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여러분들의 후배가 이 일에 관해서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이서의 이 한마디를 들은 나이 든 사람들은 피가 끓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부귀영화를 누린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였다. ‘그래, 행여 패배할지라도 노력했다는 것만으로도 창피당하는 꼴은 피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승리하기라도 한다면, 하씨 가문의 압력을 견딘 우리의 이야기는 후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이 될 수 있겠지.’“그래요, 우리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잖아요? 하씨 그룹이 H국에서 가장 큰 가문이면 어쩔 겁니까? 큰 가문이라고 해서 사람을 괴롭혀도 된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나도 우리가 하씨 그룹에 강경하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우리가 못 만나본 사람이 어디 있고, 겪어보지 못한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맞아요! 행여 우리가 진다고 한들 퇴직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밖에 더 하겠어요? 요즘 같은 시대에 굶어 죽을 일은 없으니 하씨 그룹과 맞서 싸웁시다!” “...”흥분한 주주들의 말을 듣던 소희는 부러움이 서린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만약 내가 저런 말을 했다면... 전혀 효과가 없었을 거야.’ ‘하긴... 매번 놀라운 기적을 이뤄낸 이서 언니가 하는 말이니까 저분들도 하씨 그룹에 맞설 용기를 낼 수 있으셨던 거겠지.’ 주주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서는 하은철의 현재 움직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윤씨 그룹의 압박하는 방법을 아주 간단하고 난폭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회사가 윤씨 그룹과 협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하씨 그룹의 이런 방법이 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압력을 가하는 몇 개의 회사를 살펴보니까 이 방법은 곧 효력을 잃을 것 같더군요.” “왜냐하면 하씨 그룹이 압박하고 있는 회사의 대부분은 우리 윤씨 그룹과 협력하면서 적은 투자로 큰 이윤을 벌어들이고 있거든요.”
하나는 회의실을 나서는 두 사람을 긴장감과 불안감이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소희가 자신을 향해 성공적인 회의였다는 손짓을 보내는 것을 보고서야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나가 이서에게 다가서며 물었다.“어땠어? 주주들과 총회를 한 첫날이었잖아. 괜찮았던 것 같아?”“음...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아. 이미 이런 회의를 여러 번 개최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나 할까?”“그리고... 지난 1년여 간의 시간 동안 나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더 궁금해졌어. 다시 태어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특히 내가 하은철과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야.” “하나야, 너는 지금 이 상황이 믿어져?”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나도 1년여 전에는 믿기 어려웠어.”“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는 이제 출근해야 할 것 같아. 너는 이제 뭐 할 거야?” “나도 마침 가려던 참이었어. 마침 가는 길도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 줄래?” “그래.”문어귀에 서서 5분을 기다리던 하나는 이서가 큰 가방을 메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왜 그렇게 큰 가방을 가지고 온 거야?”“각 회사의 상황이 담긴 자료들인데, 그 회사들을 방문하기 전에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챙겨봤어. 나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만 백전백승할 수 있는 법이잖아?” 활력이 넘치는 이서를 본 하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바로 이 모습이 지난 1년여간의 네 모습이었어.”“그랬어?”빙그레 웃던 이서가 하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야, 있잖아...” “왜 그래?”“저번에 내기했던 거 기억하지?” 이서의 말을 들은 하나가 두 사람의 내기를 떠올렸다. “그 내기에서 결국 내가 이겼잖아. 그럼 약속대로...”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말해봐, 네가 원하는 거라면 불평 없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음...”이서가 일부러 말을 길게 끌며 하나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그래도 먼 길을 달려온 상언 오빠한테
이서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그 리치푸드 대표의 비서에게 명함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의 비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짧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윤 대표님, 죄송하지만 강 대표님의 오늘 일정은 꽉 찬 상황입니다.” 이서가 물었다.“그럼 내일은요?”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레는요?”비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윤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강 대표님의 3개월간의 일정은 이미 꽉 찬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강 대표님을 만나 뵙고 싶으시다면, 3개월 후의 일정을 조율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리치푸드는 기껏해야 중소기업에 불과하였으나, 윤씨 그룹은 현재 H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초대형 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중소기업의 대표가 대기업의 대표를 만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나, 오늘의 이서는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강 대표님의 오늘 일정을 찾아보니, 본래 약속이 잡혀 있던 광고회사 담당자의 아들이 갑자기 입원하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하던걸요?”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다른 일정을 잡을 수도 없었을 텐데...” “제가 그 시간에 강 대표님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걸까요?” 순간 비서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뭐야,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이야...’ “윤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강 대표님께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비서는 강명철에게 전화를 걸어 낮은 목소리로 문밖의 상황을 간단히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강명철은 이서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그가 비서에게 말했다.“들어오라고 해.” 한숨을 돌린 비서가 전화를 내려놓고 이서에게 말했다.“윤 대표님, 들어오시죠.” 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곧장 강명철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리치푸드의 대표는 계량 한복을 입은 60대 초반의 노
