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이 굳어진 지환이 긴장하며 물었다.“이서야, 괜찮아?” 운서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단지 방금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는데... 제가 잃어버린 기억인 것 같았어요.” 지환이 심하게 떨리는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 고개를 숙였던 이서가 어색하게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등에서는 핏줄이 서서히 불거지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흥분한 것 같았다. 이서는 그가 왜 이토록 흥분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왜인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H선생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서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H선생님, 방금은 왜 눈물을 흘리신 거예요?” 이서가 다시 한번 물었다. 지환이 이서를 끌고 소파에 앉았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떤 친구가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그 친구도 너와 마찬가지로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선량했거든...” “그럼 그분은 분명 H선생님께 소중한 분이시겠네요?” ‘그래서 눈물이 나셨던 거구나.’ “응, 그 사람은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었어. 비록 지금은 그 사람을 잃었지만 말이야.”지환의 두 눈동자에 다시 한번 거대한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본 이서는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은 듯했다. 이서가 떨면서 물었다.“그 분이... H선생님의 애인이셨나요?” 지환이 이서를 바라보며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그랬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여자였어.” “나는 앞으로도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사람만을 사랑할 거야.’ 지환의 말에 이서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H선생님께 너무 의존하느라 독신인지 묻는 것도 잊었었네. 그런데 지금 보니까...’이서가 지환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럼 왜 그분을 되찾으려 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노력 중이야.” 이서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이 떠올랐다. 그 불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자신이 전혀 화를 낼
‘H선생님은 왜 진작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걸까?’ ‘H선생님의 눈에 들 수 있다니, 그 여자분은 분명 큰 행운을 가진 분이실 거야.’문득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상언이 떠오른 이서가 눈물을 닦았다.‘맞다, 사모님께서 이 선생님과 H선생님은 오래된 친구라고 하셨었잖아. 이 선생님은 틀림없이 H선생님의 모든 걸 알고 계실 거야.’여기까지 생각한 이서가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나와 옆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서재에 있던 상언은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노크 소리를 들은 그가 하인일 것이라 생각하고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혼자 있고 싶어요.” 놀란 이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녀는 H선생님을 위하여 입술을 깨물었고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이 선생님, 저예요.” 이서의 목소리를 들은 상언이 어리둥절하여 얼굴의 초조함을 접고 문을 열었다.“이서 씨? 무슨 일 있어요?” 여태까지는 항상 상언이 주동적으로 이서를 찾았었다. 물론 이렇게 한 것은 임하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여 가능한 한 빨리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다.이서는 하나에 관한 일은 자신이 아는 것이라면 모두 상언에게 알려주었다. 매번 하나가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간통 현장을 잡으러 다녀야만 했다는 것을 들은 상언은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하나 씨를 구하고 싶어.’‘이전에는 하나 씨가 안정감이 부족한 이유가 아버지의 일탈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어머니의 행동도 하나 씨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줬을 것 같아.’ “그게... H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상언이 경계하며 이서를 바라보았다.“또 뭐가 알고 싶으신 거예요?” 이서가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단지 H선생님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니까요.”이서의 말을 들은 상언은 이유 없는 화가 치미는 듯했다.“어디 목숨만 내놓겠어요? 제가 보기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지독한 사랑을 하
