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멈칫했다.“그건 물어서 뭐 해요?”육광태는 한숨을 내쉬었다.“승민이는 며칠 전부터 위출혈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 원래 상태도 좋지 않은데 어제부터 갑자기 단식을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간병인 말로는 어제 전화를 받고 이렇게 됐대요.”부승민이 위출혈로 입원했다고?얼떨떨해서 듣고 있던 온하랑은 문득 이틀 전 안문희의 손자 병문안을 갔을 때 병원에서 부승민의 뒷모습을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잘못 본 줄로만 알았었다.온하랑이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본 육광태가 말했다.“지금 저와 함께 병원에 가서 좀 설득해 봐요!”정신을 차린 온하랑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안 갈래요.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 몸으로 장난쳐봤자 고통받는 사람은 본인이에요. 우리는 이미 이혼했는데 앞으로 이럴 때마다 제가 보러 가야 하면 제 삶은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부터 그녀는 부승민이 일 년 내내 밖에서 접대하여 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는 그녀가 항상 지켜보며 부승민이 제때 식사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마련했기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이제 이혼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병원에 입원할 줄은 몰랐다. 육광태는 미간을 찌푸렸다.“하랑 씨! 지금 민 씨 가족 일로 화난 거 알아요. 장담하는데 그건 제가 혼자 벌인 일이에요. 부승민은 정말 모른단 말이에요!”온하랑은 담담하게 말했다.“안 믿어요. 보나마나 두 사람이 짜고 저를 속이는 거겠죠!”“하늘에 맹세컨대 제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천벌을 받을 거예요!”육광태는 오른손을 들고 엄숙한 표정으로 맹세했다. 육광태의 사뭇 진지한 표정을 본 온하랑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육광태는 얼른 한마디를 보탰다.“아직도 못 믿겠어요? 하랑 씨, 제가 병원에 갔을 때 승민이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만약 죽음만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어요! 오늘 아침에도 피를 토했어요. 의사는 승민이의
온하랑은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숨이 가빠와 가슴이 심하게 부풀었다가 줄어들며 뺨이 열기로 붉어졌다.한 VIP 병실 문 앞에서 멈춰선 육광태는 문을 가리켰다.“여기예요. 들어가 봐요.”온하랑은 문에 달린 창문으로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침대 머리맡에 수액을 걸려있었고 부승민은 병상에 누워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육광태의 품에 안겨 몸부림치던 부시아가 칭얼거렸다.“삼촌, 저도 들어가고 싶어요.”육광태는 부시아를 껴안으며 말했다.“잠시만, 먼저 삼촌이랑 숙모가 얘기하게 하자.”“알았어요.”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발소리에 부승민은 눈을 감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잖아.”이제 보니 안 자고 있었구나. 온하랑은 침대 옆으로 와서 누워있는 부승민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는 갑자기 마음을 졸이며 숨을 죽였다.며칠 사이에 그는 다시 살이 많이 빠지고 눈두덩이가 움푹 패었으며 얼굴에는 살이 거의 없었다. 턱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고, 얼굴빛은 창백하게 병색을 띠고 있었다.밖으로 드러난 깡마른 양손 손등은 혈색 없이 하얗고, 시퍼런 핏줄이 울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될 수 있지?오랫동안 알고 지낸 부승민은 항상 기운이 넘쳤다. 온하랑은 이렇게 연약한 부승민의 모습은 처음 봤다. 마치 얇은 종잇장처럼 살짝만 만지면 찢어질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부승민은 다시 말했다.“아직도 안나가?”“나야.”온하랑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부승민은 흠칫하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결국 눈을 뜨지 않았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목구멍 깊숙이 씁쓸함을 삼켰다. 손가락으로 슬며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뭐 하러 왔어?”온하랑은 두 걸음 가까이 다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미안해. 어제는 내가 오해했어.”