이서가 자료 더미를 펼쳐 놓았다. “어젯밤, 강 대표님 회사의 모든 광고를 살펴보았습니다. 강 대표님께서는 이 광고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강명철이 무심코 물었다.“문제점이 뭐요?” “가장 큰 문제점은 제품의 특징을 부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강명철이 콧방귀를 뀌었다.“윤 대표, 윤 대표의 전공은 광고에 관련된 것도 아니지 않소?” 하지만 이서는 미소를 지은 채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네, 비록 제 전공이 광고에 관련된 것이 아니지만, 저는 대기업의 대표로서 각종 업계의 관계자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이죠.” “광고 건에 대해서는 줄곧 미광 기업과 협력해 오셨죠? 물론 미광 기업은 광고계의 선두 주자였죠. 하지만 그건 이제 20여 년 전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최근 몇 년간 미광 기업의 업계 내 순위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데,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이서가 물었다.강명철이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내 회사로도 모자라, 미광 기업도 한바탕 비판하겠다는 거요?! 허, 얼마나 함부로 떠들어댈 수 있는지 한번 들어나 보겠소!” “미광 기업이 한때 선두 주자로서 광고계를 풍미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 몇 년간 미광 기업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들이 만든 광고가 20여년 전의 스타일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소비 주력군은 더 이상 20여년 전의 그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의 소비 주력군의 20년 전만 해도 어린 아이였던 사람들이죠.” “어린 아이였던 그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사회의 경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즉, 광고가 지향하는 집단은 그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광 기업의 작품은 어떻습니까? 노인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설탕이 함유되지 않아 소화가 쉬운 제품이라니... 이게 노인을 겨냥하는 광고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게다가 이 제품의 포장은...” 이서는 광
비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어머, 그럼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인 거네요.” “무슨 소리! 우리가 윤씨 그룹과 협력하지 않는 한, 하씨 그룹이 우리를 공격할 일은 없을 거야.”강명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비서가 급히 전화를 들며 말했다.“네, 안녕하세요, 리치푸드 강 대표님의 사무실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말이 들려온 것일까. 순간, 비서가 머뭇거리며 강명철을 바라보았다. 강명철이 물었다.“어디서 온 전화야?” “하씨 가문이요...”강명철은 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그의 태도는 방금 이서를 대할 때의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는데, 수화기 너머 사람의 신분을 들은 강명철의 얼굴에는 아첨하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그러니까 지금 제게 전화를 거신 분이 하 사장님의 작은 아버지인... YS그룹의 대표님이란 말씀이십니까?!” 차분한 지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서려 있었다.[못 믿겠다면, 지금 당장 만나보면 되겠네요.]“아이고, 못 믿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누가 감히 YS 그룹의 대표님을 사칭할 수 있겠습니까.”“그나저나 대표님께서 어쩐 일로 제게 전화를 다 주신 건지... 아, 혹시 윤 대표가 저를 찾아왔다는 걸 알고 계신 건가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는 단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게 전부니까요.”“물론 윤 대표의 말이 청산유수이긴 했지만, 저는 하 사장님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그녀의 방안이 일리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지환이 차가운 어투로 강명철의 말을 끊었다. 강명철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예... 꽤 날카로운 분석이긴 했습니다만, 전혀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는데, 왜 그녀와 협력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지환의 질문을 들은 강명철은 순간 어리둥절해졌으나, 이내 그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명철이 다시 한번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이서는 리치푸드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지환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뭐 해?] 지환이 뻔히 알면서 물었다.“다음 회사로 가보려고요.”이서가 말했다.[그렇구나, 첫 번째 회사 상황은 어땠어?] “꽤 완강한 태도를 보이시더라고요. 아마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요.” 지환이 말했다.[힘들면 내 부하 직원들을 시켜도 돼.] 만약 그들이 윤씨 그룹과의 협력을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환은 그들이 윤씨 그룹과의 협력을 결심하게 할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H국 내의 YS 그룹의 세력도 만만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MH 그룹의 힘까지 합친다면, 지환은 하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것을 철저히 짓밟아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건 싫어요.”