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했어요?”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윤동호 부부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유환 씨, 방금 말한 돈을 안 내도 된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아저씨, 아주머니...”임유환이 설명하려 할 때 조명훈이 나서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돈을 안 낸다고? 설마 우리한테 빌붙으려는 거예요?”“빌붙는다니요.”임유환이 언짢은 듯 눈썹을 꿈틀거리자 조명훈 비웃으며 말했다.“그게 아니면 뭔데요? 당신이 돈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잖아요.”“호텔이 내건 데 내가 왜 여기서 돈 내고 밥을 먹겠어요.”“호텔이 당신 거라고요? 허세도 작작 부려야지.”담담히 말하는 임유환에 조명훈은 조소로 받아쳤다.“당신이 정말 여기 사장이면 직원들이 왜 당신을 몰라보겠어요?”“제가 직접 호텔에 오는 일은 아주 드무니까요. 못 알아보는 건 당연하죠.”“너!”조명훈은 임유환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아들, 신경 쓰지마, 그냥 있는 척이라도 하게 내버려 둬.”조덕화가 그런 조명훈을 말리며 낮게 말했다.어차피 임유환이 멋대로 주문한 음식이니 임유환더러 계산하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네, 아빠.”조명훈은 조덕화의 말에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자기야, 뭐하러 저런 사람들이랑 말을 섞어.”“솔직히 다 아저씨 덕분에 저 사람들도 여기 앉아있는 거잖아. 아저씨 돈이랑 권력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지.”“그런데도 감사하기는커녕 아저씨만 원망하고, 돈 없는 사람들이 허세는 더 많다니까. 급 떨어져.”“우리 자기 왜 이렇게 똑똑해? 하는 말마다 다 맞네.”이신비의 말을 들은 조명훈은 금세 또 기분이 좋아져서 웃어댔다.“역시 우리 맘 알아주는 건 신비밖에 없다니까.”조덕화 부부도 예비 며느리의 말을 듣고는 아주 흡족해하며 미소를 지었다.“저는 사실만 얘기한 것뿐이데요 뭘.”이신비는 입술을 말아 물며 조신한 척을 해댔다.미래의 시부모님이기도 하고 또 그 집안의 권력과 재력이 제 인생을 바꿔줄 수도 있었기에 이신비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잘 보
“염 지배인님?”진짜로 이곳에 등장한 염지훈에 다들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염... 염 지배인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조덕화가 놀라운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당신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조덕화에게는 쌀쌀맞게 대하던 염지훈이 임유환을 보자 공손하게 90도 인사를 했다.“사장님!”“사... 사장?”임유환을 사장이라 칭하는 염지훈에 깜짝 놀란 조덕화 일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임유환이 정말로 S 호텔 사장이었다니!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다들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임유환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염 지배인.”“오셨습니까, 사장님!”염지훈은 어찌나 공손한지 땅까지 파고 들어갈 기세로 굽신거렸다.“미안해요,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귀찮았죠.”“사장님, 아까 들어보니까 누가 사장님에 대해 안 좋게 말하던데, 이 사람들인가요?”미간을 찌푸리며 조덕화 일가에게로 눈길을 돌린 염지훈에 그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며 다급히 일어나 해명하기 시작했다.“염 지배인님, 그럴 리가요! 그런 일... 없습니다!”“그럼요, 다 오해입니다.”그 고고하던 소민지도 나서서 아부를 해대는 모습에 염지훈은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조급해 난 조덕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염 지배인님, S 호텔 사장님은 흑제 어르신 아니었나요? 왜... 임유환 씨가...”“S 호텔 사장이 한 분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염지훈의 대답을 들은 조덕화와 소민지는 낯빛이 하얗게 질리며 그동안 임유환에게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누가 누굴 욕해... 그들이 바로 그 바보 멍청이였다.조덕화 일가는 임유환이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가만있은 건 두려워서가 아니라 상대할 가치도 없어서였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염지훈은 조덕화 일가가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는 임유환에게 넌지시 물었다.“사장님, 식사하시는 데 불편하시면 저 사람들 내보낼까요?”“아니요, 됐어요. 다 아저씨 친