두 눈을 꾹 감은 부승민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은 더욱 쓰라렸다.과연 온하랑의 마음속에는 그가 조금도 없었다. 그의 곁에 1초라도 더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온하랑은 부승민이 눈을 감은 것을 보고는 허탈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갈게. 병 치료 잘해.”부승민은 눈을 질끈 감고 커다란 손으로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의 마른 장작에 온하랑이 다시 기름을 끼얹으며 작은 불씨가 튀어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량의 짙은 연기 가스가 심장에 모여 언제든지 폭발 할 위험이 있었다.그녀는 참으로 냉혈하고 모질었다!그러나 하필이면 그는 여전히 온하랑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부승민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위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콜록콜록...”등 뒤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부승민이 침대 옆에 힘없이 엎드려 입가에 묻은 옅은 선홍색 피가 그의 창백한 얼굴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어 더욱 빨갛에 보였다.부승민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얇은 종잇장 같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처럼 여렸다. 온하랑은 마음을 졸이며 재빨리 침대 옆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그의 등을 두드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괜찮은 거야?”부승민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눈시울은 빨갛게 물들고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는 느릿느릿 협탁에서 티슈를 뽑아내 입가를 닦고 휴지통에 버렸다. 등에 놓인 온하랑의 손을 치와버린 부승민은 침대에 등을 대고 평평하게 누웠다. 무덤덤하게 그녀를 흘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나지막이 말했다.“너랑 상관없어.”“...”정말 고집이 장난이 아니었다.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부승민의 고집만은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온하랑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테이블 위에 포트를 들어 뜨거운 물 한 컵을 따라 부승민 앞으로 내밀었다.“입 헹궈.”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부승민은 아무
“너 간 거 아니었어? 다시 와서 뭐 해?”부승민은 냉랭한 눈으로 온하랑을 흘겨보았다.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온하랑은 깨진 유리컵을 쓸며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쳐다보았다.“그렇게 내가 가기를 바라니까 금방 가도록 할게.”부승민은 화가나 웃음이 났다.이 여자는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걸 꺼야!일부러 그를 약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시아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삼촌은 대체 무슨 고집이 이렇게 세지? 왜 말을 이따위로 밖에 못 하는 거야. 숙모를 밀어내고 있잖아. 마른 병아리 민지훈은 누나, 누가 거리며 입이 얼마나 달콤한데?당장 삼촌을 말려야 해. 이러다 숙모가 진짜 화나서 가버릴지도 몰라.“삼촌, 이거 왜 이래요?”부시아는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바닥에 유리 조각을 짚었다. 부승민의 표정은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주먹을 입술에 대고 기침을 하고는 조용히 말했다.“방금 물 마시려다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어.”“삼촌, 나랑 말하며 왜 숙모를 보고 있어요?”부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작은 얼굴에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뜨고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부승민과 시선이 마주치며 온하랑은 얼른 시선을 거두고 유리 조각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부승민은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꼬마는 눈을 떼굴떼굴 굴렸다.“알았어요. 삼촌은 숙모가 보고 싶었던 거죠. TV에서 하루 못 보면 3년 못 만난 것 같다고 했는데 그러면 삼촌은 숙모를 몇 년 동안이나 못 만난 거네요. 그래서 너무 보고 싶었던 나머지 숙모에게서 눈을 못 떼는 거예요...”“부시아!”온하랑은 얼굴을 굳히며 정색했다.이 꼬마는 평소에 어떤 드라마를 보길래 나이도 어린 게 어른보다 아는 게 더 많은 거야.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어.부시아는 얼굴에 미소가 굳으며 입술을 꼭 다물고는 검지를 맞대며 애교를 부렸다.“삼촌, 살이 엄청 많이 빠졌어요.
