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지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형사 처분을 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아직 안 늦었어. 네 인생은 아직 4분의 1밖에 안 지났으니까. 앞으로 많은 게 좋은 날들이야!”임가희가 말했다.임연지는 그 말에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음속에서는 그녀를 삼킬 듯한 거대한 증오심이 피어올랐다.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매일 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계속해서 물었다.“내 인생은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걸까?”앞이 보이지 않았다.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연지야, 나도 네가 온하랑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형기를 무사히 잘 넘기는 게 제일 중요해. 절대 쓸데없이 허튼짓하려고 들면 안 된다.”임가희가 임연지를 달래며 말했다.“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서는 절대 안 돼. 이 시간이 지나 결국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알겠어요.”임연지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 순간, 임연지의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였다.“맞다, 고모. 온하랑도 임신 7개월 차 아니에요? 아이가 태어나도 살아가는 데는 문제 없는 시기잖아요?”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임가희가 말했다.“가능하긴 하지만 너무 위험해.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한다면…”“고모가 방금 가르쳐 주셨잖아요. 권력을 빌려서 권력을 대항하라고. 부선월을 조금만 더 빨리 돌아오게 해주세요. 가능한 제 출산 예정일에 맞춰서요.”…아침이 밝았다. 온하랑은 아침을 먹으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부승민을 바라보며 무심코 물었다.“짐은 다 챙겼어?”“짐 챙길 필요 없어. 안 갈 거니까.”부승민이 차분하게 말했다.온하랑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예 파기된 거야?”“응.”“그래, 알겠어.”부승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휴지로 입을 닦았다.
온하랑 역시 기사를 통해 부현승과 서혜민의 “이혼” 소식을 알게 되었다.서혜민은 매체 인터뷰를 통해 남편인 부현승이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자신의 사촌과 바람이 났다고 폭로했다.서혜민의 눈물 어린 고발은 많은 네티즌의 동정과 격려를 받았다. 이후, 네티즌 중 누군가가 부현승이 바로 부승민의 사촌 동생이며 부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폭로했다.기사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인기 검색어 순위에까지 올랐다.온하랑 역시 이 사건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판을 제대로 뒤엎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한순간에 모든 기사가 인터넷에서 사라졌고 인기검색어 올라갔던 검색어도 금방 내려갔다.아마 BX 그룹의 홍보부가 사건 처리를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이런 기사는 절대 BX 그룹에 좋은 영향을 주는 기사가 아니었으니까.하지만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 한구석에서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부현승이 서혜민의 사촌과 바람이 났다고?그게 사실일까?온하랑이 하는 부현승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서혜민의 눈물 어린 폭로를 보면 그녀의 말이 딱히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온하랑이 정보를 더 알아보기 위해 검색창을 누르려던 순간, 도우미가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오전 휴대폰 사용 시간이 끝나버린 것이다.…부현승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던 그때, 서수현은 마침 컴퓨터 코드와 씨름하느라 애먹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팀의 두 친구도 대회 준비로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전화벨 소리를 들은 서수현은 몇 번 더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아쉬운 듯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부현승 이사님?잠시 망설인 서수현은 친구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이사님? 무슨 일이세요?”부현승이 학교를 떠난 이후, 두 사람은 더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서수현도 부승민과 서혜민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고 본격적으로 대회 준비에만 몰두했다.그런 지금, 부현승에게서 전화가
서수현은 고개를 돌려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포니테일을 한 어린 소녀가 휴대폰을 보며 맞은편에 앉은 친구에게 불평하고 있었다.소녀의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세상에 이상한 사람들 진짜 많잖아. 학벌이 인격이랑 같은 것도 아니고… 4학년 컴공과라고 하던데, 이거 신고하면 졸업 못 하게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아마 가능성 없을걸. 불법도 아니잖아, 그냥 역겨운 거지.”“…”서수현의 맞은편에는 그녀의 친구가 앉아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친구는 자신의 학과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셋이서 만든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야, 우리 옆에 있는 애들 지금 우리 학과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너 혹시 들었어?”서수현이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친구가 메시지 하나를 더 보냈다.“학과 단톡에서 누가 이 얘기하고 있다는데? 나 구경 좀 하고 올게.”“…”한동안 마우스 위에 엄지를 올려놓고 계속 고민하며 망설이던 서수현도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단톡방을 클릭해 내용을 확인해보았다.단톡방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시작은 누군가가 인스타에서 본 게시물을 공유하며 시작되었다.“님들 이거 봤어요? 소프트웨어 공학과라고 하던데?”“저도 아침에 봤음요.”“지금은 인기검색어 내려갔던데요.”“설마 우리랑 같이 수업 듣는 그 서수현은 아니겠죠? 설마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솔직히 전에 봤을 때 살이 조금 찐 것 같긴 했어요. 근데 그냥 살찐 것 같지는 않고, 묘하게 임신한 사람 체형이었단 말이죠.”“맞아요, 저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서수현의 친구는 단톡방을 확인한 순간, 흥미롭다는 듯 가십거리를 즐기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그녀는 서수현을 한 번 쳐다보더니 개인 톡방을 열어 물었다.“수현아, 너랑 그 이사님… 그거 설마 진짜야?”서수현이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했다.“당연히 아니지.”“그런데 왜 아무 해명도 안 해?”서수현은 힘없이 한숨을 푹 내