“임... 임 선생님?”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이민호를 바라보았다.S 시 작전지역 중령씩이나 되는 사람이 임유환에게 선생님이라 칭하는 모습이 임유환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의아하게 보일 만했다.이민호는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임유환만 보며 인사를 했다.“임 선생님도 식사하러 오셨어요?”“네, 여기서 다 보네요.”“유... 유환 씨, 둘이 아는 사이에요?”그때 간신히 놀라움에서 헤여나온 윤동훈 부부가 임유환을 향해 물었다.좀 전 염 지배인 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이번에는 작전지역 이민호라니!이민호는 그 어떤 부서의 부장보다도 한참 위에 있는 무려 작전지역의 중령이었다.시장도 중령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데 그런 사람이 임유환에게 이리 공손하니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아, 그냥 예전에 작전지역에서 알고 지낸 전우예요.”“전우? 유환 씨 군인이에요?”임유환이 아무 이유나 갖다 대며 둘러대자 윤동훈이 이것도 놀랍다는 듯 물었다.“전에는 군인이었죠. 이젠 아니에요.”“어머!”어린 나이에 군인이었다니, 그때부터 중령은 넘어선 그 신분에 윤동훈과 김선은 속으로 끊임없이 놀라고 있었다.“아저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임유환 씨 전우 이민호라고 합니다.”임유환의 둘러대는 말을 들은 이민호가 눈치 빠르게 윤동훈과 김선에게 인사를 건넸다.“아이고, 안녕하세요! 반가워요!”작전지역 중령을 인사를 받은 윤동훈이 흥분하여 서둘러 인사를 받아주었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조덕화 일가는 너무 부러워 질투심만 차올랐다.“저도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가워요!”“편하게 대하세요, 이 중령님.”“하하하!”이렇게 높은 사람한테 받는 공손한 대접이 익숙지 않았던 윤동훈이 어찌할 줄 모르자 이민호가 사람 좋게 웃으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그럼 임 선생님, 식사하세요. 저는 방해 그만하고 나가볼게요. 시간 되실 때 차나 한잔 같이해요. 물론 임 선생님 시간 되실 때요.”“네, 그렇게 해요.”“그럼
아까 일 때문인지 조덕화 일가는 더 앉아있기도 불편해 서둘러 밥을 먹고는 자리를 떴다. 그래서 한 상 가득 남은 음식들이 아까웠던 윤동훈은 집에 싸가기로 했다.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김선은 아직도 통쾌한지 윤동훈을 향해 말했다. “여보, 아까 조덕화 얼굴 봤어? 서리맞은 가지 같더라니까. 이제 다신 우리한테 잘난 척 못 하겠네!”조덕화 집안에 몇 번이나 수모를 당해왔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갚아주었다.그리고 이 모든 게 임유환 덕분이었기에 윤동훈은 임유환을 보며 웃었다.“그렇겠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요 유환 씨.”“별말씀을요.”“그런데 유환 씨가 언제 S 호텔 사장이 된 거예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우린?”“저는 그냥 작은 주주일 뿐이에요. 실질적인 사장은 흑제죠. 그래서 아저씨 아주머니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실까 봐 지금까지 말도 못 했어요.”윤동훈의 질문에 임유환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유환 씨 같은 사위를 만난 게 복이죠 정말.”“우리 유환 씨는 다 좋은데 너무 겸손해요!”윤동훈과 김선은 손사래를 치며 임유환을 칭찬하기에 바빴다.“그 정도는 아닌데, 저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하!”“이것 봐요, 너무 겸손해서 탈이라니까.”임유환이 부끄러워하자 김선은 더 기뻐하며 웃었다.임유환같이 완벽한 사람이 사위로 들어오다니, 김선은 보면 볼수록 맘에 들었다.제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임유환을 보며 윤서린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깊은 눈동자도 조금 촉촉해졌지만 윤서린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향했다.그렇게 집에 들어온 임유환은 윤서린 상처에 연고부터 발라주었다.이미 거의 다 사라진 멍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한 임유환이 입을 열었다. “서린아, 오늘만 지나면 다 나을 것 같아.”임유환은 분명 좋은 소식을 전했지만 윤서린은 어딘가 서운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유환 씨는 이젠 가는 거예요?”“응.”“알겠어요.”임유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서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
