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은 우아한 여성미를 과시하기 가장 좋은 의복이다.이서는 거울 속의 아리따운 자태를 보고 귓불이 빨개졌다.거울 속의 지환은 실눈을 뜨고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그의 코는 천천히 이서의 목에 이르렀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았다.이서는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지환은 그걸 느꼈는지 한 손으로 이서의 허리를 안아 그녀를 화장대에 앉혔다.이서의 등은 화장대에 밀착했다.방안에는 따뜻한 히터 바람이 불고 있지만, 허리에서 느껴지는 냉 기운이 척추를 따라 천천히 올라왔다. 몇 분이 지나자,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며 방안의 열기가 이서의 백옥같은 피부를 조금씩 물들였다. 온몸의 피부가 야릇한 핑크색으로 변하며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와 점점 분리되었다.마지막에 이르자, 이서는 눈이 희미해지면서 모든 것이 흐리멍덩해졌다.‘밖에, 정말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빙설 천지일까?’저녁에 이서는 쿡이 보낸 사진을 받았다.한 장밖에 없었다.아직 미처 보정작업이 끝나지 않았다.하지만 보정하지 않아도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겼다.잡지에 바로 탑재해도 될 정도의 A컷 화보 사진이었다.이서는 사진을 임하나에게 보내주었다.임하나는 보자마자 즉시 답장했다.[와우, 역시 쿡은 쿡이구만. 바로 사진 공모전에 내도 수상하겠다!][그리고, 이서야, 너 너무 예쁘다. 이목구비는 똑같은데 왠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 모델이 훌륭한 건지 쿡의 촬영기술이 훌륭한 건지,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이서는 웃었다. 곧 답장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이서는 촬영 스텝이 보낸 메시지인 줄 알고 별 생각없이 클릭했다.그런데 메시지 내용이 이상했다.[저는 하지환의 아내입니다.]이서는 장난 문자인 줄 알고, 상대방을 차단하려는데 상대방이 또 메시지를 보냈다.[우선 차단하지 마세요. 우리 혼인 신고도 했어요.]이서는 동작이 멈칫했다.곧이어 상대방이 파일을 한 장 보내왔다. 혼인 신고서였다.물론 H국
사진 속에는 고작 18~19세 정도로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곱슬머리에 우아한 티아라를 쓰고, 유럽풍 궁중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청순하고 아름다웠다.사진 속 또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지환이었다.언제 찍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지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입술을 오므리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와 대조적으로 옆에 있는 여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꼭 집어 어디가 이상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다시 대화방으로 돌아왔을 때 사진은 이미 삭제되었다.상대방이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제가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몫입니다만, 부탁하 건데 제발 이 일을 당신 남편에게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당신에게 그의 비밀을 알려준 걸 알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이서가 다시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이미 그녀를 차단했다.문자를 보낼 수도 없었고 친구추가도 되지 않았다.이서는 눈썹을 힘껏 찡그렸다.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지환의 얼굴이 문 뒤에서 나타났다.그녀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주었던 그 얼굴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서는 심란했다. 그 여자의 말을 100%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간과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자기 왜 그래?”지환이 긴장해서 들어왔다.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이서는 입술을 깨물고 지환의 터치를 피했다. “괜찮아요.”“오늘 촬영할 때 너무 추웠지? 어디 아파, 내가 약 사올까?”“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지환이 의심할까 봐, 또 다른 핑계를 댔다.“회사 쪽에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지환은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는 손을 들어 이서의 목을 쓰다듬었다. “너무 힘들면 회사 그만 둬. 내가 자기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그가 진심에서 우러러 나온 걱정이라는 걸 이서는 알 수 있었다.그가 이럴수록 그녀는 호흡이 더욱 어려워졌다.“응.”