서수현의 머릿속에서 “윙”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수현아?”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서수현이 말했다.“알겠어요, 아저씨. 지금 당장 갈게요.”서수현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응급 상황임을 알리는 응급실의 불이 켜져 있었고 창고 관리인은 복도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아저씨.”급하게 달려온 서수현이 관리인을 발견하고 달려와 물었다. 병원 응급실까지 뛰어오느라 서수현의 얼굴은 이미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숨을 크게 들이쉰 그녀가 물었다.“저희 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의사가 뭐래요?”“수현아.”관리인은 다급히 달려온 서수현을 발견하자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아직도 안에서 응급 처치 중이야.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들어가더구나.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라. 의사들 반응 보아하니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서수현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혹시라도 아버지가 잘못될까 두려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아저씨, 아버지께서 어떻게 쓰러지신 건지 알고 계세요?”“나도 그때 자리에 없어서 잘은 모르겠구나. 다른 사람들 말로는 네 아버지가 누구랑 통화하면서 말다툼을 조금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자리에 쓰러졌다더구나.”장윤범은 바지 호주머니에서 벽돌 크기의 휴대폰을 꺼냈다.“여기, 네 아버지 휴대폰.”서수현은 휴대폰을 받아들어 손에 꼭 쥐었다.“정말 감사해요, 아저씨. 다른 일 있으시면 먼저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너 혼자 괜찮겠니?”“네, 괜찮아요. 전에 아버지 입원하셨을 때도 제가 다 한 걸요.”“알겠다. 그럼 먼저 가볼게.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부부는 모든 사랑을 자신의 하나뿐인 딸에게 쏟아부었다.그 시절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시골에서는 첫 아이가 여자아이일 경우, 부모 모두 30세가 넘어서야만 둘째를 가질 수 있었다.그렇게 서명철 부부는 30세가 되자마자 서혜민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둘째를 가졌다.하지만 애석하게도 둘째 역시 딸이었다. 그런데도 부부는 결국 셋째까지 낳으며 아들을 향한 강한 열망을 버리지 못 했다.서혜민은 집안의 장녀로서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고 숙제할 시간도 줄여야 했다. 결국, 서혜민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일찌감치 사회로 나가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그녀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선생님도 그녀가 아주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하며 열심히만 한다면 좋은 인재가 될 거라는 말을 해왔었다. 하지만 서명철 부부는 교사의 말을 무시하고는 서혜민의 중학교 자퇴를 강하게 밀어붙였다.중학교를 자퇴하는 그날, 서혜민은 한참이나 울었고 서수현도 그런 자신의 사촌 동생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아들을 대할 때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는 서명철 부부에게도 분통이 터졌다.서혜민이 일을 시작한 이후, 서수현도 관리규정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3년 동안 연락이 끊겼고 서수현이 수능시험을 마치고 나서야 간신히 다시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그때의 두 사람은 예전 같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서수현은 서혜민의 성격에 조금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서명철처럼 다른 사람의 이득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아득바득 매달리는 성격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람 자체에는 변함없이 여전히 착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랬던 서혜민이 지금 이런 수준까지 되어 있을 줄 미처 상상도 못 했다!서혜민이 서수현을 찾아왔던 그 날, 서수현은 마침 전화를 받고 있었고 서혜민은 밖에서 그녀의 통화내용을 전부 엿듣게 되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연 비서가 서수현에게 온천 리조트로 가라고 지시하고 있었고, 그뿐만 아니
서수현은 아버지를 대신해 입원 수속 절차를 마치고 점심 식사까지 따로 챙겨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석철이 눈을 떴다.“아버지, 정신이 좀 드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서석철은 눈을 깜빡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옆 병상의 대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제야 서석철은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서서히 기억나기 시작했다.초소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서석철은 서명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그는 갑자기 걸려온 서명철의 전화에 잠시 의문을 품었다. 전화를 받고 보니 서명철은 서수현이 염치없이 매형을 유혹했다는 둥, 서석철이 동생이 잘 나가는 꼴을 못 봐 딸을 부추겨 서혜민의 가정을 파탄 내려 했다는 둥, 온갖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서석철은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 탓에 서명철과 언쟁을 벌이게 됐다.