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흑...”허유나가 다리를 감싸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이 순간, 후회와 무력감이 그녀 마음 깊은 곳에 퍼지기 시작했다.만약 애당초 그녀가 자만하지 않았다면 지금 임유환 옆에서 벼락출세하는 사람은 분명 그녀일 것이다.그녀가 자기 손으로 행복을 차버린 것이다...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도 임유환은 무표정이었다.그의 눈에서는 조금의 연민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에게 있어서 이런 사람들은 눈길조차 줄 가치도 없었다.“유환 씨, 허유나 혼자 여기 남겨둬도 괜찮을까요?”조금 전 허유나의 행동에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윤서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었다.그녀는 혹시나 허유나가 또 이상행동을 할까 봐 걱정되었다.만약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큰일이었다.“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임유환이 차갑게 대답했다.그의 이 냉랭함은 허유나를 향한 것이었다.“서린아, 너 얼굴 부은 건 내가 돌아가서 한약 지어줄게. 부기 좀 가라앉게.”“유환 씨, 한약도 지을 줄 알아요?”윤서린이 경이로운 눈으로 물었다.“전에 사부님께 좀 배웠어요.”임유환이 부드럽게 대답했다.“내가 데려다줄게.”“네.”윤서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몰래 조각 같은 임유환의 얼굴을 쳐다봤다.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다.이는 그녀가 처음으로 임유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순간 마음이 아주 든든했다....30분 후, 임유환은 윤서린을 집까지 바래다줬다.“서린아,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난 근처 한약방에 가서 약재 좀 사 올게.”윤서린 집에 한약재가 없어서 임유환은 한약방에 가기로 했다.“네.”윤서린이 수줍어하며 대답했다.임유환은 동네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한약방에 도착했다.약국 주인은 70세도 넘어 보이는 노인분이셨다.“사장님, 마황, 향유, 복령, 동규자 세 냥씩 주세요.”임유환은 약국에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듯 네 가지 약재의 이름을 말했다.“네, 손님.”약국 사장은 뒤돌아서서 임유환이 말한 네 가지 약재를 골라 무게를 달
“잘생긴 환자분, 왜 절 피하세요. 저 안 잡아먹어요.”부자연스럽게 웃는 임유환을 보며 최서우는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아니면, 여자 친구가 보고 화낼까 봐 그래요?”“잘생긴 환자분, 여자 친구한테 잡혀 사나 봐요?”“하하...”임유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잡혀 살다니, 사랑해서 그러는 거지!]“설마, 내가 맞혔나요?”최서우는 임유환을 보며 섹시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렸다.임유환은 최서우를 보며 눈을 흘겼다.“어이쿠, 재밌으시네요.”최서우는 웃으며 대답하고는 교활한 눈으로 말했다.“잘생긴 환자분, 지난번에 이 누나의 카톡을 차단해서 엄청 속상했어요.”“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이 누나 카톡 차단 풀어주면 앞으로 매일 샤워 끝나고 영상통화 해줄게요.”“켁켁...”그 말 한마디에 임유환은 하마터면 사레에 드릴 뻔했다.그의 성격에 이 순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눈앞의 이 여우는 분명 마음씨 좋은 누나의 모습을 하고는 왜...“켁켁.”약국주인은 최서우의 대담한 언사에 참지 못하고 헛기침했다.하지만, 최서우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이 여인이 말만 강하게 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최서우의 남성혐오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최서우는 겉으로 보기에는 남자한테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거나,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아마 그 남자의 그곳을 잘라버릴지도 모른다...“아가씨, 약국은 여전한가?”그때, 약국 주인이 물었다.“네, 할아버지도 그대로세요.”최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말이 나와서 말인데, 할아버지 병세는 좀 나아졌나?”약국 주인이 관심하며 물었다.그와 최서우의 할아버지는 오랜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매주 일요일 오후마다 동네에서 장기를 두었었다.그런데, 이 최 씨 할아버지가 반년 전에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아니요.”최서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아이고.”약국 주인도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안 할아버지, 저 먼저 갈게