눈치 빠른 이서는 바로 이해했다.“정말?”“응, 아까 민박집 주인에게 물어봤는데, 매년 이맘때면 밤 10시에서 3시 사이에 오로라를 볼 수 있대.”“오우, 이런 이벤트가 있을 줄은 몰랐네.” 의서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임하나는 이서의 말 속에 담긴 다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밥 먹고 밖에 나가서 기다리자!”“그래요.” 기대에 찬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서, 이서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일었다. 고개를 돌리자, 사랑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다는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이서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의심은 깨끗이 씻겨졌다.‘왜 낯선 사람을 믿고 내 남편을 의심하는 거야?’“무슨 생각해?” 웃으며, 이서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물었다.이서는 고개를 저었다.저녁을 먹고 나니 9 시가 넘었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홀에서 서성거렸다.홀에 아직 적잖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오로라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10시가 지나자, 어두웠던 하늘에 마법이 일어났다. 초록색 띠가 나타나더니 그 띠가 곧이어 오색찬란한 불꽃처럼 피어오르며 다채로운 색으로 변했다.도시 전체를 뒤덮은 아우라는 후광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이서와 임하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주위 사람들도 모두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사진을 찍던 임하나가 고개를 돌려 이상언을 불렀다. “상언 씨.”그제야 그녀는 이상언이 곁에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그가 보이지 않자, 당황해서 몸을 돌려 살피려고 하는데, 마침 이상언이 아름다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호텔에서 나오는 걸 보았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면서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한 걸음 다가온 이상언을 본 임하나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이상언이 그녀 앞까지 왔을 때, 임하나는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이상언은 미소를 지으며 임하나를 바라보았다. 지적이면서 차분한 이미지의 얼굴이 오로라 불빛 아래서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임하나는 핸드폰을 꽉
3개월 간의 수습기간을 마치고 정식으로 연인 관계로 확정하는 날, 하필 나연을 만나다니, 하나는 마음이 찝찝했다.하나의 표정을 살핀 이서가 나연에게 다가갔다. “나연아, 여기서 만나다니……, 밥은 먹었어? 내가 맛난 거 사줄까?”이서를 본 나연은 안색이 변했다. 입을 열려는 그녀를 이서가 강제로 한쪽으로 끌고 갔다.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환이 다시 이상언을 한 번 쳐다보았다.이상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환에게 음성 없이 입모양으로 고맙다고 말하고는, 바삐 임하나를 달래러 갔다.지환도 몸을 돌려 이서가 간 곳으로 따라갔다.이서는 나연을 식당으로 데려왔다. 이서의 손에서 벗어난 나연은 손목을 비비며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언니, 뭐하는 거예요? 아프잖아요…….”이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 나연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방학이어서, 휴가 왔는데, 왜요? 뭔 문제라도 있나요?”이서는 나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렇게 타이밍이 딱 맞게 나타날 리 없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도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었다.게다가, 이상언도 나연한테는 마음이 없는 걸 잘 알기에, 굳이 도둑처럼 그녀를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그럴 리가. 밥은 먹었어? 내가 맛난 거 사 줄게.”“아니, 필요 없어요.” 나연은 쏘아붙였다.“나도 돈 있거든요.”“너 혼자 온 거니?”“그럴 리가요?”나연이 입을 삐죽거렸다.“언니, 우리 고작 한 두 번 만난 사이인데, 내가 왜 굳이 언니한테 시시콜콜 설명해야죠?”이서는 빙그레 웃었다.“그렇긴 하지, 하지만 난 말이야, 친구를 아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거든. 친구의 행복이 바로 내 행복이니까. 내 친구가 행복하지 않다면, 난 친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를 뿌리 뽑을 생각이거든.”“무슨 뜻이에요?”이서는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가요.”문에 기대어 있던 지환은, 이서가 소녀를 훈계하는 것을 보고 시종 아무 말도 하지