“아직 잘 모르겠어.”부승민은 슬그머니 온하랑을 보았다.“의사가 언제 괜찮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온하랑은 현재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대에 오르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회복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삼촌이 수술할 때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요.”“우리 시아 천사네.”“삼촌 손에서 끽끽, 이상한 소리가 나요.”온하랑은 허, 탄성을 내뱉으며 팔짱을 끼고 부승민을 흘겨보았다.“손에 뼈만 남았는데 소리가 안 날 수 있어?”“...”부승민은 할 말을 잃었다.“숙모, 삼촌한테 너무 못되게 굴지 마요! 삼촌도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요...”“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고? 그럼 위가 약한 걸 알면서 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그날 밤 삼촌이 너무 슬펐으니까요!”부시아는 그럴싸하게 한숨을 쉬며 눈썹을 찡그렸다.“삼촌이 숙모를 정말 사랑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부시아.”온하랑은 부시아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부시아는 얼른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깜빡이며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시아한테 왜 그래. 다 맞는 말인데.”부승민이 온하랑의 눈을 보며 말하자 온하랑은 가슴이 살짝 먹먹해졌다.“그래서 뭐? 우린 이미 끝났어. 오빠가 자해한다고 해서 내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이것으로 너를 협박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나를 너무 멀리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마... 나에게도 민지훈과 경쟁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부승민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삼촌, 아파요.”부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부승민은 얼른 부시아의 손을 놓았다. 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그녀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다시 제자리에 놓고 부시아에게 말했다. “시아야, 넌 여기 삼촌이랑 있을래? 고모는 먼저 갈 거야.”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거야?“안 돼요!”침대에서 뛰어내린 시아는 온하랑의 다리를 잡았다.“가지 마요! 숙모가
온하랑은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거렸다. 부승민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그녀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하랑은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물었다.“무슨 조건인데?”부승민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온하랑이 한마디를 보탰다.“적당히 해!”부승민은 그윽한 눈빛으로 마치 매우 경건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아주 간단해. 일부러 나를 멀리하지 말고 나한테도 공정한 기회를 주는 거야.”온하랑이 침묵하자 부시아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숙모, 들어줘요? 네?”온하랑은 눈을 치켜뜨고 부승민을 노려보았다. 부승민은 언제부턴가 꾀가 정말 많아졌다. 온하랑이 여전히 말이 없자 부승민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며 미간을 찌푸리고 복부를 감쌌다.“쓰읍...”“삼촌, 왜 그래요? 위가 많이 아파요?”부시아는 즉시 침대 옆으로 달려가 관심 어린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괜찮아.”고통을 참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이 짧은 시간에 벌써 두 번이나 아팠는데 의사 불러줄까?”부승민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아파서 죽게 내버려둬. 어차피 넌 관심도 없는데.”“...”“그래, 그래. 승낙할게. 됐지?”그녀는 짜증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공정한 경쟁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부승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진짜지?”“거짓말이길 원해?” “당연히 아니지. 약속 지켜. 다시는 날 피하지 않을 거지?”“나도 조건이 있어. 이번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앞으로 민지훈을 겨냥하지 마. 그리고 내가 민지훈과 있을 때 와서 방해하지 마.”온하랑은 민지훈이 그녀가 부승민과 엮인 걸 알게 될까 봐 불안했다. 부승민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부시아는 미친 듯이 부승민에게 눈짓했다.어차피 부시아라는 스파이가 있으니까, 그녀가 마른 병아리를 주시할 것이다. 부승민은 마지못해 승낙했다.“그래, 겨냥하지 않을게. 그런데 나한테도 단둘이 있을 시간을 줘.”“있을 거야. 미리
