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현승은 이미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답을 들은 서혜민은 협의서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고 그녀의 사과를 끝으로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BX 그룹의 법무팀을 나온 서혜민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드디어 끝났네...’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있었는데 모두 서명철에게서 온 것이었다.서혜은 재빨리 전화를 걸어 일시적으로 그를 안정시켰다.“어떻게 된 거야. 왜 하루 종일 전화를 안 받아? 뭐했어?”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서명철의 호통이 들려왔다.“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요. 소란 피우라면서요? 그래서 부현승 회사로 찾아왔어요.”그제야 서명철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그래? 어떻게 됐어?”“회사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했어요. 지금까지 취조실에 갇혀있어서 전화를 못 받은 거예요.”서혜민의 답에 서명철은 한숨을 내쉬었다.“바보야? 경찰이 오란다고 따라가는 사람이 어딨어. 그때는 옷을 확 벗어야지. 그럼 아무도 너한테 접근하지 못할걸?”어이가 없었던 서혜민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전화는 왜 하신 거예요?”“별일은 아니고. 네 엄마가 귀중품 보냈는지 물어보라고 해서 연락했어. 택배는 보냈지? 그 뭐냐... 송장번호 어떻게 돼?”“아직이요. 지금 바로 가서 보낼게요. 귀중품이라 택배 보내는 게 쉽지 않거든요. 영상 같은 것도 찍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려요.”“그래. 알겠다. 서둘러.”“네.”서혜민이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핸드폰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혜민아, 엄마 아빠가 널 너무 다그친다고 탓하는 건 아니지? 우리도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부현승이 경찰에 신고하는 걸 보면 모르겠어? 걔는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다니까? 그러니까 걱정 말고 우리한테 보내. 어차피 결국에는 다 너한테 돌려줄 거야.”서혜민은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무덤덤하게 답했다.“그럼요. 당연히 알죠. 가족인데 다 저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잖아요.”“그래. 이제야 철이 들었구나.”전화를 끊은 서혜민은 평온한
영상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동창이 서수현에게 영상을 보냈다.[이거 봤어? 네 동생 맞지? 참... 기가 막히네.][뭔데?][일단 봐봐.]서수현은 의아해하며 영상을 확인했다.영상에는 서혜민의 독백이 담겨있었다.“저희는 나이 차이가 없어서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하지만 처한 환경이 매우 달랐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는 이 모든 게 분노와 질투로 변했습니다. 아버지는 줄곧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는 어차피 시집갈 운명이니 공부를 하는건 시간 낭비라고... 글을 읽지 못해도 시집을 갈 수 있는데 큰돈 쓰며 딸자식 공부시는 게 무슨 소용인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현혹되었고 여자는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인식이 박히면서 이걸 핑계 삼아 스스로를 위안했습니다. 어쩌면 일종의 도피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부러웠어요. 이런 부러움이 나중에는 질투로 변하더군요. 친절을 베풀면 내 처지가 너무 불쌍해서 잘해주는 건가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멀리할 때는 무시하는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열등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말 한마디 한마디에 서혜민의 진심이 담겨있음을 보여준다.영상을 끝까지 본 서수현은 기분이 착잡했다.서혜민과 멀어지기 시작한 건 대학 입사가 끝난 후였다.3개월의 방학이 생긴 서수현은 제일 먼저 서혜민에게 연락하여 같이 밥 먹자고 제안했다.서혜민은 시험 잘 봤냐고 물어보며 말을 덧붙였다.“연락 온 거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난 네가 대학 붙어서 이제 나 같은 사람이랑은 연락 안 하는 줄 알았어.”“내가 그럴 사람이야? 여기 근처로 지원할 생각이니까 나중에 놀러 와.”“됐어. 넌 이제 대학생인데 우리 같은 사람이랑 어울리면 안 되지.”농담인 듯 아닌 듯한 그 말에 서수현은 마음이 심란했다. 서혜민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고의로 한 말인지 아니면 무심코 내뱉은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느껴진 서혜민의 예민함에 저도 모르게 연락 횟수를 줄
