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중 한 명은 ML 국에서 만났던 여자, 줄리의 남편이었다.그의 몸은 더 불은 것 같았다. 옆의 여자는 지난번에 만났던 보석을 치렁치렁 두른 그 여자도, 줄리도 아닌 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남자는 이서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그는 접수대에 가서 피임약 한 박스를 달라고 하고는 받아서 훌쩍 떠나버렸다.이서 뒤에서 간호사가 낮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비록 ML 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간호사의 동경하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저 사람 아세요?” 간호사는 먼저 놀란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피부색과 머리카락을 보고 ML 국 현지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물론이죠, 우리 병원 원장님이신데요.”“네? 원장님이요?” 이서는 깜짝 놀랐다.한편으로 왜 그의 주변에 예쁜 여자들이 줄지어 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진료소 규모만 봐도 이윤이 엄청 나다는 걸 알 수 있다.“네, 그리고 아직 결혼도 안 했답니다. 다이아 미스터예요. 어느 복받은 아가씨가 사장님과 결혼하려는지 모르겠네요.”간호사가 다시 한번 동경의 눈빛을 발산하며 한숨을 쉬었다.이서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결혼 안 했다고요?!”“네.”“아내 있지 않나요?”간호사는 웃었다.“나, 여기서 근무한 지 10년 넘었거든요, 와이프가 있다는 건 금시초문인걸요?”이서가 더 묻고 싶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임하나가 문자를 보내왔다.[이서야, 너 어디야? 아까 지환 씨가 너 찾으러 왔다가 호텔에 없는 걸 보고, 너 찾는다고 다시 나갔는데…….][바로 갈게.]메시지를 보낸 후, 간호사와 작별을 고하고 진료소를 나갔다.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ML 국의 거리에 따뜻한 가로등이 하나씩 켜졌다.이서는 호텔 방향으로 달려갔다.걷다 보니 눈앞에 갑자기 영롱한 작은 흰 꽃들이 하늘에서 날렸다.이서는 손을 내밀고 받았다. 눈꽃이었다.그녀는 눈꽃을 ‘후’ 불었다. 눈앞의 입김
각박한 세상을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사람처럼, 사소한 일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아무 반응도 하지 않은 윤이서를 본 하지환은 용기를 내어 그녀를 데리고 호텔로 갔다.두 사람은 소복히 쌓인 눈을 밟으며 가까운 거리를 30분 동안 걸었다.호텔에 들어서자 밀려온 따뜻한 온기는 꽁꽁 얼어버린 몸을 녹이기 충분했다.정신을 차린 이서는 곧바로 지환과 잡고 있던 손을 뺐다.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하나와 사람들은 호텔에 들어서는 그들을 보고 다가왔다.하나는 이서를 잡아당긴 채 지환을 노려봤다.“이서야, 괜찮아?”“난 괜찮아.”이서는 고개를 숙여 애꿎은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먼저 올라가자.”“그래.”하나는 이서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갔다.로비에는 세 명의 남자만 남아 있었다.소지엽은 이상언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선생님, 제가 이분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으신가요?”그는 하나에게 상언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의사라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상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지환를 바라본 뒤, 유유히 입구로 걸어갔다.그는 로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고 두 사람만의 시간을 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지엽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당신은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네요.”지환은 지엽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알고 있습니다.”“아직도 이서에게 상처주고 싶어요?”지엽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환은 죄책감을 느꼈는지 분노가 수그러들었고, 그는 입술을 오므리며 어떠한 핑계도 대지 않았다.그런 그의 모습에 지엽은 더욱 화가 났다.지엽은 늘 지환의 단점을 찾으려 노력했고, 이를 확대해서 자기 합리화를 했다.‘이 남자는 이서랑 어울리지 않아.’하지만 현재 지환의 모습으로는 합리화가 되지 않았다.한때 이서를 짝사랑했던 UFC 챔피언을 생각났다.이제 지엽은 그가 왜 이서를 포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뭐라고 변명이라도 하지 그래요?”“제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
