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에요.”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신을 해쳤던 사람과 단둘이 있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을지 예상이 가서 부현승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이틀 뒤에 변호사 시켜서 합의서 보내드릴게요.”“네. 고마워요.”룸 안은 정적이 찾아왔고 서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식을 먹었다.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부현승과 마주 보며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이때 부현승이 핸드폰을 힐끗 보고선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켰다.“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계산은 했으니까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서수현은 고개를 들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부탁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알겠어요.”문을 열던 부현승은 멈칫했다.“아참, 준서는 지금까지 딱 한 번 만나본 적 있죠? 언제 보러 갈 거예요?”서수현은 곰곰이 생각했다.“일단 예선 끝나고 나서요.”“그럼 그때 연락해 줘요.”“알겠어요.”부현승은 문을 열고 나갔다.발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서수현 혼자 남은 방안은 쥐 죽듯 한 정적만 가득했다.그녀는 팔을 쭉 뻗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불편해하는 걸 알고 먼저 자리를 피해준 부현승이 내심 고맙기도 했다.서수현은 여유롭게 케이크 한 조각을 먹었다.부현승이 그날 밤 그 사람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서수현은 그가 매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잘생긴 외모, 뛰어난 집안 배경, 출중한 능력 모든 게 완벽했다. 매일 성실히 출근하고 주변의 비서까지 전부 남자였기에 다른 부잣집 도련님에 비해 스캔들 한번 터진 적조차 없었다. 심지어 서혜민의 출신을 알고서도 전혀 꺼리지 않고 결혼식을 올렸으니 다른 남자들과는 많이 달랐다.만약 그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만약 임신하지 않았다면, 만약 평범한 대학생으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면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게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모든 건 허상일 뿐,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은 순간 부현승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절대
서명철은 그제야 서혜민이 투신자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하기도 하지만 거듭되는 자기암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남 탓을 하게 된다.‘내가 남 좋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다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인데 왜 마음을 몰라주는 거지? 영민이가 나중에 성공하면 모두한테 좋은 거잖아. 하여튼 약해빠졌다니까. 감옥을 가게 된 것도 아닌데 말 몇 마디 했다고 죽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이렇게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이런 불효자가 있나. 고생해서 키워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죽으면 죽었지 뭐. 서혜민이라는 딸은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거야.’서명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택배 가지러 갔다.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얼마나 좋은 걸 보냈을려나. 이걸 안 보내고 죽었으면 어쩔뻔했어.’집으로 돌아간 서명철은 헐레벌떡 택배를 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건 상자를 꽉 채운 돌멩이뿐이었다.“이게 뭐야?!”서혜민의 어머니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재빨리 돌멩이를 꺼내고선 안에 귀중품이 없는지 확인했다.“설마... 택배 기사가 바꿔치기한 건 아니겠죠? 얼마 전 뉴스에 택배기사들이 물건을 훔친다고...”그들은 서혜민이 일부러 돌멩이를 넣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지금 당장 따지러 가요.”“가는 김에 장례에 필요한 물건들 좀 사야겠어. 사람들 망신 사기전에 얼른 혜민이가 죽었다고 친척들한테 연락 돌려.”택배기사는 절대 바꿔치기한 거 아니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어쩔 수 없이 택배를 보낸 우체국에 연락하게 되었고 곧바로 통화가 연결되었다.“돌멩이를 보낸 게 맞아요. 안 그래도 너무 이상했어요. 택배비는 무게로 계산하는 건데 돌멩이를 보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아가씨가 그 돌에 남다른 뜻이 담겨있다면서 꼭 보내야 한다고 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영상 하나 보내줄게요.”
