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못 하겠어?”하지환은 따가운 눈초리로 이천을 바라봤다.이천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아뇨, 아뇨, 아닙니다.”“가 봐.”“네.”갑자기 뭔가 떠오른 지환은 사무실을 떠나려는 이천을 막았다.“이서가 ML국에 있을 때, 의문의 사람에게 메시지를 받았다고 하더군,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이천은 크게 벌린 채 조용히 지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한참을 기다렸지만, 지환은 이미 시선을 거두고 남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다른 자료는 없나요?”“없어.”“?!”‘내가 무당인 줄 아는 거야?’이때 지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문제 있어?”“아……, 아닙니다…….”‘양지 바른 곳이라도 알아봐야지……, 답도 없는 대표님 말을 따를 바엔 그냥 양지 바른 곳에서 눈을 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이렇게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어.’하지만 대표님과 사모님이 싸운 이유가 자기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는 이 억울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천이 나가자마자 지환은 이상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술 마실래?]상언은 운전을 하는 듯했다.지환은 넥타이를 헐렁하게 풀었다.“아니, 방금 회사에 도착했어.”[그래?]상언은 뜸을 들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지환에게 투덜거렸다.[넌 내가 그런 장인 어른을 만난 게 불행하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고, 내가 왜 장인 어른의 잘못까지 덮고 가야하는 거야?]지환은 상언의 말을 바로잡았다.“너랑 하나 씨는 이미 헤어졌어.”상언이 대답했다.[넌 꼭 사람 마음에 불을 지펴야겠니?]“너도 내가 이서랑 싸웠을 때 옆에서 살살 건드렸잖아.”[…….]상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그래, 내가 잘못했네. 어떻게 하면 하나 씨의 아버지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없앨 수 있을까? 조언 좀 해줘.]“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넌 혼자 남게 될 걸.”[…….][그래도 어떡해, 내가 하나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첫만남
임하나는 아빠가 어디서 얻어맞고 왔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어떻게 된 일이야?]윤이서가 답장했다.하나는 이제야 잠에 들었는지 답장이 오지 않았다.이서는 루나의 채팅창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그녀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이서는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아무 소식 없어?]곧바로 루나에게서 답장이 왔다.[아직이야, 내가 꼭 찾아주겠다고 네 친구에게 전해줘.]이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준비를 하고 서둘러 회사로 갔다.일찍 와서인지,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이서가 층을 누르고 닫기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잠깐만요!”그녀는 열림 버튼을 눌러 그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몇 층 가세요?”“언니, 드디어 만났네. 회사가 싫다고 도망간 줄 알았어!”이서는 고개를 들었고, 그제야 그녀가 윤수정이라는 걸 알았다.그 순간 그녀는 후회했다.‘기다리지 않고 당장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야 했어!’수정의 말은 엘리베이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서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회사가 이렇게 좋은데, 내가 왜 도망가?”“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우리 신제품이 나오면 언니네 집안이 망하는 건 한 순간이야. 아, 아니지, 우리 회사가 망할 거야. 그때쯤이면 삼촌이랑 이모들이 가만두지 않을 걸? 언니,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언니는 사업에 적합하지 않다고. 일찍이 나한테 맡겼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된 이상 언니가 해야지 뭐.”이서가 대답했다.“너무 성급한 거 아니야?”계획대로라면 서나나의 웹드라마 방영 3일 차에 공식 판매에 들어갈 예정이었다.그리고 서나나의 웹드라마는 이틀 뒤에 공개되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수정이 시큰둥하게 말했다.“그 배우의 드라마를 기다리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봤는데 그 배우는 절대 성공할 수 없어.”“연예계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암묵적
윤이서는 내리자마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성지영과 윤재하와 마주쳤다.두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 짐작할 수 있던 이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볼 일 있으세요?”성지영은 이서를 보자마자 뺨을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러나 그녀와 윤재하의 목숨이 이서의 손에 달려 있었기에 온 힘을 다해 참아야 했다.“이서야,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정말 우리를 죽이려는 속셈이야?”이서는 문을 열고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뭘 했다고요?”“네가 장부를 우기광한테 줬다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아?”“그건 당신들이 법을 어긴거지, 나랑은 상관없잖아요.”“너!”