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나나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세 사람이 장희령에 대한 논의를 펼치던 그때, 장희령은 VIP 통로의 CCTV 자료를 보고 있었는데, 그 영상에는 이서의 곁에 서 있는 하이먼 스웨이가 분명히 찍혀 있었다.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으나, 희령은 여전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심가은 씨가 윤이서랑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이 만나는 걸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희령이 또 한 번 가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가은에 대해 생각하던 그녀가 지엽을 떠올렸다. ‘소지엽 씨랑 가은 씨는 지금 같은 곳에 있어.’‘그리고 가은 씨는 소지엽 씨에게 자주 매달렸을 거고...’ ‘그래, 그 남자에게서 가은 씨의 행방에 대한 열쇠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핸드폰을 꺼낸 희령이 천천히 지엽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녀는 심동을 따라간 이후로 한 번도 그에게 전화한 적이 없었는데,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심동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두려웠고, 자신의 생각이 깊어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 잠시 고심하던 희령이 마침내 용기를 내어 지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화기 너머에서 지엽의 멋진 목소리가 들려왔다.다만 그의 목소리는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피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저예요.” 희령이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누르며 말했다.“장희령, 저 기억해요?”그녀조차도 자신의 말에 서린 기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지엽이 다리를 꼬았다.[무슨 일이죠?]“그렇구나...” 희령은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가... 가은 씨랑 연락이 안 돼서요.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죽었어요, 그 여자.] 지엽이 심란한 어투로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며칠 전에.]그는 불과 어제 이서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희령은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다.“뭐라고요?” ‘가은 씨가
호텔 안.이미 11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서는 여전히 잠을 자지 않았다. 살며시 문을 연 지환은 마침 이서가 정신을 집중하여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 장면은 그를 어렴풋이 과거로 끌고 간 것 같았다.그녀는 윤씨 그룹을 인수한 이후 늘 침실에서 자료를 보았다. “여긴 왜 오셨어요?”고개를 들어 물컵을 향해 손을 뻗던 이서가 지환을 보고 물었다. 지환이 그녀를 응시했다.“왜 이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있는 거야?”이서가 시계를 힐끗 보았다.“이제 겨우 11시인데요? 아직은 안 졸려요.” 지환은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그래, 이서는 한 가지 일을 끝내지 못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었지.’ “뭐길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야?” “회사 자료요.”이서가 갑자기 흥분하며 말했다.“지환 선생님, 그거 아셨어요? 제가 원래 큰 회사의 대표였대요!”‘아무리 그래도 내 회사가 4대 가문의 회사 중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어.’‘지환 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실지도 모를 일이니까...’하지만 그녀는 이내 자기가 뱉은 말이 웃긴다고 생각했다. ‘하긴... 내가 기억을 잃어가는 동안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지환 선생님이 모르실 수가 있겠어.’ 이서의 얼굴에 만연한 감미로운 미소를 본 지환은 온 걱정이 사라지는 듯했다.‘역시 이서를 데리고 오길 잘한 것 같아.’‘M국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 보여. 내가 옳은 결정을 한 것 같아서 뿌듯하네.’ “돌아오자마자 일에 집중하는 거야?”자료를 받아본 지환은 그것이 협력 회사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곧장 알아차렸다.“네, 하나가 그러는데, 하은철이 윤씨 그룹을 괴롭히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협력 회사들도 윤씨 그룹과 협력하기를 꺼리고 있고요... 저는 회사의 대표로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어요.” “그래서 돌파구는 찾았어?”이서가 턱을 만지며 말했다.“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한 자료를 지환에게 건넸다.“이 식품 회사를
고개를 든 지환이 이서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무의식중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이서는 지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한데 만져봐도 될까요?” 그녀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절대 훔쳐보지는 않을게요. 그냥... 만져만 보고 싶어요.” 소녀의 눈에 비친 갈망을 본 지환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침대 옆에 있는 안대를 들어 올렸다.“정말 훔쳐보지 않을 거야?” “절대 훔쳐보지 않을 거예요!”이서가 네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맹세할게요!” 지환이 말했다.“그럼 안대 좀 써볼래?” “좋아요.”이서가 지환이 말한 대로 얌전히 안대를 썼다. 지환은 이서가 준비가 된 것을 보고서야 가면을 벗었다. “이제 됐어요?”조용히 1분을 기다린 이서가 물었다. 지환은 기다리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웃기기도 하면서 화가 나기도 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이서와 눈높이를 같게 했다.