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는 영문을 모른 채 송서묵의 뒤를 따랐다.송서묵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를 꽂고 한가로이 발걸음을 내디디며 이서에게 물었다.“윤이서 씨는 어떤 결과를 원하세요?”윤이서는 몇 분 동안 진지하게 생각했다.“이 사건인 경우, 최악의 상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송서묵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윤이서를 보는 눈빛에 약간의 의아함이 더해졌다.‘하은철 뒤꽁무니만 따라다닌다는 소문과 달리 꽤 독한 사람이었네.’“기물파손에 쌍방 폭행, 먼저 시비 걸고 도발했으니 판결이 확정되면, 아마도 열흘에서 보름가량 감금될 수 있습니다.”이서는 웃으며 얘기했다.“송 변호사님이라면 이에 그치지 않을 것 같은데요?”송서묵은 웃으며 대답은 피했다.윤이서는 몸을 곧게 폈다.“궁금한 게 있어요.”“네. 말씀하세요.”“누가 의뢰했나요?”송서묵은 윤이서의 눈을 바라보며 답했다.“음…… 이건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경찰서 오기 전, 상대방은 그에게 자기의 신분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그는 굳이 그 사람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경찰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입구에 도착하자 윤수정과 딱 부딪혔다.윤수정은 차에 오르다 말고 이서를 표독스럽게 쳐다보았다.“윤이서.”윤이서는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윤수정은 이미 휠체어를 타고 윤이서 앞에 다가왔다.여기는 경찰서이니, 굳이 이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변호사가 이미 내 뜻을 잘 전달했지?”말하는 사이에 고천성도 나왔다.그는 윤이서 뒤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윤수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턱을 젖히며 말했다.“네가 아무리 은철오빠의 비위와 입맛을 맞추려고 노력해도, 결론적으로 오빠라는 사람은 얻지 못할 거야!”윤이서는 차갑게 웃었다.“깜냥도 안 되는 남자를 보물로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걸? 송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먼저 갈게요.”“모셔다 드릴 게요.”“어떻게 귀찮게…
윤이서가 다가와서 물었다.“뭐 좀 도와드릴까요?”“아니요.”하지환은 처음 요리하는 사람처럼 동작이 능숙하지 않았다.주방 선반 위에 놓인 태블릿은 요리 과정을 반복하여 재생되고 있다.“처음이죠?” 윤이서는 다소 의외였다.“응.”“그런 것 같네요.”비록 능숙해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조리 있게 잘하고 있었다.하지환은 갈비찜을 접시에 담았다.이서는 접시를 식탁에 놓고 하지환 맞은편에 앉았다.“먹어봐요.”윤이서는 수저를 들어 두부조림을 집었다.한 입 맛보고 웃으며 말했다.“플레이팅은 좀 부족한데 맛은 괜찮네요. 음식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요.”하지환은 젓가락을 잡았던 손을 멈칫하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서는 직감적으로 하지환이 송서묵을 변호사로 의뢰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이 대단한 인물은 하씨 그룹도 어쩌지 못한 거물이다.그녀가 몰래 하지환을 힐끗 보고는 입가에 나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왜? 입맛에 안 맞아요?”하지환은 윤이서의 불안한 시선을 알아채고 물었다.윤이서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송서묵 변호사는 당신이 섭외한 건가요?”하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섭외했죠?”“전에 그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어요.”사실이었다. 과거에 하지환이 송서묵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그때 송서묵은 하씨 집안을 도와 다국적소송을 진행중일 때라 늘 살인 협박에 시달렸다. 하씨 집안은 대한민국에서는 제1의 가문이라고 하지만 해외까지는 힘이 닿지 못했다. 이때 사람을 파견하여 송서묵의 신변을 보호했던 사람이 하지환이었다.그래서 송서묵은 하지환에게 매우 감사했다. 이번에 그에게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해성에서 날아왔다.이서는 그가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자, 추궁도 하지 않고 계속 밥을 먹고 있었다.식사를 마친 후, 하지환은 이서에게 올라가 쉬라고 했다.“먼저 목욕하고 쉬어요.”피곤한 건 사실
이서는 목욕 타올을 두르고 망설이며 욕실을 나섰다.상의를 탈의한 채 갈아입을 옷을 찾던 지환은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이서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지환의 몸매는 정말 예술이었다. 떡 벌어진 넓은 어깨와 잘록한 치골, 운동으로 잘 다져진 탄탄한 가슴 근육과 복근, 생각해 보면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이서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지환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제가 도와드릴 게요.”눈썹을 치켜세운 지환은 움츠린 이서의 분홍색 발가락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잠긴 목소리는 답했다.“그래요.”그는 말하면서 갈아입을 옷을 이서에게 건넸다.고개를 숙인 이서는 지환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한 그녀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이서 손에 들린 옷은 지환의 팔을 가볍게 지나, 어깨 쪽에 다다랐다. 지환의 키에 비해 아담한 이서는 발끝을 세워야만 옷을 입힐 수 있었다.지환이 눈치채고 매너 있게 고개를 숙이자, 이서의 붉은 입술이 지환의 턱에 닿았다.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머릿속도 백지장이 되었다.