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서인아를 구하느라 폐허 속에 갇혀있던 탓에 임유환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었다.임유환은 철근에 배가 찔려 몇 바늘씩이나 꿰맨 채로 누워있었는데 다행히도 스승님의 혹독한 훈련과 수많은 약재 덕분에 남다른 회복속도를 자랑하며 열몇 시간 만에 몸이 거의 다 회복됐었다.그래서 당시 임유환의 주치의이자 의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최서우의 주의를 끌게 된 것이다.임유환에게 흥미가 생긴 최서우는 말끝마다 잘생긴 환자분이라며 임유환을 유혹해댔고 임유환더러 자신의 연구를 도와달라고 졸라왔었다.하지만 그 연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던 임유환은 표본으로 잘려나가긴 싫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했었다.하지만 임유환의 예상과 반대로 그 거절 뒤에 따른 것은 최서우의 더욱 강력해진 유혹이었다.최서우는 임유환의 상태를 살펴본다는 이유로 병실에 들어와 그의 복부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그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임유환은 너무 흥분한 탓에 상처까지 다시 벌어져 버린 것이다.최서우는 그제야 의사를 데려온다는 말만 남기고 멋쩍은 듯 병실을 빠져나갔다.그렇게 주치의에게 버려진 채 혼자 어금니를 깨물며 고통을 참아내던 그 날의 추억을 회상하던 임유환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지금의 임유환은 최서우가 다시 눈을 떠서 잘생긴 환자분이라며 저를 쫓아다녀 주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일어나주기만 한다면 임유환은 최서우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연구실에 끌려가서 그녀의 표본이 된다 해도 기꺼이 모른 척 같이 가줄 수 있었다.“서우 씨, 얼른 좀 일어나요 제발...”임유환은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서우 씨가 일어나기만 하면, 멀쩡히 눈만 떠주면 서우 씨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요. 그게 뭐든 다 들어줄게요...”임유환의 간절한 기도에 답변하듯 최서우의 오른손의 손가락 하나가 살짝 움직였다.하지만 그마저도 단 한 번으로 끝났고 손가락은 다시 움직임을 멈추었다....한편 정씨 집안의 서재
“알겠습니다, 가주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그래, 다들 이만 나가봐.”“예!”정서진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을 한 부하들이 나가고 고요해진 서재에서 정서진의 두 눈은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이번 암살이 실패한 것도 그리고 임유환이 무제의 실력에 오른 것도 전부 정서진의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었다.스물일곱의 나이로 무제의 경지에 올랐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정서진이었기에 정서진은 더더욱 임유환을 살려둘 수가 없었다.그리고 임준호와 채수빈 역시 임유환과 만나게 해서는 안 되었다.그들이 만남을 이어오다 자칫해서 임유환이 그날 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정씨 집안에는 큰 화가 미칠 것이기에 우선은 그것부터 막고 봐야 했다.그리고 임유환을 어떻게 죽일 건지는 천천히 다시 계획을 세워 두 번의 실패는 없게 한 번에 끝내야 했다....깊은 밤, 연경 제일병원.임유환은 밤이 깊었음에도 전혀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릿속엔 온통 최서우 생각뿐이었다.그래서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꼭 모은 채 최서우가 빨리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유환아, 소파에서 좀 쉬어. 여긴 내가 보고 있을게.”그때 임유환은 제 곁으로 다가와 다정히 속삭이는 서인아에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서인아가 바라본 임유환의 눈에는 실핏줄이 가득했다.아마 지친 몸을 정신력으로 버텨내다가 생긴 것 같았다.“괜찮아, 내가 있을게.”하지만 임유환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너랑 조 중령님도 오래 있었는데 얼른 가서 쉬어. 내 걱정은 말고.”“그렇지만 너 눈이...”서인아는 임유환을 이대로 뒀다간 그에게도 무슨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져 걱정스러운 눈으로 임유환을 바라보았다.“괜찮아, 이 정도로 나 어떻게 되지 않아. 그보다 네가 종일 뛰어다니느라 고생했지.”임유환은 서인아를 달래듯 다정히 바라보며 웃었다.“아냐, 나 안 힘들어. 그럼 나도 여기 같이 있을게.”그에 서인아도 웃으며 의자를 끌어와 임유환 옆에 앉았다.“나도 잠