참지 못한 성지영은 손을 들었고, 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성지영은 손을 든 채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다행히 그때 윤재하가 그녀를 끌어당겨 계단을 내려갔다.“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애한테 화를 내?”윤재하는 성지영에게 이렇게 말한 뒤, 다정하게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서야, 예전에 온라인에서 널 비난한 건 엄마 잘못이 맞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가족이잖니. 어떻게 다른 사람을 시켜서 네 부모를 해칠 수 있어?”이서가 대답했다.“그래서 부모인 당신들은 날 괴롭혀도 되고, 난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네가 인간이야?”성지영은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넌 나를 엄마로는 보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고마워히지는 못할 망정, 은혜를 원수로 갚아?”이서가 반박했다.“두 분이 인터넷에 거짓된 정보를 퍼뜨릴 때, 제 생각은 하셨어요? 그래도 내 부모라고 말할 수 있어요?”이 말 한마디로 윤재하와 성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이서는 이미 문을 열었고,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전 이미 우기광 씨에게 증거를 줬고, 경찰이 이미 사건을 접수했어요. 그 증거들은 오래 전부터 접수된 것이니, 나를 찾아와도 아무 소용없어요.”“정말 그렇게 정없이 나올거니?”윤재하는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내리깔았고, 그동안 보였던 다
그들의 대화와 동시에 1층에 도착했다는 엘리베이터 안내 음성이 들렸다.윤재하는 천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그는 다시 닫기 버튼을 눌렸다.성지영이 물었다.“여보, 아직도 그 배은망덕한 것에 의지하고 싶어요?”윤재하는 한숨을 쉬었다.“아니,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우리에게 수정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어.”성지영의 분노는 한순간에 기쁨이 되었다.“그렇죠? 맞아요, 수정이도 위층에 새로 회사를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서랑 경쟁하기 위해 일부러 이서랑 동일한 테마를 잡고 디자이너 프로모션이나 유명인들의 지지를 받아 이 업계에 최고라고 하더라고요. 전 수정이가 이서를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그때쯤이면 어르신의 마음도 바뀔 거예요. 유능한 손자며느리를 누가 마다하겠어요?”아내의 말을 들은 윤재하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정말이다.사업가들은 모두 힘이 세다.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더욱 인기를 끌 것이었다.그 어르신은 쇼핑몰의 거물이었고, 당연히 강력한 여성에게 끌리는 사람이었다.그들의 대화와 함께 둘은 윤수정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윤재하 부부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수정은 생각에 잠겼다.모든 것이 그녀의 손바닥 안이었다.“삼촌, 숙모,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운철 오빠에게 말할 게요.”수정은 윤재하와 서지영에게 찻잔을 건네줬다.이서는 그들을 들여보내고 싶었지만, 그런 속마음을 반대해야 했다.“정말 고마워, 수정아.”수정의 말을 들은 성지영은 다정한 그녀의 말에 눈물을 훔쳤다.“수정아, 숙모가 너무 후회하고 있어, 내 딸이 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수정이 대답했다.“숙모, 제가 어렸을 때 많이 챙겨주셨잖아요. 전 다 기억해요.”“아이고, 참 착하구나. 숙모가 네 엄마만큼 아이들 교육에 능숙했다면, 그런 배은망덕한 것으로 키우지 않았을 텐데.”성지영은 그 어디에도 수정 같은 사람이 없을 것처럼 치켜세우고, 이서를 한바탕 깎아내렸다.윤재하 부부는 양전호가 자료를 들고 들어온 후
심소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윤이서의 사무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놀라 문으로 걸어갔다.“이서 언니,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오셨어요?”마침 모든 일정을 다 짠 이서는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모든 부서의 부장들을 회의실로 모시고 와.”“네.”이서가 회사로 돌아온 것을 본 소희는 자신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었다.‘이번에는 화해를 하셨는가 모르겠네.’‘현태 씨가 이서 언니 남편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좋은 사람이랑 언니가 사이가 틀어졌을까?’소희는 의문을 품은 채 각 부서의 부장을 회의실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이틀 뒤면 브랜드 광고 모델의 새 드라마가 나옵니다.”이서는 차분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다들 준비되셨나요?”“네, 준비됐습니다.”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서가 대답했다.“좋습니다. 다음으로 주의사항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하나씩 실행해 나갈 예정이니, 문제가 있으면 즉시 저에게 피드백해주시기 바랍니다.”이서는 주의해야 할 사항을 각 부서에 전달했다.한 시간여 만에 회의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이서는 일어서서 사람들을 바라봤다.“다른 의견 있으십니까?”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없습니다.”“일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나갔다.다른 부서의 부장들도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마지막으로 걸어가던 홍보부장은 앞서가던 마케팅부장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여 부장님, 잠시만요.”모든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홍보부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공장에서 위층 사람들의 일에 집중해 우리의 주문을 중단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알고 계셨습니까? 역시 홍보부장님이라 그런지 소식이 빠르시군요.”“농담할 때가 아닙니다.”홍보 부장이 말했다.“그런데 왜 이 일을 윤 대표님께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걱정되지 않습니까?”“뭐가 걱정이라는 말입니까?”“대표님 말씀 못 들으