소지엽이 떠난 후, 이상언은 하지환을 향해 걸었다.“소씨 집안의 둘째 도련님이 이서 씨에게 이렇게 애정이 많을 줄은 몰랐네.”지환은 눈을 치켜 올리며 상언을 바라봤다.순간, 상언은 등골이 서늘해져 황급히 대화 주제를 바꿨다.“이서 씨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손잡고 들어오던데, 화해한 거야?”지환은 상언을 다시 쳐다봤다.그제야 상언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만약 자신이었어도, 배우자가 재혼했다는 사실을 숨겼다면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지환처럼 오해가 있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그러나 지환은 이서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이서는 당연히 오해할 법했다.“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상언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웃으며 지환의 어깨를 잡았다.“네가 이서 씨를 찾으러 나섰을 때, 하나 씨랑 알아봤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ML국에서 온 건 하나 씨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어. 근데 두 사람이 ML국어를 몰라서 소통에 문제가 있었나 봐, 그래서 내가 내일 우리를 통역사로 써달라고 했어. 어때? 지환아, 난 중요한 순간에 등 돌리지 않아.”지환은 가차없이 그의 속내를 들추어냈다.“하나 씨랑 같이 있고 싶은 거잖아.”“설마 이서 씨를 따라갈 생각이 없는 거야?”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상언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지환은 그를 째려봤다.그제서야 상언은 자신이 또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너도 참.”너무 기쁜 나머지 살짝 맛이 간 모양이다.이서는 다음 날, 두 명의 통역사가 합류할 것을 알고 있었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상언과 지환이 떠올랐다.“미안해, 이서야.”임하나는 이마를 짚으며 상언의 끈질긴 매달림에 이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그때 상언 씨가 좋은 말을 너무 많이 해줘서……. 너도 알잖아, 잘생긴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어.”“아니면, 이따 만
이상언은 조수석에 앉은 난형난제인 허지환을 쳐다보며 허탈한 기색을 보였다.오히려 지환은 기분이 좋은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두 사람은 어제의 경로를 따라 각각의 집을 찾아 나섰다.상언과 지환은 통역사라는 명목으로 어제보다 더 필요한 존재였다.마침내 윤이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특산품을 소개할 기회를 얻었다.그들 덕에 ML국 주민들이 제품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도 있었다.이 접근 방식은 의심할 여지 없이 ML국의 네 명의 주민의 신뢰를 증가시켰으며,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몇몇 사람들은 그날 스키장에 갔다가 그 소녀가 스스로 넘어진 걸 봤다고 말했다.넘어진 여자아이가 큰 소리를 내기도 했고, 외부인이었기에 그들의 뇌리에 박혔다고 말이다.필요한 경우 하나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녹화해둔 비디오를 줄 수도 있다고 했다.이건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목격자일 뿐이지만 최소한 하나의 말이 그 사람들과 똑같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었다.상언이 나서서 당시 그의 여자친구가 하나였다고 말했다면 하나가 말한 내용의 신뢰성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상언이 직접 그녀를 여자친구라고 밝히지 못한 건 하나가 상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나연이 찾아온 후, 그녀는 언젠가 자신도 엄마나 나연과 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아 두려웠다.남자 때문에 모든 것이 변하는 사람.그래서 그녀가 상언에게 직접 이별을 고한 것이었다.다시 생각해보니 하나는 조금 웃겼다.“왜 웃어요?”운전을 하던 상언은 백미러를 통해 하나의 미소를 발견했다.하나는 즉시 표정을 굳히고 옆에서 자고 있던 이서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아무 것도 아니에요.”“지환이도 잠들었어요.”“그게 무슨 말이에요?”하나는 몸에 가시를 세운 채 상언을 경계했다.상언은 백미러에 비친 하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내 말은, 이번 기회에 우리가 잘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어쨌든, 차로 다음 집까지는 한 시간이 걸리니까요.”“왜 이렇게 많이 걸리는 거야.”하나는 차창
