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현은 생각에 잠긴 듯 행동마저 느려졌다.사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그 일은 결국 직면하게 될 것이다.한참 동안 고민하던 서수현은 끝내 답장을 보냈다.[나중에요. 지금은 관심 갖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혹여나 부현승을 미행하고 있던 기자에게 사진이라도 찍히면 일은 더 커지게 된다.부현승은 칼답했다.[알겠어요.]서혜민은 다음 날 아침 부현승에게 연락했다.두 사람은 협의를 위해 BX 그룹의 법무팀에서 만나기로 했다.금액은 크지 않았고, 변호사는 이미 작성한 서류들을 서혜민에게 보여주며 그녀가 해야 할 의무에 대해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때마침 서혜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서명철이다.변호사는 화면에 뜬 ‘아빠’라는 단어를 언뜻 보고선 서혜민에게 말했다.“받으셔도 괜찮아요. 기다릴게요.”“아니요. 계속하시죠.”서혜민은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돌린 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알겠습니다.”협의서에 적힌 대부분의 조항들은 서혜민이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 앞으로 그날 밤의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언급해서는 안 되며 어떤 형태로든 부현승과 서수현의 사생활을 공개하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또한 부준서의 양육권에 관한 내용도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서혜민에게 선택을 맡기는 조항들도 보였다.영원히 강남을 떠난다면 집은 서혜민의 소유가 되고, 강남에 남는 순간 집은 압류된다.그렇다. 어젯밤 서혜민이 서명철에게 집이 압류되었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었다.서혜민은 부현승이 모든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할까봐 두려웠다. 만에 하나 서명철이 집을 빼앗아 간다면 서혜민이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난것이나 다름없기에 이게 최선의 선택이다.그러나 뜻밖에도 부현승은 재산 관련 얘기는 언급하지 않았고 협의서에도 그저 집에 관한 조항들뿐이었다.서혜민은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부현승을 바라봤다.“집 말고 다른 돈은...”“너한테 없잖아.”부현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말했다.“집만 네 명의로 있어.” 서혜민은 수치심
부현승은 이미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답을 들은 서혜민은 협의서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고 그녀의 사과를 끝으로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BX 그룹의 법무팀을 나온 서혜민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드디어 끝났네...’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있었는데 모두 서명철에게서 온 것이었다.서혜은 재빨리 전화를 걸어 일시적으로 그를 안정시켰다.“어떻게 된 거야. 왜 하루 종일 전화를 안 받아? 뭐했어?”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서명철의 호통이 들려왔다.“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요. 소란 피우라면서요? 그래서 부현승 회사로 찾아왔어요.”그제야 서명철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그래? 어떻게 됐어?”“회사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했어요. 지금까지 취조실에 갇혀있어서 전화를 못 받은 거예요.”서혜민의 답에 서명철은 한숨을 내쉬었다.“바보야? 경찰이 오란다고 따라가는 사람이 어딨어. 그때는 옷을 확 벗어야지. 그럼 아무도 너한테 접근하지 못할걸?”어이가 없었던 서혜민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전화는 왜 하신 거예요?”“별일은 아니고. 네 엄마가 귀중품 보냈는지 물어보라고 해서 연락했어. 택배는 보냈지? 그 뭐냐... 송장번호 어떻게 돼?”“아직이요. 지금 바로 가서 보낼게요. 귀중품이라 택배 보내는 게 쉽지 않거든요. 영상 같은 것도 찍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려요.”“그래. 알겠다. 서둘러.”“네.”서혜민이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핸드폰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혜민아, 엄마 아빠가 널 너무 다그친다고 탓하는 건 아니지? 우리도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부현승이 경찰에 신고하는 걸 보면 모르겠어? 걔는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다니까? 그러니까 걱정 말고 우리한테 보내. 어차피 결국에는 다 너한테 돌려줄 거야.”서혜민은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무덤덤하게 답했다.“그럼요. 당연히 알죠. 가족인데 다 저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잖아요.”“그래. 이제야 철이 들었구나.”전화를 끊은 서혜민은 평온한
