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정 씨, 오늘 먼저 들어가 쉬세요.” 이서정을 취재하고자 촬영현장을 방문한 기자들을 힘겹게 막아고 있는 경비원을 본 감독은 웃는 얼굴로 이서정에게 말했다.이서정이 감독님을 흘겨보았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치켜세우니 우쭐해졌다. 그러나 그녀도 바보는 아니었다. 일전에 지환이, 그녀에게 아낌없이 지원해 줄 테지만 절대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지금 둘의 관계가 폭로된 건 그녀의 소행이 아니라 그녀와는 무관하였다. 하지만, 지금 나가서 취재에 혈안이 된 기자들을 마주했다가 말실수라도 하면 가까스로 잡았던 황금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을 테니.“감독님, 촬영현장에 온 이상 저도 그냥 일개 일꾼입니다. 저를 특별 대우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 계속 촬영하시죠.”감독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닦으며, 뭐라고 말하기도 애매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촬영을 계속했다.이서정은 성형한 얼굴이라 표정이 부자연스러운데다 연기도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 예전 같았으면 재활영을 진행했을 텐데, 오늘은 모두 ‘패스’시켰다.이서정은 자신의 연기가 마침내 감독의 눈에 들었다고 의기양양했다.촬영이 끝나자 매니저는 휴대전화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언니, 하 대표님 비서가 언니 찾는데요?”이서정의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뭐래?”“저녁에 예쁘게 차려 입고, 하 대표님 만나러 오라는데요?”매니저는 일부러 큰소리로 이야기를 전했다.수줍게 얼굴을 붉힌 이서정은 지환의 얼굴과 몸매를 생각하며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아우, 진짜…… 부끄럽게?” 다들 부러운 눈길로 이서정을 쳐다보며, 속으로는 이서정이 땡잡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면전에서는 이서정에게 아부하기 바빴다.……이서는 관리사무실에서 나오면서 차단한 성지영의 전화번호를 해지하고 전화를 걸었다.“한번 만납시다.”“드디어 나랑 얘기할 마음이 좀 드니?”“장소는?”이서는 쓸데없는 소리 없이 간단명료하게 얘기했다.“집
“언니, 이건 별개의 문제지.”윤수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윤씨 집안이 하씨 집안의 도움으로 오늘날의 발전을 이룬 건 맞아. 하지만 그거랑 연로하신 부모님을 내팽기치고 나몰라라 하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닌가……?”“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보다 저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 이서는 윤수정을 째려보았다.“윤수정, 네가 옆에서 부채질하면서 부추인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방금 콩밥 먹고 나왔는데, 또 먹고 싶지 않으면 잠자코 있을래?”윤수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며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언니,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 암튼 작은아빠와 작은엄마는 해명동영상을 올리지 않을 거야.”이서는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며 훑어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비웃는 말투로 얘기했다.“그 동영상, 네가 찍어 올리라고 시킨 거지?”윤수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건 범죄행위인데?!”이서는 피식 웃으며 성지영과 윤재하를 다시 보았다.“나 분명히 얘기했어요. 3일 시간 줄게요. 그 때까지 해명 동영상을 올리지 않을 경우에, 날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사람이라고 탓하지 마세요.”이서는 말을 뱉고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떠났다.성지영과 윤재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이서의 강경한 태도에 겁을 먹고 윤수정을 쳐다보았다.“수정아, 이제 어떡하면 좋겠냐? 아무래도 이서가 우리한테 불리한 증거가 갖고있는 것 같다.”윤수정은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작은아빠, 작은엄마, 걱정 마세요. 기우예요. 윤이서가 무슨 증거를 갖고 있겠어요? 게다가 두 분이 윤이서를 키운 건 사실이잖아요. 언니를 키우면서 얼마나 애쓰고, 마음고생 많았는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요. 댓글 보면 다들 결혼하고 나서 안면몰수하고 부모님을 버린 윤이서 비난하고 욕하지, 두 분을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성지영은 수정의 얘기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맞장구를 쳤다“그래, 맞아. 이서가 우리 돌보기는커녕,
지환은 도장 찍듯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뽀뽀를 했다. 그녀의 얇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이 온 몸으로 만연했다.이서는 그의 유유자적한 표정에 더욱 긴장했다.지환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착하지? 얌전히…….”그의 목소리에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어둠 속으로 이끄는 것 같았다.이서는 지환의 팔을 껴안고 두 눈은 흐리멍덩하게 하늘의 달을 보았다.하늘의 달은 나뭇가지 끝에서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다.……더 그레이트 지화.이서정은 벌써 여러 차례 손목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에 비해 무려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지환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매니저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그녀는 지환의 번호가 없었다.