때는 두 사람이 치열하게 말다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 너머로 이상한 잡음 외에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자 서명철은 별생각 없이 전화를 끊었다.“아빠가 편찮으신 걸 알면서 일부러 화나게 만드는 의도는 뭐예요?”“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 어쨌든 내 큰형이니까 병원비 반 정도는 부담할게.”서수현은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명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병원비를 받을 거란 일말의 기대조차 없었다. 그러니 너무나 의외였다.“삼촌, 그럼 계산서 보내줄 테니까 지금 바로 이체해 줘요.”“수현아, 잠깐만. 실은 물어볼 게 있어.”“돈 받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그래. 알겠다.”“아참, 자의로 지불했다고 꼭 문자 남겨줘요.”서수현은 전화를 끊지 않고 곧바로 계정에서 결재 계산서를 찾아 서명철에게 보냈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한 건 아니지만 대충 어떤 얘기를 주고받는지 눈치챘던 서석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네 삼촌이 정말 병원비 반을 지불한대?”서수현도 목소리를 낮추며 답했다.“말은 그렇게 했는데 모르죠... 세상에나, 정말 보냈어요.”서명철은 서수현의 계좌로 병원비를 입금하며 방금 말한 대로 메모를 남겼다.눈이 마주친 서수현과 서석철은 믿기지 않은 현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걸 보니 정말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다.돈을 받은 서수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먼저 말을 꺼냈다.“물어보고 싶다는 게 뭐예요?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말씀드릴게요.”“혹시 혜민이랑 연락되니?”“왜요? 연락 안 받아요?”“없는 번호라고 뜨네. 카톡 계정까지 지웠어.”사과 영상과 부혀승의 고소 취하 기사를 본 서명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곧바로 서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들려오는 건 없는 번호라는 답이었고 불안한 마음으로 카톡을 보니 계정마저 지워졌다.부현승에게 감금되어 마지못해 사과 영상을 찍었을 거라는 가능성까지 생각했으나 이렇게 대담하게 말 한마
그 말을 듣고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 서명철은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뛰어내렸다고? 부현승이 그런 말을 한 의도는 뭐야? 설마 뛰어내린 게 혜민이라는 거야?”“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그냥 해본 소리일 수도 있고... 그런데 혜민이가 요즘 상황이 안 좋은 건 사실이잖아요. 이혼하고 소송까지 당했으니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인데...”“절대 그럴 리가 없어. 지금 혜민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말이야? 아니, 부현승이 널 속이려고 일부러 지어낸 말일 수도 있어.”비록 강하게 부정했지만 서명철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정말 뛰어내린 건 아니겠지? 아니야, 말 잘 듣고 착한 애가 그럴 리가 없어. 그래도 만에 하나...’“그 사람이 절 속일 이유는 뭔데요?”“혜민이를 감금해서 사과 영상을 찍은 게 틀림없어. 우리 지금 다 속고 있는 거라니까? 혜민이가 죽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게 부현승의 전략이야.”“아무 사이 아닌데 굳이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요? 설마 혜민이가 부현승 씨가 바람피운 증거를 갖고 있어요?”“없을 거야.”서혜민은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실질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계속 이렇게 버틴다면 감옥 가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다.“부현승 씨가 고소를 했으니 혜민의 입장에서는 협의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에요. 삼촌은 왜 계속 부현승 씨가 혜민이를 협박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협의 안 하면 감옥 가는 신세인데 그런 걸 원할 리가 없잖아요.”서명철은 식은땀이 맺혔다.“그게...”“삼촌, 설마 혜민이가 감옥에 갈 위험을 무릅쓰고 부현승 씨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어요? 도대체 왜요?”“그게... 너도 알다시피 혜민이가 효녀잖니. 아마 부현승한테 돈을 더 받으려고 그랬던 것 같아. 감옥에 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거지...”서수현은 그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혜민이가 협의하려고 직접 회사로 찾아갔대요. 회사에서 사인한 거라 CCTV에 모든 과정이 담겨있을 텐데 앞뒤가 잘 안 맞네요. 삼촌, 정말
