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목욕 타올을 두르고 망설이며 욕실을 나섰다.상의를 탈의한 채 갈아입을 옷을 찾던 지환은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지환의 몸매는 정말 예술이었다. 떡 벌어진 넓은 어깨와 잘록한 치골, 운동으로 잘 다져진 탄탄한 가슴 근육과 복근, 생각해 보면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이서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지환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제가 도와드릴 게요.”눈썹을 치켜세운 지환은 움츠린 이서의 분홍색 발가락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잠긴 목소리는 답했다.“그래요.”그는 말하면서 갈아입을 옷을 이서에게 건넸다.고개를 숙인 이서는 지환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한 그녀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이서 손에 들린 옷은 지환의 팔을 가볍게 지나, 어깨 쪽에 다다랐다. 지환의 키에 비해 아담한 이서는 발끝을 세워야만 옷을 입힐 수 있었다.지환이 눈치채고 매너 있게 고개를 숙이자, 이서의 붉은 입술이 지환의 턱에 닿았다.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머릿속도 백지장이 되었다.갑자기 몸이 붕 뜨는 것 같더니 이내 침대로 내던져졌다.곧이어 숨 막히는 키스가 쏟아졌다.의식은 점차 주체를 잃고, 육체와 분리되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울어요?” 지환의 목소리에 의식이 돌아온 이서는, 볼을 쓰다듬고 나서야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알았다.방금 전까지 눈에 서려 있던 흥분과 격정은 사라지고 지환은 무덤덤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싫은가요?”이서는 버벅거리며 붉은 입술을 벌렸다.싫은 게 아니라, 민예지가 지환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짜증나고 슬펐을 뿐이다.하지만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계약서에서는 상대방의 사생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환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잘 자요.”이서가 정신 차리고, 일어났을 때 문은 이미 닫혔다.그녀는 무릎을 안고 침대에 우두커니 앉았다. 막막하고 답답했다.이날
어젯 저녁부터 이서의 도시락을 받지 못해 속을 태우는 하은철은 이서한테서 전화가 걸려 오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이렇게 빨리 전화를 받은 건 전례가 없었던 터라, 마음속으로 할 말을 생각하던 이서 조차도 어리둥절했다.“내 밥은? 왜 아직 내 밥은 안 오는 거야?”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정말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니까. 하나는 나를 감방에 보내려고 안달이 났고, 하나는 나를 노예 취급하고……. 나 다 때려 치울 거야. 이제 밥 같은 거 안 해!”‘먹던 말던! 먹기 싫으면 굶어 죽던가!’할아버지의 체면은 이미 하은철이 다 깎아 먹었다.전화를 사이에 두고, 하은철도 이서의 짙은 노기를 느꼈다.끊긴 핸드폰을 손에 든 그는 어리둥절했다.이서 얘기로 들어서는, 분명히 윤수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문득 어제 윤수정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니 고천성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났다.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는 바로 윤수정에게 전화해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어제 널 괴롭힌다는 사람이…… 혹시 이서니?”하은철의 전화를 받고 한껏 신이 났던 윤수정은 그의 질문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오빠…….]“맞아, 아니야?”[맞아, 언니가 나를 때렸어. 믿지 못하겠으면 와서 봐봐.]“왜? 왜 널……?”윤수정은 억울한 척 흐느꼈다.[내가…… 내가 오빠를 좀 잘 챙겨달라고 했더니, 나를 나쁜 년이라고 욕하면서 손찌검 했어. 그리고 오빠, 글쎄 언니가 감방에 보내겠대…….]하은철은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사실이야?”[못 믿겠으면, 고천성 한테 물어봐. 어제 언니가 얼마나 미쳐 날뛰었는지 몰라. 흑흑…….]윤수정은 더욱 서럽게 울었다.[오빠, 설마 정말 이서 좋아하게 된 거야? 이젠 내 말도 못 믿어?]하은철은 순간 당황했다.“아니야, 당연히 네 말 믿지. 걱정하지 마. 고천성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하지만 난, 오빠랑 같이 있고 싶은데…….]하은철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는 몸이