그리고 계약 규정에 따르면, 지환만 필요에 따라 그녀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고, 그녀는 지환에게 연락해서는 안 되었다.바로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낯선 번호였다.이서정은 얼굴에 희색을 띄며 얼른 전화를 받았다.“하 대표님, 안녕하세요?”수화기 너머의 민호일은 이서정이 한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웃으며 물었다.[안녕하세요, 저기 혹시 이서정 씨 되십니까?]이서정은 바로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지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경계하듯 물었다. “누구…… 시죠?”[아, 네, 민호일이라고 합니다.]이서정의 눈동자는 즉시 휘둥그레졌다.“4대 가문 중 하나인 민씨 가문의 수장이신, 그 민호일……이요?!”[네, 이서정 씨 안녕하세요.]이서정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안녕하세요.”[이서정 씨, 혹시 언제 시간 되세요? 우리 같이 커피나 한 잔 할까요?]이서정은 긴장한 나머지 손으로 허벅지를 비볐다.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어, 저는…… 언제든지 괜찮습니다.”[네, 그럼 시간을 정해서 비서보고 모셔오라고 하겠습니다.]“아 네, 좋아요. 그래요”민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래? 늙은 부모님 등골 빼먹는 등골 브레이커라니……!”“결혼하고 나서 바로 부모를 나몰라라 했대. 남자가 그리 좋을까?”“택시 기사 남편때문에 굳이 이럴 필요 있을까?”“…….”이서가 하이힐을 신고 디자인부에 들어왔을 때, 마침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것을 들었다.그녀는 아무런 기색을 내지 않고 사무실 쪽을 지나갔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서를 보고 얼른 동료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군거리던 사무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기 때문이다.차라리 사실로 증명하는 것이 백배 낫다.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앉아 있는 장지완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눈썹을 치켜 떴다.“당연히 우리 총괄님을 보러 왔지요. 실검에 올랐던데, 어떻게 처리할 예정이에요?”“그건 내 사적인 일이라…….”이서는 의자가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다.“굳이 얘기 안하고 싶은데…….”장지완은 이서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이서가 컴퓨터를 켜지 않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곧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서 두 손으로 책상을 받치고 비웃듯 이서를 바라보았다.“비록 총괄님의 사적인 일이긴 하지만, 회사의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니 하는 말이죠…….”이서는 냉소하면서 물었다.“아니, 계속 위 상사에게 대드는 부총괄님은 잘릴까 봐 두렵지도 않나 봐요?”“네가 감히……!”이서는 웃으며 말했다.“못할 건 없는 거 같은데……. 심심하면 와서 트집 잡고 시비 걸고 하니, 회사 업무에 방해가 되는데? 계속 이런 식이면 내가 당신을 자르지 않더라도 사장님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장지완은 입꼬리를 부자연스럽게 올렸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윤이서, 잘난 척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껏 즐겨.”말을 마치고는 허리를 비틀며 나갔다.이서는 동영상 얘기를 하는 줄 알고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컴퓨터를 켤 때도 자리가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
그러나 명성이 자자한 만큼 골드 킹과 작업하는 것조차가 힘든 일이었다.이서는 지환의 능력이 이렇게 대단한지 몰랐다. 글쎄 골드 킹 쪽 사람이 직접 전화를 걸게 하다니…….게다가 상대방은 매우 공손했다.[안녕하세요, 윤이서 씨 되십니까?]“네.”[혹시 언제쯤 시간이 될까요? 우리 쪽에서 직접 찾아 뵙고 상담 드리고 싶은데요…….”이서는 잠깐 생각한 뒤 답했다.“1시 정도 괜찮을까?”[그럼요.]“그래요, 그럼 있다가 봅시다.”이서는 전화를 끊자마자, 즉시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방금 골드 킹에서 나에게 전화 왔어요. 당신 파워 대단한데요?”지환은 기분이 좋았다.[맛난 저녁 사준다는 거 잊지 말고…….]그는 일부러 ‘맛난’저녁이란 글자를 강조하며 얘기했다.이서의 볼이 뜨거워졌다.그녀는 왠지 지환이 ‘음담패설’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곧 마음을 다 잡았다.‘맛난 음식이 뭐가 음담패설이야? 윤이서, 정신 차리자.’“알았어요.” 이서는 계속 말을 이었다.“그럼 퇴근하고 장 좀 더 봐서 갈게요.”이서가 자기 말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눈치챈 지환은 소리 없이 입술을 치켜 올렸다.“그래, 포도 좀 많이 사와.”……하씨 가문 저택.아침 일찍 일어나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아침을 먹은 하경철은 지팡이를 들고 천천히 문가로 걸어갔다.주경모 집사가 마중을 나왔다.“어르신 외출하시겠습니까?”하경철은 웃으며 답했다.“그래.”“이서 아가씨한테 가는 거죠?”하경철 얼굴의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자네한텐 정말 아무 것도 숨길 수 없군!”주경모는 웃으며 말했다.“어르신, 제가 봤을 때 어르신께서 굳이 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어, 벌써 결과 나왔어?”“아니요,” 주경모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아마 확인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그럴 리가? 지환의 결혼 소식이 언론에 퍼졌는데, 이서가 정말 지환의 아내라면, 분명히 기분이 안 좋겠지? 만약 아니라면 별 반응이 없을 테고…….”하경철은 주경모가