“서우 씨, 나 기억 안 나요?”의아한 표정의 최서우를 보는 임유환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갔다.“누... 누군데요?”말을 하며 몸을 일으키던 최서우는 절반쯤 일어났을 때 머리에서 느껴지는 깨질듯한 통증에 순간 숨을 들이마시며 이를 악물었다.“서우 씨!”그에 걱정된 임유환이 달려가 최서우를 부축하려 했지만 최서우는 단번에 그 손을 내친 채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는 짓이에요!”최서우에게 얻어맞은 임유환의 손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찌릿찌릿한 통증이 전해지는 것 같았지만 임유환은 그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놀라버렸다.설마 기억을 잃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저를 이토록 경계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서우야, 나는 알아보겠어?”그런 최서우가 마찬가지로 걱정된 조명주가 나서며 다급히 물었다.“명주야!”다행히 조명주는 알아본 듯 최서우가 환히 웃었다. 하지만 이내 의아한 듯 물어왔다.“명주야, 너 지금 사관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여깄어?”“그리고 나는 왜 또 여깄는 거야? 여기 병원 같아 보이는데.”정말로 기억을 잃은 듯해 보이는 최서우의 말에 조명주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너 진짜 아무런 기억도 없는 거야?”“기억이라니? 무슨 기억 말하는 거야?”하지만 조명주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최서우는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였다.“우리 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래!”“우리 지금 3학년이잖아. 방학에 여행 가기로 한 거 안 잊었지?”“근데 너 아까 내가 물어본 말에 대답 안 했어 아직. 네가 왜 우리 학교에 온 거야?”“그리고 내가 왜 여깄어? 나 아까까지 도서관에서 책 보고 있었는데...”“서우야, 너...”당황스러워하는 최서우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조명주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했다.“서우야, 아무래도 네가 기억을 잃은 것 같아.”“기억을 잃었다고?”조명주의 말에 깜짝 놀란 최서우가 몸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도 관
“기억이 안 나.”기억을 잃기 전에 최서우가 임유환을 남다르게 생각한다는 걸 아는 조명주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었다.“다시 잘 생각해봐. 정말 모르겠어?”“응, 모르겠어.”“그래...”조명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임유환은 저를 떠올리지 못하는 최서우를 보며 마음 한편이 아파왔다.“서우야, 그럼 서인아 씨는 알아?”포기하지 않고 묻는 조명주에 최서우는 아까와는 상반되는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당연하지!”“서인아 씨는 우리 여자들의 우상이잖아. 예쁘고 카리스마도 있고. 어린 나이에 벌써 재계 여왕님이시잖아.”서인아에 대한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던 최서우는 그제야 임유환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여자를 주의 깊게 보았는데 그 실루엣이 서인아와 너무나도 흡사했다.“서인아 씨? 어떻게 여기 계세요?”서인아는 눈을 크게 뜨고 묻는 최서우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서우 씨가 기억을 잃었으니 당연히 모르겠죠. 우리 아까 같이 밥도 먹었는데.”미소를 짓는 서인아의 눈에는 기억을 잃어버린 최서우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했다.“우리가 같이 밥을 먹었다고요? 서인아 씨랑 저랑요?”한편 최서우는 자신이 서인아와 함께 밥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연신 되물었다.“명주야, 나 얼마나 잔 거야?”최서우는 좀 전까지만 해도 깊은 꿈을 꾸고 있었다. 너무나도 생생해서 마치 현실 같은 꿈을.분명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너무 피곤해서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누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려서 힘껏 눈을 떠봤더니 지금 이 상황이었다.“수술한 시간까지 다 하면 열두 시간쯤 됐어.”“열두 시간이면 그렇게 길지도 않은데...”조명주의 대답에 최서우는 혼자 중얼거렸다.현실에서는 고작 열두 시간 지났을 뿐인데 꿈속에서는 한 세기를 보낸 것 같았다.“응, 빨리 일어나서 다행이야.”“지금 어디 불편한 덴 없어?”걱정스레 묻는 조명주에 최서우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냥 머리가 좀 아픈 것 말고는 다 괜찮아.”“