“네, 나연이 날 좋아하는 거 눈 달린 사람은 다 안다고……, 근데 나랑 나연이……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요. 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믿지 않아요.”그는 정말 억울했다.타임머신이 있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딸기 농장에서 ‘질투 유발 작전’을 펼쳤던 자신을 한바탕 두들겨 패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수준 낮은 방법을 생각해 냈을까?’이서가 물었다.“하나는, 상언 씨가 나연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안 믿는 거예요, 아니면 나연이가 상언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안 믿는 거예요?”이상언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네? 뭔…… 차이가 있나요?”“물론 차이가 있죠.”이서가 진지하게 얘기했다.“상언 씨는 여자 마음을 너무 몰라요. 나연이 상언 씨를 좋아한다면, 상언 씨가 나연에게 마음이 있든 없든, 하나는 계속 이 상황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둘이 함께 있는 모습도 직접 두 눈으로 봤으니…….”“하지만 그건…….”이서는 손을 흔들었다.“설령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라고 할지라도 마음이 께름한 건 어쩔 수 없어요. 게다가 더 큰 함정은…….”“함정이요?”“나연이 상언 씨를 좋아한다는 거예요.”“…….”“게다가…….”이상언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또 있어요?”“네.”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나연, 하나 이름도 비슷한데다, 나연이 한참 어리고…….”“네? 이름이 완전 다른 데…….”이상언의 입술 근육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여자는 그래요. 별 거 아닌 포인트에도 예민하게 받아들일 때 있거든요.”이상언의 당황한 표정을 본 이서가 말을 이었다.“상언 씨, 설마 여자친구 처음 사귀는 건 아니죠?”“그건 아닌데…….”전에도 여러 차례 연애를 했지만, 모두 가볍게 만난 사이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는 없었다.오히려 여자 쪽이 이상언의 비위를 맞추려고 갖은 노력을 해 왔었다.임하나는 그가 처음으로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여자였다.“나 어떻게 해야 하죠?” 이상언은 속수무책이었다.그의
그 뒤 며칠 동안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지막 날 촬영이 끝나고, 지환이 쿡 팀을 초대에 쫑파티를 했다. 그 뒤 쿡을 포함한 촬영팀은 M 국으로 돌아갔다. “최종본은 우편으로 H 국으로 보내 예정입니다. 혹시 요구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메일로 알려주세요.”비행기에 오르기 전, 쿡이 미소를 지으며 이서에게 말했다.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쿡 씨.”배웅을 마치고 지환과 이서는 공항에서 호텔로 돌아왔다.그들은 이상언 등 두 사람과 내일 스키 타러 가기로 약속했다.호텔 뒤에 바로 스키장이 있었다.요 며칠 동안, 나연이 여러 차례 이상언을 찾아왔었지만, 그는 여러 가지 구실로 거절했다.하지만 그녀는 참으로 끈질겼다.이상언이 톡을 차단하자, 레스토랑에서 기다리면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시도했다.이상언이 나연에게 전혀 마음이 없다는 걸 임하나도 잘 알고 있지만, 본인보다 한참 어린 여자가 남자친구 앞에서 어슬렁거리니 신경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다.그것도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나연이 걔 완전 고수야. 첫사랑이고, 내숭녀고, 다 저리 가라야.” 다음날 같이 스키 타러 가서 임하나가 이서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차라리 공명정대하게 공세를 펼치면 따지기라도 할 텐데, 그냥 가끔 상언 씨에게 연락해서 이것저것 하자고 하니,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상언 씨에게 차단하라고 하고 싶어도 그랬다가 괜히 빌미를 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오빠, 언니가 질투해요?’나연을 차단했을 때, 그녀가 이런 얘기하면서 이상언에게 접근할 게 뻔했다.하나도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남자친구를 만났었지만, 매번 상대방이 그녀에게 넘어오면 그녀는 가차없이 헤어졌다. 따라서 남자친구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건 없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을 공략하는 데만 공을 들였다. “제기랄, 연애는 정말 귀찮아, 솔로가 편해.” 임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고 삐딱선을 탔다.“그냥 헤어질까?” “고작 이 정도로
나연만 나타나면 이상언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고등학생인 데다 첫 해외 여행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그녀를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그러나 임하나의 표정이 평소와 다름없는 것을 보고, 그는 약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곧 임하나 뒤로 가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나연한테 가볍게 인사했다. “일찍 나왔네.”임하나는 온 몸이 굳어졌다. 곁눈질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큰 손을 보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그들의 친밀한 동작이 시사하는 바를 잘 알면서도 나연은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하나에게 물었다. “하나 언니, 스키 탈 줄 아세요?” ““아는데, 왜?”매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상언을 찾던 나연이 갑자기 임하나에게 부탁하자, 임하나는 나연이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나…….”“언니 시간 안 된다면, 상언 오빠한테 부탁할게요.”그녀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임하나를 바라보았다.임하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거였어. 진격을 위한 퇴각이야? 결국은 상언 씨를 노린 거잖아…….’‘어린애가 참 꿍꿍이도 많다.’하나가 답하려는데 이서가 먼저 나섰다. “내가 전문 코치 한 명 붙여 줄게.” 하나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이서를 쳐다보았다. 이서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나연을 바라보았다.이서를 보자마자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임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난 현지어를 못 알아듣는데…….”임하나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이다. 그것도 예쁜 소녀가…….“됐어, 내가 가르쳐 줄게.”아무리 계략이 있다고 한들 어린 소녀가 뭘 할 수 있을까? 이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연이 바로 옆에 있으니 그녀에게 뭐라고 까놓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그럼 조심해.”“응.” 임하나가 말하면서, 사람이 적은 곳을 가리켰다.“우리 저쪽으로 가자.” ““응. 언니, 정말 좋은 사람이야.”나연이 달콤하게 웃었다.두 사람의 멀