온하랑은 점심밥을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전부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부시아는 흥분하며 소파에 앉아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난 이거랑 이거 먹을래요...”온하랑은 부승민을 보며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뭐 먹을래? 골고루 담아줄까?”부승민은 고래를 저었다.“아니, 난 음식 못 먹어.”온하랑은 싸늘하게 웃으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못 먹는다니? 그런데 육광태가 왜 나 때문에 단식 투쟁한다고 했을까? 하루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던데?”흠칫 놀란 부승민은 창백한 얼굴에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설마 너 육광태가 뭘 하던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그래그래. 내가 졌다 졌어.온하랑은 눈을 꾹 감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짜증도 덜할 테니까.두 사람이 밥 먹고 있을 때 부승민은 옆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점심을 다 먹고 온하랑은 테이블을 깨끗이 치웠다. 이때 문밖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온하랑은 가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중년 남자가 서있었고, 그들 뒤에는 두 젊은이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 과일 바구니와 선물을 들고 있었다.온하랑은 멈칫하더니 두 사람을 행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 이사님, 기 이사님. 안녕하세요.”두 사람은 온하랑을 보자마자 잠시 얼어붙었지만, 얼굴에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하랑 씨, 대표님 안에 계세요?”“네, 들어와서 앉으세요.”온하랑은 옆으로 비켜주었다. 부시아는 소파에 앉아 크고 동그란 눈으로 고 이사와 기 이사를 바라보았다.“두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고승범과 기성윤은 부시아를 본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대표님한테 언제 이렇게 큰딸이 있었지?“그래, 안녕. 아가 정말 귀엽구나.”미소를 지으며 응한 고승범 이사는 시선을 옆에 있는 부승민에게 옮겼다.“대표님.”부승민은 눈을 치켜뜨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온하랑은 그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회사는 두 달 동안 위기를 맞았다. 고승범 이사는 부승민의 경영방식이 독재에 가깝긴 하지만 BX 그룹 경영에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BX 그룹은 그룹 내부에서 단결이 잘 되어있는 직원들, 그룹 외부에서 시장 점유 경쟁력을 확보할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필요했다.부승민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내우외환이라고요?”고승범이 설명했다.“부승민 씨는 모르실 겁니다. 최근 두 달 동안 그룹이 C 시에서 계획해왔던 부동산 프로젝트가 다 다른 사람한테 뺏겼거든요. 다른 부서들도 경쟁사들 때문에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보았고요. 이건 분명 의도적이고 계획된 공격일 겁니다.“일부 회사 임원들은 이 수모를 절대 그저 넘어갈 수 없어 이미 빼앗긴 프로젝트를 다시 뺏어오거나, 아니면 그 경쟁사들에 일종의 보복을 해줄 것을 제안했다.또 다른 임원진들은 지금 회사가 필요한 것이 바로 안정적인 운영이라 판단하고 섣불리 행동했다가 괜히 손해 보는 일 없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부승민의 굴곡진 큰 손이 무릎 위에 얹혔다. 그는 가늘게 실눈을 뜬 채 물었다.“그래서 조사는 해봤어요?”부민재는 자신의 형이니 넘어가 줄 수 있었다.하지만 부승민은 다른 사람이 감히 할아버지가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것에 손대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조사 당연히 해봤죠, 경주 쪽 곽씨 가문 같습니다.”“곽씨 가문?”부승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눈을 내리깐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경주 곽 씨 일가가 왜 굳이 BX 그룹을 건드리지?“그쪽 사람들 만난 적 있나요?“부승민이 물었다.고승범은 한숨을 내쉬더니 답했다.“제가 비서 통해서 곽 씨 일가 사람 좀 만나보려고 했는데 자꾸 뒤로 밀더라고요. 어떻게 해서 겨우겨우 그쪽 매니저 두 명을 만났는데 다들 자세한 얘기는 안 해주고 대충 얼버무리기만 하던데요.”부승민이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아직 우리 그룹 쪽에서 곽 씨 일가 사람들이랑 만나기엔 이른 것 같네요. 따로 조사 좀 더 해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도