“우음...”아무 대비도 없이 들이닥친 임유환의 입술에 윤서린은 눈을 크게 떴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아 임유환의 가슴팍을 그 작은 손으로 내리쳤다.하지만 임유환은 그럴수록 윤서린을 더욱 꽉 안아왔다.임유환이 이렇게 갑자기 입을 맞춰 올지 몰라 처음에 깜짝 놀랐던 윤서린도 그의 계속되는 입맞춤에 점차 점차 적응한 것인지 반항을 하던 몸짓도 약해져 갔다.임유환은 윤서린을 더욱 꽉 껴안으며 그 말캉한 입술을 훑었다.그에 몸이 저절로 반응한 윤서린은 임유환의 목을 끌어안았다.임유환은 눈을 감고 윤서린의 손길을 느끼며 더는 윤서린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렇게 윤서린의 경계심도 완전히 사라지고 둘은 온전히 그들만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서로에게서 몸을 떼고 임유환이 다정한 눈으로 윤서린을 바라보았다.“이렇게 갑자기 덮치는 게 어딨어요...”윤서린이 침대 사이에 선을 그으며 말했다.“오늘 밤은 절대 이 선 넘지 마요!”“귀여워.”임유환은 그 깜찍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윤서린도 코를 찡긋거리며 삐진 티를 냈지만 눈 속에 가득한 다정함은 어떻게 감출 수가 없었다.볼을 따라 귀까지 빨개져서는 선을 긋는 모습에 임유환은 또 윤서린에게로 다가갔다.“안돼요, 엄마 아빠 들어요...”그러자 윤서린은 다급하게 말렸다.엄마 아빠가 바로 옆방인데 여기서 임유환이랑 그렇고 그런 것을 하면 분명 소리가 들릴 것이었다.그것만큼 민망한 일이 없었기에 윤서린은 애써 임유환을 밀쳐냈다.“그럼 아저씨 아주머니 다 잠드시면 할까?”“그래도 안 돼요!”“저리 가요! 아무튼 안 된다고요!”윤서린은 입술을 앙다물고 얼굴을 붉혔다.“이 선 넘지 마요. 넘으면 나 진짜 화낼 거예요!”“하하하!”윤서린은 귀까지 뜨거워 나며 말을 했지만 임유환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장난이야, 진짜 바보야 너?”“유환 씨랑 말 안 해요!”임유환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고서야 저를 놀리는 것을 알아차린 윤서린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눈물까지 차올랐다.“미안해
[유환 씨, 내일 시간 있어요?][있는데 왜요?]임유환이 간단히 답장을 보내자 최서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또 문자를 보냈다.[잘됐네요 그럼!]최서우의 기뻐하는 이모티콘을 본 임유환은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매번 최서우가 저를 찾을 때면 늘 좋은 일은 없었기에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실험대상으로 삼고 저번에는 가짜 남친인 척 강준석의 파티에까지 참석해달라고 하는 사람인데 누구라도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나 아직 무슨 일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래요 서운하게.]최서우는 서운하다며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같이 보냈다.[됐어요. 빨리 무슨 일인지나 말해요.]임유환의 어이없다는 듯한 답장에 최서우는 부탁을 하기가 망설여졌다.이렇게 저를 경계하니 부탁을 내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그래서 최서우는 임유환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며 부탁할 판을 깔기 시작했다.[시간 있으면 할아버지 병은 좀 어떤지 와서 봐줘요.]예상과 달리 할아버지 병세에 대해 말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안도하며 알겠다고 답장했다.[고마워요, 근데 좀 일찍 와줄 수 있어요?][그렇게 급해요?][음... 일이 좀 있어요.][할아버지 몸 안 좋아지셨어요?][아니요, 할아버지는 건강하세요.][근데 왜 이렇게 급해요?][그랬어요 내가? 그냥 할아버지 빨리 퇴원했으면 좋겠어서 그랬나 봐요.][알겠어요.]임유환은 대답을 하고도 찝찝한 마음에 한 번 더 물어봤다.[진짜 다른 일 있는 거 아니죠?][아니...]최서우는 타자를 하면서도 찔리는지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 요즘 명주도 나랑 할아버지 같이 보살피고 있어요. 유환 씨 온다고 하면 좋아하겠네요. 유환 씨한테 할 말 있는 것 같던데.][조 중령님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요?][무슨 말이요?]임유환의 반응을 본 최서우는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일단은 임유환을 데려오는 게 우선이기에 일부러 장난스러운 문자를 보냈다.[그건 나도 모르죠. 내일 오면 다 알게 될 텐데요 뭘.]