“어...”제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임유환이 벙쪄있자 조명주도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유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빨리 옷 내려요!”“하...”이러면 둘의 첫 만남이라도 떠올리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별 소용이 없자 임유환은 실망한 듯 옷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정도로 최서우는 빨개진 얼굴로 임유환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최서우는 조명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명주야, 내가 진짜 이런 변태를 구하려고 총을 맞았다는 거야?”“어...”최서우에게 자신이 변태 취급을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던 임유환은 입꼬리가 떨려오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서우야, 유환 씨는 변태가 아니야.”그렇게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대신해 조명주가 해명을 해주고 있었다.“너랑 유환 씨는 병원에서 처음 만났어. 그때 유환 씨 배에 난 상처를 살펴준 게 너고, 그리고 너 때문에 유환 씨 상처가 다시 벌어지기도 했었어.”그때까지만 해도 쌩쌩하게 돌아다니며 임유환을 괴롭히던 최서우를 생각하니 조명주는 제가 괜히 부끄러워졌다.“알겠어.”조명주가 저를 속일 리 없었기에 최서우도 그런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임유환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그때 최서우를 자극할 다른 방법이 떠오른 임유환은 다시 입을 열었다.“서우 씨가 전에 나를 잘생긴 환자분이라고 불렀던 건 기억 나요?”“잘생긴 환자분이요?”임유환의 말을 들은 최서우는 이불로 온몸을 감싸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당신 진짜 변태 아닌 거 확실해요?”“아니에요...”저를 노려보는 최서우에 임유환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지금의 최서우는 마치 대학 시절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조효동이라는 인간에게 상처받지도 않고 남자를 혐오하는 병 같은 것도 없는 활발하고 해맑았던 그때로.하지만 저마저도 깨끗이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임유환은 슬퍼질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최서우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요...”그때 힘들어하는 임유환을 보아낸 최서우가 미안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괜찮아요, 서우 씨가 눈 뜬 걸로 난 충분해요. 기억은 천천히 회복하면 되죠.”최서우의 사과에 정신을 차린 임유환은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최서우를 보며 말했다.“그리고 기억을 못 해낸대도 괜찮아요. 우리 앞으로 천천히 알아가요. 나에 대한 서우 씨 인상이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게 나도 노력할게요.”“일단 내 소개부터 할까요? 난 임유환이라고 해요.”최서우는 내밀어진 임유환의 손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의 진심 어린 눈을 보고 결심한 듯 손을 내밀었다.“최서우예요.”“그럼 우리 이제 다시 알아가 봐요.”임유환은 제 손을 잡아 온 최서우를 보며 웃었다.“누워있어요. 간호사한테 의사 선생님 모셔오라고 할게요. 검사 다시 해봐요.”“고마워요.”저 낯선 고맙다는 말을 들은 임유환은 순간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고개를 떨구었다.예전 같았으면 잘생긴 환자분이라며 놀리듯 말했을 최서우인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모두 사라져버려 임유환은 또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려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최서우는 조명 탓에 유난히 길고 처량해 보이는 임유환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왔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라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명주야, 나랑 저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였어?”“친구.”조명주는 최서우의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사이가 아주 좋은 친구였어.”“사이좋은 친구?”혼자 중얼거리는 최서우의 눈동자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5분 뒤, 병실로 들어온 의사는 최서우에게 간단한 검사를 진행했고 기억을 저장하는 부분에 손상이 있는 것 말고는 다른 이상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정말 기억상실이 맞긴 한 것 같았다.“선생님, 그럼 제 친구가 기억을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그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임유환의 질문에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최서우 씨