이서는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점심 휴식시간이라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삼삼오오 모여 얘기하고 있었다.이서가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하나 둘씩 다시 신나게 이서의 일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에이, 니들이 봤을 때, 이 일의 결말은 어떻게 될 거 같아?”“누가 알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윤이서가 공공의 적이 됐다는 거지. 가족들까지 나서서 폭로한다는 건 윤이서가 더 이상 하씨 집안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얘기 아니겠어? 그 말인즉 하씨 집안과 윤씨 집안 모두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겠다는 얘기지. 택시기사인 남편이 뭘 할 수 있겠어?”“내가 봤을 때, 윤이서는 자초한 거야. 좋은 하씨 집안 사모님을 고사하고 무슨 택시 운전 기사래?!”“전에 지완 언니가 얘기했잖아. 일부러 하은철을 엿 먹이려고 그런 거라고. 듣기로는 하은철이 사랑하는 사람이 윤이서 동생이래. 그래서 하은철이 이서와 결혼을 계속 미뤘던 거고…….”“근데 하은철은 왜 윤 총괄님을 찾아왔대? 온 사무실에 장미와 다이아몬드 반지도 또 뭐고?!”“아마도 할아버지 강요에 못 이겨서겠지, 그 집 어르신은 왜 그렇게 윤이서를 예뻐하는지 모르겠네?”사람들이 한창 떠들고 있는데, 문밖에서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은 얼른 입을 다물고 밖을 내다보았다.온 사람이 하은철인 걸 보고 다들 깜짝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졌다.“하은철 씨?” 한 여직원이 얼굴을 붉히며 일어섰다.“어…… 어떻게 오셨습니까?”“이서 사무실에 있어요?”“네, 네, 있어요, 사무실에 있어요.”하은철은 가볍게‘응’ 하고 대답하고 이서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그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리둥절했다.‘하씨 집안 며느리…… 물 건너간 거 아니야? 근데 하은철은 왜 또 나타난 거지?’하은철을 보고 이서는 불쾌한듯 눈썹을 찡그렸다.“왜 또 왔어?”하은철은 하경철에게 등 떠밀려서 온 거였다. 그래서 지금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 머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한마디 덧붙였다.“겸사겸사 전 약혼녀가 도움이 필요한지 보러 왔는데?”이 ‘전’자가 내포하는 의미가 참으로 오묘했다.강수지는 그제야 이서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참으로 의리 있는 분이시네요. 전 약혼녀를 이렇게까지 챙기는 게 쉽지 않을 텐데…….윤 총괄님이 지금 난처한 건 맞아요. 속담에 남의 자식 고운 데 없고 내 자식 미운 데 없다는데, 부모가 나서서 비난하고 폭로하는 거 보면, 없는 일을 지어낸 거 같지는 않아요.지금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당신의 출현은 아마 구세주의 강림이나 다름없을 거예요.분명히 당신의 도움이 절실할 겁니다!”하은철은 입꼬리를 치켜들려 말했다.“그런데 필요 없다고 하던데.”강수지는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이서를 쳐다보았다.“윤 총괄님, 이제 콧대 그만 세워요. 자식이 부모와 인연을 끝는 건 잘못된 일이에요. 이런 일은 사석에서 얘기하면 끝이지, 뭐 하러 남의 입방아에 오르게 해요. 윤 총괄 명성에도 좋지 않게……. 도련님이 돕지 않으면, 아마 큰 코 닥칠 거 같은데…….”듣기에는 구구절절 이서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그녀를 사리 분별 못하는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었다.이서는 책상 위의 시계를 한 번 보았다.“그만 가!”하은철은 이서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쫓아내자 안색이 보기 좋지 않았다.“윤이서, 작작해! 눈치 챙겨.”“우린 이미 끝났어. 근데 왜 자꾸 와서 나를 귀찮게 해? 눈치 없는 사람이 누군데?”이서가 휴대전화를 들고 말했다.“둘 다 나가. 안 나가면 아래층 경비 부를 거야!”하은철은 눈썹을 찌푸리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윤이서! 정신 차려, 내 도움 없으면 넌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게 될 거야!”“신경 쓰지 마. 이미 언론 홍보 대행사에 찾았거든.”하은철은 입가에 조롱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대행사를 찾았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대행사를 찾았는지 모르겠는데, 설마 사기당한 건 아니겠지
배시영은 그제야 하은철을 보고 다소 의외인 듯 눈썹을 올려 떴다.“하은철 씨도 여기 계셨네요.”“네.” 잠깐 딴 생각을 하던 하은철은 곧 다시 배시영을 바라보았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윤이서 씨 언론 홍보 대행을 의뢰받았습니다.”이 말을 들은 강수지는 믿을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하은철은 대충 직감했지만 그래도 안색이 한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배시영 씨가 웬만해선 직접 나서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하은철은 이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오늘 이렇게 오신 것은 설마…… 제 안면 때문인가요? 사실, 저와 이서는 이미 끝났어요. 그러니 굳이 그러실 필요……”배시영은 나름 하은철에게 공손했지만, 그래도 듣다 못해 그의 말을 끊었다.“아닙니다, 오늘 온 건 온전히 개인적으로 윤이서 씨를 좋아하기 때문이에요.”“…….”“별일 없으면 먼저 나가 주시겠습니까? 윤이서 씨와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하은철과 강수지는 배시영 일행에 떠밀려 사무실을 나갔다.