영상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동창이 서수현에게 영상을 보냈다.[이거 봤어? 네 동생 맞지? 참... 기가 막히네.][뭔데?][일단 봐봐.]서수현은 의아해하며 영상을 확인했다.영상에는 서혜민의 독백이 담겨있었다.“저희는 나이 차이가 없어서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하지만 처한 환경이 매우 달랐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는 이 모든 게 분노와 질투로 변했습니다. 아버지는 줄곧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는 어차피 시집갈 운명이니 공부를 하는건 시간 낭비라고... 글을 읽지 못해도 시집을 갈 수 있는데 큰돈 쓰며 딸자식 공부시는 게 무슨 소용인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현혹되었고 여자는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인식이 박히면서 이걸 핑계 삼아 스스로를 위안했습니다. 어쩌면 일종의 도피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부러웠어요. 이런 부러움이 나중에는 질투로 변하더군요. 친절을 베풀면 내 처지가 너무 불쌍해서 잘해주는 건가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멀리할 때는 무시하는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열등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말 한마디 한마디에 서혜민의 진심이 담겨있음을 보여준다.영상을 끝까지 본 서수현은 기분이 착잡했다.서혜민과 멀어지기 시작한 건 대학 입사가 끝난 후였다.3개월의 방학이 생긴 서수현은 제일 먼저 서혜민에게 연락하여 같이 밥 먹자고 제안했다.서혜민은 시험 잘 봤냐고 물어보며 말을 덧붙였다.“연락 온 거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난 네가 대학 붙어서 이제 나 같은 사람이랑은 연락 안 하는 줄 알았어.”“내가 그럴 사람이야? 여기 근처로 지원할 생각이니까 나중에 놀러 와.”“됐어. 넌 이제 대학생인데 우리 같은 사람이랑 어울리면 안 되지.”농담인 듯 아닌 듯한 그 말에 서수현은 마음이 심란했다. 서혜민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고의로 한 말인지 아니면 무심코 내뱉은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느껴진 서혜민의 예민함에 저도 모르게 연락 횟수를 줄
때는 두 사람이 치열하게 말다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 너머로 이상한 잡음 외에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자 서명철은 별생각 없이 전화를 끊었다.“아빠가 편찮으신 걸 알면서 일부러 화나게 만드는 의도는 뭐예요?”“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 어쨌든 내 큰형이니까 병원비 반 정도는 부담할게.”서수현은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명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병원비를 받을 거란 일말의 기대조차 없었다. 그러니 너무나 의외였다.“삼촌, 그럼 계산서 보내줄 테니까 지금 바로 이체해 줘요.”“수현아, 잠깐만. 실은 물어볼 게 있어.”“돈 받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그래. 알겠다.”“아참, 자의로 지불했다고 꼭 문자 남겨줘요.”서수현은 전화를 끊지 않고 곧바로 계정에서 결재 계산서를 찾아 서명철에게 보냈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한 건 아니지만 대충 어떤 얘기를 주고받는지 눈치챘던 서석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네 삼촌이 정말 병원비 반을 지불한대?”서수현도 목소리를 낮추며 답했다.“말은 그렇게 했는데 모르죠... 세상에나, 정말 보냈어요.”서명철은 서수현의 계좌로 병원비를 입금하며 방금 말한 대로 메모를 남겼다.눈이 마주친 서수현과 서석철은 믿기지 않은 현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걸 보니 정말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다.돈을 받은 서수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먼저 말을 꺼냈다.“물어보고 싶다는 게 뭐예요?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말씀드릴게요.”“혹시 혜민이랑 연락되니?”“왜요? 연락 안 받아요?”“없는 번호라고 뜨네. 카톡 계정까지 지웠어.”사과 영상과 부혀승의 고소 취하 기사를 본 서명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곧바로 서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들려오는 건 없는 번호라는 답이었고 불안한 마음으로 카톡을 보니 계정마저 지워졌다.부현승에게 감금되어 마지못해 사과 영상을 찍었을 거라는 가능성까지 생각했으나 이렇게 대담하게 말 한마