간단한 몇 마디 인사로도 두 사람 사이엔 짙은 긴장감이 흘렀다.온하랑은 살짝 부승민을 힐끔 보았다.‘오늘 밤 여기에 머무르겠다고? 뭐, 괜찮네.’메이슨이 하품을 하며 졸린 기색을 내비쳤다.“졸려? 위층에 가서 잘래?” 온하랑이 물었다.“네.” 메이슨은 조그맣게 대답하며 손에 들고 있던 체스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카펫을 짚고 일어서더니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고는 작게 말했다.“엄마, 이야기 해주시면 안 돼요?”“그래, 엄마가 이야기 들려줄게.”온하랑은 메이슨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최동철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카펫 위에 흩어진 장난감과 보드게임을 간단히 정리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부승민에게 말했다.“편히 있어.”그 말과 함께 최동철도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메이슨은 세수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불 속에 들어갔고 온하랑은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동화책을 펼쳤다.책 속 두 번째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몇 문장 읽었을 때 최동철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온하랑은 잠시 멈칫했지만 최동철이 손짓으로 계속 읽으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는 천천히 침대 끝에 앉아 온하랑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다.고요한 방 안에는 온하랑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만이 흘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잔잔한 시냇물처럼 공간을 가득 채우며 은은하게 번졌다.방 안의 분위기는 조화롭고 따뜻했다. 부드러운 조명이 구석구석을 비추며 아늑함을 더했고 평온함이 감돌았다.최동철은 침대 끝에 조용히 앉아 온하랑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화로운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했는데 마치 깊고 맑은 호수처럼 고요하면서도 그 속에 담긴 감정은 한없이 깊었다.언제부터였는지 메이슨은 점점 고른 숨소리를 내며 꿈나라로 빠져들었다.이야기가 끝에 다다랐고 온하랑은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의자를 원래 자리로 옮기고 일어났다.최동철도 온
최동철은 영어로 낮게 속삭이며 메이슨에게 말했다.“메이슨, 엄마 전화야. 직접 말씀드려.”“엄마, 보고 싶어요. 언제 돌아오세요?”메이슨의 어린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부승민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는데 그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온하랑은 메이슨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모자 간의 정은 쉽게 끊을 수 없는 법이었다.그건 마치 그가 부시아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다만 최동철의 교활함이 문제였다. 아이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온하랑은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엄마 지금 외식 중이야. 금방 돌아갈게.”“네. 그럼 엄마 돌아오면 자러 갈게요.”메이슨의 목소리가 끝나자 수화기 너머로 최동철이 다시 말을 이었다.“하랑아, 혹시 불편하면 안 돌아와도 돼. 내가 메이슨을 잘 달래볼게.”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냉소를 터트렸다.‘목적을 이루고 나서도 마치 배려심 깊은 척 연기까지 하다니.’온하랑은 부승민을 한 번 힐끗 보더니 최동철에게 말했다.“불편하지 않아요. 곧 돌아갈게요.”최동철은 부승민의 냉소를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그래, 여기서 기다릴게.”전화가 끊기자 부승민은 최동철의 말투를 따라 하며 비꼬듯 말했다.“그래, 여기서 기다릴게.”온하랑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나 샤워 좀 할게.”그러나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그녀는 부승민에게 다시 눌려졌다.“좀 이따 가. 우리 아직 ‘저녁’ 다 안 먹었잖아.”“...빨리 끝내.”메이슨이 너무 오래 기다릴까 봐 그녀는 서둘렀다.부승민은 이를 꽉 물고 말했다.“그래, 빨리 끝낼게.”그러고는 온하랑을 다시 한 번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이번엔 정말 빨랐다.그의 움직임이 빨랐고 그녀가 여러 번 절정에 다다르는 시간도 짧았다.끝난 뒤 온하랑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결국 부승민이 그녀를 안아 욕실로 데려가 간단히 씻겨 주었다.샤워를 마친 뒤 옷을
저녁 식사 후, 온하랑은 부승민과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부승민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문을 닫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그러면서도 무심한 듯 물었다.“샤워할 거야?”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고 그들의 시선이 맞닿았다.온하랑은 그의 눈 속에 타오르는 불길을 발견했다.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이미 충분히 이해한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응.”그녀는 천천히 욕실로 걸어갔고 부승민은 그런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샤워기의 물소리가 욕실 가득 울려 퍼지면서 따뜻한 김이 허공을 채웠다.온하랑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그의 허리에 감겨 있었고 몸은 공중에 떠 있었다.뜨거운 물줄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폭우 속에서 흔들리는 작은 꽃처럼 그녀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떨리고 있었다.온하랑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좀... 좀 천천히 해...”