이미 초대장을 열어버린 이서의 눈에 하이먼 스웨이가 정성을 다하여 붓글씨로 쓴 자신의 이름이 보였다. 그것은 이서의 이목을 확 끌었다. 상언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후였다. 그가 정신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을 때, 이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었다. 이서가 호기심이 만연한 눈빛으로 상언에게 물었다.“저한테 온 초대장인데, 왜 제게 전해주지 않으신 거예요? 그리고...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이 누구예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놀란 상언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상언은 며칠 전 유람선에서 심가은이 하이먼 스웨이의 이야기를 꺼내어, 이서가 기절했던 일이 눈에 선한 듯했다. 그러나 눈앞의 이서는 하이먼 스웨이의 이름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와 대화를 나누려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상언은 다소 격동되었다.“이서 씨, 잠시만요. 먼저 방에 돌아가 계세요. 제... 제가 좀 급한 일이 있어서 통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다급한 상언의 모습을 본 이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서가 떠나자, 상언이 곧바로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두 사람이 말다툼으로 인한 냉전 상태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정말 놀랄 일이야. 방금 이서 씨가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의 이름을 봤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상언이 컴퓨터 책상을 다가가며 말을 이어 나갔다.“지금 바로 마이클 천 선생님의 제자 분한테 전화를 걸어봐야 할 것 같아.” 수화기 너머의 지환이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그래, 알겠어.]상언은 머지않아 마이클 천의 제자와 연락이 닿았다. 상언의 묘사를 들은 마이클 천의 제자가 말했다.[지극히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많은 기억상실 환자분들이 겪는 단계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자면, 사람의 기억은 커다란 항아리와 같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항아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비
“맞아요.”“그럼 제가 H선생님과 어떤 사이였는지 물어보면 안 되는 거죠?” “네.”상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H선생님의 애인이 누군지도, H선생님이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도우려 하시는지도 물어볼 수 없겠어.’이서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본 상언이 마음속으로 가볍게 탄식했다.‘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건, 너무도 잔인한 일이야.’ 깊이 깨달은 그가 이서를 더욱 동정하고 있었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의 초대에 응하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이서가 되물었다.상언이 미소를 지었다.“물론이죠.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의 이름을 듣고도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았으니,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을 뵈러 가도 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초대에 응하고 싶어요.”‘어차피 나는 매일 하는 일도 없잖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생각이 많아질 뿐이니까 차라리 할 일을 찾는 게 낫겠어.’그녀가 초대장의 날짜를 확인하였다.[17일.]‘내일이네.’“그래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네, 감사합니다.”상언과의 대화를 마친 이서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상언이 하이먼 스웨이 여사의 고택으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하이먼 스웨이가 아닌 심가은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서가 아무런 답장을 보내오지 않자, 가은은 조급해하던 참이었다. 하루 종일 이씨 가문의 소식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서가 내일 하이먼 스웨이의 고택을 방문하겠다는 소식을 들은 심가은이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둘게요.]수화기 너머의 열정 넘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상언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하인일 거야.’ 전화를 끊은 심가은은 이 좋은 소식을 되새기느라 위층에서 내려오는 하이먼 스웨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가은아,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야?” ‘가은이를 다시 만난 이후로, 저렇게 기뻐하
심가은이 빠르게 잔꾀를 굴렸다.“엄마,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이서 씨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요. 그리고 엄마, 저는 엄마가 이서 씨를 좋아하시는 게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서 씨와의 만남을 특히 기대하고 있는 거고요.” 하이먼 스웨이는 심가은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았다.“그럼 됐어. 엄마는 가은이가 이서와 많은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구나. 이서는 또래보다 식견과 경력이 풍부한 아이거든.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가은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요, 엄마, 우선 손님맞이 준비부터 할게요.”가은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가은이가 차츰 철이 드는구나.’하이먼 스웨이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얘야, 엄마는 네가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구나.’ 주방에 들어간 가은이 요리사에게 설명을 마치고, 홀로 주방의 뒷문으로 나와 변태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획대로 하죠.”수화기 너머에서 변태남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은은 즉시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이서가 고문당해 죽는 장면으로 가득한 듯했다. ‘윤이서가 죽기만 하면 지엽 씨는 분명 의기소침해질 거야. 