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 저녁부터 이서의 도시락을 받지 못해 속을 태우는 하은철은 이서한테서 전화가 걸려 오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이렇게 빨리 전화를 받은 건 전례가 없었던 터라, 마음속으로 할 말을 생각하던 이서 조차도 어리둥절했다.“내 밥은? 왜 아직 내 밥은 안 오는 거야?”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정말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니까. 하나는 나를 감방에 보내려고 안달이 났고, 하나는 나를 노예 취급하고……. 나 다 때려 치울 거야. 이제 밥 같은 거 안 해!”‘먹던 말던! 먹기 싫으면 굶어 죽던가!’할아버지의 체면은 이미 하은철이 다 깎아 먹었다.전화를 사이에 두고, 하은철도 이서의 짙은 노기를 느꼈다.끊긴 핸드폰을 손에 든 그는 어리둥절했다.이서 얘기로 들어서는, 분명히 윤수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문득 어제 윤수정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니 고천성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났다.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는 바로 윤수정에게 전화해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어제 널 괴롭힌다는 사람이…… 혹시 이서니?”하은철의 전화를 받고 한껏 신이 났던 윤수정은 그의 질문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오빠…….]“맞아, 아니야?”[맞아, 언니가 나를 때렸어. 믿지 못하겠으면 와서 봐봐.]“왜? 왜 널……?”윤수정은 억울한 척 흐느꼈다.[내가…… 내가 오빠를 좀 잘 챙겨달라고 했더니, 나를 나쁜 년이라고 욕하면서 손찌검 했어. 그리고 오빠, 글쎄 언니가 감방에 보내겠대…….]하은철은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사실이야?”[못 믿겠으면, 고천성 한테 물어봐. 어제 언니가 얼마나 미쳐 날뛰었는지 몰라. 흑흑…….]윤수정은 더욱 서럽게 울었다.[오빠, 설마 정말 이서 좋아하게 된 거야? 이젠 내 말도 못 믿어?]하은철은 순간 당황했다.“아니야, 당연히 네 말 믿지. 걱정하지 마. 고천성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하지만 난, 오빠랑 같이 있고 싶은데…….]하은철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는 몸이
전화를 끊고 이서는 경찰서에 가서 노트북 컴퓨터를 찾으러 왔다.“노트북이 완전 박살 났어요.”남자 경찰이 말했다.“아마 복구하기 힘들 겁니다.”이서가 눈썹을 찡그렸다.콘테스트 마감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작업한다고 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잠깐 고민을 하던 이서는 서비스 센터에 한 번 가기로 했다.센터 직원은 북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냥 다시 하나 사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이서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서비스 센터를 걸어 나왔다. 몇 걸음 안 갔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윤이서 씨?”고개를 돌려보니, 이상언이 길가에서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이 선생님 여기는 웬 일이세요?” 이서는 정신을 가다듬고 걸어갔다.“이 부근에 유명한 정통 한식집이 있다고 들었는데…….”이상언이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보며 말했다.“지금 이 주변을 몇 바퀴 돌았는데도 못 찾겠어요.”이서는 이상언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핸드폰 속의 위치를 한 번 쓰윽 보고는 말했다.“이 한식집은 작은 골목 안에 있어요. 네비로는 찾기 힘들 거에요. 제가 알려 드릴게요.”이상언도 곧 차를 세워 두고, 이서를 따라 한식집으로 걸어갔다.두 사람은 작은 골목을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번화한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적한 오솔길로 들어갔다.오솔길의 끝에 한식집이 있었다.문 앞의 간판은 이미 페인트가 벗겨졌다.“바로 이 집이에요!” 흥분한 이상언의 모습을 마치 어린애 같았다.본인의 역할을 다한 이서가 말했다.“그럼 맛있게 드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왜요? 윤이서 씨.” 이상언은 이서를 불러 세웠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별다른 약속 없으면 저랑 같이 식사해요. 제가 살게요.”마침 이서에게 할 말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서는 고장 난 노트북 때문에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아니에요, 전 일이 좀 있어서…….”“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해야 하잖