“현승 오빠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너무 궁금하네.”부승민이 대답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보니 육광태였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온하랑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육광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온시 근처에 있는 항구에서 부선월의 흔적을 발견했대. 아직 잡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너도 강남에서 조심해.”부승민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알겠어.”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부승민의 모습에 온하랑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무슨 일 있어?”부승민은 찌푸리던 미간을 풀고선 온하랑을 향해 웃었다.“회사 일이야. 걱정 안 해도 돼.”그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사실 현승이보다 먼저 알아챈 사람은 수현 씨야. 준수 태어난지 얼마 안되고 연회가 있었잖아. 우리 그 전날에 병원에서 마주쳤던 게 기억나?”“기억하지. 그 당일에도 우리랑 같은 차 탔잖아.”온하랑은 곰곰이 생각했다.“상식적으로 혜민 씨가 수현 씨의 아이를 훔쳤다면 죄책감 때문이라도 절대 요청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수현 씨는 내가 말한 걸 듣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거네.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직접 연회에 가야 하니까 혜민 씨가 거절하지 못하게 일부러 우리랑 동행한 거고. 그럼 날 이용했다는 거네?”“맞아.”부승민은 웃으며 답했다.“우리 하랑이 생각보다 똑똑한데?”“칭찬 같은데 왜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온하랑마저도 부준서가 모유가 아닌 분유를 마신걸 이상하게 생각했으니 서수현은 더 말할 것도 없다.“단번에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현승 오빠를 떠올린 거 보면 수현 씨도 엄청 똑똑한 것 같아.”부승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꼭 그런 건 아니야. 수현 씨는 현승이 밑에서 인턴 수습을 하고 있었어. 처음에는 아마 현승이가 그날 밤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이건 부승민의 추측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수현이 부준서의 정체를 노출했을 리가 없거니와 부현승을 피하지도 않았
차에 오른 부승민은 급히 시동을 거는 게 아닌 관련 부서에 신고하여 수상한 인물이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당부했다. 부선월을 찾는 인원을 늘인 후 경호원 몇 명을 더 동원하여 인근 지역에 분포시켰다.육광태가 부선월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적이 어둠에 숨어있는이상 어떤 패를 내놓을지 모르기에 모든 상황을 고려해 미리 준비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온하랑으로 부선월을 유인해 낼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아 섣불리 리스크가 큰 이 방법을 택하지 못했다.부승민이 본가에 도착했을 때 양정숙과 부시아는 아직 식사하고 있었다.“익숙한 차 소리가 나길래 아빠가 왔을 거라고 확신했어요.”부시아는 식탁에 앉아 짧은 다리를 흔들며 싱글벙글 웃었다.“우리 시아 데리러 왔지.”곧이어 부승민은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건넸다.“할머니, 저 왔어요. 삼촌도 계셨네요?”부광훈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할머니한테 얘기할 일이 있어서 왔어. 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먹고가.”“전 이미 먹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기다릴게요.”부승민은 소파에 앉았다.“승민아, 삼촌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이따가 시간 좀 내줘.”부승민은 부광훈을 힐끗 보고선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부시아는 손가락을 내려놓고 휴지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배불러요. 잘 먹었습니다.”의자에서 홀짝 뛰어내린 부시아를 보며 부광훈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시아 짐 좀 챙겨줘요.”도우미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눈치껏 부시아와 함께 방으로 향했다.부승민은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식탁으로 가서 부시아가 앉았던 의자를 끌어당겨 자연스레 앉았다.“삼촌, 하실 말씀이 뭐예요?”부광훈과 양정숙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네 고모...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니?”부승민은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도 잘 몰라요.”“너도 몰라?”“오늘 막 밀입국
“현승 오빠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너무 궁금하네.”부승민이 대답하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보니 육광태였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온하랑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육광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온시 근처에 있는 항구에서 부선월의 흔적을 발견했대. 아직 잡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 뒤에서 도와주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너도 강남에서 조심해.”부승민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알겠어.”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부승민의 모습에 온하랑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무슨 일 있어?”부승민은 찌푸리던 미간을 풀고선 온하랑을 향해 웃었다.“회사 일이야. 걱정 안 해도 돼.”그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사실 현승이보다 먼저 알아챈 사람은 수현 씨야. 준수 태어난지 얼마 안되고 연회가 있었잖아. 우리 그 전날에 병원에서 마주쳤던 게 기억나?”“기억하지. 그 당일에도 우리랑 같은 차 탔잖아.”온하랑은 곰곰이 생각했다.“상식적으로 혜민 씨가 수현 씨의 아이를 훔쳤다면 죄책감 때문이라도 절대 요청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수현 씨는 내가 말한 걸 듣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거네.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직접 연회에 가야 하니까 혜민 씨가 거절하지 못하게 일부러 우리랑 동행한 거고. 그럼 날 이용했다는 거네?”“맞아.”부승민은 웃으며 답했다.“우리 하랑이 생각보다 똑똑한데?”“칭찬 같은데 왜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온하랑마저도 부준서가 모유가 아닌 분유를 마신걸 이상하게 생각했으니 서수현은 더 말할 것도 없다.“단번에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현승 오빠를 떠올린 거 보면 수현 씨도 엄청 똑똑한 것 같아.”부승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꼭 그런 건 아니야. 수현 씨는 현승이 밑에서 인턴 수습을 하고 있었어. 처음에는 아마 현승이가 그날 밤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이건 부승민의 추측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수현이 부준서의 정체를 노출했을 리가 없거니와 부현승을 피하지도 않았