전화를 끊고 이서는 경찰서에 가서 노트북 컴퓨터를 찾으러 왔다.“노트북이 완전 박살 났어요.”남자 경찰이 말했다.“아마 복구하기 힘들 겁니다.”이서가 눈썹을 찡그렸다.콘테스트 마감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작업한다고 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잠깐 고민을 하던 이서는 서비스 센터에 한 번 가기로 했다.센터 직원은 북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냥 다시 하나 사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이서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서비스 센터를 걸어 나왔다. 몇 걸음 안 갔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윤이서 씨?”고개를 돌려보니, 이상언이 길가에서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이 선생님 여기는 웬 일이세요?” 이서는 정신을 가다듬고 걸어갔다.“이 부근에 유명한 정통 한식집이 있다고 들었는데…….”이상언이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보며 말했다.“지금 이 주변을 몇 바퀴 돌았는데도 못 찾겠어요.”이서는 이상언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핸드폰 속의 위치를 한 번 쓰윽 보고는 말했다.“이 한식집은 작은 골목 안에 있어요. 네비로는 찾기 힘들 거에요. 제가 알려 드릴게요.”이상언도 곧 차를 세워 두고, 이서를 따라 한식집으로 걸어갔다.두 사람은 작은 골목을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번화한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적한 오솔길로 들어갔다.오솔길의 끝에 한식집이 있었다.문 앞의 간판은 이미 페인트가 벗겨졌다.“바로 이 집이에요!” 흥분한 이상언의 모습을 마치 어린애 같았다.본인의 역할을 다한 이서가 말했다.“그럼 맛있게 드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왜요? 윤이서 씨.” 이상언은 이서를 불러 세웠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별다른 약속 없으면 저랑 같이 식사해요. 제가 살게요.”마침 이서에게 할 말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서는 고장 난 노트북 때문에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아니에요, 전 일이 좀 있어서…….”“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해야 하잖
이상언은 눈을 부릅뜨곤 한참이나 뒷말을 기다렸지만, 이서는 아무런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 종업원이 식사를 내오기 시작했다.“자, 식사합시다. 드세요.”식사를 마치고, 이상언과 이서는 갈라섰다.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이상언은 휴대전화를 꺼내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야?”“회사.”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지환은 북성 동쪽의 작은 상권에 사무실을 얻었다. 공간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하은철에게 하씨 빌딩 88층을 치우고 개인 헬스장을 만들어 두라고 했다.그가 회사라고 말하자 이상언은 북성 동쪽에 위치한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나, 오늘 누구 만났게? ……이서 씨 만났어.”고개도 들지 않던 지환은 손에 쥔 펜을 멈추고, 냉엄한 표정을 지었다.“밥도 한 끼 먹었지.”“이상언!” 지환은 혀끝이 입천장에 닿았다.이상언은 헤헤 웃었다.“우연히 만난 거야. 노트북을 수리하려고 한다길래 너를 적극 추천했어. 어때, 충분히 재미있지? 네가 이서 씨 도와 노트북을 고치기만 하면 그녀는 틀림없이 니가 멋지다고 생각할 거야. 네가 달리 보일 거라고. 그럼 너희 두 사람의 관계도 더욱 가까워지지 않을까?”검지로 이마를 누르고 있는 지환의 얼굴선이 팽팽해졌다.머릿속에 또 어젯밤의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이서의 적극적인 행동은 그의 욕정에 불을 지폈지만, 그녀의 눈물은 열정의 불씨를 무참히 꺼버렸다.‘마음에서 우러난 게 아니었어.’“왜 말이 없어?” 전화 너머에서 느껴지는 지나치게 조용한 분위기는 이상언을 긴장하게 했다.지환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하은철을 8년 동안 사랑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이상언은 속으로 부정했다.‘뭐가 그리 복잡해?’하지만 입으로는 별일 아닌 듯 물었다.“정말 이서 씨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지환은 눈동자를 치켜들었다.“들어와.”들어온 사람은 비서 이천이었다. 지환이 통화 중인 걸 확인하