사무실 밖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서 사무실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모두 배시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인지 확인차 온 것이었다.하은철과 강수지가 나온 것을 보고 모두 의론이 분분했다.“무슨 일이야?”“윤이서가 배시영을 섭외한 거야?”“윤이서 완전 쩐다. 배시영이 직접 출마하다니.”“그러게. 듣기로는 배시영은 일류스타나 유명인사들만 상대한다고 들었는데?”“인맥이 개 쩐다라는 얘기밖에 할 게 없네! 완전 부럽!”“…….”밖의 수군거림에 배시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닫아 모든 것을 차단했다.“윤이서 씨, 시작해도 될까요?” 배시영이 물었다.이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심소희더러 손님들에게 물을 한 잔씩 따라주라고 했다.업무 모드에 들어간 배시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이서 씨 일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당신 수중에 부모를 고발할 수 있는 증거가
그 그림자는 바로...성지영과 또 다른 사람!이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마음속에 맴돌았고,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서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지환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드디어 내 옷을 골라주려는 거야!’하지만 곧 이서가 매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고, 지환은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얼마나 이혼하고 싶길래 저러는 거야?’ ‘나랑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계속해서 치미는 울화를 느꼈다. ...한편, 재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쫓던 이서는 성지영과 다른 그림자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뭐야, 두 사람의 발걸음도 빨라지는 것 같은데?’이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뒤쫓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두 사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당황한 탓에 길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듯했다. 이서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성지영의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옷차림을 보면 여자인 것 같은데.’‘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라...’ 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급기야 갈라져 걷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하지만 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여자의 뒤를 따랐다.모퉁이를 돈 이서가 그 여자의 옷과 모자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이서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이서야, 오랜만이구나.”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의 손을 뿌리쳤고, 상대의 모습을 알아본 후에 주저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성지영!”성지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름을 부른다고? 이서야, 나는 아직도 네 어미 되는 사람이란다. 벌써 잊은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같은
이서는 두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소희는 현태를 한번 보고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이서 언니, 제가 알기로 우리 집 결혼식 들러리는 독신이어야 할 수 있어요...” 즉, 이서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결혼식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규칙이 있어?”“네.”“괜찮아, 어쨌든...”“곧 독신이 될 예정이잖아? 이혼한 사람이 들러리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는 거지?”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현태는 백미러로 지환을 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어두워져 있었다. 소희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이, 이서 언니... 부모님을 만날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서는 차내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대답했다.“정장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격식 있어 보이니까.” “그렇구나...”소희는 이서와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지환의 낯빛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차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태가 말했다.“도착했습니다.”지환과 이서가 차례로 내리자, 소희는 몰래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현태 오빠, 어쩌죠? 방금 나왔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잖아요! 중매는 무슨, 싸우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렵겠어요!” “그렇지 않을 거야.”현태는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를 위로하려고 했다. “이따가 기회를 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자.” 소희는 멀찍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요! 이서 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도 없죠!” 두 사람도 차에서 내렸다.“이서 언니, 가요!”소희는 주동적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3층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해서 이서의 뒤를 따랐고, 맨 뒤에서 걷던 현태는 이 장면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