그때가 되면 나도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소씨 가문과의 결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 거라고.’‘그 여자의 말이 맞아, 지엽 씨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뭐 어때? 어차피 마지막에 지엽 씨의 곁에 있는 사람은 내가 될 텐데!’ ...이튿날 이른 아침, 이서가 일어났다.배미희는 명문가인 하이먼 스웨이의 고택에 가기 위해서는 고급스러운 옷이 필요하다며 이서에게 옷을 한 벌 사다 주었다. ‘옷도 사주시고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의 고택까지 데려다주려 하시다니.’ 옷의 가격을 알게 된 이서는 놀라서 나자빠질 뻔했다. ‘치마 한 벌에 60억?!’ 그녀가 정중하게 고가의 선물을 사양하려 했으나, 배미희가 말했다.“60억이면 별거 아니에요. 그동안 이서 씨가 우리 집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니까 아무 말
이상언이 말했다.“엄마가 어린 세대의 사람과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그러게, 이서는 이상한 마력이 있어서 왜인지 계속 다가가고 싶단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의 딸과는 정말 달라.”심가은을 떠올린 배미희가 눈살을 찌푸렸다.“거들먹거리는 걸로도 모자라, 겸손하지 못하고, 교양까지 없더구나. 아, 전에 어떤 대단한 가문의 딸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어쩜 그럴 수가 있니?” 상언은 가은에 관한 일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기에, 배미희가 수다를 떨도록 내버려둔 채, 2층으로 올라갔다.같은 시각, 하이먼 스웨이의 고택으로 향하는 이서는 호기심이 가득한 아기처럼 차장에 붙어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모든 것은 그녀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을 만나도 이런 느낌일까?’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바로 이때, 차량이 점점 외진 곳을 향해 들어갔다. 불안감을 느낀 그녀가 운전기사에게 물었다.“기사님, 왜 점점 더 외진 곳으로 가시는 거예요?” 운전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아, 이곳의 길은 모두 이렇습니다. 거주하는 사람이 적은 탓이죠.”“하지만...”이서가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거리에 아무도 없는데요...” 운전기사가 웃으며 말했다.“이서 씨, 안심하세요. 이 길은 제가 20년간 운전해 온 길입니다. 올해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거대한 풍채의 사람이 차량의 앞을 막아섰다. 망치를 들어 올린 그는 단번에 차량의 앞 유리를 깨뜨렸으며, 또 한 번 손을 들어 운전기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시뻘건 선혈이 차 안에 흩뿌려졌다. 자극적인 피비린내를 맡은 이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몇 초 후, 망치를 든 그 남자가 운전석에서 운전기사를 끌어냈고, 바닥에 버리듯이 내팽개쳤다. 운전석에 앉은 그 남자가 뒷좌석의 이서를 바라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누..
지환이 이서를 안고 나오자, 한 무리의 부하들이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들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환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장 차 대기시켜요!”부하 직원 중 대장 격인 안토니오가 즉시 반응하며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지금 당장 차를 대기시켜라, 오버.”이내 검은 산타나 한 대가 나타났고, 지환은 즉시 이서를 안고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그가 말한 주소는 마이클 천의 제자의 심리 진료실이었다. 멍하니 있던 운전기사는 급히 차를 몰고 심리 진료실로 향했다. 운전기사는 수시로 고개를 들어 뒷좌석에 앉은 채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한 지환을 바라보았다. ‘정말... 내가 아는 대표님이 맞는 거야?’차량이 마침내 심리 진료실에 다다랐다. 이서를 안고 심리 진료실에 들어선 지환은 마이클 천을 마주했다. 약간의 긴장이 풀린 지환이 물었다.“언제 오신 겁니까?” “오늘 아침이요.”마이클 천이 지환의 품에 안긴 창백한 이서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누군가의 습격에 자극을 좀 받았습니다.” “다친 곳은 없으신 겁니까? 만약 다친 곳이 있다면 먼저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제가 이미 확인했거든요.” 지환이 다급하게 말했다.“마침 선생님께서 오셔서 다행입니다. 얼른 이서를 좀...” 지환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자극받은 이서에게 어떠한 부작용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마이클 천이 뒤돌아서서 간호사 몇 명을 불렀다.“지금 바로 이동식 침대를 준비하고, 이서 아가씨를 검사실로 모시도록 하세요!” 간호사 몇 명이 즉시 이동식 침대를 가지고 돌아왔다.“선생님, 여자분을 얼른 침대로 옮겨 주시겠어요?” 지환은 어느 나라에서나 신비로움을 뽐내는 사람이었기에, 이 간호사들은 지환의 진면목을 본 적이 없었다.하물며 지금 지환의 얼굴에는 가면이 씌워져 있었기 때문에 간호사
마이클 천이 떠난 후, 천천히 몸을 웅크린 지환이 눈물에 젖은 이서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말했다. “이서야, 나 여기 있어.”가볍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어둠을 뚫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처럼 따스했다. 이서의 떨리던 속눈썹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이내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서서히 눈을 떴다. 지환을 마주한 그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H선생님.”“괜찮아.”지환이 낮은 목소리로 이서를 위로했다.“여기는 안전해.”고개를 들어 지환을 바라보던 이서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한 글자 한 글자 물었다.“아까 그 사람은 대체... 누구길래...”