윤이서가 공장과의 계약을 체결한 것은 오후 3시였다.그녀는 공장을 나서자마자 재빨리 휴대폰을 켜 확인을 했지만, 여전히 루나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대신 임하나가 남긴 음성 메시지가 있었다.[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빠 진술에 의하면 퇴근길에 갑자기 한 무리가 차에서 내리더니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대.][아빠가 평소에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잘못 걸린 거지. 아 웃겨 죽겠어.][이서야, 오늘 같이 저녁 먹을까? 내가 살게.]이서는 미소를 지으며 하나에게 답장을 보낸 다음 루나의 채팅창에 들어갔다.이서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아직이야?]곧바로 루나에게서 답장이 왔다.[응, 아직.]루나는 메시지와 함께 고민 중인 이모티콘을 보냈다.[참 이상하네, 혼인 여부는 확인했는데 아내가 누구인지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가 않아.][서류에 안 적혀 있어?][나도 그게 너무 궁금해, 아무 것도 안 적혀 있어.]이전에 루나는 하지환의 혼인관계증명서를 이서에게 보냈지만, 이서는 아내의 이름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이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뭇거리다가 텍스트를 쳤다.[그럼 혼인관계증명서가 조작된 걸까?]타이핑 후 그녀는 바로 보내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던 이서는 결국 마음을 먹고 보냈다.루나에게서 답장이 왔다.[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이 답장에 이서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그녀는 입술이 떨렸다.‘맞아.’‘어떻게 이걸 조작할 수 있겠어?’‘만약 조작된 것이었으면 지환 씨가 나한테 말했겠지.’‘지환 씨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이 혼인관계증명서가 진짜라는 뜻이 아닐까?’루나는 답장으로 응답했다.[그래도 친구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내 친구가 동사무소에서 일하거든,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상관없어. 내 친구도 기다릴 거야.]사실 이서는 더 이상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지환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그가 진실을 꾸며낼 수도 있는 노릇이었기에
“윤이서 씨가 나가실 때 둘째 도련님께서 윤이서 씨가 다시 오면 돈을 받지 말라고 하셨어요.”임하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모호한 눈으로 이서의 팔을 찔렀다.이서는 하나를 곁눈질로 보고 식당 주인을 따라 룸으로 갔다.안내를 끝낸 식당 주인이 떠나자마자 하나는 입을 열었다.“어쩐지 소씨 그룹 둘째 도련님이 널 대하는 태도가 다르긴 했어.”“그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지 않아? 이건 다른 문제인가?”하나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는 이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알았어. 이 얘기는 그만할게. 어쨌든 그 사람은 이미 떠났잖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맞아.”차를 한잔 따르자 이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하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이서야, 지금 지환 씨랑은 어때?”이서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잘 모르겠어,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거든…….”“복잡하다니?”하나가 말했다.“얼마나 복잡하길래?”이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하나는 찻잔을 들어올렸다.“됐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래도 이서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네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면 좋겠어. 나를 위해 이혼하지 않았던 우리 엄마처럼 되지 마. 사실 엄마는 모르겠지만, 난 우리 엄마 아빠가 헤어졌으면 했거든, 어쩌면 내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은 진작에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았을 거야.”이서는 안타까운 눈으로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 일의 진상이 밝혀지고 지환 씨가 양다리를 걸친 게 확인되면,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할 거야.”단지 이서는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혼하는 것이 달갑지 않을 뿐이었다.하나가 말했다.“이서야, 내가 네 인생에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지만, 난 정말 걱정돼……, 우리가 남자 일로 마음이 약해질까 봐 두려워.”하나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이서는 하나의 옆에 앉아 그녀를 안았다.“알지, 나도 네 마음 다 알아…….”하나는 이서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몸을 들썩였