차에 오른 부승민은 급히 시동을 거는 게 아닌 관련 부서에 신고하여 수상한 인물이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당부했다. 부선월을 찾는 인원을 늘인 후 경호원 몇 명을 더 동원하여 인근 지역에 분포시켰다.육광태가 부선월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적이 어둠에 숨어있는이상 어떤 패를 내놓을지 모르기에 모든 상황을 고려해 미리 준비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온하랑으로 부선월을 유인해 낼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아 섣불리 리스크가 큰 이 방법을 택하지 못했다.부승민이 본가에 도착했을 때 양정숙과 부시아는 아직 식사하고 있었다.“익숙한 차 소리가 나길래 아빠가 왔을 거라고 확신했어요.”부시아는 식탁에 앉아 짧은 다리를 흔들며 싱글벙글 웃었다.“우리 시아 데리러 왔지.”곧이어 부승민은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건넸다.“할머니, 저 왔어요. 삼촌도 계셨네요?”부광훈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할머니한테 얘기할 일이 있어서 왔어. 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먹고가.”“전 이미 먹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기다릴게요.”부승민은 소파에 앉았다.“승민아, 삼촌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이따가 시간 좀 내줘.”부승민은 부광훈을 힐끗 보고선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부시아는 손가락을 내려놓고 휴지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배불러요. 잘 먹었습니다.”의자에서 홀짝 뛰어내린 부시아를 보며 부광훈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시아 짐 좀 챙겨줘요.”도우미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눈치껏 부시아와 함께 방으로 향했다.부승민은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식탁으로 가서 부시아가 앉았던 의자를 끌어당겨 자연스레 앉았다.“삼촌, 하실 말씀이 뭐예요?”부광훈과 양정숙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네 고모...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니?”부승민은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도 잘 몰라요.”“너도 몰라?”“오늘 막 밀입국
부승민과 부시아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온하랑은 청진기를 낀 채 청진판을 불룩한 배에 올려놓고 태아의 심장 박동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부시아는 가방을 벗어 소파 구석에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봤다.“숙모, 뭐 듣고 있어요?”온하랑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아기 심장 소리 듣고 있었어.”“그게 들려요? 저도 들을래요.”온하랑은 청진기 이어팁을 빼고 부시아의 귀에 얹었다.“자, 해봐.”부시아는 온하랑의 손에서 납작한 청진판을 받아 온하랑의 배에 얹은 후 천천히 움직이며 귀를 기울였다.1분 뒤, 온하랑이 물었다.“어때?”부시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청진기를 떼어냈다.“너무 신기해요. 이걸 쓰면 뭔가...”부시아는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뭔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요. 다른 소리는 아예 안 들리는데 여기 납작하고 동근 곳에서 나오는 소리는 엄청 선명하게 들려요.”“맞아. 그게 청진기의 기능이야.”부시아는 청진기를 다시 착용하더니 자신에 가슴에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러고선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봤다.“숙모, 송이 심장 소리를 들어봐도 돼요?”“응. 당연하지.”“오예!”송이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아기 고양이에서 어느새 4kg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뚱땡이가 되었다. 중성화 수술을 한 이후로 점점 더 살이 찌었는데 통통한 그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다.캣타워 캡슐 안에 몸을 숨긴 송이는 기분이 별로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고 꼬리도 축 처져있었다.부시아는 청진기를 들고 다가가 발끝을 세우더니 고양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선 진지한 얼굴로 심장 박동을 듣기 시작했다.송이는 힐끔 쳐다보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코를 골았다.그렇게 거실에서 한참을 놀다가 안문희에 의해 위층으로 끌려가 잠자리에 들었다.일찍 씻고 누운 온하랑은 머리맡에 기댄 채 가벼운 음악을 틀었다.9시 반쯤 일을 마친 부승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손에는 청진기가 들려있었다.
곧이어 부승민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이러니까 잘 들리네. 규칙적인 거 보니 아주 건강하군.”그렇게 1분 동안 듣다가 청진기를 떼어냈다.온하랑은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렸고 막 잠이 들려던 찰나 차가운 청진판이 또다시 느껴졌다.온하랑은 심장이 마구 뛰었다.“우리 하랑이 심장 소리 듣고 싶네.”부승민은 말하면서 청진판을 점점 더 위로 올렸다.움직임은 매우 부드러웠는데 차가운 느낌이 깃털처럼 몸 곳곳을 어루만지자 예민함이 극에 달한 온하랑은 호흡이 가빠져 긴장한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청진판은 그녀의 가슴에서 정확히 멈췄다.“하랑아, 너 지금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어.”부승민은 온하랑에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혼자말하는 것 같았다.“숨소리가 왜 이렇게 거칠어? 어디 아픈 거 아니야?”부승민은 청진판을 이리저리 움직였고 그의 가볍고도 부드러운 손길은 마치 간지럼을 태우는듯 온몸이 나른해졌다.심지어 잘 들리지 않는지 꾹꾹 눌렀다.그렇게 몇 분 후, 드디어 청진기를 벗었다.온하랑은 그가 이번에는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이 가지 않아 조마조마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무거운 물건이 올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정말 청진기를 거뒀다는 생각에 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또다시 차가운 뭔가가 가슴에 닿았고 안 그래도 잔뜩 예민해진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그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어쩌면 긴장하면서도 내심 기대하는 것 같다.테이블 위에 청진기가 놓이는 털컥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고 이내 뭔가를 삼키는듯한 소리도 들렸다.부승민이 물을 마시고 있는 게 분명한데 다 알고 있음에도 방심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예상대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청진판이 아닌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과 차가운 뭔가가 느껴졌다.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자 차가운 그 느낌도 같이 옮겨졌는데 몸 곳곳에 촉촉한 흔적이 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