이서가 웃으며 말했다. “이럴 때 제가 자리를 굳히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저를 도와 일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겠어요. 비록 어려운 일일지라도... 이건 제가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예요.” 그렇다. 그녀가 그 회사 중 단 한 곳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부하직원들에게 큰 고무적인 일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네가 너무 고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이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하 선생님, 이전에도... 저를 이렇게 걱정하셨어요?”‘이전...?’이 두 글자를 들은 지환의 눈동자에 아련함이 스쳤다. 사실, 이서는 지환이 자신과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을 별로 원치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애써 미련을 버린 채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느낌이 꽤 괜찮은 것 같거든요.” “오히려 외국에 있을 때보다도 더 후련한 것 같아요.” “적어도 지금의 저에게는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래.]지환이 아쉬워하며 당부했다. [제때 끼니 챙겨 먹는 거 잊지 말고, 절대 조급해하지 마.]“네.”이서는 지환이 전화를 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고, 창밖을 한 번 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세
리치푸드의 강명철이 이렇게도 쉽게 이서의 설득으로 인해 재계약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소희는 멍하니 서 있다가 몇 초 후에야 반응할 수 있었다. [네, 언니, 알겠어요.]“계약은 소희 씨한테 맡길게.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하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이서 언니...]급히 목소리를 높여 이서를 부른 소희는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제자리에 선 채 조급해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재계약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요, 재계약에 관한 일이 아니라...]소희는 정말이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 회사에 문제라도 생긴 거야?” [회사 일이 아니라... 언니에 관한 일이에요.] “나에 관한 일이라고? 대체 무슨 일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갑자기 심가은이 외국에서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기사에는 언니가 심가은을 죽였다는 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인 댓글이 달렸고요.] 소희는 이서가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으나, 상세하고 구체적인 댓글을 잊지 못하고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그 댓글을 사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서를 혹독하게 욕하고 있었다. 하씨 그룹이 압력을 가해오는 상황에서 이런 부정적인 뉴스가 터졌는데, 감히 윤씨 그룹과 협력하겠다는 회사가 어디 있겠는가?이서가 강하게 미간을 비틀었다. “알았어, 소희 씨는 리치푸드와의 재계약부터 처리해 줘.” [네, 언니.]전화를 끊은 이서는 즉시 뉴스 사이트를 열었는데, 스크롤을 내릴 필요도 없이 사이트 1면에 떠있는 심가은에 관한 머리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의 내용은 심가은이 죽기 전에 저지른 만행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었으나, 기사의 댓글에는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었다. [윤이서가 심가은을 살해한 게 분명해요. 듣자 하니 심가은이 죽은 곳이 대회장이었다면서요? 당시 주최 측이 선정한 우승자는 심가은이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윤이서가 흉악범을
이서는 한참이나 대답할 수 없었다. “팀장님은 조사만 열심히 해주시면 됩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홍보팀 팀장은 대단히 난처했지만, 이서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은 이서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계속해서 스크린 속의 기사를 보았다. 기사를 한참 동안 보았음에도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한 그녀는 휴대전화를 끈 채 차에서 내렸고, 이내 다른 회사로 걸어 들어갔다. 같은 시각.기사를 본 하은철이 차가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던졌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눈앞의 부하를 바라보며 냉소했다. “허, 이 기사가 아니었으면 작은 아빠랑 윤이서가 돌아온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 아니야!” 부하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아무래도 하 대표님께서 귀국하시기 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 기사를 보고서야 하 대표님께서 돌아오셨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럼 이 기사가 없었으면, 너희는 작은 아빠가 돌아온 줄도 몰랐을 거란 말이네?”부하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 당장 두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아봐! 이 기사는 도대체 어떤 새X가 찌른 건지, 심가은이라는 여자는 어떻게 죽게 된 건지까지도!” “예!”부하는 얼른 몸을 돌려 떠났다.문이 닫히자, 급히 몸을 일으킨 하은철이 태블릿에 있는 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돌아왔구나!’‘윤이서가 돌아왔어!’ ‘하지만 그 여자가 분명... 윤이서는 M국에서 잘 지낼 수 없을 거라고 했었는데?’‘지금 보아하니 그 여자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던 거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윤이서, 네가 기어코 나의 작은 아빠를 선택해야겠다면,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혹독히 치러야할 거야.’ 이렇게 생각한 하은철의 눈빛이 더욱 어둡고 음산해졌다. 같은 시각.세트장에서 촬영하던 나나는 장희령에게 여섯 번째 따귀를 맞았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감독과 제작진 등의 다른 스태프들은 더 이상 상황을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희령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