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 씨 친구로서 이서 씨의 편에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환이도 매우 복잡해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당신이 끼어들면 일이 더 복잡해 질 거예요. 그리고…….”이상언은 임하나를 빤히 쳐다봤다.하나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었고, 이를 느낀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계, 계속 말하세요…….”“지환이가 이서 씨에게 상처를 줄거라고 생각해요?”상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하나는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그의 진지한 시선 아래, 하나는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두 뺨이 뜨거워지자 그녀는 붉어진 얼굴이 들킬까 상언의 손을 뿌리쳤다.“알겠어요, 알겠어. 그냥 내버려 둘게요, 정말 시어머니도 아니고……. 앞으로 이 선생님이 아니라 엄마라고 불러야 겠네요.”그런 호칭에도 상언은 전혀 짜증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당신만 좋으면 뭐라고 부르든 괜찮아요.”잠시 후 그는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하나 씨만 절 그렇게 부를 수 있어요.”독특한 전율이 하나의 심장을 찔렀다.그녀는 뜨거운 두 뺨을 만지작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애써 무시했다.“이 선생님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방법은 어항 속에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에겐 쓸모 없어요.”하나는 상언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내렸다.“…….”상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하나가 자신의 말을 겉만 번지르르한 말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단지 속마음을 털어놨을 뿐이었다.“아…….”상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이백의 말처럼 아내를 알기란 하늘로 올라가는 것만 것 어려웠다.……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에 도착했다.이 객실은 지난번에 예약한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이었다.익숙한 침대에 누운 이서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바로 여기에서 낯선 남자에게 소식을 접했다.“자, 물 좀 마셔.”지환은 이서를 일으켜 세워 물을 조금씩 먹여주었고, 그의 눈빛은 조바심의 흔적 없이 항상 부드러웠다.물을 다 먹인 후 지환은
하지환의 눈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그는 떨리는 윤이서의 몸을 토닥이며 아이 달래듯이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했다.“말 할 게, 하지만 시간을 좀 주면 안 될까?”그는 양쪽에게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려했다.이서의 마음에 못을 박지 않는.이서는 천천히 쥐고 있던 지환의 옷깃에 힘을 풀었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옥구슬처럼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펑펑 울기 시작했다.그동안에 쌓여왔던 응어리를 푸는 것 같았다.“지현 씨는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요? 그동안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알아요? 왜 저를 이렇게 힘들 게 하는 거예요? 해외에 아내가 없다던가, 차라리 있다고 명쾌하게 말하던가, 어떠한 대답을 하든 지금처럼 모호하게 말하는 것 보다 훨씬 나아요!”이서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이는 모습을 본 지환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는 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서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기 위해 엄청난 자제력을 사용해야 했다.그는 반드시 완벽한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그의 신분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왜 그 자료표에 기혼이라고 적혀 있는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꽉 진 주먹은 매트리스를 향했다.붕대로 싸맨 상처가 찢어졌다.거즈가 빨갛게 물들었다.지환은 이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이서를 꼭 껴안았다.이서의 눈물은 그의 옷을 적시고 그의 심장을 적셨다.이서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울었다.남아있던 마지막 힘도 이 눈물과 함께 사라졌다.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고, 부엌에서는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그건 한때 그녀가 듣기 좋아했던 분주한 소리였다.그 냄새에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이서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여긴 ML국이다.그녀는 쉬기 위해 이곳으로 왔고, 행복해지고 싶었다.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바람은 식탁에 밥 냄새가 퍼짐과 동시에 실현됐다.이서는 정말 배고팠기에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과 있더라도 그녀의 허기는 이길 수 없었다.그녀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며 모처럼의 평온을 즐겼다.임하나가 증거를 얻었으니, 자연히 귀국하는 날짜도 정해졌다.윤이서와 하나는 따로 표를 사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고, 그녀들과 함께하고 싶은 두 남자는 머리를 싸매야 했다.이번 일로 배운 게 있는 그들은 전략을 바꿨다.이상언이 이서를 설득하고, 하지환이 하나를 설득하는 방식.이는 색다른 방식이었다.