“자.”이서가 손을 내밀어 기억 속의 높이를 따라 지환의 얼굴을 만졌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지환의 콧대가 만져졌다. ‘와, 콧대가 정말 높으시구나.’이것이 이서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손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곧 지환의 입술에 다다랐다. 그의 탐스러운 입술은 이서가 지난번 지환과 키스를 나누었을 때의 느낌을 단번에 떠올리게 했다.그녀의 귓불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서는 볼 수 없었지만, 지환은 이서의 사소한 변화를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특히 그녀의 빨간 귓불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추억을... 꿈틀꿈틀 되살아나게 했다. “이서야, 됐어?”지환의 목소리를 낮고 자성적이었으며,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깊은 밤의 위험을 뿜어내고 있었다.이서가 말했다.“아직이에요, 눈은 아직 안 만졌잖아요. 잠시 눈 좀 감아주시겠어요? 사실,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장 궁금했거든요.” “눈은 평소에
이서는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났고, 하나와 함께 새 회사에 도착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윤씨 그룹을 본 이서는 꿈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이서는 과거의 윤씨 그룹에 대한 기억이 없었으나, 지금의 윤씨 그룹은 그녀의 부모님이 묘사한 것과 똑같았다. 이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바닥의 벽돌 하나마저도 귀중하고 값지게 보이도록 했다. ‘부모님과 주주분들도 늘 과거를 그리워하셨었는데...’“엄마 아빠도 내가 다시 윤씨 그룹을 되찾은 걸 알면 아주 기뻐하시겠지?”이서가 문득 윤재하와 성지영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하나의 안색이 바뀌었다.‘이서가 형부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이 이야기도 말해도 되겠지?’ “이서야, 그동안 많은 일이 있으면서 사람들이 좀 변했어. 너희 부모님도 마찬가지고. 그리고...”이서가 궁금해하며 물었다.“그리고 뭐?” 곰곰이 생각하던 하나가 입을 열었다.“됐어, 너무 깊이 알 필요 없어. 그냥 너희 부모님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 둬, 나 믿지?”이서의 텅 빈 머릿속에는 부모님에 대한 나쁜 기억이 전혀 없었으나, 그녀는 하나에 대한 굳은 신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알았어.”이서를 바라보던 하나가 어떠한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아쉽지만 지금의 윤수정은 식물인간이 되어서 이서의 신분에 대한 수수께끼를 설명할 수 없어.’‘게다가 기억을 잃은 이서를 함부로 자극해서도 안 될 일이고...’‘그래, 도대체 이서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내가 철저히 알아보는 거야!”두 사람이 건물의 최고층에 도착하자, 하나가 이서에게 소희를 소개했다. 이서는 소희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는데,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소희 혼자서 버텼다는 것을 들은 그녀는 감격스럽다는 듯 소희의 손을 잡았다.소희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자, 계속 이렇게 입구에 서 있을 수는 없잖아? 주주분들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얼른 들어가 봐.”이서와 소희를 회의실로 밀어 넣은 하나는 문밖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기
“후에 여러분들의 후배가 이 일에 관해서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이서의 이 한마디를 들은 나이 든 사람들은 피가 끓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부귀영화를 누린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였다. ‘그래, 행여 패배할지라도 노력했다는 것만으로도 창피당하는 꼴은 피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승리하기라도 한다면, 하씨 가문의 압력을 견딘 우리의 이야기는 후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이 될 수 있겠지.’“그래요, 우리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잖아요? 하씨 그룹이 H국에서 가장 큰 가문이면 어쩔 겁니까? 큰 가문이라고 해서 사람을 괴롭혀도 된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나도 우리가 하씨 그룹에 강경하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우리가 못 만나본 사람이 어디 있고, 겪어보지 못한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맞아요! 행여 우리가 진다고 한들 퇴직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밖에 더 하겠어요? 요즘 같은 시대에 굶어 죽을 일은 없으니 하씨 그룹과 맞서 싸웁시다!” “...”흥분한 주주들의 말을 듣던 소희는 부러움이 서린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만약 내가 저런 말을 했다면... 전혀 효과가 없었을 거야.’ ‘하긴... 매번 놀라운 기적을 이뤄낸 이서 언니가 하는 말이니까 저분들도 하씨 그룹에 맞설 용기를 낼 수 있으셨던 거겠지.’ 주주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서는 하은철의 현재 움직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윤씨 그룹의 압박하는 방법을 아주 간단하고 난폭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회사가 윤씨 그룹과 협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하씨 그룹의 이런 방법이 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압력을 가하는 몇 개의 회사를 살펴보니까 이 방법은 곧 효력을 잃을 것 같더군요.” “왜냐하면 하씨 그룹이 압박하고 있는 회사의 대부분은 우리 윤씨 그룹과 협력하면서 적은 투자로 큰 이윤을 벌어들이고 있거든요.”