이서는 노트북을 들고 오후 내내 뛰어다녔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그녀는 아예 공모전에 참가하는 것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하지만…….윤씨 집안을 떠난 지금, 하지환에게 의지해 살아갈 수는 없었다.‘그 사람도 얼마 전에 별장을 샀으니, 아마 돈이 없을 것이야. 게다가 매달 대출금까지 갚아야 하잖아.’여기까지 생각한 이서는, 윤수정의 머리를 비틀어 놓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오늘 아침 송서묵은 이미 법적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고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왔다.법원 소장은 향후 2, 3일 이내로 윤수정한테 전달될 것이고, 재판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이서는 재판이 열리는 날, 출석만 하면 된다.잠자코 기다리면, 윤수정에게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하지만 안타깝게도…….마음 정리가 대충 끝난 이서는 콘테스트 알림 기능을 취소하려고 공식계정을 로그인했는데, 글쎄 주최측의 콘테스트 공모 마감일이 다음 주로 연장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이는 즉 그녀에게 아직 일주일의 준비 시간이 있다는 얘기다.구사일생이라는 생각이 든 이서는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별장으로 돌아왔다.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디자인 시안을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그러나 하다 보니, 시시하고 재미없어 아예 새 시안을 만들기 시작했다.지난번의 경험이 있다 보니 작업은 막힘없이 술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끊임없이 영감이 떠올라 저녁이 되기 전에 새로운 시안이 완성되었다.이서는 고개를 들고서야,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았다.후련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이서는, 뜻밖에도 지환이 음식을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언제 왔어요?” 이서는 의아해했다.지환은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 한바탕 격전을 벌인 사람처럼 머리카락은 떡이라도 된 것 마냥 하얀 얼굴에 붙어있었고, 눈망울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참 됐어요.”위층으로 올라갔었는데 이서가 초집중으로 시안을
30분 뒤, 지환은 이상언의 전화를 받았다.[방금 회의 중이었어?]이상언은 트림했다.[방금 하은철이 나한테까지 전화를 걸어왔더라. 무슨 신장 공여자를 찾겠다나? 일전에 찾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왜 또 갑자기 바뀌었어?]지환은 화가 채 가시지 않아,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찾고 안 찾고는 네 일이지.”[뭔 말이야?]이상언은 다급하게 얘기했다.[지난번에 말했잖아. 그 여자 병력이 좀 이상해. 네가 찾지 말라고 해서 손 놓고 있었지. 찾으려면 또 병력을 뒤져야 해. 야, 지금 나에게 확실하게 말해 줘. 찾아, 말아?]지환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상언은 이해했다. 찾지 말라는 뜻이다.5분도 안 되어 하은철의 전화가 또 울렸다.이상언은 병력에서 적합한 구실을 찾아 하은철을 거절하려고 윤수정의 병력을 들추어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장의 데이터 수치에 눈길이 끌렸다.지난 1년 간 윤수정의 혈압 데이터인데, 처음 몇 달은 저혈압 상태였다가, 중간에 며칠 동안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가 며칠 뒤 다시 저혈압으로 바뀌었다.촘촘하게 적힌 데이터 수치들이라, 꼼꼼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신부전증의 증상 중 하나가 저혈압인데, 통상적인 경우 혈압 수치가 갑자기 정상으로 될 수 없다.그는 하은철의 전화를 받지 않고,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원장님, 혹시 윤수정 환자 입원 후의 모든 데이터를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최근 자료들까지도요…….”병원장은 곧 데이터를 보내왔다.이상언은 특별히 혈압이 정상 수치일 때의 기타 검사 수치를 확인해 봤는데 모두 정상적인 범위 내에 있었다.그게 이상했다.……드디어 새 디자인 시안을 마친 이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직접 조직위원회에 서류를 제출하였다.모두 끝내자 왠지 모르게 공허함마저 느껴졌다.요 며칠 동안 줄곧 시안 작업으로 바빠, 하지환과 민예지의 일을 생각할 시간도,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오히려 순식간에 지나갔다. 막상 한가해지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