토요일.이서는 약속 시간까지 병원에서 소희를 기다렸다. 소희의 전화를 받고서야 밖으로 나온 이서는 지환의 병실을 지나며 안을 힐끗 보았지만,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보네.’이서는 별생각 없이 병원을 나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알콩달콩하게 서 있는 소희와 현태의 모습이 보였다.이 광경을 본 이서는 갑자기 심술이 나는 듯했다. ‘나도 하지환 씨와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차에 오르려던 이서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이서는 차 안에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을 두어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 하지환 씨가 왜 여기 있어요?”이서는 망설이기 시작했다.“현태 씨가 옷을 고르러 갈 건데, 안목이 좋은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어.” 이서가 고개를 돌려 현태를 바라보자, 현태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저... 소희 씨가 사모님께 전화한 줄은 몰랐어요.”“하지만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드문 기회라...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모님, 괜찮으시죠?” ‘완전 고의적이잖아!’이서는 속마음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두 사람이 심근영 부부를 만나야 하는 것을 떠올리며, 한 명의 조언자가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긴, 여자인 나뿐만 아니라 남자의 조언도 같이 받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화가 나긴 하지만... 조금만 참자.’ “괜찮아요, 어서 가시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조수석으로 향했다.하지만 소희가 재빨리 달려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이서 언니, 제가 현태 오빠랑 같이 앉고 싶은데, 괜찮죠?”이서는 말문이 막혔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환과 거리를 두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는데, 문이 없었다면 진작 차에서 떨어졌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소희와 현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렇다. 두 사람이 지환을 불러낸
그 사람은 바로... 심유인!“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소희는 심근영 부부를 알게 된 후로 서서히 강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게 된 찰나, 심유인이 거들먹거리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자, 소희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게다가 유인은 항상 뒤에서 작은 음모를 꾸미곤 해서, 소희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다.‘회사 기밀을 훔쳤다는 누명도 심유인이 벌인 짓인 것 같단 말이지...’‘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조사했는데도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겠어?’‘자기 자신을 조사하는 셈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소희야, 오랫동안 널 만나지 못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너를 보러 온 건데, 날 반기지 않는 것 같네?” 이서의 배후 인물이 지환이라는 것과 하은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심유인은 소희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그럴 기회가 없었다. 소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과거에 있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심유인은 오직 한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희의 남자 친구가 월요일에 찾아온다는 것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심유인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저는 언니를 반기지 않아요. 당장 나가주시겠어요?”심유인은 곧장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심소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 지금은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신다지만, 언제까지 그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그리고,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건 전적으로 윤 대표 때문이야. 네가 윤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하 대표님께서 너를 지지해 주실까?” 소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유인을 바라보았다.“이서 언니와 저의 관계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관계가 아니에요!” 심유인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래,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다는
