쟁한다고 했을까? 하루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던데?”흠칫 놀란 부승민은 창백한 얼굴에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설마 너 육광태가 뭘 하던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래그래. 내가 졌다 졌어.온하랑은 눈을 꾹 감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짜증도 덜할 테니까.두 사람이 밥 먹고 있을 때 부승민은 옆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점심을 다 먹고 온하랑은 테이블을 깨끗이 치웠다. 이때 문밖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온하랑은 가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중년 남자가 서있었고, 그들 뒤에는 두 젊은이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 과일 바구니와 선물을 들고 있었다.온하랑은 멈칫하더니 두 사람을 행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 이사님, 기 이사님. 안녕하세요.”두 사람은 온하랑을 보자마자 잠시 얼어붙었지만, 얼굴에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하랑 씨, 대표님 안에 계세요?”“네, 들어와서 앉으세요.”온하랑은 옆으로 비켜주었다. 부시아는 소파에 앉아 크고 동그란 눈으로 고 이사와 기 이사를 바라보았다.“두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고승범과 기성윤은 부시아를 본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대표님한테 언제 이렇게 큰딸이 있었지?“그래, 안녕. 아가 정말 귀엽구나.”미소를 지으며 응한 고승범 이사는 시선을 옆에 있는 부승민에게 옮겼다.“대표님.”부승민은 눈을 치켜뜨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온하랑은 그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회사는 두 달 동안 위기를 맞았다. 고승범 이사는 부승민의 경영방식이 독재에 가깝긴 하지만 BX 그룹 경영에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BX 그룹은 그룹 내부에서 단결이 잘 되어있는 직원들, 그룹 외부에서 시장 점유 경쟁력을 확보할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필요했다.부승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내우외환이라고요?”고승범이 설명했다.“부승민 씨는 모르실 겁니다. 최근 두 달 동안 그룹이 C 시에서 계획해왔던 부동산 프로젝트가 다 다른 사람한테 뺏겼거든요. 다른 부서들도 경쟁사들 때문에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보았고요. 이건 분명 의도적이고 계획된 공격일 겁니다.“일부 회사 임원들은 이 수모를 절대 그저 넘어갈 수 없어 이미 빼앗긴 프로젝트를 다시 뺏어오거나, 아니면 그 경쟁사들에 일종의 보복을 해줄 것을 제안했다.또 다른 임원진들은 지금 회사가 필요한 것이 바로 안정적인 운영이라 판단하고 섣불리 행동했다가 괜히 손해 보는 일 없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부승민의 굴곡진 큰 손이 무릎 위에 얹혔다. 그는 가늘게 실눈을 뜬 채 물었다.“그래서 조사는 해봤어요?”부민재는 자신의 형이니 넘어가 줄 수 있었다.하지만 부승민은 다른 사람이 감히 할아버지가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것에 손대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조사 당연히 해봤죠, 경주 쪽 곽씨 가문 같습니다.”“곽씨 가문?”부승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눈을 내리깐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경주 곽 씨 일가가 왜 굳이 BX 그룹을 건드리지?“그쪽 사람들 만난 적 있나요?“부승민이 물었다.고승범은 한숨을 내쉬더니 답했다.“제가 비서 통해서 곽 씨 일가 사람 좀 만나보려고 했는데 자꾸 뒤로 밀더라고요. 어떻게 해서 겨우겨우 그쪽 매니저 두 명을 만났는데 다들 자세한 얘기는 안 해주고 대충 얼버무리기만 하던데요.”부승민이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아직 우리 그룹 쪽에서 곽 씨 일가 사람들이랑 만나기엔 이른 것 같네요. 따로 조사 좀 더 해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도
천천히 위로 솟아 올라가는 담배 연기가 부승민의 얼굴을 가려 희미하게 만들었다.“당신들”이라는 세 글자에 부승민의 미간이 살살 좁혀졌다. 하지만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추서윤이 말실수를 했거나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막말을 내뱉은 것이라 생각했다.이미 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 부승민은 모든 일을 과거형으로 취급했다. 추서윤과 뒤늦게 다 지나간 일 때문에 싸우고 싶지 않았다.부승민은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말했다.“그래서, 할아버지 뵈러 갔었어? 그날에 할아버지한테 뭔 얘기 하고 왔어?“추서윤의 시선이 부승민의 몸에 고정되더니 이내 그녀의 눈빛에 검은빛이 감돌았다.“궁금해? 알고 싶어? 근데 난 말해줄 생각 없는데!”사실 부승민은 진작 의심하고 있었다.만약 추서윤이 할아버지를 찾아가 부승민에게는 자신밖에 없어야 한다 얘기했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주식 조정으로 미루어 봤을 때 부승민에게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잘 해주고 있었다.게다가 부승민의 연애사는 할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텐데 이 정도로 무너질 리가 있나?부승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머리를 굴려봐도 할아버지의 수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는 해석이 안 됐다.부승민은 더 캐묻지 않았다.“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는 게 좋겠다. 광태한테서 들었는데 계속 나 만나고 싶어 했다며?”“아직도 연기하고 있네? 내가 뭘 알고 있는지는 너도 잘 알지 않나? 하하하, 나도 정말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온하랑이랑 내가 배다른 자매라니, 우리 자매도 참 부씨 가문이랑 인연 깊다, 안 그래?”담배가 끝까지 타자 부승민은 손을 들어 재떨이에담배를 비벼 껐다.추서윤이 헛웃음을 지었다.“너무 오랫동안 안 만나주길래 난 또 내가 쥐고 있는 이 사실이 아무 소용 없어진 줄 알았지. 이렇게 나 다시 만나줄 줄은 몰랐네. 너희 이혼했다며, 아직도 손해 보면서까지 그년 지켜주고 싶어?”추서윤의 질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