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서의 몸이 다시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지환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두려워할 거 없어, 그 사람은 이미 붙잡혔으니까. 그 일에 관해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철저히 조사받게 할 거야.” 이서는 지환의 말을 듣고서야 두려움을 거둘 수 있었으며, 그제야 자신이 지환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H선생님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이 있어.’‘하지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내 마음은...’ 이서가 손을 움츠렸다.“죄송해요, 저는 그저...” 고개를 숙여 멀어지는 이서의 손을 본 지환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뽑혀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서운한 목소리로 물었다.“뭐가 또 죄송하다는 거야...” “그거야...”이서가 몸을 뒤로 움츠러들었다.“H선생님... 마음속에 이미 다른 분을 품고 계시다는 거 잘 알아요. 우리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지환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내가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람은... 바로 너였어.’하지만 지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가 말했다.“그 사람... 그 사람은 우리의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이서는 다소 화가 난 듯했다.“H선생님,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단톡방은 한동안 조용했는데, 한참 지나서야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대체 뭐가 네 눈을 흐리게 만든 거야? 형부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이서가 당황하던 찰나, 소희도 메시지를 보내왔다.[언니가 싫어할 말인 건 알지만, 형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 H국에서 M국까진 이어질걸요?]나나도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서 형부가 원한다면 매일 여자 친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매번 다 다른 사람일 거고, 죄다 아주 예쁜 여자들이겠죠... 아, 물론 형부가 원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요!]“...” 이서는 조용히 지환을 쳐다보았고,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서는 지환을 몇 번 더 흘깃 본 후,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정말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닭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서는 이 식당이 이렇게 인기 있는 건 순전히 ‘속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한 입 더 먹은 이서는 문득 지환과 두 시간 넘게 줄은 선 게 별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나서는 뭐 할 거예요?”이서가 물었다. “영화 보러 가자.” 이서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우리 같이 영화 본 적은 없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지.” 지환은 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이서야.” 이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난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지환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서는 지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오늘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우리 그냥 제대로... 데이
“왜 굳이 여기서 먹어야 하는 거예요?”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식당 내부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인테리어였다. 이서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환이라면 굳이 이런 곳이 아니라, 훨씬 더 좋은 7성급 호텔에서 우아한 분위를 즐기며 식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호텔의 고급스러움은 이 식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식당, 속설이 하나 있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가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라도 있는 듯, 지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밥을 먹은 부부는, 가정법원 앞까지 가서 이혼하려고 했던 사이라도 다시 화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 이서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창밖만을 바라보았다.이서는 그런 지환을 흘겨보았지만,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이 살짝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 비서님께 미리 예약하라고 하지 그랬어요.”그 정도는 지환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괜히 여기서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지.’지환에게는 매 순간이 아까운 시간일 터였다. 지환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천한테 예약하라고 시키면 정성이 부족한 거잖아. 정성이 부족하면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단 말이야.”이서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었다. “정성을 들여도 안 통하면요?” 