갑자기 몸이 붕 뜨는 것 같더니 이내 침대로 내던져졌다.곧이어 숨 막히는 키스가 쏟아졌다.의식은 점차 주체를 잃고, 육체와 분리되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울어요?” 지환의 목소리에 의식이 돌아온 이서는, 볼을 쓰다듬고 나서야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알았다.방금 전까지 눈에 서려 있던 흥분과 격정은 사라지고 지환은 무덤덤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싫은가요?”이서는 버벅거리며 붉은 입술을 벌렸다.싫은 게 아니라, 민예지가 지환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짜증나고 슬펐을 뿐이다.하지만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계약서에서는 상대방의 사생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환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잘 자요.”이서가 정신 차리고, 일어났을 때 문은 이미 닫혔다.그녀는 무릎을 안고 침대에 우두커니 앉았다. 막막하고 답답했다.이날
어젯 저녁부터 이서의 도시락을 받지 못해 속을 태우는 하은철은 이서한테서 전화가 걸려 오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이렇게 빨리 전화를 받은 건 전례가 없었던 터라, 마음속으로 할 말을 생각하던 이서 조차도 어리둥절했다.“내 밥은? 왜 아직 내 밥은 안 오는 거야?”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정말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니까. 하나는 나를 감방에 보내려고 안달이 났고, 하나는 나를 노예 취급하고……. 나 다 때려 치울 거야. 이제 밥 같은 거 안 해!”‘먹던 말던! 먹기 싫으면 굶어 죽던가!’할아버지의 체면은 이미 하은철이 다 깎아 먹었다.전화를 사이에 두고, 하은철도 이서의 짙은 노기를 느꼈다.끊긴 핸드폰을 손에 든 그는 어리둥절했다.이서 얘기로 들어서는, 분명히 윤수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문득 어제 윤수정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니 고천성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났다.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는 바로 윤수정에게 전화해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어제 널 괴롭힌다는 사람이…… 혹시 이서니?”하은철의 전화를 받고 한껏 신이 났던 윤수정은 그의 질문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오빠…….]“맞아, 아니야?”[맞아, 언니가 나를 때렸어. 믿지 못하겠으면 와서 봐봐.]“왜? 왜 널……?”윤수정은 억울한 척 흐느꼈다.[내가…… 내가 오빠를 좀 잘 챙겨달라고 했더니, 나를 나쁜 년이라고 욕하면서 손찌검 했어. 그리고 오빠, 글쎄 언니가 감방에 보내겠대…….]하은철은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사실이야?”[못 믿겠으면, 고천성 한테 물어봐. 어제 언니가 얼마나 미쳐 날뛰었는지 몰라. 흑흑…….]윤수정은 더욱 서럽게 울었다.[오빠, 설마 정말 이서 좋아하게 된 거야? 이젠 내 말도 못 믿어?]하은철은 순간 당황했다.“아니야, 당연히 네 말 믿지. 걱정하지 마. 고천성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하지만 난, 오빠랑 같이 있고 싶은데…….]하은철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는 몸이
전화를 끊고 이서는 경찰서에 가서 노트북 컴퓨터를 찾으러 왔다.“노트북이 완전 박살 났어요.”남자 경찰이 말했다.“아마 복구하기 힘들 겁니다.”이서가 눈썹을 찡그렸다.콘테스트 마감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작업한다고 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잠깐 고민을 하던 이서는 서비스 센터에 한 번 가기로 했다.센터 직원은 북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냥 다시 하나 사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이서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서비스 센터를 걸어 나왔다. 몇 걸음 안 갔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윤이서 씨?”고개를 돌려보니, 이상언이 길가에서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이 선생님 여기는 웬 일이세요?” 이서는 정신을 가다듬고 걸어갔다.“이 부근에 유명한 정통 한식집이 있다고 들었는데…….”이상언이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보며 말했다.“지금 이 주변을 몇 바퀴 돌았는데도 못 찾겠어요.”이서는 이상언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핸드폰 속의 위치를 한 번 쓰윽 보고는 말했다.“이 한식집은 작은 골목 안에 있어요. 네비로는 찾기 힘들 거에요. 제가 알려 드릴게요.”이상언도 곧 차를 세워 두고, 이서를 따라 한식집으로 걸어갔다.두 사람은 작은 골목을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번화한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적한 오솔길로 들어갔다.오솔길의 끝에 한식집이 있었다.문 앞의 간판은 이미 페인트가 벗겨졌다.“바로 이 집이에요!” 흥분한 이상언의 모습을 마치 어린애 같았다.본인의 역할을 다한 이서가 말했다.“그럼 맛있게 드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왜요? 윤이서 씨.” 이상언은 이서를 불러 세웠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별다른 약속 없으면 저랑 같이 식사해요. 제가 살게요.”마침 이서에게 할 말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서는 고장 난 노트북 때문에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아니에요, 전 일이 좀 있어서…….”“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해야 하잖