지환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하나는 두 손 두 발을 들고 항복했다.한편, 이서 쪽은 상언이 많은 시간과 애를 썼지만 결국 그의 설득에 이서는 마지못해 동의했다.비행기에 탄 하나는 이서에게 귓속말을 했다.“어쩌면 우리는 두 사람 손 안에 있나 봐.”“…….”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중간쯤 갔을 때, 지환은 이서의 옆에 와 앉았다.“여보, 할 말이 있어.”이서는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무슨 말이요?”“다시 돌아와주면 안 돼?”이서가 나간 이후로 별장은 휑했고, 이는 지환을 힘들게 했다.‘예전에는 집에 돌아가는 게 행복했는데…….’이서는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상황이 확실하지 않잖아요, 모든 진실이 밝혀지면 그때 돌아갈지, 아니면 여전히 돌아가지 않을지 결정할게요.”이서의 단호함에 그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엷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널 만나러 가도 될까?”이서가 막 거절하려는 찰나, 지환이 말했다.“너랑 대화하고 싶어서 그래. 너도 그 사람이 어떻게 네 연락처를 알아냈고, 왜 갑자기 너한테 그런 메시지를 보냈는지 궁금하잖아. 그리고 줄리도…….”그의 말에 이서의 마음이 움직였고, 그녀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하지만 8시 이후로는 찾아오지 마세요.”지환은 밝게 대답했다.이서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눈살을 찌푸렸다.비행기에서 내리자 하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초조하게 말했다.“이서야, 바로 나연이한테 가야 할까? 아니면 인사 부장님께 가야 할까?”“그리고 내가 무슨 옷을 입어야 기깔나게
나연이 자신을 공격하는 모습을 본 임하나는 나연이 이상언에게 말해 그녀를 정직시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도 상언의 질문에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변명이 매우 많았다.어린 나이에도 나연은 위치가 높아서 앞날이 창창해 보였다.하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고, 이전만큼 화를 내지 않았다.“어머니는 어디 계셔?”“우리 엄마는 왜 찾으세요?”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때, 나연의 엄마가 부엌에서 나왔다.“손님 오셨어?”그녀는 민박집에 들어온 사람이 하나와 다른 사람임을 알고 즉시 어두워졌다.“앞으로 우리 딸 눈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또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하나가 말했다.“제가 따님 때문에 정직당했거든요.”하나의 엄마는 즉시 반박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우리 딸이 왜 그런 짓을 했겠어요?”“못 믿으시겠으면 우리 회사 직원한테 물어보세요. 보름 전에 나연이가 우리 회사 인사부장님을 찾아가 제가 남자친구를 뺏었다고 했으니까요.”나연의 엄마는 나연이에게 고개를 돌렸다.“나연아, 이 분 말이 사실이니?”나연은 당황하지 않고 눈물을 짜냈다.“엄마, 다리가 너무 아픈데, 앉아서 얘기하면 안 돼요?”다리가 아프다는 말 한마디에 나연 엄마는 하나가 자신의 딸을 밀었던 일이 생각났고, 눈가에 맴도는 의심은 줄어들고 마음이 아파왔다.“그래, 앉아서 얘기하자.”나연 엄마는 나연을 부축하고 앉았다.잠시 후, 나연은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본의 아니게 일어난 일이지만, 모두 제 잘못이에요.”“나연아, 그게 무슨 말이야?”나연 엄마는 혼란스러웠다.하나와 이서는 동시에 나연이 거짓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빛은 마치 ‘어디까지 지어내나 보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제가 다리를 다쳤잖아요? 제가 돌아오자마자 아인이가 어쩌다가 다쳤는지 계속 물어보더라고요. 전 아인이한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나 언니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아인이는 이 말을 믿지 않고
나연의 엄마는 윤이서의 말을 듣고 불안해졌다.“나연이가 또 무슨 잘못했나요?”“네.”이서는 임하나를 밀었다.“저희가 ML국에 있을 때, 하나가 나연이를 밀었다고 하더군요. 기억하시나요?”물론 나연의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눈 앞의 네 청년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었다.“사실 당시 하나는 따님을 밀지 않았어요.”이서가 한 마디 뱉었다.나연의 엄마는 즉시 나연을 돌아보며 말했다.“나연아?”나연은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엄마……, 이서 언니가 굳이 하나 언니가 절 밀지 않았다고 하면 그런 거겠죠.”“그런 거겠죠? 그게 무슨 말이야?”나연의 말에 하나는 흥분했다.“난 널 민 적이 없어!”나연은 억울한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이미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에요. 하나 언니,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언니가 절 안 밀었다고 하면 안 민 걸로 치자고요!”“나는!”하나는 정말 이 작은 소녀의 두 뺨을 내려치고 싶었다.이서는 그녀의 행동을 읽고 급히 말렸다.“하나야, 우리가 증거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우린 증거가 있어!”이 말에 나연은 심장이 뛰었지만, 그 곳에 CCTV가 없다는 사실에 뛰던 심장은 차분해졌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서 언니, 부정하려 해도 사실은 사실이에요.”“그래서 그때 하나가 널 밀었다고?”이서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연은 이서가 자신을 떠보고 있다고 확신했다.“네!”“그래?”이서는 몸을 돌려 하나에게 말했다.“하나야, 영상 좀 보여줘.”하나가 대답했다.“알겠어.”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재생했고, 곧 화면에는 하나와 나연의 모습이 나타났다.나연의 미소는 점차 희미해졌고, 마침내 그녀가 일부러 바닥에 넘어지는 장면이 나오자 나연은 온몸을 떨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조작된 거야! 조작된 거라고!”신뢰를 잃은 나연의 엄마는 실망한 눈으로 딸을 바라봤다.엄마