서명철은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뻔뻔스럽게 굴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니? 나 때문에 죽었다는 거야? 내가 나 좋자고 이러니? 다 가족을 위해서 하는 거지.”“혜민이 시집갈 때 예물을 2억 정도 받았다면서요? 그 돈 전부 삼촌이랑 아주머니가 가졌으면서 아직도 부족하세요? 삼촌, 2억이 어떤 금액인지 아세요? 우리 아빠 신장 이식 몇 번을 할 수 있는 큰돈이라고요.”“영민이 결혼할 때 집 사줘야지...”“영민이 이제 몇 살인데 벌써 그런 걱정을 하세요? 그리고 크면 알아서 돈 벌어요. 아들 고생시키는 건 싫고 혜민이가 감옥 가는 건 상관없다 이거예요? 옆에서 보는 저도 숨 막히는데 혜민이는 얼마나 힘들었지 상상도 안 되네요. 확신은 못 하지만 뛰어내린 게 혜민이가 맞을 거예요.”서수현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서명철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떡하지?”“일단 제가 경찰서에 가서 신고할게요. 시체라도 건지면 장례 치러야죠. 어휴, 우리 불쌍한 혜민이 젊은 나이에 이렇게 가네요...”“그래. 부탁 좀 할게.”전화를 끊은 후 서석철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혜민이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 왜 죽었다고 확신하는 거야?”“죽었거나 다른 도시로 떠났거나 어차피 둘 중 하나인데 삼촌 성격 잘 아시잖아요. 탐욕에 찌든 사람인데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걸요? 혜민이가 죽어야만 지옥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거예요. 아빠, 혜민이 장례치를 때 옆에서 삼촌 호되게 혼내줘요.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렇게 연기해야 더 현실성이 있거든요.”“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 시체는 어떻게 구하려고?”“부현승 씨한테 부탁할 거예요. 정 안되면 유골 만들어서 화장했다고 얘기해야죠.”서수현은 부현승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청했고 그녀의 부탁을 들은 부현승은 곧바로 동의했다.다음 날 아침 부현승은 시체 하나를 구했다고 연락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장례식장에서 약속을 잡았다.서석철은 이미 퇴원했다. 서수현은 그에게 대충 설명하고선 부랴부랴 장례식장으
“농담이에요.”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신을 해쳤던 사람과 단둘이 있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을지 예상이 가서 부현승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이틀 뒤에 변호사 시켜서 합의서 보내드릴게요.”“네. 고마워요.”룸 안은 정적이 찾아왔고 서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식을 먹었다.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부현승과 마주 보며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이때 부현승이 핸드폰을 힐끗 보고선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켰다.“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계산은 했으니까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서수현은 고개를 들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부탁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알겠어요.”문을 열던 부현승은 멈칫했다.“아참, 준서는 지금까지 딱 한 번 만나본 적 있죠? 언제 보러 갈 거예요?”서수현은 곰곰이 생각했다.“일단 예선 끝나고 나서요.”“그럼 그때 연락해 줘요.”“알겠어요.”부현승은 문을 열고 나갔다.발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서수현 혼자 남은 방안은 쥐 죽듯 한 정적만 가득했다.그녀는 팔을 쭉 뻗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불편해하는 걸 알고 먼저 자리를 피해준 부현승이 내심 고맙기도 했다.서수현은 여유롭게 케이크 한 조각을 먹었다.부현승이 그날 밤 그 사람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서수현은 그가 매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잘생긴 외모, 뛰어난 집안 배경, 출중한 능력 모든 게 완벽했다. 매일 성실히 출근하고 주변의 비서까지 전부 남자였기에 다른 부잣집 도련님에 비해 스캔들 한번 터진 적조차 없었다. 심지어 서혜민의 출신을 알고서도 전혀 꺼리지 않고 결혼식을 올렸으니 다른 남자들과는 많이 달랐다.만약 그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만약 임신하지 않았다면, 만약 평범한 대학생으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면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게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모든 건 허상일 뿐,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은 순간 부현승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절대
