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지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형사 처분을 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아직 안 늦었어. 네 인생은 아직 4분의 1밖에 안 지났으니까. 앞으로 많은 게 좋은 날들이야!”임가희가 말했다.임연지는 그 말에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음속에서는 그녀를 삼킬 듯한 거대한 증오심이 피어올랐다.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매일 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계속해서 물었다.“내 인생은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걸까?”앞이 보이지 않았다.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연지야, 나도 네가 온하랑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형기를 무사히 잘 넘기는 게 제일 중요해. 절대 쓸데없이 허튼짓하려고 들면 안 된다.”임가희가 임연지를 달래며 말했다.“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서는 절대 안 돼. 이 시간이 지나 결국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알겠어요.”임연지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 순간, 임연지의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였다.“맞다, 고모. 온하랑도 임신 7개월 차 아니에요? 아이가 태어나도 살아가는 데는 문제 없는 시기잖아요?”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임가희가 말했다.“가능하긴 하지만 너무 위험해.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한다면…”“고모가 방금 가르쳐 주셨잖아요. 권력을 빌려서 권력을 대항하라고. 부선월을 조금만 더 빨리 돌아오게 해주세요. 가능한 제 출산 예정일에 맞춰서요.”…아침이 밝았다. 온하랑은 아침을 먹으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부승민을 바라보며 무심코 물었다.“짐은 다 챙겼어?”“짐 챙길 필요 없어. 안 갈 거니까.”부승민이 차분하게 말했다.온하랑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예 파기된 거야?”“응.”“그래, 알겠어.”부승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휴지로 입을 닦았다.
온하랑 역시 기사를 통해 부현승과 서혜민의 “이혼” 소식을 알게 되었다.서혜민은 매체 인터뷰를 통해 남편인 부현승이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자신의 사촌과 바람이 났다고 폭로했다.서혜민의 눈물 어린 고발은 많은 네티즌의 동정과 격려를 받았다. 이후, 네티즌 중 누군가가 부현승이 바로 부승민의 사촌 동생이며 부씨 가문의 셋째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폭로했다.기사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인기 검색어 순위에까지 올랐다.온하랑 역시 이 사건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판을 제대로 뒤엎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한순간에 모든 기사가 인터넷에서 사라졌고 인기검색어 올라갔던 검색어도 금방 내려갔다.아마 BX 그룹의 홍보부가 사건 처리를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이런 기사는 절대 BX 그룹에 좋은 영향을 주는 기사가 아니었으니까.하지만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 한구석에서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부현승이 서혜민의 사촌과 바람이 났다고?그게 사실일까?온하랑이 하는 부현승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서혜민의 눈물 어린 폭로를 보면 그녀의 말이 딱히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온하랑이 정보를 더 알아보기 위해 검색창을 누르려던 순간, 도우미가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오전 휴대폰 사용 시간이 끝나버린 것이다.…부현승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던 그때, 서수현은 마침 컴퓨터 코드와 씨름하느라 애먹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팀의 두 친구도 대회 준비로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전화벨 소리를 들은 서수현은 몇 번 더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아쉬운 듯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부현승 이사님?잠시 망설인 서수현은 친구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이사님? 무슨 일이세요?”부현승이 학교를 떠난 이후, 두 사람은 더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서수현도 부승민과 서혜민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고 본격적으로 대회 준비에만 몰두했다.그런 지금, 부현승에게서 전화가
서수현은 고개를 돌려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포니테일을 한 어린 소녀가 휴대폰을 보며 맞은편에 앉은 친구에게 불평하고 있었다.소녀의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세상에 이상한 사람들 진짜 많잖아. 학벌이 인격이랑 같은 것도 아니고… 4학년 컴공과라고 하던데, 이거 신고하면 졸업 못 하게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아마 가능성 없을걸. 불법도 아니잖아, 그냥 역겨운 거지.”“…”서수현의 맞은편에는 그녀의 친구가 앉아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친구는 자신의 학과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셋이서 만든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야, 우리 옆에 있는 애들 지금 우리 학과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너 혹시 들었어?”서수현이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친구가 메시지 하나를 더 보냈다.“학과 단톡에서 누가 이 얘기하고 있다는데? 나 구경 좀 하고 올게.”“…”한동안 마우스 위에 엄지를 올려놓고 계속 고민하며 망설이던 서수현도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단톡방을 클릭해 내용을 확인해보았다.단톡방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시작은 누군가가 인스타에서 본 게시물을 공유하며 시작되었다.“님들 이거 봤어요? 소프트웨어 공학과라고 하던데?”“저도 아침에 봤음요.”“지금은 인기검색어 내려갔던데요.”“설마 우리랑 같이 수업 듣는 그 서수현은 아니겠죠? 설마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솔직히 전에 봤을 때 살이 조금 찐 것 같긴 했어요. 근데 그냥 살찐 것 같지는 않고, 묘하게 임신한 사람 체형이었단 말이죠.”“맞아요, 저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서수현의 친구는 단톡방을 확인한 순간, 흥미롭다는 듯 가십거리를 즐기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그녀는 서수현을 한 번 쳐다보더니 개인 톡방을 열어 물었다.“수현아, 너랑 그 이사님… 그거 설마 진짜야?”서수현이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했다.“당연히 아니지.”“그런데 왜 아무 해명도 안 해?”서수현은 힘없이 한숨을 푹 내