윤이서는 하지환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임하나랑만 소통했다.하나도 같은 전략을 사용하려 했지만, 아빠를 때린 사람이 이상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정말 상언 씨가 한 일이에요?!”상언은 하나의 표정이 화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이서는 고개를 들어 상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왜 그랬어요?”하나는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상언이 대답했다.“사회의 물을 흐리는 사람들은 처리해야죠.”하나는 콧방귀를 뀌었다.잠시 후, 그녀는 식사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럼……, 그때 영상도 있어요?”상언은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린 어부처럼 미소를 지었다.“당연하죠, 집에 있는데, 보러 갈래요?”하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상언 씨 집으로 가야만 볼 수 있는 거예요?”“뭐, 결국 범죄의 증거니까요. 혹여나 불이익이 생길 수 있잖아요.”하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좋아요, 지금 갈까요?”“지금도 좋아요.”상언은 기뻐하며 눈썹을 치켜올리고 일어섰다.“가요.”이서는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았기에,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하나가 외투를 집어들고 미안한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서야, 미안한데, 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 둘이 있어도…… 괜찮지?”이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친구의 행복을 위해 미소를 지었다.“괜찮아.”하나는 그녀의 미소에 안심하고 식당을 나섰다.두 사람이 떠난 후, 룸에는 지환과 이서만이 남아있었다.하나가 있을 때 이서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었지만, 하나가 떠나고 나서 그녀의 모든 신경은 지환을 가리켰다.그녀는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었다.그러나 지환의 긴 다리는 그녀가 지나가야 할 길을 가로 막고 있어서 그녀가 떠나면 잡힐 게 뻔했다.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미트볼만 괴롭혔다.“그건 미트볼이지 내가 아니야.”지환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룸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처음에 그 약속을 할 때, 왜 이런 상황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이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지환은 그런 이서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조용히 말했다. “술집에 가고 싶으면, 가자.” 이서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영화는 다 보고 나가는 걸로 해요. 그리고 술 마시고 나서는 밤거리를 좀 걷는 게 어때요? 한밤중에 조용한 거리를 걷는 거, 진짜 재밌거든요. 혹시 해본 적 있어요?”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서는 스스로 신이 나서 말했다.“아마 해본 적 없겠죠? 진짜 재밌어요. 가끔 차가 몇 대 지나가면 더 재밌는데, 고요한 밤에 갑자기 누군가가 정적을 깨는 것 같다니까요?” 바로 그때, 지환이 이서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같이 해줄게. 오늘 밤 집에 안 가는 것까지도.”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괜찮겠어요?” “괜찮고말고. 뭐가 문제겠어?” 어둠 속에서 지환의 시선은 한결같았다. 오히려 이서는 괜히 의심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혹시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집에 가서 단둘이 있게 될 상황을 떠올리니, 이서의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 이서는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환 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죠.” 두 사람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술집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며 11시가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탓인지 이서는 이미 지쳐 있었다. 술집에서 나와 밤거리를 걷겠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이제는 도저히 걸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시간 동안 지환과 단둘이 밤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서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이서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한 이서는 눈을 감았다가, 스스
단톡방은 한동안 조용했는데, 한참 지나서야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대체 뭐가 네 눈을 흐리게 만든 거야? 형부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이서가 당황하던 찰나, 소희도 메시지를 보내왔다.[언니가 싫어할 말인 건 알지만, 형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 H국에서 M국까진 이어질걸요?]나나도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서 형부가 원한다면 매일 여자 친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매번 다 다른 사람일 거고, 죄다 아주 예쁜 여자들이겠죠... 아, 물론 형부가 원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요!]“...” 이서는 조용히 지환을 쳐다보았고,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서는 지환을 몇 번 더 흘깃 본 후,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정말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닭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서는 이 식당이 이렇게 인기 있는 건 순전히 ‘속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한 입 더 먹은 이서는 문득 지환과 두 시간 넘게 줄은 선 게 별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나서는 뭐 할 거예요?”