이상언은 눈을 부릅뜨곤 한참이나 뒷말을 기다렸지만, 이서는 아무런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 종업원이 식사를 내오기 시작했다.“자, 식사합시다. 드세요.”식사를 마치고, 이상언과 이서는 갈라섰다.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이상언은 휴대전화를 꺼내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야?”“회사.”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지환은 북성 동쪽의 작은 상권에 사무실을 얻었다. 공간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하은철에게 하씨 빌딩 88층을 치우고 개인 헬스장을 만들어 두라고 했다.그가 회사라고 말하자 이상언은 북성 동쪽에 위치한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나, 오늘 누구 만났게? ……이서 씨 만났어.”고개도 들지 않던 지환은 손에 쥔 펜을 멈추고, 냉엄한 표정을 지었다.“밥도 한 끼 먹었지.”“이상언!” 지환은 혀끝이 입천장에 닿았다.이상언은 헤헤 웃었다.“우연히 만난 거야. 노트북을 수리하려고 한다길래 너를 적극 추천했어. 어때, 충분히 재미있지? 네가 이서 씨 도와 노트북을 고치기만 하면 그녀는 틀림없이 니가 멋지다고 생각할 거야. 네가 달리 보일 거라고. 그럼 너희 두 사람의 관계도 더욱 가까워지지 않을까?”검지로 이마를 누르고 있는 지환의 얼굴선이 팽팽해졌다.머릿속에 또 어젯밤의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이서의 적극적인 행동은 그의 욕정에 불을 지폈지만, 그녀의 눈물은 열정의 불씨를 무참히 꺼버렸다.‘마음에서 우러난 게 아니었어.’“왜 말이 없어?” 전화 너머에서 느껴지는 지나치게 조용한 분위기는 이상언을 긴장하게 했다.지환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하은철을 8년 동안 사랑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이상언은 속으로 부정했다.‘뭐가 그리 복잡해?’하지만 입으로는 별일 아닌 듯 물었다.“정말 이서 씨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지환은 눈동자를 치켜들었다.“들어와.”들어온 사람은 비서 이천이었다. 지환이 통화 중인 걸 확인하
이서는 노트북을 들고 오후 내내 뛰어다녔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그녀는 아예 공모전에 참가하는 것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하지만…….윤씨 집안을 떠난 지금, 하지환에게 의지해 살아갈 수는 없었다.‘그 사람도 얼마 전에 별장을 샀으니, 아마 돈이 없을 것이야. 게다가 매달 대출금까지 갚아야 하잖아.’여기까지 생각한 이서는, 윤수정의 머리를 비틀어 놓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오늘 아침 송서묵은 이미 법적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고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왔다.법원 소장은 향후 2, 3일 이내로 윤수정한테 전달될 것이고, 재판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이서는 재판이 열리는 날, 출석만 하면 된다.잠자코 기다리면, 윤수정에게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하지만 안타깝게도…….마음 정리가 대충 끝난 이서는 콘테스트 알림 기능을 취소하려고 공식계정을 로그인했는데, 글쎄 주최측의 콘테스트 공모 마감일이 다음 주로 연장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이는 즉 그녀에게 아직 일주일의 준비 시간이 있다는 얘기다.구사일생이라는 생각이 든 이서는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별장으로 돌아왔다.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디자인 시안을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그러나 하다 보니, 시시하고 재미없어 아예 새 시안을 만들기 시작했다.지난번의 경험이 있다 보니 작업은 막힘없이 술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끊임없이 영감이 떠올라 저녁이 되기 전에 새로운 시안이 완성되었다.이서는 고개를 들고서야,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았다.후련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이서는, 뜻밖에도 지환이 음식을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언제 왔어요?” 이서는 의아해했다.지환은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 한바탕 격전을 벌인 사람처럼 머리카락은 떡이라도 된 것 마냥 하얀 얼굴에 붙어있었고, 눈망울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참 됐어요.”위층으로 올라갔었는데 이서가 초집중으로 시안을