서수현의 머릿속에서 “윙”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몸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수현아?”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서수현이 말했다.“알겠어요, 아저씨. 지금 당장 갈게요.”서수현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응급 상황임을 알리는 응급실의 불이 켜져 있었고 창고 관리인은 복도에서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아저씨.”급하게 달려온 서수현이 관리인을 발견하고 달려와 물었다. 병원 응급실까지 뛰어오느라 서수현의 얼굴은 이미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숨을 크게 들이쉰 그녀가 물었다.“저희 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의사가 뭐래요?”“수현아.”관리인은 다급히 달려온 서수현을 발견하자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아직도 안에서 응급 처치 중이야.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들어가더구나.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라. 의사들 반응 보아하니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서수현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혹시라도 아버지가 잘못될까 두려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아저씨, 아버지께서 어떻게 쓰러지신 건지 알고 계세요?”“나도 그때 자리에 없어서 잘은 모르겠구나. 다른 사람들 말로는 네 아버지가 누구랑 통화하면서 말다툼을 조금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자리에 쓰러졌다더구나.”장윤범은 바지 호주머니에서 벽돌 크기의 휴대폰을 꺼냈다.“여기, 네 아버지 휴대폰.”서수현은 휴대폰을 받아들어 손에 꼭 쥐었다.“정말 감사해요, 아저씨. 다른 일 있으시면 먼저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너 혼자 괜찮겠니?”“네, 괜찮아요. 전에 아버지 입원하셨을 때도 제가 다 한 걸요.”“알겠다. 그럼 먼저 가볼게.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부부는 모든 사랑을 자신의 하나뿐인 딸에게 쏟아부었다.그 시절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시골에서는 첫 아이가 여자아이일 경우, 부모 모두 30세가 넘어서야만 둘째를 가질 수 있었다.그렇게 서명철 부부는 30세가 되자마자 서혜민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둘째를 가졌다.하지만 애석하게도 둘째 역시 딸이었다. 그런데도 부부는 결국 셋째까지 낳으며 아들을 향한 강한 열망을 버리지 못 했다.서혜민은 집안의 장녀로서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고 숙제할 시간도 줄여야 했다. 결국, 서혜민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일찌감치 사회로 나가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그녀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선생님도 그녀가 아주 똑똑한 아이라고 칭찬하며 열심히만 한다면 좋은 인재가 될 거라는 말을 해왔었다. 하지만 서명철 부부는 교사의 말을 무시하고는 서혜민의 중학교 자퇴를 강하게 밀어붙였다.중학교를 자퇴하는 그날, 서혜민은 한참이나 울었고 서수현도 그런 자신의 사촌 동생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아들을 대할 때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는 서명철 부부에게도 분통이 터졌다.서혜민이 일을 시작한 이후, 서수현도 관리규정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3년 동안 연락이 끊겼고 서수현이 수능시험을 마치고 나서야 간신히 다시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그때의 두 사람은 예전 같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서수현은 서혜민의 성격에 조금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서명철처럼 다른 사람의 이득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아득바득 매달리는 성격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람 자체에는 변함없이 여전히 착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랬던 서혜민이 지금 이런 수준까지 되어 있을 줄 미처 상상도 못 했다!서혜민이 서수현을 찾아왔던 그 날, 서수현은 마침 전화를 받고 있었고 서혜민은 밖에서 그녀의 통화내용을 전부 엿듣게 되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연 비서가 서수현에게 온천 리조트로 가라고 지시하고 있었고, 그뿐만 아니
서수현은 아버지를 대신해 입원 수속 절차를 마치고 점심 식사까지 따로 챙겨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석철이 눈을 떴다.“아버지, 정신이 좀 드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서석철은 눈을 깜빡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옆 병상의 대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제야 서석철은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서서히 기억나기 시작했다.초소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서석철은 서명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그는 갑자기 걸려온 서명철의 전화에 잠시 의문을 품었다. 전화를 받고 보니 서명철은 서수현이 염치없이 매형을 유혹했다는 둥, 서석철이 동생이 잘 나가는 꼴을 못 봐 딸을 부추겨 서혜민의 가정을 파탄 내려 했다는 둥, 온갖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서석철은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 탓에 서명철과 언쟁을 벌이게 됐다.