나연의 엄마도 나연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나연의 뺨을 때렸다.“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말을 할 수 있어!”뺨을 맞은 나연은 놀란 눈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뭐가 파렴치해요? 전 내 걸 되찾고 싶었을 뿐이에요. 언니한테 제 것을 빼앗겼는데, 저는 빼앗을 수 없다는 거예요?”나연은 소리를 지르고 돌아서서 민박집을 뛰쳐나왔다.나연의 엄마는 하나에게 사과를 하면서 문 밖에 눈을 떼지 못했다.“죄송해요, 하나 씨.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제가 이쪽 일을 다 처리하고나서 직접 찾아가 사과하겠습니다.”하나는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하나는 더 이상 그녀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어쨌든 이 일은 나연이 한 일이고,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 책임은 온전한 자신의 몫이었다.“얼른 나연이를 찾으러 가보세요.”“감사합니다.”나연의 엄마는 그 말만 남겨둔 채 급히 딸을 찾아 나섰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하나는 다소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에휴, 어머니가 무슨 죄야, 우리도 얼른 돌아가자.”돌아가는 길은 고요했다.이서의 머릿속은 온통 나연의 말로 가득 차 있었다.‘내가 갖지 못한 건 하나 언니도 가질 수 없어요!’왜 계속 생각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그녀가 끊임없이 이 말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도착했어요, 이서 씨.”앞좌석에 있던 이상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제야 이서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가 차에서 내려 짐을 꺼내려던 찰나에 하지환이 한 발 앞서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냈다.“내가 데려다줄게.”지환은 아무 말없이 캐리어를 밀며 아파트로 향했다.이서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아직 오후 3시라 그런지 아파트 단지는 한산했다.엘리베이터도 둘뿐이었다.그녀는 큰 눈을 질끈 감은 채 계속해서 나연의 말을 생각했다.그녀가 실을 잡으려던 순간, 안내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이서는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문을 열었다.“
‘만약 그 의문의 사람이 내 사랑의 라이벌이라면, 그 사람도 나연이처럼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건 남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이간질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메시지를 보낸건지도 몰라.’‘나랑 지환씨가 싸우고, 자기처럼 지환 씨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한 거 아니야? 그럼 그 사람도 갖지 못한 거잖아. 그렇지만…… 말이 안 맞는게 의문의 사람이 말한 게 거짓말이라면, M국에서 본 건 왜 기혼이라고 적혀 있었던 거야? 지환 씨도 명확하게 해명하지 않고 회피했잖아. 둘 다 문제가 있어.’윤이서는 어지러운 머리를 잡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줄리를 찾을 수 없으면 지환 씨의 아내를 찾으면 되잖아!’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루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이서는 작성한 메시지를 삭제하고 루나에게 기프티콘을 보냈다.[도와줘서 고마워. 내 친구가 확인했는데 네가 알아본 정보가 바로 걔가 찾는 사람이었어. 내 친구가 이 남자의 아내가 누구인지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 일이 잘 해결되면 크게 보답한대.]기프티콘의 위력은 강력했다.3초도 지나지 않아 루나에게서 답장이 왔다.[이서야, 뭘 이런 걸 가지고. 내일 아침에 출근해서 확인해 볼게.]이서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지만, 루나가 있는 곳은 밤이었기에 간단한 말로 이 대화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고마워.]그 말만 남긴 뒤 이서는 휴대폰을 끄려했지만, 루나는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이서를 붙잡고 그 친구가 누구이며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은지 물었다.루나는 이서의 친구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가상의 인물이기에 이서는 급히 둘러댔다.[미안해, 내 친구가 다른 사람한테 자기 얘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루나는 아쉬워하며 대화를 끝냈다.……한편, YS그룹 화영지사.이천은 지환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재빨리 달려갔고, 지환의 냉랭한 분위기에 놀라 움츠러들었다.‘아이고, ML국에서 사모님과 화해하고 같이 돌아온
“왜, 못 하겠어?”하지환은 따가운 눈초리로 이천을 바라봤다.이천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아뇨, 아뇨, 아닙니다.”“가 봐.”“네.”갑자기 뭔가 떠오른 지환은 사무실을 떠나려는 이천을 막았다.“이서가 ML국에 있을 때, 의문의 사람에게 메시지를 받았다고 하더군,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이천은 크게 벌린 채 조용히 지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한참을 기다렸지만, 지환은 이미 시선을 거두고 남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다른 자료는 없나요?”“없어.”“?!”‘내가 무당인 줄 아는 거야?’이때 지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문제 있어?”“아……, 아닙니다…….”‘양지 바른 곳이라도 알아봐야지……, 답도 없는 대표님 말을 따를 바엔 그냥 양지 바른 곳에서 눈을 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이렇게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어.’