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만해요, 우리 가요.”나연은 계속 임하나만 쳐다보았다.여사장은 곧 눈치챘다. 임하나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별 다른 문제점을 찾아볼 수 없자, 남편에게 눈짓했다. “여보, 병원비 계산 좀 하고 와요.” “응.”남편은 곧 병원비를 계산하러 갔다.여사장은 이상언을 보며 말했다. “제 딸을 병원으로 데려다 주신 분이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이에요.” 이상언은 공손하게 말했다.말을 몇 마디 더 나누고 여사장은 나연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끌고 갔다.일이 이렇게 끝나버리자, 임하나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우리도 돌아가자.” 이상언이 임하나의 손을 잡고 눈을 깜빡였다.임하나가 한 번 웃었다.바로 이때, 여사장이 씩씩거리며 돌아오더니, 임하나 앞으로 걸어와 얼굴을 붉혔다. “나연이 말 들으니, 자네가 고의로 우리 딸을 넘어뜨린 거라며? 사실이야?” 임하나는 깜짝 놀랐다.“아니에요, 나 안 밀었어요!”“우리 딸은 거짓말 같은 거 안 해.”여사장의 눈시울이 또 빨개졌다.“대체 나연이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네 남자 친구를 좋아하기 때문이야?”“…….”“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했네. 사람 좋아하고 안 하고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게다가 나연이가 두 사람을 떼어 놓은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우리 딸을 다치게 하냐고?”임하나는 해명하고자 노력했다.“사장님, 전 정말…….” 그러나, 여사장은 딸인 나연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하나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다행인 줄 알아, 의사가 상처 심하지 않다고 하니 나도 더 추궁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나도 자식 잘 하겠네.”말을 마치고, 여사장은 떠났다.제자리에 멍하니 서있는 임하나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너무 괴로웠다.그녀는 분명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임하나가 뒤쫓아가서 해명하고자 하자, 이서는 재빨리 그녀를 끌어당겨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나야, 소용없어, 자기 딸 말을 믿으려고 할 거야. 네 말은 안 들을 거야.”
그냥 지나쳐가려던 이서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들이 ML 국에 도착한 첫날 호텔 통로에서 싸우고 있던 여자 둘 중 한 명이었다.이서가 지나갈 때,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이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술냄새가 진동했다. 이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이서는 영어로 그녀와 대화하려고 시도했다. “많이 취했네요.”그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서를 바라보며 영어로 말했다. “나 안 취했는데요.”말투가 또박또박 한 게 정말 취하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호텔 직원 불러드릴까요?”“아니야, 자기야…… 가지마!”여자는 울면서 이서를 끌어안았다.“?”덩치도, 몸무게도 이서보다 훨씬 큰 그녀는, 이서가 밀어내고 싶어도 힘을 쓸 수 없었다. 이서는 곧 호텔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앞 전의 일로 직원들은 바로 여자 손님을 알아보았다.호텔 직원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이 이미 다른 여자랑 떠났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매일 술에 취해 산다고.”이서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듣고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원들과 함께 여자를 부추겨 그녀의 방으로 데려갔다.방에 도착하자마자 여자는 화장실로 뛰어들어 토하기 시작했다.이서는 직원에게 팁을 주었다. 그러고는 여자를 돌봐 줄 여직원이 있는지 물었다.직원이 난처를 표했다.“죄송합니다. 야근 담당직원은 모두 남자뿐입니다.”이서는 지환에게 좀 늦게 들아간다고 문자를 보냈다.여자가 화장실에서 토하고 나올 때까지 약 15 분이 지났다.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정신이 훨씬 맑아 보였다. 이서를 본 그녀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당신은…….”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했다. “아, 저를 데려다 주신 분이죠? 고마워요.”이서는 여자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좀 괜찮으세요?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잠깐만요.” 여자는 이서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담배 한 대를 꺼내고는 잠시 침묵
이서는 겉보기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당혹스러웠다.여자가 얘기하는 모든 얘기가 왠지 지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았다.“내가 정말 어리석었어요. 난 정말 참사랑을 만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사람을 100% 신뢰하고 믿었어요. 그에게 수많은 의문점이 있어도 내 스스로 합리화했어요. 난 그가 날 절대 속이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거든요.”이서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날 지환에게 자기를 속였냐고 물었을 때 그가 했던 얘기를 회상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이번에 그를 따라 ML 국으로 와서야 그가 ML 국에서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내가 혼인관계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면 뭔 소용 있나요? M 국에서는 합법적인 부부란 걸 인정하지만, ML 국에서 난 세컨드에 불과한 걸요.”줄리는 말하면서 또 담배 한 대를 꼬나 물고 불을 지폈다.그러면서 곁눈질로 이서를 힐끗 보았다.이서가 여전히 무표정하자, 그녀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말했다. “제 넋두리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저 같은 문제를 겪지 않도록, 주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겁니다.”이서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남편과 함께 한지는 얼마나 되셨나요?”“반년 정도 되었습니다.” 줄리가 담뱃재를 털었다.“사실, 그 전에 그의 아내로부터 문자를 받은 적이 있었어요.”이서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안토니가 ML 국에서 이미 결혼했다고 나에게 얘기하더군요. 하지만 난 안 믿었어요.”줄리가 쓴웃음을 지었다.“나중에야 이렇게 국제 결혼으로 여러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즉, 안토니처럼 국제 결혼의 허점을 이용하여 이중 결혼하는 남자들이 많다는 겁니다.”여기까지 말하고는 줄리는 또 분노를 폭발했다. “남자들, 정말 간교하기 짝이 없어요.”이서가 미간을 힘껏 찌푸렸다.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상대방이 중혼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줄리가 웃었다