하지만 서명철의 말은 점점 거칠어지며 그 정도가 이미 선을 넘었다. 말이 느리고 말발이 서툰 서석철은 동생을 이기지 못하고 분출해내지 못한 화만 잔뜩 쌓이게 됐다. 그러던 중, 서석철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머리가 조금 어지럽구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서석철이 천천히 입을 떼더니 물었다.“의사 선생님께서는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거라고 하더라고요. 순간적으로 화를 내셔서 그런 거라고 하던데, 아버지 앞으로는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최대한 신경 쓰려 하지 마시고요.”서석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너도 알잖니, 네 둘째 삼촌이 말을 얼마나 험하게 하는지. 근데, 너랑 네 매형이랑…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다 거짓말이에요. 혜민이가 지어낸 말이라고요.”서수현은 애써 아버지를 안심시켰다.“이 일은 이사님께서 정리 하실 테니까, 아버지는 더 신경 쓰지 마시고 몸조리나 잘하세요.”부준서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몸 상태가 좋아졌을 때, 기회를 봐가며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또 피해자 조작하려고 드네. 수유 기간에 이혼 소송 진행하는 거든, 외도이든 간에 문제는 부현승한테 있는 게 맞잖아. 왜 굳이 쉴드를 쳐주려고 하지?”…논란의 주제가 부현승의 외도에서 수유 기간의 이혼 문제로 옮겨지며 谢沐는 여론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부현승은 이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서혜민은 부현승이 대응을 시작하자 어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부현승이 외도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박하면 서혜민은 부준서가 서수현과 부현승을 대상으로 진행한 친자확인 결과지를 공개할 생각이었다.하지만 부현승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고소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당황한 서혜민이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했다.“… 설마 저 감옥까지 가는 건 아니겠죠?”서혜민이 걱정스레 물었다.대충 상황파악을 마친 변호사가 대답했다.“명예훼손죄 자체가 상대적으로 가벼운 죄라서 최대 형량이라고 해봤자 징역 3년입니다. 혜민 씨의 경우, 피해가 커서 1~2년 정도는 나올 것 같네요. 부현승 씨 외도 증거라도 있으신가요? 합법적으로 얻으신 증거가 있다면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없어요.”“없으시다면 재판 전까지는 최대한 증거를 확보해야 할 겁니다. 예를 들어, 부현승 씨가 외도 중인 현장을 어디에서 잡았는지, CCTV 영상을 찾아보거나, 은행 계좌 내역, 회사 동료들의 증언 같은 것들 말이죠.”“그것도… 다 없습니다.”“없다면 찾아봐야죠. 아직 재판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요!”“그러니까 제 말은… 다 찾아봤는데 없었다고요!”그 말에 변호사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서혜민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그럼 대체 어떻게 부현승 씨의 외도를 확신하셨던 거죠?”“아이가, 그 두 사람의 아이거든요.”변호사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부현승 씨가 정자를 기증한 적이 있었나요? 혜민 씨 사촌분과 시험관 수술을 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됩니다. 아이의 혈연만으로는 외도를 입증하기 힘들 겁니다.”“정자 기증은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자연스러운
변호사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아무 증거도 없고, 시간도 이렇게 많이 지나서 사건을 접수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 보입니다.”“언니가 직접 경찰에 신고해도 어려운 건가요?”변호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증거가 없어서 어려울 겁니다.”변호사 사무실을 나오는 서혜민의 정신은 어딘가 혼미해져 있었다.두 시간의 상담을 통해 서혜민이 얻은 정보는 하나뿐이었다. 현재 상황이 자신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고, 뒤집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네티즌들이 그녀를 대신해 억울해하는 중인 ‘수유 기간 이혼’ 문제도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게다가 부현승은 대중적인 인물도 아니었던 탓에 이 이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묻힐 것이다.지금 서혜민에게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아있었다. 바로 부현승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서혜민이 언론에 공개적으로 자신이 했던 발언을 정정하고 부현승도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다.하지만 서혜민은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서수현은 모든 면에서 서혜민보다 뛰어났고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서수현만 주목받아왔었다. 서혜민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서수현의 들러리로만 살아왔다.서혜민이 부현승과 사귀면서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비로소 그녀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한 번은 서혜민이 자신이 살던 시골 마을로 돌아갔을 때, 1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엄마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나 학교 가기 싫어! 중졸이면 어때? 서혜민도 중졸이잖아. 지금 얼마나 잘 됐는지 한 번 봐! 부잣집 남편 만나서 명품만 걸치고 동생들까지 다 먹여 살리고 있잖아. 근데 대학교까지 간 서수현은? 지금 서혜민 밑에서 일하고 있잖아! 난 나중에 서혜민 남편보다 더 잘난 남편 만날 거야!”그 말을 들은 서혜민은 내심 기뻤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서수현의 들러리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이 흔히 부러워하는 “친구 집 딸”이었다.부현승의 존재가 너무 빛나는 탓에 한순간에 서수현의 희미하기 그지없는 빛을 가려버렸다.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