하나는 회의실을 나서는 두 사람을 긴장감과 불안감이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소희가 자신을 향해 성공적인 회의였다는 손짓을 보내는 것을 보고서야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나가 이서에게 다가서며 물었다.“어땠어? 주주들과 총회를 한 첫날이었잖아. 괜찮았던 것 같아?”“음...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아. 이미 이런 회의를 여러 번 개최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나 할까?”“그리고... 지난 1년여 간의 시간 동안 나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더 궁금해졌어. 다시 태어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특히 내가 하은철과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야.” “하나야, 너는 지금 이 상황이 믿어져?”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1년여 전에는 믿기 어려웠어.”“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는 이제 출근해야 할 것 같아. 너는 이제 뭐 할 거야?” “나도 마침 가려던 참이었어. 마침 가는 길도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 줄래?” “그래.”문어귀에 서서 5분을 기다리던 하나는 이서가 큰 가방을 메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왜 그렇게 큰 가방을 가지고 온 거야?”“각 회사의 상황이 담긴 자료들인데, 그 회사들을 방문하기 전에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챙겨봤어. 나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만 백전백승할 수 있는 법이잖아?” 활력이 넘치는 이서를 본 하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바로 이 모습이 지난 1년여간의 네 모습이었어.”“그랬어?”빙그레 웃던 이서가 하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야, 있잖아...” “왜 그래?”“저번에 내기했던 거 기억하지?” 이서의 말을 들은 하나가 두 사람의 내기를 떠올렸다. “그 내기에서 결국 내가 이겼잖아. 그럼 약속대로...”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말해봐, 네가 원하는 거라면 불평 없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음...”이서가 일부러 말을 길게 끌며 하나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그래도 먼 길을 달려온 상언 오빠한테
이서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그 리치푸드 대표의 비서에게 명함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의 비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짧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윤 대표님, 죄송하지만 강 대표님의 오늘 일정은 꽉 찬 상황입니다.” 이서가 물었다.“그럼 내일은요?”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레는요?”비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강 대표님의 3개월간의 일정은 이미 꽉 찬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강 대표님을 만나 뵙고 싶으시다면, 3개월 후의 일정을 조율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리치푸드는 기껏해야 중소기업에 불과하였으나, 윤씨 그룹은 현재 H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초대형 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중소기업의 대표가 대기업의 대표를 만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나, 오늘의 이서는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강 대표님의 오늘 일정을 찾아보니, 본래 약속이 잡혀 있던 광고회사 담당자의 아들이 갑자기 입원하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하던걸요?”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다른 일정을 잡을 수도 없었을 텐데...” “제가 그 시간에 강 대표님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걸까요?” 순간 비서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뭐야,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이야...’ “윤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강 대표님께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비서는 강명철에게 전화를 걸어 낮은 목소리로 문밖의 상황을 간단히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강명철은 이서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그가 비서에게 말했다.“들어오라고 해.” 한숨을 돌린 비서가 전화를 내려놓고 이서에게 말했다.“윤 대표님, 들어오시죠.” 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곧장 강명철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리치푸드의 대표는 계량 한복을 입은 60대 초반의 노
이서가 자료 더미를 펼쳐 놓았다. “어젯밤, 강 대표님 회사의 모든 광고를 살펴보았습니다. 강 대표님께서는 이 광고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강명철이 무심코 물었다.“문제점이 뭐요?” “가장 큰 문제점은 제품의 특징을 부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강명철이 콧방귀를 뀌었다.“윤 대표, 윤 대표의 전공은 광고에 관련된 것도 아니지 않소?” 하지만 이서는 미소를 지은 채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네, 비록 제 전공이 광고에 관련된 것이 아니지만, 저는 대기업의 대표로서 각종 업계의 관계자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이죠.” “광고 건에 대해서는 줄곧 미광 기업과 협력해 오셨죠? 물론 미광 기업은 광고계의 선두 주자였죠. 하지만 그건 이제 20여 년 전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최근 몇 년간 미광 기업의 업계 내 순위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데,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이서가 물었다.강명철이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내 회사로도 모자라, 미광 기업도 한바탕 비판하겠다는 거요?! 허, 얼마나 함부로 떠들어댈 수 있는지 한번 들어나 보겠소!” “미광 기업이 한때 선두 주자로서 광고계를 풍미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 몇 년간 미광 기업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들이 만든 광고가 20여년 전의 스타일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소비 주력군은 더 이상 20여년 전의 그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의 소비 주력군의 20년 전만 해도 어린 아이였던 사람들이죠.” “어린 아이였던 그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사회의 경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즉, 광고가 지향하는 집단은 그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광 기업의 작품은 어떻습니까? 노인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설탕이 함유되지 않아 소화가 쉬운 제품이라니... 이게 노인을 겨냥하는 광고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게다가 이 제품의 포장은...” 이서는 광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