이서는 천근 만근인 몸을 끌고 힘겹게 로열 스위트 룸까지 갔다.호텔 방문까지 간 그녀는 도저히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줄리의 이야기, 익명의 여자가 보낸 사진, 그리고 과거 지환의 신분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이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갑갑했다.지환의 모든 것이 호둣속 같았다.‘그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자칭 아내라는 사람은 진짜일까? 설마 정말로 두 명의 아내를……?’그녀는 방문을 잡고 천천히 앉았다. 여러 가기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그녀는 힘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방에 뛰어들어가 지환을 깨워서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럴 힘조차 없었다. 문 앞에 한참동안 앉아 있으며 기운이 좀 생기자 그녀는 룸 카드키를 꺼냈다.문이 열리고, 방에 들어간 이서는 이미 깊은 잠에 든 지환을 보았다.편안한 얼굴로 곤히 자고 있었다.완전히 무방비 상태로.그를 바라보는 이서의 눈빛이 복잡했다.‘정말로 날 속였을까?’이서는 눈을 꼭 감았다.자문해 보았지만 답은 없었다.몸이 쓰러지려는 찰나, 그녀는 벽을 짚고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잠깐 망설이다 손을 들어 남자의 미간을 어루만졌다.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잡혔다.깜짝 놀란 이서는 몸이 움찔했다.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지환의 품에 안겼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서의 머리에 비비적거렸다. “우리 여보, 왔어.”이서는 머리를 지환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강력한 심장 박동을 듣고 있으니 눈물이 솟구쳤다.그녀는 눈물을 애써 참느라 이불을 꽉 쥐었다.“왜 술냄새가 나는 거 같지?”지환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웠다. 아직 잠이 덜 깬 듯했다“술 마셨어?”이서는 잡았던 이불을 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응’하고 답했다.“다음에 술 마시고 싶으면 날 불러.” 이서를 힘껏 껴안은 지환은 거의 잠결에 그녀와 소통하고 있었다. “여자 혼자 술 마시면 위험해.”이서의 코가 또 시큰거렸다.‘이런 지환이 정말 나를 속였을까?’이서는 밤새 잠을 설
이상언의 방 안.외출 준비하고 있던 하나와 상언은 약을 들고 찾아온 지환을 보고 긴장해서 물었다. “이서 아파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병을 상언에게 건네주었다. “봐봐, 혹시 부작용 같은 건 없는지.”이상언은 쭉 한 번 살펴보고 말했다.“부작용이 없으니 안심하고 복용해도 되.”말을 마치고, 그는 또 물었다.“왜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거야?”“나도 잘 모르겠어.”지환이 눈살을 찌푸렸다.“여기 의사 말로는 물갈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던데…….”“내가 한 번 가 볼게.”세 사람은 지환의 방으로 갔다.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서는 미처 눈을 감을 겨를도 없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던 이서의 시선은 곧 임하나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지환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이서야…….”임하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어디가 아픈 거야?”이서는 고개를 저었다.심적 고통에 비하면, 육체적 고통은 새 다리 피였다.이상언은 진맥도 하고 이서의 설태와 눈도 살폈다.“별 문제없어. 열 나면 복용 지시대로 약을 복용하면 돼.”지환은 곧 물을 뜨러 갔다.임하나는 이서의 손을 잡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이서는 가볍게 웃었다: “열이 좀 나는 것뿐이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그녀는 완전 무장한 임하나와 이상언을 힐끗 보았다. “나가려고?” ““안 갈 거야.”임하나는 황급히 말했다.이서는 웃었다.“증거 찾으러 가는 거야?”이서가 그녀의 심중을 알아맞히자, 임하나도 굳이 숨기지 않고, ‘응’하고 답했다.“그럼 빨리 가. 스키장 쪽 CCTV는 없지만, 목격자는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는 기침을 했다.“시간이 지체될수록 너에게 더 불리해.”“하지만…….”임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빨리 가, 네가 여기 있으면 나 오히려 못 쉬어.”“하나 씨, 이서 씨 말이 맞아요, 여기 지환이 있으니까 우리 그만 가요.”임하나는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는 따뜻한 물