오랜만이라 그런지 부승민은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잠시 멈춰 샤워기를 껐고 긴 팔을 뻗어 수건을 집어 그녀의 몸 위에 덮었다. 그리고는 가뿐히 그녀를 안고 욕실을 나섰다.온하랑은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붉어진 눈가를 하고는 그가 힘을 준 팔뚝을 붙잡고 말했다.“빨리 가.”“알겠어.”“...아니, 그렇게... 빠르게가 아니야... 으응...”그녀는 그가 터치할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했다.“알아.”그는 그녀의 말을 따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이내 창가에 도착했다.“안 돼...” 온하랑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아래를 힐끗 보니 차들이 오가며 번화한 거리와 길게 늘어진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눈을 위로 돌리자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펼쳐졌는데 천장이 없는 듯한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부승민은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속삭였다.“긴장하지 마. 건너편엔 높은 건물이 없으니 아무도 볼 수 없어.”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내려놓았고 그녀의 허리를
어두운 조명과 검은색 자동차가 어우러져 최동철의 실루엣이 희미해졌고, 거기에 부승민이 거의 다 왔다고 메시지를 보낸 터라, 온하랑은 무심코 그가 부승민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하필 이때 최동철이 올 줄은 말이다.“너 내 차가 온 걸 보고서도 그 사람한테서 안 떨어지고 오히려 머리를 돌려서 못 본 척하더라.”그는 최동철이 일부러 그와 비슷한 차를 몰고, 비슷한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 온 걸 보면 내일 출장을 핑계로 별장에 묵으려는 게 뻔했다.“...!”온하랑은 난감해서 울상 지었다.“못 본 척한 게 아니라 진짜 못 봤어...”눈 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이 쫙 비친 순간 온하랑은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냥 지나가는 이웃 차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내가 경적 안 울렸으면, 넌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그 사람이랑 얘기했겠네?”“아니거든.... 사람 잘못 본 걸 발견하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네 차를 알아봤어.”온하랑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변명하듯 말했다.부승민이 말없이 그녀만 지그시 바라보자 온하랑은 눈을 깜빡였다.“왜 그렇게 쳐다봐? 혹시 내가 그 사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렇다면?”온하랑은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바로 널 차버렸지. 뭐 하러 여기 앉아서 연기하겠어?”“...”온하랑은 문득 차창 밖을 보다가 여전히 차 옆에 서 있는 최동철을 발견했다. 그를 보는 순간 다시 민망해져서 부승민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우리 이제 가자.”부승민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온하랑 뺨에 입을 맞췄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몸을 살짝 뒤로 빼고 투명한 창문 너머로 최동철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가속 페달을 밟아 단지 밖으로 차를 몰았다.차 안에는 난방이 빵빵하게 돌아서 훈훈했다.온하랑은 얼굴이 달아올라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뒷자리에 던졌다. 그러곤 바깥 풍경을 힐끗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우리 어디 가서 밥 먹을 거야?”부승민은 대답 대신 갑자기 차를 길가에 세웠다.“왜 멈춰?”
온하랑은 하루 종일 메이슨과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해 질 무렵이 돼서야 돌아왔다.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메이슨은 이미 잠이 들었다.도착하자 도우미가 저녁 식사를 먼저 할 거냐고 물었다. 온하랑은 메이슨이 잠에서 깨면 같이 먹겠다고 했다.오후 늦게쯤, 메이슨이 조금 출출해해서 온하랑이 그를 데리고 디저트 가게에 갔고 같이 케이크를 먹었기에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온하랑은 노트북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테이블에 앉아 업무를 처리했다.창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온하랑이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휴대폰이 두 번 울렸다. 확인해 보니 부승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지금 데리러 갈게. 야식 먹자. 거의 다 왔어.]온하랑은 답장을 보냈다.[좋아, 나도 아직 저녁 못 먹었어.]그리고 노트북을 덮고 도우미에게 말했다.[잠깐 밖에 나갈 건데 언제 들어올지 몰라요. 30분 뒤쯤에 메이슨 깨워서 밥 먹여 주세요.]도우미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방으로 올라가 다시 메이크업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방에서 나오며 베란다를 지나칠 때 무심코 밖을 내다봤다.부승민의 차가 이미 별장 입구에 와 있었다.