하지만 대표님과 사모님이 싸운 이유가 자기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는 이 억울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천이 나가자마자 지환은 이상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술 마실래?]상언은 운전을 하는 듯했다.지환은 넥타이를 헐렁하게 풀었다.“아니, 방금 회사에 도착했어.”[그래?]상언은 뜸을 들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지환에게 투덜거렸다.[넌 내가 그런 장인 어른을 만난 게 불행하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고, 내가 왜 장인 어른의 잘못까지 덮고 가야하는 거야?]지환은 상언의 말을 바로잡았다.“너랑 하나 씨는 이미 헤어졌어.”상언이 대답했다.[넌 꼭 사람 마음에 불을 지펴야겠니?]“너도 내가 이서랑 싸웠을 때 옆에서 살살 건드렸잖아.”[…….]상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그래, 내가 잘못했네. 어떻게 하면 하나 씨의 아버지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없앨 수 있을까? 조언 좀 해줘.]“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넌 혼자 남게 될 걸.”[…….][그래도 어떡해, 내가 하나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첫만남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심유인은 즐거워했다.“와, 가난하긴 해도 염치는 있으신가 보네요. 하지만 그게 유일한 장점이겠죠?” 선물은 현태가 스스로 준비한 것이기에, 소희도 현태가 무슨 선물을 샀는지 몰랐다.그래서 현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소희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무슨 선물을 샀는데요?”‘소민찬보다 못한 선물이면 큰일인데.’ 소희는 선물로 심유인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어쨌든 현태가 부모님을 보러 오는 날이니, 선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태가 심씨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소희는 현태가 심씨 가문의 권세나 재물 탓에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현태가 웃으며 말했다.“우선 들어가자. 곧 알게 될 거야.”이지숙도 계속 밖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그래요,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하자고요.”고개를 끄덕인 소희가 현태의 선물을 들어주려 하자, 현태가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이 세심한 배려는 곧장 이지숙의 눈에 띄었는데, 여자는 본래 본능적인 행동을 가장 신경 쓰기 마련이지 않은가?현태의 행동을 본 이지숙은 소희가 거짓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겉으로 보기에는 덩치도 크고 투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세심한 면이 있네?’이렇게 생각한 이지숙은 현태를 다소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현태는 이지숙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지숙은 고용인에게 심근영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사실, 심근영은 일찍 깨어났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근영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2층에서 현태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고용인의 동정을 들은 심근영이 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곧 나가도록 하지.” 심근영은 고용인이 떠난 후에야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그제야 현태의 생김새를 똑똑히 보았다. 현태는 키가 크
‘게다가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한 적도 있지만, 월급은 적지 않았어. 한 달에 2천만원으로 시작했고, 윤 대표님께 일이 생기면 월급도 더 올라갔으니까.’“저분은...”현태는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본 후, 어떤 태도로 대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소희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정말 몰라서 그래요?”현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알아야 해?”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나한테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심유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내 사촌... 언니예요.”소희는 심유인과 가족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언니도 오늘 남자 친구를 데려왔더군요.” “사촌 언니? 소희 씨의 친언니가 아니고?” 소희가 낮게 불평을 내뱉었다.“아니에요, 우리 언니일 리가 없잖아요!”“그럼 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소희 씨 집에 온 거야?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소희는 하마터면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다. 특히 현태의 그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보이게 했다. 심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제 남자 친구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소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일반적인 경우에는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하잖아요. 언니처럼 남의 집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고요.”