차 안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이상언은 오랜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지환이의 재혼에는 이유가 있어요.”“이유?”임하나는 웃으며 말했다.“누가 총 들고 협박이라도 한 거예요? 우리 아빠도 그 단어를 참 좋아하셨죠,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울 때마다 엄마한테 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했어요. 다른 여자랑 나뒹구는 게 회사를 위해서인지, 성욕에 지배된 건지, 얼토당토않는 말이죠. 다른 여자랑 히히덕거리고 있는 걸 내 두눈으로 확인했는데 왜 이런 말을 못 하겠어요?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 거예요?!”그들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이서가 말했다.“우리…….”“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컸네요.”상언은 하나를 대신해 말했다.“계속 주무세요, 도착하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남았어요.”이서는 상언의 말에 안심한 후,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사실 조수석에 있는 지환은 자고 있지 않았다.단지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는 하나와 상언의 대화를 들었다.지환은 못을 뽑아도 나무판에는 못자국이 선명히 남는다는 하나의 말에 동의했다.하지만 그는 못자국이 영원히 남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이서에게 상처주지 않고 남은 못자국을 지울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을 말이다.한 시간 후, 차는 마지막 집에 도착했다.마지막 집의 주인은 의사였다. 그는 젊었을 때 많은 도시를 여행했기에 이서가 화영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큰 관심을 보였다.하나는 상언에게 귓속말을 했다.“지난번에 여기 왔을 땐 왜 그렇게 퇴짜를 맞은 거예요?”상언은 테이블 위에 눈부시게 놓인 특산품을 바라봤다.“어쩌면 우리가 이서 씨처럼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 말투가 지환이처럼 부드럽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고.”하나는 상언이 구사하는 ML국 언어와 지환이 구사하는 ML국 언어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하지만 집주인이 지환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상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
남주인도 윤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부인과 다툼이 있었나요?”하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남주인은 웃으며 대답했다.“싸우는 건 좋은 거예요. 저도 아내와 싸울 때면 서로를 더 잘 알게되죠.”지환은 처음 듣는 말에 입술을 씰룩거렸다.“싸우는 게 정말 그런 이점이 있다고 해도 전 아내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모든 싸움은 제 아내의 마음에 가시가 되니까요. 그리고 모든 화해는 그 가시를 뽑아내야 함을 가리키죠.”남주인은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침착하게 말했다.“맞아요, 앞으로 저도 아내와 싸우지 않게 조심해야겠네요.”이서는 남주인의 서재에서 나간 후, 거실에서 두 아이가 울트라맨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그녀가 처음 이 가족의 자료를 찾아봤을 때, 이 집에는 1남 1녀의 두 자녀가 있다는 걸 확인했기에 울트라맨과 인형을 하나씩 샀지만, 결국 집에 들어와 확인하니 자료는 잘못되어 있었고, 두 아이 모두 남자아이였다.두 소년은 국제 학교에 다녔기에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고, 오히려 ML국 언어를 사용할 때 더듬거렸다.그래서 그들을 싸울 때에도 영어를 사용했다“내놔, 형이면 동생한테 양보해야지!”“네가 동생이니까 형한테 양보해!”“…….”7~8살짜리 두 아이의 말다툼은 몸싸움으로 번졌다.이서는 주위를 살폈지만 그들을 말리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아마 시끄러운 아이들의 일상에 오랫동안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두 아이의 몸싸움은 거칠어졌고, 큰 아이는 동생의 눈을 긁을 뻔했다.이서는 그들의 행동에 놀라 소리쳤다.“그만해!”그녀는 두 아이를 꾸짖었다.두 아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이서를 바라봤다.아이의 맑은 눈망울이 순식간에 이서를 진정시켰다.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몸을 웅크리고는 상냥하게 말했다.“사이좋게 지내야지, 그렇지?”“근데 내 장난감을 뺏으려고 했단 말이에요!”두 아이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이서가 말했다.“울트라맨의 형제가 몇 명인지 알아?”두 아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