“무슨 일이야?”이서는 첫번째로 임하나 곁으로 달려갔다.임하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몰라, 방금 잡아주면서 스키 가르쳤는데, 갑자기 뒤로 넘어갔어.”임하나가 앞으로 다가가 나연의 상황을 살폈다.“괜찮아?”나연은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손에 새빨간 피가 묻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하나 언니, 난 괜찮아요,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걸 난 알아요.”임하나의 안색이 일그러졌다.의사인 이상언은 쪼그리고 앉아 나연의 머리를 살펴보고, 머리카락에 묻은 피를 보며 안색이 바뀌었다.“당장 병원 가야 해.”임하나는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며 이상언에게 해명하고 싶었다.이상언은 이미 스키장 직원을 불러 나연을 차로 옮기도록 지시했다.전문직 의사로서의 상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평소의 온화함은 사라지고, 잘생긴 이목구비에 엄숙함과 늠름함이 더했다.환자에 대한 인격적 존중과 책임이 가득찼다.그러나 차에 누워 눈을 깜빡이며 작전 성공의 제스처를 취하자, 임하나는 심장에 돌이 눌린 거처럼 갑갑하고 답답했다.시동을 걸어 출발하려는 차를 보며 이서가 물었다. “하나야, 너도 갈 거야?”임하나는 그제야 반응했다. “나…… 나도 가는 게 낫겠어.”“나도 같이 가 줄게.”임하나는 이서를 바라보며 코를 훌쩍였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지환이 차를 몰고 이서와 임하나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병원에 도착한 이서와 하나는 간호사를 통해 나연이 2 층에서 검사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병원의 특별한 분위기 속에서 둘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2 층에 도착하자, 마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상언을 만났다.임하나를 본 이상언이 말했다.“어떻게 왔어요?”“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나도 나연이가 어떻게 넘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엉겁결에 말이 튀어나와 버린 임하나는 멍하니 이상언을 바라보며 다가가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이상언은 환하게 웃으며, 임하나의 창백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난 하나 씨
소희는 심유인이 오늘도 트집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일찍 자신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않은가.소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심유인이 멍청한 건 알겠는데, 남자 친구라는 사람도 멍청한 건가?’‘여기까지 따라와서 같이 소란을 피우다니.’잠시 후, 소희는 소민찬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뭐?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고? 하하, 심씨 가문 아가씨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니!”“참, 윤 대표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면서요?” “역시 끼리끼리군요. 남자 친구마저 똑같은 가난뱅이니까요.”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소희가 다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의 남편이 YS그룹의 전 대표인 하지환 씨라고 얘기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순간, 심유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구겨졌다.하지만 소민찬은 이 말을 듣자마자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웃겨 죽겠네요. 윤 대표의 남편이 하지환 대표님이라고요?” “유인아, 사촌 동생이라는 분이 허영에 가득 찬 분이신가 봐?” 유인은 다급하게 소민찬의 소매를 여러 번 당겼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윤 대표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면, 저는 물구나무서서 똥을 먹겠어요!” “누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와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거죠?” 뒤에서부터 이지숙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에 소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사석에서는 저런 면이 있으시구나.’ 소민찬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비록 소씨 가문의 일원이라 해도, 이지숙 앞에서는 힘을 쓸 방도가 없을 것이다.“안녕하십니까.” “소민찬 씨군요. 우리 집에는 어쩐 일로 온 거죠?” 유인이 민찬의 손을 잡고 말했다.“숙모, 민찬 씨는 제 남자 친구잖아요. 숙모께서 제 남자 친구를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지숙이 말했다.“네 남자 친구는 네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지. 내가 허락한다고 한들, 소용없지 않겠니?