“아니에요... 그냥...”최서우는 고개를 젓는 임유환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그냥 뭐요?”“그냥...”임유환은 수술 때문에 머리가 다 밀려버려 원래의 미모를 잃어버린 최서우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또 눈시울을 붉혔다.“그냥... 내가 서우 씨를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래요.”“남자가 뭐 이렇게 감성적이에요. 나도 같이 슬퍼지잖아요.”자책하는 임유환을 보고 있자니 최서우의 가슴도 같이 저릿해 났다.“그래요 유환 씨, 서우 힘들게 깨어났는데 기뻐해야죠!”그때 덩달아 슬퍼진 조명주가 일부러 임유환을 나무라며 말했다.“하하, 미안해요.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눈에 뻔히 보이는 억지웃음이었지만 다들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최서우의 일을 겪으면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한층 더 돈독해진 것 같았다.혼자 연경에 있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는데 서인아는 이런 낯설지마는 따뜻한 느낌이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때 보고를 위해 병원에 온 흑제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임 선생님께서 알아보라고 한 일 거의 다 알아내긴 했는데...”“근데 뭐요?”말을 멈추는 흑제에 임유환은 눈을 치켜뜨며 그를 바라보았고 서인아와 조명주 역시 긴장한 듯 흑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그 경찰이 잡혀가는 도중에 혼자 독을 먹고 자결했답니다.”“독을 먹고 자결해요?”흑제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아까의 일을 떠올리는 임유환이었다.임유환을 공격하던 검은 옷의 킬러들과 같은 방법으로 자결한 걸 보니 아마 한패인 듯싶었다.“그 사람 자료는 찾았어요?”“그건 못 찾았습니다.”“사람을 시켜서 시스템을 뒤져봤는데 그런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답니다.”“역시 계획 살인이었네요.”고개를 젓는 흑제에 임유환의 눈빛이 다시금 차가워졌다.“그럼 그 가짜 기자는요? 똑같이 독을 먹고 자결했겠네요?”“네...”“하하, 정말 철저히 계획된 움직임이네요.”냉소를 흘리던 임유환은 이내 드는 의문에 다시 흑제를 바라
“있긴 한데 왜 그러세요?”“제가 잠시 머물 수 있을까요?”“당연하죠!”일부러 조심스레 묻는 임유환에 흑제는 심장이 철렁했다.주인님이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물을 때마다 수명이 깎여나가는 듯 불편했다.하지만 아직 임유환의 신분을 노출할 수는 없었기에 흑제는 억지로 임유환에게 맞추며 연기를 이어나갔다.“감사합니다, 흑제님.”임유환의 미소에 흑제도 얼른 두 손을 모으며 인사를 했다.“별말씀을요, 집은 제가 얼른 비워놓겠습니다.”“감사합니다.”그에 임유환도 호탕하게 웃어 보였고 제 주인의 의도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흑제는 그냥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흑제가 나가자 임유환이 환경과 프라이버시를 강조할 때부터 의아하게 생각하던 서인아와 조명주의 시선이 임유환에게로 향했다.공교롭게 두 여자 모두 혹시 집에 여자를 두려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한 탓에 심문하듯 임유환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 따가운 시선을 느낀 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눈꼬리를 떨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요?”“별장은 왜 빌리는 거야?”먼저 질문을 한 서인아는 죄인을 추궁하는 듯 날카롭게 물었다.“왜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건데?”“하하.”역시 여자는 감성의 동물이라더니 프라이버시에만 집중하고 환경을 강조한 건 까맣게 잊어버린 서인아에 임유환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왜,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하지만 임유환의 웃음에 서인아는 아까보다 더 집요하게 임유환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의심이 더 짙어진 것 같았다.“그럴 리가.”임유환은 멋쩍게 웃으며 해명을 했다.“환경 좋고 프라이버시 확실한 데로 알아봐달라고 한 건 서우 씨의 회복을 위해서야.”“서우 씨 회복?”잠시 당황하던 서인아는 이내 임유환의 뜻을 알아차렸다는 듯 물었다.“너 설마 서우 씨를 별장으로 옮기려는 거야?”“응.”고개를 끄덕인 임유환은 제 계획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앞으로 서우를 별장에 들이고 제가 매일 옆에서 침 치료를 해줄 생각이었다.그러면 기억력을 자극하는 데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