이상언은 눈을 부릅뜨곤 한참이나 뒷말을 기다렸지만, 이서는 아무런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 종업원이 식사를 내오기 시작했다.“자, 식사합시다. 드세요.”식사를 마치고, 이상언과 이서는 갈라섰다.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이상언은 휴대전화를 꺼내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야?”“회사.”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지환은 북성 동쪽의 작은 상권에 사무실을 얻었다. 공간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하은철에게 하씨 빌딩 88층을 치우고 개인 헬스장을 만들어 두라고 했다.그가 회사라고 말하자 이상언은 북성 동쪽에 위치한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나, 오늘 누구 만났게? ……이서 씨 만났어.”고개도 들지 않던 지환은 손에 쥔 펜을 멈추고, 냉엄한 표정을 지었다.“밥도 한 끼 먹었지.”“이상언!” 지환은 혀끝이 입천장에 닿았다.이상언은 헤헤 웃었다.“우연히 만난 거야. 노트북을 수리하려고 한다길래 너를 적극 추천했어. 어때, 충분히 재미있지? 네가 이서 씨 도와 노트북을 고치기만 하면 그녀는 틀림없이 니가 멋지다고 생각할 거야. 네가 달리 보일 거라고. 그럼 너희 두 사람의 관계도 더욱 가까워지지 않을까?”검지로 이마를 누르고 있는 지환의 얼굴선이 팽팽해졌다.머릿속에 또 어젯밤의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이서의 적극적인 행동은 그의 욕정에 불을 지폈지만, 그녀의 눈물은 열정의 불씨를 무참히 꺼버렸다.‘마음에서 우러난 게 아니었어.’“왜 말이 없어?” 전화 너머에서 느껴지는 지나치게 조용한 분위기는 이상언을 긴장하게 했다.지환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하은철을 8년 동안 사랑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이상언은 속으로 부정했다.‘뭐가 그리 복잡해?’하지만 입으로는 별일 아닌 듯 물었다.“정말 이서 씨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지환은 눈동자를 치켜들었다.“들어와.”들어온 사람은 비서 이천이었다. 지환이 통화 중인 걸 확인하
이서는 노트북을 들고 오후 내내 뛰어다녔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그녀는 아예 공모전에 참가하는 것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하지만…….윤씨 집안을 떠난 지금, 하지환에게 의지해 살아갈 수는 없었다.‘그 사람도 얼마 전에 별장을 샀으니, 아마 돈이 없을 것이야. 게다가 매달 대출금까지 갚아야 하잖아.’여기까지 생각한 이서는, 윤수정의 머리를 비틀어 놓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오늘 아침 송서묵은 이미 법적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고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왔다.법원 소장은 향후 2, 3일 이내로 윤수정한테 전달될 것이고, 재판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이서는 재판이 열리는 날, 출석만 하면 된다.잠자코 기다리면, 윤수정에게 법적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하지만 안타깝게도…….마음 정리가 대충 끝난 이서는 콘테스트 알림 기능을 취소하려고 공식계정을 로그인했는데, 글쎄 주최측의 콘테스트 공모 마감일이 다음 주로 연장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이는 즉 그녀에게 아직 일주일의 준비 시간이 있다는 얘기다.구사일생이라는 생각이 든 이서는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별장으로 돌아왔다.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디자인 시안을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그러나 하다 보니, 시시하고 재미없어 아예 새 시안을 만들기 시작했다.지난번의 경험이 있다 보니 작업은 막힘없이 술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끊임없이 영감이 떠올라 저녁이 되기 전에 새로운 시안이 완성되었다.이서는 고개를 들고서야,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았다.후련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이서는, 뜻밖에도 지환이 음식을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언제 왔어요?” 이서는 의아해했다.지환은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 한바탕 격전을 벌인 사람처럼 머리카락은 떡이라도 된 것 마냥 하얀 얼굴에 붙어있었고, 눈망울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참 됐어요.”위층으로 올라갔었는데 이서가 초집중으로 시안을
30분 뒤, 지환은 이상언의 전화를 받았다.[방금 회의 중이었어?]이상언은 트림했다.[방금 하은철이 나한테까지 전화를 걸어왔더라. 무슨 신장 공여자를 찾겠다나? 일전에 찾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왜 또 갑자기 바뀌었어?]지환은 화가 채 가시지 않아,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찾고 안 찾고는 네 일이지.”[뭔 말이야?]이상언은 다급하게 얘기했다.[지난번에 말했잖아. 그 여자 병력이 좀 이상해. 네가 찾지 말라고 해서 손 놓고 있었지. 찾으려면 또 병력을 뒤져야 해. 야, 지금 나에게 확실하게 말해 줘. 찾아, 말아?]지환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상언은 이해했다. 찾지 말라는 뜻이다.5분도 안 되어 하은철의 전화가 또 울렸다.이상언은 병력에서 적합한 구실을 찾아 하은철을 거절하려고 윤수정의 병력을 들추어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장의 데이터 수치에 눈길이 끌렸다.지난 1년 간 윤수정의 혈압 데이터인데, 처음 몇 달은 저혈압 상태였다가, 중간에 며칠 동안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가 며칠 뒤 다시 저혈압으로 바뀌었다.