“방법이 있어요?”최서우가 놀라운 눈으로 임유환을 바라봤다.임유환이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한 게 분명했다.“반반이에요.”임유환이 낮은 소리로 읊조렸다.그는 감히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반반이요?”말을 들은 최서우는 크게 실망했다.그녀의 할아버지 같은 간암 말기인 환자는 의학적으로 완치될 희망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수명연장밖에 방법이 없다...“네.”임유환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방법이 있나요?”최서우가 놀라운 눈으로 임유환을 보며 물었다.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녀는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말이 임유환의 입에서 나오자, 어느 정도 믿음이 생겼다.이 녀석의 신체 소질은 일반인과 다르니까.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한의학으로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환자를 직접 봐야 해서 뭐라 확답을 드리지는 못할 것 같아요.”임유환이 대답했다.“한의학이요?”최서우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더더욱 임유환의 말에 믿음이 갔다.그녀는 서양의학의 주치의로서 서양의학의 모든 방법을 다 사용했었다. 항암 방사능치료도 다 했지만, 할아버지를 고통스럽게만 할 뿐 효과가 거의 없었다.하여 그녀는 한의학적인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그녀는 한 한의사의 말을 듣고 한약을 지어서 할아버지께 드렸다.확실히 효과가 있었다.다만, 일시적으로 할아버지의 병을 악화하지 않게만 할 뿐, 좋아지지는 않았다. 최근 할아버지의 병세는 또다시 악화하었다.그녀도 속수무책으로 마지막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는 한의학의 가능성을 증명하기도 했다.다만 그녀는 아직 진정한 한의학의 대가를 만나지 못했다.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할아버지의 병은 진짜 희망이 있을지도 몰랐다.“가요, 유환 씨. 지금 바로 할아버지한테 가요.”최서우의 눈이 순간적으로 밝아지더니 임유환의 팔을 잡아끌었다.“어...최 선생님, 할아버지의 상황이 아주 안 좋으신가요? 괜찮으시면 저 잠깐 집에 가봐도 될까요.”임유환이 손에 들린 한
“최 선생, 할아버지를 구하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암을 치료한다는 게 애들 장난은 아니잖아요?”조동민은 최서우를 보다가 적대적인 눈길로 임유환을 보며 말했다.“너 이 자식,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야, 얼른 꺼져!”올해 마흔세 살인 그는 이미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최서우의 미모와 몸매에 빠져있었다.이런 여인은 그가 꿈에 그리던 여인이었다.하지만 예전에는 최서우에게 다가갈 기회가 없었다. 더욱이 최서우가 남성혐오증이 있어서 이성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라는 얘기를 들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마침 기회를 잡았다.그는 최서우의 할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주치의를 자원했다.그리고 지금.그는 일부러 할아버지가 곧 중태에 빠질 것 같은 허상을 만들어 낸 후, 직접 나서서 할아버지의 병세를 안정시켜 최서우가 그에게 신세를 지게끔 만들려고 했다.그렇게 되면, 그는 손쉽게 최서우를 조종하여 그의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어렵게 가장 중요한 단계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이 가로채게 두지 않을 것이다.더군다나 이 녀석은 한눈에 보기에도 의술도 없어 보이고 최서우에게 접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조동민은 절대로 이 녀석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최서우는 그의 것이다!임유환도 당연히 조동민의 적개심을 눈치채고 있었다. 상대의 눈에서 깊이 숨겨둔 음모도 볼 수 있었다.그는 두 눈을 살짝 감았다.“조 주임님, 지금 저희 할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의료 장비로는 치료할 수 없으니, 임유환더러 시도해 보라고 하죠.”최서우는 조동민의 진짜 의도를 모른 채 간청했다.“최 선생, 미안하지만 여기는 병원이에요. 병원의 규칙은 알 텐데요.”조동민은 단칼에 거절했다.말을 마친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그리고, 다른 의사들이 속수무책이라고 해서 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방법이 있으신가요?”최서우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거렸다.“맞아요.”조동민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할아버지의 암을 완