그 말을 듣고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 서명철은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뛰어내렸다고? 부현승이 그런 말을 한 의도는 뭐야? 설마 뛰어내린 게 혜민이라는 거야?”“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그냥 해본 소리일 수도 있고... 그런데 혜민이가 요즘 상황이 안 좋은 건 사실이잖아요. 이혼하고 소송까지 당했으니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인데...”“절대 그럴 리가 없어. 지금 혜민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말이야? 아니, 부현승이 널 속이려고 일부러 지어낸 말일 수도 있어.”비록 강하게 부정했지만 서명철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정말 뛰어내린 건 아니겠지? 아니야, 말 잘 듣고 착한 애가 그럴 리가 없어. 그래도 만에 하나...’“그 사람이 절 속일 이유는 뭔데요?”“혜민이를 감금해서 사과 영상을 찍은 게 틀림없어. 우리 지금 다 속고 있는 거라니까? 혜민이가 죽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게 부현승의 전략이야.”“아무 사이 아닌데 굳이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요? 설마 혜민이가 부현승 씨가 바람피운 증거를 갖고 있어요?”“없을 거야.”서혜민은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실질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계속 이렇게 버틴다면 감옥 가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다.“부현승 씨가 고소를 했으니 혜민의 입장에서는 협의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에요. 삼촌은 왜 계속 부현승 씨가 혜민이를 협박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협의 안 하면 감옥 가는 신세인데 그런 걸 원할 리가 없잖아요.”서명철은 식은땀이 맺혔다.“그게...”“삼촌, 설마 혜민이가 감옥에 갈 위험을 무릅쓰고 부현승 씨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어요? 도대체 왜요?”“그게... 너도 알다시피 혜민이가 효녀잖니. 아마 부현승한테 돈을 더 받으려고 그랬던 것 같아. 감옥에 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거지...”서수현은 그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혜민이가 협의하려고 직접 회사로 찾아갔대요. 회사에서 사인한 거라 CCTV에 모든 과정이 담겨있을 텐데 앞뒤가 잘 안 맞네요. 삼촌, 정말
서명철은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뻔뻔스럽게 굴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니? 나 때문에 죽었다는 거야? 내가 나 좋자고 이러니? 다 가족을 위해서 하는 거지.”“혜민이 시집갈 때 예물을 2억 정도 받았다면서요? 그 돈 전부 삼촌이랑 아주머니가 가졌으면서 아직도 부족하세요? 삼촌, 2억이 어떤 금액인지 아세요? 우리 아빠 신장 이식 몇 번을 할 수 있는 큰돈이라고요.”“영민이 결혼할 때 집 사줘야지...”“영민이 이제 몇 살인데 벌써 그런 걱정을 하세요? 그리고 크면 알아서 돈 벌어요. 아들 고생시키는 건 싫고 혜민이가 감옥 가는 건 상관없다 이거예요? 옆에서 보는 저도 숨 막히는데 혜민이는 얼마나 힘들었지 상상도 안 되네요. 확신은 못 하지만 뛰어내린 게 혜민이가 맞을 거예요.”서수현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서명철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떡하지?”“일단 제가 경찰서에 가서 신고할게요. 시체라도 건지면 장례 치러야죠. 어휴, 우리 불쌍한 혜민이 젊은 나이에 이렇게 가네요...”“그래. 부탁 좀 할게.”전화를 끊은 후 서석철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혜민이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 왜 죽었다고 확신하는 거야?”“죽었거나 다른 도시로 떠났거나 어차피 둘 중 하나인데 삼촌 성격 잘 아시잖아요. 탐욕에 찌든 사람인데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걸요? 혜민이가 죽어야만 지옥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거예요. 아빠, 혜민이 장례치를 때 옆에서 삼촌 호되게 혼내줘요.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렇게 연기해야 더 현실성이 있거든요.”“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 시체는 어떻게 구하려고?”“부현승 씨한테 부탁할 거예요. 정 안되면 유골 만들어서 화장했다고 얘기해야죠.”서수현은 부현승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청했고 그녀의 부탁을 들은 부현승은 곧바로 동의했다.다음 날 아침 부현승은 시체 하나를 구했다고 연락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장례식장에서 약속을 잡았다.서석철은 이미 퇴원했다. 서수현은 그에게 대충 설명하고선 부랴부랴 장례식장으