촘촘하게 적힌 데이터 수치들이라, 꼼꼼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신부전증의 증상 중 하나가 저혈압인데, 통상적인 경우 혈압 수치가 갑자기 정상으로 될 수 없다.그는 하은철의 전화를 받지 않고,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원장님, 혹시 윤수정 환자 입원 후의 모든 데이터를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최근 자료들까지도요…….”병원장은 곧 데이터를 보내왔다.이상언은 특별히 혈압이 정상 수치일 때의 기타 검사 수치를 확인해 봤는데 모두 정상적인 범위 내에 있었다.그게 이상했다.……드디어 새 디자인 시안을 마친 이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직접 조직위원회에 서류를 제출하였다.모두 끝내자 왠지 모르게 공허함마저 느껴졌다.요 며칠 동안 줄곧 시안 작업으로 바빠, 하지환과 민예지의 일을 생각할 시간도,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오히려 순식간에 지나갔다. 막상 한가해지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이지숙이 꽤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어머, 내 정신 좀 봐.”“나는 윤 대표더러 소희를 설득해 달라는 의미였어. 오해하지는 마.” 이서는 이미 고개를 돌려 심근영과 대화를 이어가던 지환을 흘겨보다가 이지숙을 향해 말했다.“알맞은 상대를 찾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이지숙이 말했다.“그거야 그렇지만... 윤 대표는 우리 소희의 친구잖아. 그러면 소희와 가치관이 잘 맞는다는 뜻이지 않겠어? 어쩌면 이 중에 두 사람 마음에 다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소희를 힐끗 보았는데, 그녀는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현태 씨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을 받고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요리가 나오는 동안, 이서는 구실을 찾아 소희와 함께 룸을 나섰다.“소희 씨, 왜 현태 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거야?” 소희가 말했다.“아직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이 현태 오빠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고요.”“만약 반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소희의 긴장한 모습을 본 이서가 웃기 시작했다.“두 분이 현태 씨를 반대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 거야? 현태 씨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네?” “이서 언니!”“그래, 인제 그만 웃을게.”“나는 두 분이 현태 씨의 출신을 전혀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두 분에게는 현태 씨의 출신보다, 소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물론, 두 분이 소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현태 씨의 출신을 더 중요히 여기시겠지.”“그럼 소희 씨도 두 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으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렸어?”곰곰이 생각하던 소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언니 말이 맞아요.”두 사람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이지숙이 다시금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소희는 이서를 힐끗 본 후에야 입을 열었다.“엄마, 사실... 제겐 남자 친구가 있어요.”놀란 이지숙은 대답도 잊은 채 소희를 바
이서의 심장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메웠다.거부할 수 없는 그의 손길,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은근한 기대가 피어올랐다.그 순간,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이 많이 차갑네. 평소에 신경 좀 써.’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을 때는 5분이 흐른 후였다. 뺨에 오른 붉은 기운은 이미 옅어졌지만, 귓불의 붉은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다시 운전석에 앉은 지환의 모습이 맑고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이자, 이서는 방금 욕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환 씨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떨칠 수 없는 괴로움 속에서, 이서와 지환은 마침에 호텔에 다다랐다.심근영 부부와 소희는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게다가 심근영은 이 기회를 틈타 지환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하 대표님, 저희 체면을 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지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하지만 심근영은 그의 행동 스타일을 일찌감치 들은 모양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이서와 악수를 하려 했다.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지환이 이를 저지했다.“늦게 왔는데, 주문부터 하시죠.”심근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소희에게 두 사람의 일을 들은 상태였다.‘참, 두 사람이 싸우는 중이라 했었지?’‘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곧 화해하겠는걸?’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심근영이 지환에게 메뉴를 건넸고, 지환은 이서에게 메뉴를 건넸다. 