이서가 물었다. “영화 보러 가자.” 이서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우리 같이 영화 본 적은 없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지.” 지환은 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이서야.” 이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난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지환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서는 지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오늘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우리 그냥 제대로... 데이
“왜 굳이 여기서 먹어야 하는 거예요?”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식당 내부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인테리어였다. 이서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환이라면 굳이 이런 곳이 아니라, 훨씬 더 좋은 7성급 호텔에서 우아한 분위를 즐기며 식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호텔의 고급스러움은 이 식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식당, 속설이 하나 있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가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라도 있는 듯, 지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밥을 먹은 부부는, 가정법원 앞까지 가서 이혼하려고 했던 사이라도 다시 화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 이서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창밖만을 바라보았다.이서는 그런 지환을 흘겨보았지만,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이 살짝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 비서님께 미리 예약하라고 하지 그랬어요.”그 정도는 지환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괜히 여기서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지.’지환에게는 매 순간이 아까운 시간일 터였다. 지환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천한테 예약하라고 시키면 정성이 부족한 거잖아. 정성이 부족하면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단 말이야.”이서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었다. “정성을 들여도 안 통하면요?” 지환은 담담하게 말했다. “안 통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우리 둘이 다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아무리 바보 같아 보여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하지환 씨...” 이서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지환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서야,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하지만 하도훈 문제가 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지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서의 귓가에 들려오자,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빛나는 지환의 완벽한 이목구비는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잘생기지 않았다’는 말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지환이었다. 지환은 이 세상에 내려온 최고의 선물과 같았는데, 한때 그를 가졌던 이서에게도 그것은 분명 큰 행운이었다.“‘그날 내가 하지환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복수 계획에 동의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서의 조용한 목소리에 지환이 잠시 이서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글쎄,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이서는 왠지 지환의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뭔데요?” 지환은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하게 됐을 거라는 건 변함이 없다는 거지.” 그 한마디에 이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서는 미칠 듯한 두근거림을 감추려 애써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있는 거예요?” 지환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뿐이잖아. 물론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이제 두 번째 장소로 가자.”“어디로 갈 건데요?” 이서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었지만, 지환은 대답 대신 조수석 문을 열어줄 뿐이었다.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고,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는 지환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가정법원 앞에 서 있는 신혼부부와 이혼하러 온 듯한 부부들을 보며 이서가 말했다. “덕분에 생각났네요.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잖아요.”지환은 안전벨트를 풀던 손을 멈추고 이서를 바라보았다.“혹시 지금 내려서 이혼하자는 건 아니지?”이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