“농담이에요.”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신을 해쳤던 사람과 단둘이 있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을지 예상이 가서 부현승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이틀 뒤에 변호사 시켜서 합의서 보내드릴게요.”“네. 고마워요.”룸 안은 정적이 찾아왔고 서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식을 먹었다.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부현승과 마주 보며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이때 부현승이 핸드폰을 힐끗 보고선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켰다.“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계산은 했으니까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서수현은 고개를 들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부탁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알겠어요.”문을 열던 부현승은 멈칫했다.“아참, 준서는 지금까지 딱 한 번 만나본 적 있죠? 언제 보러 갈 거예요?”서수현은 곰곰이 생각했다.“일단 예선 끝나고 나서요.”“그럼 그때 연락해 줘요.”“알겠어요.”부현승은 문을 열고 나갔다.발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서수현 혼자 남은 방안은 쥐 죽듯 한 정적만 가득했다.그녀는 팔을 쭉 뻗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불편해하는 걸 알고 먼저 자리를 피해준 부현승이 내심 고맙기도 했다.서수현은 여유롭게 케이크 한 조각을 먹었다.부현승이 그날 밤 그 사람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서수현은 그가 매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잘생긴 외모, 뛰어난 집안 배경, 출중한 능력 모든 게 완벽했다. 매일 성실히 출근하고 주변의 비서까지 전부 남자였기에 다른 부잣집 도련님에 비해 스캔들 한번 터진 적조차 없었다. 심지어 서혜민의 출신을 알고서도 전혀 꺼리지 않고 결혼식을 올렸으니 다른 남자들과는 많이 달랐다.만약 그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만약 임신하지 않았다면, 만약 평범한 대학생으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면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게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모든 건 허상일 뿐,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은 순간 부현승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절대
서명철은 그제야 서혜민이 투신자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하기도 하지만 거듭되는 자기암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남 탓을 하게 된다.‘내가 남 좋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다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인데 왜 마음을 몰라주는 거지? 영민이가 나중에 성공하면 모두한테 좋은 거잖아. 하여튼 약해빠졌다니까. 감옥을 가게 된 것도 아닌데 말 몇 마디 했다고 죽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이렇게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이런 불효자가 있나. 고생해서 키워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죽으면 죽었지 뭐. 서혜민이라는 딸은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거야.’서명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택배 가지러 갔다.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얼마나 좋은 걸 보냈을려나. 이걸 안 보내고 죽었으면 어쩔뻔했어.’집으로 돌아간 서명철은 헐레벌떡 택배를 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건 상자를 꽉 채운 돌멩이뿐이었다.“이게 뭐야?!”서혜민의 어머니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재빨리 돌멩이를 꺼내고선 안에 귀중품이 없는지 확인했다.“설마... 택배 기사가 바꿔치기한 건 아니겠죠? 얼마 전 뉴스에 택배기사들이 물건을 훔친다고...”그들은 서혜민이 일부러 돌멩이를 넣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지금 당장 따지러 가요.”“가는 김에 장례에 필요한 물건들 좀 사야겠어. 사람들 망신 사기전에 얼른 혜민이가 죽었다고 친척들한테 연락 돌려.”택배기사는 절대 바꿔치기한 거 아니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어쩔 수 없이 택배를 보낸 우체국에 연락하게 되었고 곧바로 통화가 연결되었다.“돌멩이를 보낸 게 맞아요. 안 그래도 너무 이상했어요. 택배비는 무게로 계산하는 건데 돌멩이를 보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아가씨가 그 돌에 남다른 뜻이 담겨있다면서 꼭 보내야 한다고 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영상 하나 보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