지환은 담담하게 말했다. “안 통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우리 둘이 다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아무리 바보 같아 보여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하지환 씨...” 이서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지환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서야,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하지만 하도훈 문제가 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지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서의 귓가에 들려오자,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빛나는 지환의 완벽한 이목구비는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잘생기지 않았다’는 말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지환이었다. 지환은 이 세상에 내려온 최고의 선물과 같았는데, 한때 그를 가졌던 이서에게도 그것은 분명 큰 행운이었다.“‘그날 내가 하지환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복수 계획에 동의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서의 조용한 목소리에 지환이 잠시 이서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글쎄,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이서는 왠지 지환의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뭔데요?” 지환은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하게 됐을 거라는 건 변함이 없다는 거지.” 그 한마디에 이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서는 미칠 듯한 두근거림을 감추려 애써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있는 거예요?” 지환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뿐이잖아. 물론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이제 두 번째 장소로 가자.”“어디로 갈 건데요?” 이서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었지만, 지환은 대답 대신 조수석 문을 열어줄 뿐이었다.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고,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는 지환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가정법원 앞에 서 있는 신혼부부와 이혼하러 온 듯한 부부들을 보며 이서가 말했다. “덕분에 생각났네요.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잖아요.”지환은 안전벨트를 풀던 손을 멈추고 이서를 바라보았다.“혹시 지금 내려서 이혼하자는 건 아니지?”이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왜 이미 고이서의 정보를 손에 넣고도 나한테 바로 알리지 않은 거예요?”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지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료를 받았을 때는 어떤 카페의 근처였어. 그런데 마침 네가 소지엽을 만나러 가는 걸 보게 된 거지.”“하지환 씨가 밖에 있었다고요?” 이서가 놀라며 되물었다. ‘그럴 수가 있다고?’그 말은 곧 두 사람이 비슷한 시간대에 고이서의 자료를 입수했다는 얘기였다. ‘뭔가 이상한데...’ 이서는 지환을 보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지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이서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야 뭔가 눈치챈 듯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겼다는 거야?” 이서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시간을 계산해 봤는데, 하지환 씨는 구태우 씨보다 하루 늦게 고이서를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시간을 계산해 보면 하지환 씨가 이긴 게 확실한 셈이죠.”이서는 괜히 혼자서 이리저리 고민했던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럼...”지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네 시간은 내 거라는 거야?” 이서는 그 말이 묘하게 들렸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든 해도 돼?” 이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뭘 하려고요?” 지환은 이서를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뭘 할 것 같은데?” 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순한 생각들을 애써 지우려고 했다. 지환은 이서의 표정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지환은 이내 무슨 생각이 났는지 환한 웃음을 지었다.“이서야, 혹시...” “그런 거 아니에요!”이서는 빠르게 부인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수상쩍었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맞춰줄 수 있어.”지환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리자, 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것은 지환이 이서에게 보낸 고이서에 관한 자료였다.‘이게 왜 열린 거지?’이서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그래?]이서의 목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자, 지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서의 시선은 시종일관 고이서의 자료에 머물러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고이서의 자료를 보는 중인데, 다 보고 나서 다시 전화할게요.”이서는 전화를 끊고 자료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자료의 내용은 고이서가 제공한 이력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이서는 5살 때 화재 사고를 겪은 후 해외로 보내졌다.