서명철은 그제야 서혜민이 투신자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하기도 하지만 거듭되는 자기암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남 탓을 하게 된다.‘내가 남 좋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다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인데 왜 마음을 몰라주는 거지? 영민이가 나중에 성공하면 모두한테 좋은 거잖아. 하여튼 약해빠졌다니까. 감옥을 가게 된 것도 아닌데 말 몇 마디 했다고 죽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이렇게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이런 불효자가 있나. 고생해서 키워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죽으면 죽었지 뭐. 서혜민이라는 딸은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거야.’서명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택배 가지러 갔다.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얼마나 좋은 걸 보냈을려나. 이걸 안 보내고 죽었으면 어쩔뻔했어.’집으로 돌아간 서명철은 헐레벌떡 택배를 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건 상자를 꽉 채운 돌멩이뿐이었다.“이게 뭐야?!”서혜민의 어머니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재빨리 돌멩이를 꺼내고선 안에 귀중품이 없는지 확인했다.“설마... 택배 기사가 바꿔치기한 건 아니겠죠? 얼마 전 뉴스에 택배기사들이 물건을 훔친다고...”그들은 서혜민이 일부러 돌멩이를 넣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지금 당장 따지러 가요.”“가는 김에 장례에 필요한 물건들 좀 사야겠어. 사람들 망신 사기전에 얼른 혜민이가 죽었다고 친척들한테 연락 돌려.”택배기사는 절대 바꿔치기한 거 아니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어쩔 수 없이 택배를 보낸 우체국에 연락하게 되었고 곧바로 통화가 연결되었다.“돌멩이를 보낸 게 맞아요. 안 그래도 너무 이상했어요. 택배비는 무게로 계산하는 건데 돌멩이를 보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아가씨가 그 돌에 남다른 뜻이 담겨있다면서 꼭 보내야 한다고 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영상 하나 보내줄게요.”
“현승 오빠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너무 궁금하네.”부승민이 대답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보니 육광태였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온하랑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육광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온시 근처에 있는 항구에서 부선월의 흔적을 발견했대. 아직 잡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너도 강남에서 조심해.”부승민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알겠어.”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부승민의 모습에 온하랑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무슨 일 있어?”부승민은 찌푸리던 미간을 풀고선 온하랑을 향해 웃었다.“회사 일이야. 걱정 안 해도 돼.”그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사실 현승이보다 먼저 알아챈 사람은 수현 씨야. 준수 태어난지 얼마 안되고 연회가 있었잖아. 우리 그 전날에 병원에서 마주쳤던 게 기억나?”“기억하지. 그 당일에도 우리랑 같은 차 탔잖아.”온하랑은 곰곰이 생각했다.“상식적으로 혜민 씨가 수현 씨의 아이를 훔쳤다면 죄책감 때문이라도 절대 요청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수현 씨는 내가 말한 걸 듣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거네.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직접 연회에 가야 하니까 혜민 씨가 거절하지 못하게 일부러 우리랑 동행한 거고. 그럼 날 이용했다는 거네?”“맞아.”부승민은 웃으며 답했다.“우리 하랑이 생각보다 똑똑한데?”“칭찬 같은데 왜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온하랑마저도 부준서가 모유가 아닌 분유를 마신걸 이상하게 생각했으니 서수현은 더 말할 것도 없다.“단번에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현승 오빠를 떠올린 거 보면 수현 씨도 엄청 똑똑한 것 같아.”부승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꼭 그런 건 아니야. 수현 씨는 현승이 밑에서 인턴 수습을 하고 있었어. 처음에는 아마 현승이가 그날 밤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이건 부승민의 추측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수현이 부준서의 정체를 노출했을 리가 없거니와 부현승을 피하지도 않았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