“잘 모르는 사람들은 언니한테 부모가 없어서 남의 부모에게 허락받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유인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결국 이지숙이 나선 후에야 유인의 난처함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아버지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네, 엄마.” 소희는 현태의 팔짱을 끼고 심씨 가문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걸음도 안 걸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린 심유인이 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잠깐만, 소희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오늘은 네 남자 친구가 삼촌과 숙모를 처
심유인은 한참이 흘러도 소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따분해졌다. “소희야, 네 남자 친구는 언제 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 게 좀 이상하네. 설마 별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작은 곳에서 길을 잃으면 운전기사를 할 수 있겠어요?”심유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 자랑스러운 표정은 뭐야?’‘운전기사인 남자 친구를 두고도 창피하지 않다 이거야?’‘허! 심소희, 순진하긴.’유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밖에서 고용인의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사, 사모님, 아가씨의 남자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이 나타나는구나!’심유인은 당사자인 소희보다 더 초조해하며 먼저 달려 나갔다.‘운전기사라더니, 몰고 온 차가 고용주 명의인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간 유인은 마침내 차에서 내린 현태를 마주했다.그의 옷차림을 본 순간, 유인은 웃음을 터뜨렸다.‘풉, 그냥 티셔츠에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온 거야?’‘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오면서도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비웃음을 당하려고 작정한 건가?’ 하지만 눈살을 찌푸린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현태의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라, 현태가 자기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소희는 빠르게 현태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그저께 양복도 사줬는데, 왜 양복이 아닌 캐주얼복을 입고 온 거예요?” 현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나도 양복을 입고 오려고 했지. 그런데 그 옷은 오래 입으면 불편하더라고. 소희 씨의 부모님을 뵈면서도 온 마음을 옷에 쏟을까 봐 걱정돼서 이렇게 입었어.” “사소한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아?”소희가 대답했다.“그래요? 양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소희가 이지숙을 흘긋 바라보았다. 과연 이지숙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물론 최선을 다해서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현태가 불안해하며 물었다.“어머님
심유인이 그중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숙모, 민찬 씨가 특별히 준비한 팔찌예요. 마음에 드세요?” 이지숙은 흘긋 보더니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띠었다.그 팔찌는 아주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것으로,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유인이의 친엄마도 아니고, 소민찬 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건데도 아주 통 크게 행동하는구나.’하지만 이지숙은 잠시 후에 소희의 남자 친구가 올 것을 떠올리자 약간 걱정이 되었다. 사실, 며칠간 이어진 심근영의 설득에 이지숙은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래, 어차피 우리 심씨 가문은 많은 자원과 돈이 있잖아. 그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우리 가문의 사위라는 이름으로 상류층은 아니어도 소소한 부자는 될 수 있을 거야.’하지만 지금 소민찬의 씀씀이를 보자, 이지숙은 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상류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었다. 가방이나 옷 같은 큰 것들뿐만 아니라, 가끔은 화장품조차도 비교해야 하니 말이다. 이지숙은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으나, 상류 사회의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밀리면, 매번 모임 때마다 얘깃거리가 될 텐데...’ 이것이 바로 이지숙이 소희의 상대가 운전기사라는 것에 반감을 가지 이유였다.엄마로서, 자기 딸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터. “숙모, 이건 삼촌께 드리는 거예요.” 심유인이 꺼내든 두 번째 선물은 시계였다. “롤렉스 시계예요. 최신 모델인데, 삼촌도 분명히 좋아하시겠죠?”이지숙은 심유인이 손에 든 시계를 보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저 시계는... 적어도 1억은 넘을 거야.’ ‘물론 유인이한테는 작은 성의일 뿐이겠지만...’ 이지숙이 불안한 표정으로 소희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소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심유인의 선물 공세가 고의로 현태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인 것을 알아차렸다.‘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