하지만 지환이 보내온 자료에는 더욱 상세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당시 겨우 5살이던 고이서는 하룻밤 사이에 해외로 보내졌고, 병원에 도착한 후에는 병원에 있던 환자들이 차례로 퇴원하게 되었다. 딸의 치료 기간 동안, 성지영과 윤재하는 각기 다른 시점에 귀국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귀국한 후 처음으로 향한 목적지가 모두 보육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번.보육원 쪽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이 고이서를 대신할 아이를 구하러 간 것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이서였다. ‘그때 윤수정이 내가 윤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게 전부 사실이었구나.’ 모든 퍼즐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처음에 하은철이 이서와 결혼한 이유는 그녀의 신장을 위한 것이었는데, 윤재하와 성지영은 하은철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서와 하은철이 결혼하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도우려 했다. ‘하긴, 나는 윤씨 가문에 있어서 시집을 통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게 할 도구일 뿐이었어. 누가 그런 도구한테 큰 관심을 쏟으려 했겠어?’‘윤재하가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횡령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하씨 가문은 윤씨 가문에 그토록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윤씨 가문은 줄곧 재기하지 못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내가 윤씨 가문 사람들한테 배신당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어제, 이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환과 지엽이 보낸 자료를 동시에 받았다. 이서는 어떤 자료를 먼저 열어야 할지 심란해졌고, 아예 두 자료 모두 열어보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환 씨를 골라야 할까, 아니면 지엽이를 골라야 할까?’이서는 서류봉투에 있는 전화번호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이서는 갑자기 동전 던지기를 떠올렸다.‘그래,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는 동전을 던지라고 했어!’사실, 동전을 던지는 최종 목적은 선택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전을 던지는 순간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에 있었다.하지만 이서는 동전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잔돈을 바꿨고, 끝내 5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게 되었다.이서는 차로 돌아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동전 던지기를 시작했다.짤랑.이서의 머리가 하얘지던 찰나, 동전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됐어, 한 번 더 해보자.’생각을 정리한 이서는 곧장 동전을 던지지 않고,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이 맑아지기를 기다린 후에야 동전을 위로 던졌다.동전은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이서의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이서는 어이가 없어서 동전을 다시 주워 들었다.‘이 방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 같아.’ ‘그래, 차라리 숫자나 그림으로 고르는 게 좋겠어.’ 이서는 다시 동전을 집어 들었다.‘숫자는 하지환 씨를, 그림은 지엽이를 가리키는 걸로 하자.’마음을 확실히 정한 이서는 다시 동전을 던졌다. 이번에는 동전이 그녀에게 확실한 답을 주었다.‘그림이구나.’하지만 이서는 명확한 답을 얻고도 기쁘지 않았다. 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지엽이 건넨 서류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얇은 서류 더미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이서는 손을 들어 어렵사리 서류봉투를 열었는데, 서류를 꺼내려는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환에게서
“그럼 이번 일은 구태우 씨에게 조사를 맡기를 걸로 하겠습니다.”이서가 몸을 일으키며 소지엽을 바라보았다.“세부적인 내용은 심 대표님과 직접 이야기하면 돼. 나는 돌아가서 회사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소지엽은 이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괜찮아.”이서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몸을 돌려 떠났다. 그 단호한 뒷모습과 깔끔한 마무리, 소지엽은 이서의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달갑지 않은 게 분명해.’“소지엽 씨?”지엽은 심근영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심근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한편, 아래층에 도착한 이서는 주동적으로 소희 모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서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이지숙은 꽤 의아해했다.“이렇게 빨리?” “네, 구체적인 사항은 지엽이가 대표님과 상의할 거예요. 저는 여기 있어도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소희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언니, 제가 데려다줄게요.”이지숙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는 소희와 이서의 관계가 더 좋아져서 지환이라는 큰 나무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랐다. “언니, 오늘 소지엽 씨와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유인이 언니의 만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이서가 말했다.“그러게, 타이밍을 잘 맞춘 것 같아.”“참, 소희 씨의 양부모가 아직도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지?” “조금 이상하긴 해요. 꽤 오랫동안 저를 귀찮게 하지 않았거든요.”이서가 말했다. “심태윤도?”“네.”이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소희 씨에게 게임 회사의 기밀문서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운 사람이 심태윤일 가능성은 없을까?”소희는 고개를 저었다.“걔가 벌인 짓이었다면 심씨 가문 사람들이 벌써 잡아냈을 거예요.”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못 찾아내는 걸 보면, 심태윤이 벌인 짓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심태윤이 심씨 가문 사람들과 협력해서 벌인 일인 건 아닐