차 옆에는 듬직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한 손을 차 문 위에 올리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였다. 불빛이 빨갛게 깜빡이고 있었다.온하랑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왔다.부승민이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자, 온하랑은 조용히 다가가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서프라이즈!”남자는 온몸이 움찔했다. 뜨거운 손이 온하랑이 교차한 두 손을 덮었고, 다른 손에서 담배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담배꽁초를 발로 짓눌렀다.마침 그때, 앞쪽 코너에서 자동차 한 대가 환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비추며 다가왔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남자 등 뒤에 얼굴을 묻은 채 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게 꿈인 것 같아.”낯설지
“그러면 이젠...”“네가 기회를 봐서 사모님을 도발해 봐. 사모님이 열받아서 너를 미워하게 만들어야 해.”간하림이 말했다.그 말이 떨어지자 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간하림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윤이 내 의도를 알아챈 거 아니야?’“내가 임신한 척해서 사모님을 자극하고 사모님이 열받아서 나를 밀면 유산한 척한다... 이런 걸 말하는 거야?”“맞아.”간하림이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바로 그거야!”‘때가 되면 사모님이 널 밀기는커녕 오히려 네 거짓 임신을 들춰내 버릴걸.’“근데...”“왜?”“나, 진짜 임신했어.”“진짜 임... 뭐라고? 네가 진짜로 임신했다고?”간하림이 깜짝 놀랐다.“응.”설윤 목소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어제 집에 돌아왔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매스꺼워서 문득 생리가 밀린 게 떠올라 임신 테스트기를 사 봤거든. 근데... 정말로 임신이라고 나오더라.”간하림은 속이 쓰린 듯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나이도 많은 최국환이 그녀를 임신시킬 줄도 몰랐다.‘운도 참 좋지.’만약 아이를 낳아서 최씨 가문의 재산을 조금이라도 물려받게 되면 설윤은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늦둥이는 더 귀여움을 받기 마련이다.“맞다.”설윤은 혼잣말하듯 계속했다.“아직 병원에는 안 가 봤어. 언제 가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너 임신한 거 회장님한테 말했어?”간하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병원에서 검사받은 다음에 보고서 들고 가서 서프라이즈로 보여주려고.”“그렇구나... 음, 윤아. 네가 임신했다면 아까 그 방법은 쓰면 안 돼. 네 몸 상하면 안 되지. 내가 좀 더 고민해 볼게.”‘사모님께 한번 물어보고 나서 다시 얘기해야겠다.’“하림아,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면 회장님한테도 양육 의무가 생기지 않아? 그럼 사모님도 날 쉽게 쫓아내지 못할 텐데 굳이 지금 상대할 필요가 있나?”“...”전화를 끊고 나서, 간하림의 마음속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견딜
임연지도 임가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임가희는 그녀가 너무 성급했다고 나무랐다.임연지는 입으로는 잘못을 인정했지만 속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그녀는 일부러 설윤의 정체를 드러내서 가방을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오후가 되자, 임연지는 예상대로 점원에게서 설윤이 환불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녀는 곧바로 가방을 예약하고 직접 가게에 가서 찾아왔다.가방을 손에 넣은 임연지는 후련한 기분으로 예쁜 사진을 찍어 한진에게 보냈다.[나 가방 받았어.]시간을 보니 이때쯤 한진은 막 일어났을 것 같았다.잠시 후 한진이 답장을 보냈다.[진짜 예쁘네! 처음 나왔을 때부터 딱 꽂혔는데 네가 준다니까 사양 안 할게.][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 쪽에 맡겨뒀다가 네가 귀국할 때 가져갈래, 아니면 누가 대신 가져다주게 할까?][며칠 뒤에 우리 오빠가 갈 거야. 나 대신 가져다줄 수 있어. 너 언제 시간 돼? 시간 맞춰서 오빠를 보낼게.][난 지금도 괜찮아. 나 센트럴 백화점 4층 커피숍에 있어.][좋아, 내가 오빠한테 전화해 볼게.]몇 분 뒤, 한진이 다시 연락했다.[오빠가 지금은 바쁘대. 그래서 오빠 비서가 대신 갈 거야. 거기서 좀 기다려 줘. 곧 도착할 거야.][알겠어.]임연지는 커피를 시켜 천천히 마시면서 한진과 채팅을 이어갔다.[진아, 근데 네 방법 진짜 효과 좋아. 내가 이틀 정도 오재*을 냉대했더니 바로 전처럼 나한테 잘하려고 해.][그 사람 몰래 귀국해서 부모나 친구들한테도 알리지 못하고 호텔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어. 결국 너밖에 연락할 데가 없잖아? 계속 차갑게만 대하면 안 돼. 가끔 잘해주기도 하면서 밀당해 봐. 그래야 헷갈릴 거야.][알겠어.]카페에서 20분쯤 기다리자,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깔끔한 청년이 들어와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장 임연지에게 다가왔다.임연지는 그 청년이 비서임을 확인한 뒤 가방을 건네주고 커피숍을 나왔다....간하림은 임가희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지만 속으로는 난감해졌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