30분 뒤, 지환은 이상언의 전화를 받았다.[방금 회의 중이었어?]이상언은 트림했다.[방금 하은철이 나한테까지 전화를 걸어왔더라. 무슨 신장 공여자를 찾겠다나? 일전에 찾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왜 또 갑자기 바뀌었어?]지환은 화가 채 가시지 않아,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찾고 안 찾고는 네 일이지.”[뭔 말이야?]이상언은 다급하게 얘기했다.[지난번에 말했잖아. 그 여자 병력이 좀 이상해. 네가 찾지 말라고 해서 손 놓고 있었지. 찾으려면 또 병력을 뒤져야 해. 야, 지금 나에게 확실하게 말해 줘. 찾아, 말아?]지환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상언은 이해했다. 찾지 말라는 뜻이다.5분도 안 되어 하은철의 전화가 또 울렸다.이상언은 병력에서 적합한 구실을 찾아 하은철을 거절하려고 윤수정의 병력을 들추어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장의 데이터 수치에 눈길이 끌렸다.지난 1년 간 윤수정의 혈압 데이터인데, 처음 몇 달은 저혈압 상태였다가, 중간에 며칠 동안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가 며칠 뒤 다시 저혈압으로 바뀌었다.촘촘하게 적힌 데이터 수치들이라, 꼼꼼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신부전증의 증상 중 하나가 저혈압인데, 통상적인 경우 혈압 수치가 갑자기 정상으로 될 수 없다.그는 하은철의 전화를 받지 않고,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원장님, 혹시 윤수정 환자 입원 후의 모든 데이터를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최근 자료들까지도요…….”병원장은 곧 데이터를 보내왔다.이상언은 특별히 혈압이 정상 수치일 때의 기타 검사 수치를 확인해 봤는데 모두 정상적인 범위 내에 있었다.그게 이상했다.……드디어 새 디자인 시안을 마친 이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직접 조직위원회에 서류를 제출하였다.모두 끝내자 왠지 모르게 공허함마저 느껴졌다.요 며칠 동안 줄곧 시안 작업으로 바빠, 하지환과 민예지의 일을 생각할 시간도,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오히려 순식간에 지나갔다. 막상 한가해지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
“왜 우리가 나가요?!” 임하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내가 사장이야. 손님 받고 말고는 내가 정해요…….”사장이 귀찮은 듯 손사래 치며 말했다.“자, 나가, 나가요, 민예지 양이 싫어하는 사람은 우리 식당에서도 환영하지 않아요.”임하나가 더 따지려고 나서자, 이서가 그녀를 붙잡았다.“하나야, 됐어. 해피한 주말을 꼭 이런 곳에서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근처에 많은 게 음식점이다.“꼭 그렇지는 않지요.”갑자기 농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놀러 나왔는데 당연히 기분 좋게 놀아야죠.”말소리 나는 방향을 따라 보았더니 뜻밖에도 이상언이었다.여기서 그를 다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상언이 다가와 이서와 임하나랑 인사를 하고 또 사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하며 모난 곳 없이 무던했다.“이 두 분은 제 친구입니다.”말 속의 뜻은 이미 분명했다.이서와 임하나를 쫓는 것은 바로 그를 쫓는 것이다.눈앞 이 남자의 신분을, 식당 사장은 몰라도, 민예지는 단번에 알아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 이상언 님!”‘국제적으로 유명한 천재 의사!’‘하지환의 절친이라고 했다.’민예지의 심장이 또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환도 근처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검지가 갑자기 아파오기 시작했다“그…… 할 일이 더 있다는 걸 깜빡했어요……. 저 먼저 갈게요…….”식당 사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민예지를 쫓아갔다.“민예지 양…….”임하나는 민예지가 이렇게 허겁지겁 줄행랑을 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호기심에 이상언을 쳐다보고는 몰래 이서에게 물었다.“이분은 어디에서 뭐 하시는 분이신가? 민예지는 왜 이 사람을 이렇게 두려워하는 거야?”이서도 민예지가 왜 겁이 잔뜩 들어 도망갔는지 모른다.의사인 이상언이 사람 잡아먹을 일은 없을 테고.“윤이서 씨, 이분은…….”이상언의 시선은 임하나에게 떨어졌다.임하나는 솔직하고 대범하게 손을 내밀었다.“임하나입니다.”“이상언입니다.”두 사람은 손가락이 마주치자마자