‘소희 씨의 심씨 가문 생활, 꽤 재미있는 것 같은데?’ “우리... 2층에 가서 얘기 좀 할까?”심근영이 2층 방향을 가리켰다. 이서는 소지엽을 한 번 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대답했다.“네.”세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고용인이 차와 음료를 내려놓고 떠나자, 심근영이 입을 열었다.“윤 대표는 어떤 생각을 했길래, 소지엽 씨한테 우리 소희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한 거지?” 이서가 대답했다.“말하자면 깁니다.”시간은 주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이서는 고이서와 성지영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회사로 돌아갔고, 지환은 이서에게 구태우와 자신 중에 누가 먼저 고이서의 자료를 찾는지 비교해 보라고 했다.이서는 일요일 하루 종일 지환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가 분명히 고이서를 조사하러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환 씨... 꽤 진지한 것 같아.’이서는 약간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서도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지환이 구태우보다 더 빨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환이 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환이 이기기를 바라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복잡한 마음에 시달리던 이서는 오후 3시쯤 구태우의 메시지를 받았다.메시지를 보는 순간, 이서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는데, 그제야 자신이 지환이 이기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때, 이서는 구태우의 전화를 받았다.[회사로 가겠습니다.]“그냥 자료를 보내주시면 되잖아요.” 구태우의 말투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자료를 원하신다면 가져가겠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하시죠.]이서는 자신이 구태우를 화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고이서를 생각하면서 카페로 향했다.몇 분 후.카페에서 소지엽을 만난 이서의 구태우의 말투가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서는 잠시 생각한 후, 소지엽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왜 네가 온 거야?” “내가 구태우한테 자료를 달라고 했어. 왜, 불편하기라도 한 거야?” 이서는 소지엽의
심유인이 말하지 않자, 심근영은 소민찬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민찬은 선물에 대해 전혀 몰랐던 터라, 값싼 선물들을 보고 당황하여 얼른 설명했다.“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선물들은 제가 산 게 아니라, 전부 유인이가 산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애초에 유인이는 저한테 몸만 오면 된다고 했습니다.”“여러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소민찬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답례 선물은 안 받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소민찬은 이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심씨 가문의 저택을 떠났다. 심유인은 그의 뒤를 쫓아가려다가 심근영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유인아, 우리가 알아듣게끔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니?”심유인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촌, 숙모, 저... 저는...”“차마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네요.”소희가 심유인의 곁으로 다가가 냉소하며 말했다.“제가 대신 말씀해 드릴게요.” “제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걸 알고, 일부러 소민찬 씨를 찾아가서 남자 친구 역할을 해달라고 한 거죠?” “소민찬 씨는 남자 친구인 척만 하면 되니까, 이 선물들도 소민찬 씨가 샀을 리 없어요.”“전부 다 언니 사비로 사신 거죠?” 심유인의 안색이 아주 어두워졌다.“그런 거 아니야...!”심유인은 아직도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소민찬 씨가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니라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난 거니?”이지숙이 물었다. ‘다른 세 가지 선물은 전혀 가짜가 아니었어. 확실히 수십억은 되는 것들이었다고.’‘회사에서 근무하지도 않는 유인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겠어?’심유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심근영은 심유인의 반응을 살피다가 집사를 불렀다.“당장 조사해, 당장!”심유인은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아 ‘털썩’ 소리를 내며 심근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삼촌, 제가 다 설명해 드릴게요. 그 선물들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