하지환은 이미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그는 큰 손으로 윤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이 모습은 마치 예의 바른 아이에게 상을 주는 것 같았다.그는 두 아이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이서 누나의 말을 이해했어?”지환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는 너무나도 강했다.두 아이는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이 말했다.“착하네, 나가서 놀아.”두 아이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이서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두 다리는 요지부동이었다.게다가 그녀는 부끄럽지만 지환의 손길이 그리웠다.‘내가 미쳤지, 미쳤어.’‘여기가 ML국만 아니었어도 지환 씨에게 이혼하자고 말했을 거야.’‘이대로 가면, 계속해서 지환 씨의 영향을 받을 거야, 재혼은 아니야!’‘재혼은 절대 안 돼!’“여보…….”지환은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방금은 정말 멋있었어, 아이들을 잘 돌보는 구나, 네가 그동안 너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확인시켜 줬어.”“만지지 마세요.”이서는 한발짝 물러서며 말했다.지환이 다정하게 이야기할 때마다 이서는 더욱 두려워졌다.지환이 말했다.“알겠어, 그래도 앞으로는 이번처럼 아무 말없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약속해줘.”그는 아침을 주기 위해 이서에게 갔을 때 이서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순간적으로 그는 정신줄을 놓고 이천에게 5분 안에 이서를 찾아오라고 지시했다.이서가 ML국으로 갔다는 사실에, 그는 즉시 전용기를 몰아 출발했지만, 출발 전 ML국의 기상악화로 인해 이륙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지환은 이상언이 막지 않았더라면 기장을 죽일 기세였다.이를 회상한 지환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항상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적일 수 없었다.이서는 지환의 목숨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이서가 말했다.“전 더 이상 지환 씨에게 알릴 의무가 없어요.”“시간을 좀 줘, 내가 다 설명할게.”“도대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해요? M국에 본처가 있다는 건 분명하잖아요. 지환 씨, 제가 그
동시에 하지환과 이상언은 거침없이 서로를 안아주는 그녀들의 모습이 내심 부러웠다.증거를 확보한 후, 네 사람은 집주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남주인이 아쉬워하며 말했다.“저녁도 못 먹고 가시고……, 아쉽네요. 잠시 후에 제 친구가 올 건데, 여기에서 알아주는 투자자예요. 여러분들을 만나면 엄청 기뻐할 거예요.”남주인은 지환을 쳐다보며 말했다.네 사람은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바로 그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남주인은 문을 열고 술을 들고 서 있는 친구를 보자마자 두 팔을 벌려 따뜻하게 맞이했다.“오, 안토니, 어서 와.”‘안토니’ 이 세 글자에 이서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이서가 병원에서 본 남자였고, 줄리가 자신을 속였다고 말한 바로 그 남자였다!지금 그는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고 홀로 왔다.이서는 참지 못하고 토니에게 영어로 물었다.“줄리를 아시나요?”토니는 환하게 웃었다.“네, 당신도 줄리의 친구인가요?”이서는 깜짝 놀랐다.“친구요? 당신과 줄리는 부부잖아요.”“부부요?”토니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말했다.“아, 저번에 연기한 걸 말하는가보군.”“연기요?”“맞아요, 줄리는 연극배우인데다 경험자인데, 지난번에 ML국에 와서 요즘 떠오르는 영감이 없다며 같이 연기해 달라고 하더군요.”“그럼…… 당신은 두 명의 와이프가 있는 게 아니에요?”토니는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전 아직 결혼도 안 했어요, 제가 나이에 비해 성숙해보인다는 말은 자주 듣지만, 전 아직 20대거든요.”이서는 어리둥절해졌다.‘연극일 뿐인데, 그날 밤 줄리는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한 거야?’‘너무 연기에 몰입해서 그런 건가?’피어나는 의문을 해결하려면 줄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줄리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토니가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 줄리가 연극배우라는 것만 알아요.”하나는 줄리를 신경 쓰고 있는 이서에게 참지 못하고 물었다.“줄리가 누구야?”이서의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