조동민은 으름장을 놓았다.“조 주임님, 유환 씨는 저를 속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최서우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자, 마음이 좀 안정되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조동민보다 임유환을 더 믿고 있었다.말을 들은 조동민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그는 이 녀석이 도대체 최서우에게 어떤 마술을 부렸기에 최서우가 이토록 믿는지 알수 없었다. 필경 조동민이야말로 이 병원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난 의사였으니 말이다.여신이 곧 손에 들어오게 생겼는데 이 녀석이 좋은 일을 망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그는 임유환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너 이 자식, 의사라고 했지. 그럼 의사 면허증부터 보여줘.”“전 그런 거 없어요.”임유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허, 없어? 그런데 감히 의사 행세를 해!”조동민이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는 임유환이 내놓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최 선생님, 이제 누가 최 선생을 속이고 있는지 알겠어요?”그는 의기양양하게 최서우를 바라봤다.최서우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그녀는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최대호는 그녀의 할아버지인데, 임유환더러 환자의 상황을 좀 보라고 한다고 해서 어떠한 손실이라도 있을까?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희망이 조금이라도 더 생기는 거니까!하지만 최서우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임유환이 담담하게 말했다.“조 주임님, 병이 주임님 몸에 생긴 것이 아니고, 주임님 가족에게 생긴 것도 아니라서 조금도 조급해 않으신 거죠?”“너 이 녀석, 그게 무슨 말이야!”조동민의 얼굴에 화가 잔뜩 치밀었다.최서우의 눈이 조금 빛났다.임유환의 말은 마침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을 살리는 일 앞에서 그까짓 자격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임유환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대다수 한의학 대가는 비록 의사 면허증이 없지만 수많은 의학계의 난치병을 치료했습니다.”“과연 그들이 의료행위를 할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신가요?”“
“그건...”여신이 믿지 못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조동민의 얼굴빛이 더 어두워졌다.저 녀석이 어떻게 한눈에 모든 걸 알아챘는지 알지 못했다.조동민이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못 하자 최서우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투가 차갑게 변했다.“됐어요, 조 주임님. 최대호는 제 할아버지예요. 저는 이 병원 의사고요. 할아버지의 병세는 제가 책임질 수 있어요.”“그러니까 유환 씨, 저희 할아버지 좀 진찰해 주세요.”임유환을 바라보는 최서우의 눈길은 부드러웠다.임유환이 말한 것처럼 병은 그녀 할아버지에게 생긴 것이지 조동민의 가족에게 생긴 것이 아니기에 조동민은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다.무엇보다 그녀는 임유환이 조동민에게 한 진찰 때문에 임유환의 말에 더 믿음이 갔다.“네.”임유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병상으로 걸어갔다.초췌한 모습으로 온몸에 호스를 꽂고 병상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보니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할아버지는 이미 연세가 많으셔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치료하면 건강한 사람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조동민은 진심으로 할아버지가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라기는 하는 걸까?]임유환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할아버지의 손목에 얹고 맥을 짚었다.체내에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임유환은 조용히 할아버지의 신체를 검사했다.그런데 검사를 하면 할수록 그의 미간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최서우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조동민은 그럴듯한 임유환의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냉소를 지었다.“녀석, 진찰 다 끝났어? 무슨 문제라도 발견했어?”그의 눈에 한의학은 한낱 비과학에 불과했다.그리고 이 녀석은 어떠한 재료나 도구도 없이 자기가 뭘 좀 배웠다고 자부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지 않은가.“조 주임님, 본인도 의사 시면서 환자를 진찰할 때 조용히 해야 한다는 걸 모르시나요?”임유환이 차갑게 대답했다.“너!”조동민의 얼굴빛이 바뀌더니 차갑게 콧방