이서는 모두의 권유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주문한 요리는 모두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었는데,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심근영과 지환은 사업상의 일을 이야기했으며, 이지숙과 소희, 그리고 이서는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끝은 ‘결혼’이었다.“소희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곧 결혼해야 해.” “...엄마, 서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거야?’‘맞는 말이었잖아.’‘당신들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다고!’한편, 차에 오른 이서가 지환에게 물었다.“소희 씨한테 전화해서 약속을 취소할까요?” 지환이 시계를 힐끗 보았다.“안 늦었어.”“안 늦었다고요? 하지만 나는...” 차가 갑자기 멈추자, 이서가 이상하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왜 그래요?”“도착했어.” 이서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집을 보고는 멍해졌다.순간, 지난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했다.‘여긴... 우리가 전에 살던 곳이잖아?’이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익숙한 감정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여기서... 내 인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냈었지.’“어서 들어가.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자연스럽게 욕실로 들어가 몸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냈다.하지만 옷에 묻은 핏자국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참, 이 집에도 옷이 있을 텐데...’잠시 머뭇거리던 이서는 욕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지환 씨는... 거실에 없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까치발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하지만 계단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지환과 맞닥뜨렸다.이서는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목욕 수건만 두른 상태였고, 한 손은 가슴 위에 얹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 서 있던 지환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의 목젖이 힘겹게 미끄러지자, 이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비... 비켜요. 옷 가지러 갈 거라고요...!”지환은 힘겹게 시선을 돌려 2층을 바라보았다.“내가 가져다줄게. 너는 욕실로 돌아가.”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욕실로 돌아갔다.그녀는 눈앞의 위기를 해결하느라, 이후의 어색함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한창 샤워하던 이서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문
운전기사는 놀라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이서는 잠시나마 그 남자의 눈동자를 응시했다.‘날 노리는 거구나.’ 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어 도망치려 했다.하지만 문을 열기도 전에 남자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뼈를 깎는 고통이 밀려오자, 이서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이서의 눈을 가렸다.“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나도 너처럼 보기 드문 미인을 죽여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깝거든? 그런데 어쩌겠어? 그게 내 임무인걸. 임무는...”이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선혈이 자기 얼굴과 목, 그리고 온몸에 튀는 것을 느꼈다. 그 선혈은 뜨겁고 끈적거리기 그지없었다.하지만 분명히 이서의 피는 아니었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쿵!잠시 후, 그 남자가 굉음을 내며 그녀의 곁에 쓰러졌다. 이서는 그제야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차량 지붕에는 굽은 칼을 현란하게 돌리고 있는 어둠의 호리병이 있었다. 그가 쥔 칼에 검붉은 선혈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이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당신이 죽인 거예요?!”이서는 자신이 보기에도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하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개의치 않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왜요, 문제 있어요?” 이서는 재빨리 좌우를 살폈는데,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녀는 어둠의 호리병을 보며 말했다.“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라고요!!” 어둠의 호리병은 의외라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처리해 본 적이 있는 겁니까?”이서가 말했다.“그럴 리가요.”“아주 능숙해 보이는데요?”어둠의 호리병은 이서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라는 말, 정말입니까?” 이서는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다만, 이번에는 망설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화 연결음이 이어지던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