지환은 눈을 치켜뜨고 연기 속에서 이서를 보았다.네 눈이 마주쳤지만, 말없이 상대방만 바라보았다.이상언은 얼른 이서를 지환의 곁으로 밀었다.“타이밍 죽이지?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이서 씨를 만났어.”지환 옆에 앉은 이서는 그에게서 나는 옅은 박하 냄새 때문에 심금이 혼란스러워졌다.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르는 임하나는, 하지환이 이상언과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둘이…… 친구예요?”‘오우, 하지환 괜찮은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천재 의사도 알고…….’“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되었어요.”이상언은 임하나의 곁에 자리를 잡고 태블릿 메뉴판을 각각 이서와 임하나에게 건네주었다.“임하나 씨, 저희는 이미 주문했어요. 드시고 싶은 거 더 주문하세요.”앉아서 안절부절못하는 이서는 다리를 들어 몰래 임하나를 발로 찼다. 그녀에게 함께 스리슬쩍 빠져나가자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임하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진지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그녀는 몰래 테이블 밑을 보았다.그제야 지환의 긴 다리가 이쪽으로 뻗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그녀의 발길질은 지환의 다리를 정확하게 맞았다.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지환이 마침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있었다.이서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주문하는 척했다.“자기야, 절대 가재 요리 주문하면 안 돼. 알지?”임하나가 귀띔해 주었다.이서가 응, 하고 대답했다.“어, 윤이서 씨도 가재 먹으면 안 돼요?” 이상언은 흥미진진하게 물었다.“네, 이서는 가재 알레르기 있어서 먹으면 큰일 나요. 먹자마자 온몸이 팅팅 부어요.”“그래요?” 이상언은 흥이 났다.“신기하네, 지환도 그러한데! 한번은 가재를 잘못 먹고, 세상에, 얼굴이 부어서……. 하하하하, 그때 사진 안 찍어 둔 게 얼마나 후회되는지 몰라요!”지환은 이상언을 째려보았지만, 이상언은 모르는 척 계속 임하나에게 물었다.“그럼 이서 씨는 가재 말고 또 못 먹는 거 있어요?”“있지요, 이서는 고수와
임하나는 피식 웃었다.“지환 씨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다면서, 벌써 그 사람 쪽으로 팔이 굽는 거야?”“하나야…….”이서의 얼굴이 붉어졌다.임하나는 정색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 내가 널 봐서 그냥 놔둔다. 휴우, 잘생긴 남자를 잃었으니, 뭐로 날 보상해 줄 거야?”이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해줄게.”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룸으로 돌아왔다.이서가 들어가자 지환의 시선이 이서에게 쏠렸다.이상언은 상황을 보고 일어섰다.“시간도 아직 이른데 영화나 보러 갈까요?”“아니요.”임하나는 이상언과 얽히고 싶지 않아 태도를 분명하게 했다.“나와 이서는 쇼핑하러 갈 거에요. 오늘 맛있게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이상언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그럼 우리도 같이 가요. 쇼핑하면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는 후회했다.지환이 언제 여자들의 가방 들었다고?하지만, 뜻밖에도 지환은 별말없이 순순히 양복을 들고 일어났다.그리하여 이날, 이상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하지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양손 가득 쇼핑백만 들려 있지 않았더라면, 이상언은 필히 지금 이 모습의 하지환을 찍어 SNS에 업로드했을 것이다.아마도 폭발적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이다.저녁이 되자, 이서와 임하나는 발바닥이 아플 정도까지 쇼핑을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이상언은 임하나를 책임지고 데려다주고, 이서는 못 이기는 척 지환의 차에 올라탔다.차가 달리고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 흘렀다.별장에 도착하자, 이서는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쇼핑백을 꺼내려고 했다.하지환이 한발 앞서 쇼핑백을 들었다.“가요.”이서는 두 벌만 샀다. 나머지는 전부 임하나의 전리품이었다.이서는 쇼핑백을 한 번 보고는 지환의 뒤에서 걸었다.달빛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는 마치 목을 감고 뒤엉켜 있는 사람 보였다.그림자를 살펴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좀 더 천천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