하지만 서명철의 말은 점점 거칠어지며 그 정도가 이미 선을 넘었다. 말이 느리고 말발이 서툰 서석철은 동생을 이기지 못하고 분출해내지 못한 화만 잔뜩 쌓이게 됐다. 그러던 중, 서석철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머리가 조금 어지럽구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서석철이 천천히 입을 떼더니 물었다.“의사 선생님께서는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거라고 하더라고요. 순간적으로 화를 내셔서 그런 거라고 하던데, 아버지 앞으로는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최대한 신경 쓰려 하지 마시고요.”서석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너도 알잖니, 네 둘째 삼촌이 말을 얼마나 험하게 하는지. 근데, 너랑 네 매형이랑…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다 거짓말이에요. 혜민이가 지어낸 말이라고요.”서수현은 애써 아버지를 안심시켰다.“이 일은 이사님께서 정리 하실 테니까, 아버지는 더 신경 쓰지 마시고 몸조리나 잘하세요.”부준서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몸 상태가 좋아졌을 때, 기회를 봐가며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또 피해자 조작하려고 드네. 수유 기간에 이혼 소송 진행하는 거든, 외도이든 간에 문제는 부현승한테 있는 게 맞잖아. 왜 굳이 쉴드를 쳐주려고 하지?”…논란의 주제가 부현승의 외도에서 수유 기간의 이혼 문제로 옮겨지며 谢沐는 여론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부현승은 이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서혜민은 부현승이 대응을 시작하자 어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부현승이 외도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박하면 서혜민은 부준서가 서수현과 부현승을 대상으로 진행한 친자확인 결과지를 공개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부현승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고소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당황한 서혜민이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했다.“… 설마 저 감옥까지 가는 건 아니겠죠?”서혜민이 걱정스레 물었다.대충 상황파악을 마친 변호사가 대답했다.“명예훼손죄 자체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죄라서 최대 형량이라고 해봤자 징역 3년입니다. 혜민 씨의 경우, 피해가 커서 1~2년 정도는 나올 것 같네요. 부현승 씨 외도 증거라도 있으신가요? 합법적으로 얻으신 증거가 있다면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없어요.”“없으시다면 재판 전까지는 최대한 증거를 확보해야 할 겁니다. 예를 들어, 부현승 씨가 외도 중인 현장을 어디에서 잡았는지, CCTV 영상을 찾아보거나, 은행 계좌 내역, 회사 동료들의 증언 같은 것들 말이죠.”“그것도… 다 없습니다.”“없다면 찾아봐야죠. 아직 재판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요!”“그러니까 제 말은… 다 찾아봤는데 없었다고요!”그 말에 변호사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서혜민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그럼 대체 어떻게 부현승 씨의 외도를 확신하셨던 거죠?”“아이가, 그 두 사람의 아이거든요.”변호사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부현승 씨가 정자를 기증한 적이 있었나요? 혜민 씨 사촌분과 시험관 수술을 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됩니다. 아이의 혈연만으로는 외도를 입증하기 힘들 겁니다.”“정자 기증은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자연스러운
변호사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아무 증거도 없고, 시간도 이렇게 많이 지나서 사건을 접수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 보입니다.”“언니가 직접 경찰에 신고해도 어려운 건가요?”변호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증거가 없어서 어려울 겁니다.”변호사 사무실을 나오는 서혜민의 정신은 어딘가 혼미해져 있었다.두 시간의 상담을 통해 서혜민이 얻은 정보는 하나뿐이었다. 현재 상황이 자신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고, 뒤집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네티즌들이 그녀를 대신해 억울해하는 중인 ‘수유 기간 이혼’ 문제도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게다가 부현승은 대중적인 인물도 아니었던 탓에 이 이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묻힐 것이다.지금 서혜민에게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아있었다. 바로 부현승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서혜민이 언론에 공개적으로 자신이 했던 발언을 정정하고 부현승도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다.하지만 서혜민은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서수현은 모든 면에서 서혜민보다 뛰어났고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서수현만 주목받아왔었다. 서혜민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서수현의 들러리로만 살아왔다.서혜민이 부현승과 사귀면서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비로소 그녀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한 번은 서혜민이 자신이 살던 시골 마을로 돌아갔을 때, 1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엄마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나 학교 가기 싫어! 중졸이면 어때? 서혜민도 중졸이잖아. 지금 얼마나 잘 됐는지 한 번 봐! 부잣집 남편 만나서 명품만 걸치고 동생들까지 다 먹여 살리고 있잖아. 근데 대학교까지 간 서수현은? 지금 서혜민 밑에서 일하고 있잖아! 난 나중에 서혜민 남편보다 더 잘난 남편 만날 거야!”그 말을 들은 서혜민은 내심 기뻤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서수현의 들러리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이 흔히 부러워하는 “친구 집 딸”이었다.부현승의 존재가 너무 빛나는 탓에 한순간에 서수현의 희미하기 그지없는 빛을 가려버렸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