"뭐라고요?"최서우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최서우 본인도 의사였기에 지금 임유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헛소리하지마! 그럴 리가 없잖아!"조동민은 그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임유환을 향해 소리쳤다."전문용어 좀 아는 걸로 어디서 약을 팔아! 맥 좀 짚어보고 혈색 잠깐 봤다고 그렇게 쉽게 진단한다고? 네가 그렇게 잘났어?""우리는 전문적인 의료기계를 통해서 진단하는 거라고, 너처럼 눈으로 대충 보고 하는 게 아니라."임유환의 말이 맞다면 그 노인의 병은 오진이었다.오진이면 큰 의료사고란 말인데 하필 그런 진단을 내린 사람이 조동민이었다.이 업계에서 나름 전문가로 통하는 사람이 그런 실수를 했으니 지금 누구보다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유환 씨, 방금 한 말들 다 사실이에요?"그때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최서우가 임유환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만약 임유환의 말이 사실이라면 할아버지를 살릴 희망이 있는 것이었다."네. 사실이에요. 제가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어요."임유환의 확신에 찬 말에 최서우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네가 뭔데 장담해! 뭐 한의사면 안색 보면 다 알아? 그럼 병원에 그 많은 기계들은 왜 필요해!""조 주임님,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여기 ICU에요. 지금 할아버지 상태도 안 좋으시다고요!"최서우는 화가 난 듯한 투로 조동민에게 말했다.조동민은 눈을 크게 뜨고 최서우를 보더니 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너 정말 저놈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쟤 의사 면허증도 없어!""유환 씨, 어떻게 진단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최서우는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도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다시 한번 임유환에게 물었다.물론 임유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저 어떻게 그런 진단을 하게 됐는지 제대로 알고 싶었다."간단해요. 맥박이랑 간에 혈기가 어떻게 돌고 있는지만 보면 알 수 있어요."임유환은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우선 할아버님 맥박은 약
조 주임이 화가 나서 소리치자 병문 밖에 있던 다른 의사와 간호사들도 임유환에 대해 수군대기 시작했다."그러게요. 어디서 아무것도 아닌 놈이 와서 우리 조 주임님한테 실력을 운운해요!""한의사? 한 번 보면 안다고? 그렇게 한 번 봐서 알 거면 사람들이 왜 그 고생을 하면서 기계를 만들겠어!""말이 한의사지 뭐 그냥 사기꾼이죠.""당연하죠! 의사는 가운을 입어야 의사죠. 언제 한의사가 제대로 병 고치는 거 봤어요?"많은 동료들이 저를 위해 말해주자 우쭐해진 조동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들었지. 네가 아무리 한의사라 해도 기계로 검사한 것보다 정확할 순 없어.""기계의 정확도를 의심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조동민 씨 당신을 의심하는 거예요."임유환은 많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뭐?"조동민은 이를 악물며 되물었지만 임유환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대답을 해왔다."기계 좋죠. 정확한 거 저도 알죠. 하지만 병이라는 게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인데 환자 건강 상태 보면서 진단해야 하는 거잖아요. 조 주임님은 환자 건강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너무 기계에만 의존하시는 것 같아서요.""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너 자격증 있어? 뭘 안다고 나를 평가해 네가!""내가 당신을 평가할 자격이 있냐 물으면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최서우 씨 할아버지 병은 조 주임님의 오진이 맞다는 겁니다.임유환은 마치 사실을 얘기하듯이 당연한 듯 말했다."너!"조동민이 화가 나서 입을 떼려 할 때 경비가 뛰어오며 말했다."조 주임님! 여기 소란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서요!""이놈이야. 환자 보는 데 방해되니까 당장 내보내!"조동민은 임유환을 가리키며 말했다."환자 보는 데 방해된다고요 제가?" 임유환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조 주임님이 앞으로도 이렇게 환자 진료하시면 살아남는 환자가 없겠네요.""그 입안 다물어!"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동민은 부들부들 떨며 경비원을 향해 소리 질렀다.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