“그럼 그렇게 할게.”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는 사무실에 들어가 고이서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몇 가지 시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안 맞아.’‘하지만 내가 대체품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즉, 지환이나 구태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기다림의 시간은 항상 힘겹지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월요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소희는 초조함 속에서 깨어났다. 고용인들이 그런 소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곧 남자 친구분이 대표님 내외분을 만나실 텐데, 어째 긴장하는 모습이 아가씨가 그분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 같네요?” 놀림당한 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용히 고용인에게 다가가 물었다.“아주머니, 심씨 가문에 몇 년 동안 계셨어요?”고용인이 말했다.“4, 5년은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그럼 아주머니께서는 저희 부모님께서 제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심동, 그러니까 저희 오빠가 장희령을 데려왔을 때 많이 혼났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고용인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가십 매체가 그런 것도 알고 있던가요?”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망했어.’‘그 매체에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잖아!’‘우리 부모님은 자녀의 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셔.’‘어쩌면 오늘 현태 오빠를 부른 것도, 혼내기 위한 걸 수도 있어.’ 소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고용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내외분께서 도련님을 혼내신 이유는, 장희령 씨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게다가 그 아가씨는 인품마저 좋지 않았잖아요. 아가씨를 겨냥하지만 않았어도 심씨 가문에 시집올 수는 있었을 텐데 말이죠.”고용인의 위로에도 소희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고, 심지어 현태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
“네, 소희 씨는 그 여자가 성지영의 딸이라고 했어요.”“제 기억이 맞다면, 그 여자는 나랑 동갑이에요. 즉, 그 여자가 정말 성지영의 딸이라면 두 가지 상황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나한테 쌍둥이 자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확실히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거죠.”“아마 내 본래 이름도 ‘윤이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거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주 간단해요. 고이서의 경력을 봤는데, 5살 때 화재를 당해서 피부이식수술과 성형수술을 감행했다고 했거든요.” “만약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그 여자가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수술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 그 두 가지 수술은 일정한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회복 시간도 꽤 많이 필요했을 거예요.”“진정한 윤이서는 하은철과 약혼했는데, 수술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알려지면 약혼이 취소되었을 거고, 하씨 가문도 다시는 윤씨 가문을 돕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윤씨 가문은 존재할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윤재하가 하씨 가문과의 약혼을 지키기 위해 가짜 윤이서, 즉 너를 끌어들였다는 거야?” “네, 나를 외국에 보내서 공부하게 한 것도, 윤씨 가문 사람들이 내가 예전의 윤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대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네 추측이 정확한지 알고 싶어?”지환이 물었다.“그야 당연하죠.” “이천한테 알아보라고 할게.”“아니요, 이미 알아봐 달라고 했어요.”순간 동작을 멈춘 지환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소지엽한테?” “아니요, 구태우 씨한테요.” “그 사람은 소지엽의 친구잖아.” “그래서요?” 이서가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환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하염없이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래.”“우리 내기 하나 하자, 어때?