지환은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것 같았다.첫 번째로 드는 생각이, 신분이 들통났다는 거였다.하지만 곧 냉정을 찾은 지환은 최근 이서와 접촉한 사람들을 자세히 회상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마각을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서는 줄곧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참동안 아무 반응이 없자, 이서는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것 같았다.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나 너무 피곤해요. 좀 자고 싶어요.”이서는 진실의 답을 들을 엄두가 안 났다.지금까지 지환이 그녀를 속이지 않았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이는 그녀의 확고부동한 신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신념이 깨졌다.지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우습게 만들었다.“자기야…….”“내일 돌아가요, 우리.”이서는 몸을 돌려 지환을 등지고 누웠다.지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리가 몇 초 동안 다운된 거 같았다.그는 이서가 자신의 신분, 즉 하씨 집안 사람인 걸 알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그러나 이서의 이런 반응은 그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그러나 곧 긴장했던 등 근육이 다소 릴렉스해졌다.‘적어도 당장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니 다행이야…….’‘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말도 없네.’“그래, 그럼 푹 쉬어.” 지환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작 또한 조심스러웠다.이서는 눈을 꼭 감았다.정신이 몽롱해서인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곧 잠이 들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이서의 눈에 여러 개의 그림자가 보았다.“이서야, 깼어?”임하나도 다소 긴장해 보였다. “좀 어때? 괜찮아?”이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도 아까처럼 그렇게 흐리멍덩하지 않았다. “응.”“물 좀 따라 줄게.” 임하나는 말을 하고 물을 따르러 갔다.이서는 그제야 방안을 제대로 살폈다. 방 안에는 하나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방금 잠이 덜 깬 상태여서 헛것이 보였나 보다. “상언 씨랑 지…… 지환 씨는?”“몰라.”임하나는
“뭔데? 말해 봐, 나 화 안 낼 거야.”“사실 말이야, 만약 네가 윤씨 그룹 CEO에 경선에 출마할 거라는 걸 내가 일찍 알았더라면, 난 포기하라고 말했을지도 몰라. 왜냐면 너도 알다시피 윤수정 뒤에는 하은철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잖아. 하은철이라는 뒷배만으로도 주주들은 그녀에게 넘어가기 충분했지. 그러나 지환 씨는 달랐어.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믿었어. 지환 씨의 통찰력이 뛰어난 건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돈독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건 바로 진정한 부부라면, 너희들처럼 서로 응원하고 힘을 줘야 하는 거로 생각해. 우리 부모처럼 매일 싸우고 헐뜯는 게 아니라…….”“미안해.” 이서가 웅얼거렸다.“괜찮아.”임하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나저나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이서는 임하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목격자는 찾았어?”이 일을 언급하자 임하나는 고민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쉽지는 않네. 호텔 매니저한테 호텔 투숙 명단을 받았어. 저쪽 스키장은 호텔 투숙 고객만 이용 가능하니 일일이 조사하면 목격자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참, 너 아직 내 질문에 답 안 했다.”이서는 웃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만의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친구에게 그녀의 걱정거리까지 얹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몸이 아프니까 엉뚱한 생각하나 봐.”같은 시각, 옆 방.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상언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SY 그룹 회장이라는 걸 이서 씨가 안 거 맞아? 확실해?”눈살을 찌푸리자 지환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확실하지 않지만, 이서가 자길 속였는지 물었다고. 그럼 이 일 말고 또 뭐가 있겠어?”이상언은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야?” 지환은 손을 뻗어 술잔을 받지 않고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몸을 소파에 우겨 넣었다.“내가 아니라 이서가 어떻게 할 건지 지켜 봐야지.
긴장한 탓에 온 몸이 경직되어 있던 이서는 이불 속에서 자기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지환의 부드러운 말투에 넘어가지 않고, 통증으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아무것도 아니에요, 피곤해서 말할 힘도 없어요, 그나저나 내일 귀국 항공편은 예약했어요?”지환은 이서의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털을 뒤로 넘기려고 손을 뻗었는데, 이서가 다시 피했다. 그는 허공에 뻗은 자신의 손을 보며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여전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했다. “항공권 예약할 필요 없어. 우리 전용기 타고 돌아갈 거야.”지환에게 궁금한 게 한 트럭은 되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죄책감이 들면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지환의 목소리만 들으면, 그를 믿고 싶다는 생각이 뚫고 나올까 봐, 그녀는 혼신의 힘으로 자기 생각을 머릿속으로 다시 꽁꽁 가둬 두고 있었다.“응, 나 먼저 자요.”“그래.” 지환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이번에 이서는 피하지 않았다.같은 시각, H 국, 공항.구태우가 캐리어를 건네면서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 정말 ML 국에 갈 거야? 윤이서 거기 없으면?”소지엽은 씩씩하게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있든 없든 난 갈 거야.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그날, 집에 돌아온 구태우는, 소지엽에게 임현태의 ‘러브스토리’를 얘기해주었다.말을 마치고, 그는 소지엽을 바라보았다. “난 왜 너나 임현태나 같은 처지인 거 같지? 이룰 수 없는 짝사랑, 결국은 포기로 끝날 거 같은데…….”포기라는 말이 소지엽의 신경을 자극했다.그는 이전에도 포기했다.어린 시절, 이서가 하은철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그더러 포기하라고 했다. 하은철의 상대가 안 된다고. 하은철은 하씨 집안의 도련님이고 직계 후계자였다.그는 소씨 집안의 사생아에 불과했다.그때는 자신이 이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물러났다.자기도 하은철 못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