“왜 우리가 나가요?!” 임하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내가 사장이야. 손님 받고 말고는 내가 정해요…….”사장이 귀찮은 듯 손사래 치며 말했다.“자, 나가, 나가요, 민예지 양이 싫어하는 사람은 우리 식당에서도 환영하지 않아요.”임하나가 더 따지려고 나서자, 이서가 그녀를 붙잡았다.“하나야, 됐어. 해피한 주말을 꼭 이런 곳에서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근처에 많은 게 음식점이다.“꼭 그렇지는 않지요.”갑자기 농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놀러 나왔는데 당연히 기분 좋게 놀아야죠.”말소리 나는 방향을 따라 보았더니 뜻밖에도 이상언이었다.여기서 그를 다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상언이 다가와 이서와 임하나랑 인사를 하고 또 사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하며 모난 곳 없이 무던했다.“이 두 분은 제 친구입니다.”말 속의 뜻은 이미 분명했다.이서와 임하나를 쫓는 것은 바로 그를 쫓는 것이다.눈앞 이 남자의 신분을, 식당 사장은 몰라도, 민예지는 단번에 알아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 이상언 님!”‘국제적으로 유명한 천재 의사!’‘하지환의 절친이라고 했다.’민예지의 심장이 또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환도 근처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검지가 갑자기 아파오기 시작했다“그…… 할 일이 더 있다는 걸 깜빡했어요……. 저 먼저 갈게요…….”식당 사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민예지를 쫓아갔다.“민예지 양…….”임하나는 민예지가 이렇게 허겁지겁 줄행랑을 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호기심에 이상언을 쳐다보고는 몰래 이서에게 물었다.“이분은 어디에서 뭐 하시는 분이신가? 민예지는 왜 이 사람을 이렇게 두려워하는 거야?”이서도 민예지가 왜 겁이 잔뜩 들어 도망갔는지 모른다.의사인 이상언이 사람 잡아먹을 일은 없을 테고.“윤이서 씨, 이분은…….”이상언의 시선은 임하나에게 떨어졌다.임하나는 솔직하고 대범하게 손을 내밀었다.“임하나입니다.”“이상언입니다.”두 사람은 손가락이 마주치자마자
지환은 눈을 치켜뜨고 연기 속에서 이서를 보았다.네 눈이 마주쳤지만, 말없이 상대방만 바라보았다.이상언은 얼른 이서를 지환의 곁으로 밀었다.“타이밍 죽이지?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이서 씨를 만났어.”지환 옆에 앉은 이서는 그에게서 나는 옅은 박하 냄새 때문에 심금이 혼란스러워졌다.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르는 임하나는, 하지환이 이상언과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둘이…… 친구예요?”‘오우, 하지환 괜찮은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천재 의사도 알고…….’“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되었어요.”이상언은 임하나의 곁에 자리를 잡고 태블릿 메뉴판을 각각 이서와 임하나에게 건네주었다.“임하나 씨, 저희는 이미 주문했어요. 드시고 싶은 거 더 주문하세요.”앉아서 안절부절못하는 이서는 다리를 들어 몰래 임하나를 발로 찼다. 그녀에게 함께 스리슬쩍 빠져나가자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임하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진지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그녀는 몰래 테이블 밑을 보았다.그제야 지환의 긴 다리가 이쪽으로 뻗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그녀의 발길질은 지환의 다리를 정확하게 맞았다.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지환이 마침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있었다.이서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주문하는 척했다.“자기야, 절대 가재 요리 주문하면 안 돼. 알지?”임하나가 귀띔해 주었다.이서가 응, 하고 대답했다.“어, 윤이서 씨도 가재 먹으면 안 돼요?” 이상언은 흥미진진하게 물었다.“네, 이서는 가재 알레르기 있어서 먹으면 큰일 나요. 먹자마자 온몸이 팅팅 부어요.”“그래요?” 이상언은 흥이 났다.“신기하네, 지환도 그러한데! 한번은 가재를 잘못 먹고, 세상에, 얼굴이 부어서……. 하하하하, 그때 사진 안 찍어 둔 게 얼마나 후회되는지 몰라요!”지환은 이상언을 째려보았지만, 이상언은 모르는 척 계속 임하나에게 물었다.“그럼 이서 씨는 가재 말고 또 못 먹는 거 있어요?”“있지요, 이서는 고수와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