이서는 고이서의 신분을 알아내는 데 급급하여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백화점 입구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소희가 말했다.“그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해요?”현태가 웃으며 말했다.“머리 쓰는 일은 나한테 묻지 마. 사모님께서 곧 결과를 알려주시겠지.”“아무래도 내 머리는 월요일에 쓰는 게 좋겠어.” 현태의 눈빛이 다소 부끄러워졌다.“월요일에 소희 씨 부모님께 순조롭게 인정받아서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고개를 숙인 소희의 뺨도 붉게 달아올랐다.“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은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가르쳐 주긴, 솔직한... 내 속마음이야.” “청산유수네요.”소희가 현태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이만 가요, 옷 사야죠!”“그래.”현태는 흐뭇하게 대답한 후, 소희가 자신을 끌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이서와 지환은 순조롭게 택시를 잡았다.두 사람이 차에 오른 후, 지환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어?”이서가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하지환 씨한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잖아요.”“뭐가 적절하지 않아?” “우리는 곧 이혼할 거예요. 이런 시점에서 나한테 생긴 일을 하지환 씨한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환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앞줄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는 열정적인 노인이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두 사람은 이혼한다고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은 인연인 거예요.”“나중에는 이혼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간다고 해도, 아직은 이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혼하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인연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의하고 도울 수도 있는 거죠.” “나를 보세요, 마누라와의 관계가 다 끝나는 바람에 때로는
화장실을 나선 소희는 급히 매장으로 돌아왔고, 현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는 어디 있어요?”“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어서요, 이서 언니부터 찾아야 해요.”소희는 현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현태는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모습에 급히 이서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매장 입구에 있는 지환을 보았으나, 이서를 찾지는 못했다. 현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어디 계세요?”굳은 표정의 지환은 여전히 이서가 떠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소희가 현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여기서 형부랑 있어 주세요.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이서 언니를 찾아볼게요.” 하지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이서의 모습이 보였다.소희가 급히 다가가 이서의 팔을 붙잡았다.“이서 언니...” 이서가 맥없이 짧게 대답했다.“응.” “언니, 왜 그래요?”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지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가와 긴장한 눈빛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성지영을 만났는데...” “언니도 성지영을 봤어요?”소희가 놀라며 물었다.“그럼 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봤겠네요?” 이서의 눈이 반짝거렸다.“성지영 옆에 있는 사람을 봤어?”“아니요, 보지는 못했는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자, 성지영의 딸인 것 같았어요. 언니, 외동딸인 거 아니었어요? 성지영한테 언제 딸이 하나 더 생긴 걸까요?” “딸?”이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렇다니까요.”“아! 두 사람의 말투를 들어보니, 언니가 두 사람을 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어요.”소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언니한테 또 다른 자매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거예요?”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주 낯익다고 느끼던 참이었어. 잘 생각해 봐, 두 사람이 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소희는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윤씨
성지영은 이서의 눈길을 피했지만, 아까만큼 긴장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안간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미친X, 네가 내 주변 사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성지영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서가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그 사람, 대체 누구죠?”‘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확신한 순간, 성지영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풀리는 것 같았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볼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지?’ 이는 그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성지영은 이서가 고이서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누구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윤이서, 네가 나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나도 너한테 정을 논할 필요가 없어!”“당장 비켜, 한 번만 더 내 앞길을 막으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라고!”이서는 한참이나 냉랭한 표정으로 성지영을 바라본 후에야 길을 비켰다. 성지영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화장실에 도착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나타난 손에 성지영의 어깨를 세게 쳤다.화들짝 놀란 성지영이 뒤를 돌자, 고이서의 모습이 보였고, 성지영은 또 한번 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얘, 깜짝 놀랐잖니. 윤이서인 줄 알았다고!” 고이서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주변을 살폈고, 이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성지영을 끌고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다 엄마 때문이잖아요! 그러게 왜 시내에 오자고 하셔서.”원래 그들은 교외에서 잘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하지만 성지영이 교외 옷이 촌스럽고 수준 낮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꼭 시내에 가서 옷을 사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성지영은 이서를 우연히 만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두 사람은 시내에 오자마자 이서를 마주치고 말았다.기민한 고이서가 성지영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을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