윤서린의 예상대로 옆방에서는 김선이 귀를 벽에 가져다 대고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이상하네, 왜 아무 소리도 안 나지?”김선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윤동훈을 보며 물었다.“여보, 유환 씨랑 서린이 설마 아직도 안 해본 건 아니겠지?”“당신은 뭐 그런 것까지 알려고 그래!”윤동훈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얼굴이 빨개진 채 김선을 나무랐다.“이게 다 서린이를 위해서지!”“유환 씨가 책임감이 좀 강해? 서린이랑 그런 쪽으로 발전하면 우리 서린이 절대 포기 안 할 거 아니야?”“그런 거 안 해도 잘해주잖아.”“당신이 뭘 알아!”김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윤동훈을 노려보며 말했다.“요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데, 유환 씨 같은 남자가 밖에 나가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달려들겠어? 서린이 생각 좀 하라고 당신은!”“됐어. 애들 일을 우리가 왜 나서. 걱정 마.”“유환 씨가 서린이 보는 눈빛만 봐도 얼마나 아끼는지 다 보이는데. 둘이 절대 안 헤어져.”“어떻게 걱정이 안 돼...”“안 되겠어. 내가 내일 서린이 좀 부추겨봐야지. 서두르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한다니까...”김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유환은 윤서린이 직접 그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절대 선을 넘지 않고 있었다.윤서린은 엄마가 엿들을까 봐 아직도 조마조마해 하며 얼굴을 붉혔다.“서린아,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그 붉어진 얼굴을 본 임유환이 의아한 듯 묻자 윤서린의 눈동자가 떨려왔다.“방, 방금 씻어서... 더워서 그래요.”“에어컨 온도 좀 낮출까?”“아니에요.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래. 그럼 우리 얘기나 하자.”임유환은 부드럽게 웃으며 내일 돌아가야 하니 오늘은 윤서린과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래요!”윤서린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임유환을 바라보았다.“유환 씨, 이번에 연경 가면 한 달은 있어야 오죠?”“그럴 걸 아마.”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가문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봐야 했고 또 어머니의 결백을
임유환은 떨리는 윤서린의 몸을 보며 제 생각이 맞았음을 알아차렸다.“바보, 걱정 마. 서인아 안 찾아갈 거니까.”서인아와 임유환은 이미 완전히 끝난 사이였다.서인아 그날 밤 그 말을 한 날부터 둘 사이는 이미 끝이 나버렸다.저를 다독이며 말하는 임유환에 윤서린은 난감한 듯 주저하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유환 씨, 나 너무 쪼잔하죠...”“무슨 소리야 그게.”“네가 날 얼마나 많이 봐주고 있는데, 네가 지금보다도 더 날 이해해주면 내 남자 친구 자리가 위험해질 것 같아.”그 말에 윤서린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 이내 입술을 말아 물며 낮게 말했다.“고마워요.”“뭐가?”“나 이해해줘서요.”벙찐 임유환에 윤서린이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바보.”그 웃음에 또 가슴이 따뜻해지는 임유환이었다.“내가 고마워해야지. 날 더 많이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건 넌데. 내가 서인아 이름 듣고 기분 나빠 할까 봐 말 못 한 거지?”“네.”“걱정 마, 나 아무렇지도 않아.”늘 말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알아주는 임유환을 보며 윤서린이 또 미소를 짓자 임유환도 윤서린의 눈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됐어. 늦었는데 일찍 자. 너 다크서클 장난 아니야.”“알겠어요.”아이 다루듯 달래는 그 말투에 윤서린도 고분고분하게 침대에 누웠다.불 꺼진 어두운 방에서 윤서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근데 사실 유환 씨가 서인아 씨를 만나는 것보다 정우빈 씨를 만나게 될까 봐, 나는 그게 더 무서워요...”“조심할게.”“아무 일 없을 거야.”“그래요.”제 머리맡에서 속삭이는 임유환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좀 된 윤서린이 마침내 잠을 청하려 했다.“잘 자요-”“너도 잘자.”...이튿날 아침.아침을 먹은 임유환은 윤서린 부모님과 윤서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그리고 도착한 S 시 제일병원 206호 병실 앞에는 진작 마중 나온 최서우가 임유환을 반겨주었다.“유환 씨, 여기요!”“서우 씨.”임유환은 가벼운 미소를 띠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