고이서는 두 사람이 단톡방에 보낸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웃기 시작했다.하지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신분임을 잊지 않았고, 절대 외부인에게 자신이 원래의 ‘윤이서’라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윤이서가 나와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의심할 거야.’고이서가 걱정을 털어놓자, 성지영이 무심히 말했다.[얘, 그렇게 우연히 만날 리가 없잖아. 이렇게 큰 도시에서 쇼핑하다가 윤이서를 만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윤재하도 그런 우연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우리 딸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곧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텐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그래도 드레스가 사고 싶다면, 교외로 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군.][윤이서가 교외로 쇼핑가지는 않을 테니까.]성지영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교외에서 어떻게 그럴듯한 드레스를 살 수 있겠어요?] 고이서는 시내에서는 이서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교외에서는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엄마, 교외에는 제대로 된 드레스가 없긴 하겠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잖아요.][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되면, 시내의 드레스는 물론이고, 고급 럭셔리 브랜드의 드레스까지 전부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네?]이 말은 성지영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토요일에 시외에서 쇼핑하자꾸나.][네, 엄마.]고이서는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최고층에 있던 이서는 전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희가 걸어온 것이었다. [이서 언니, 긴급 상황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이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젯밤에 부모님께 현태 오빠의 존재를 털어놓았잖아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저를 서재로 부르셔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현태 오빠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는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요.”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눈빛에서는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지환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감정은 입술 끝에서 단 세 글자로 바뀌고 말았다.“알겠어.” 이서도 지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괴로웠다.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과거만 떠올릴 뿐, 그 누구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그것은 그저 과거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그만 먹을래요.”이서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병실을 떠났다. 차에 오르자, 이서는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하지환 씨가 하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은 왜 우리한테 이런 장난을 친 걸까?’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차 안의 카펫을 바라보던 이서는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회사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고이서를 마주쳤다.다시 고이서를 마주한 이서의 감정은 완전히 뒤바꾼 후였지만,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고이서가 빙그레 웃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나요?”“덕분에요.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를 마신 이후로 아주 잘 자고 있어요.” “참, 지난번에 꽃차가 부족하면 더 구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큰 걸로 하나 더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이서가 주동적으로 꽃차를 더 달라고 하자, 고이서의 눈동자에 기쁨이 번졌다.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서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윤씨 그룹에 들어온 거였구나.’‘재무팀 팀장을 다시 구해봐야겠어.’어쨌든 재무는 한 회사의 존망이 달린 것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구해드리면 될까요?”“어제저녁에 세어 보았는데, 아직 10포가 남았더라고요. 매일 저녁에 1포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10일분은 남은 셈이죠. 4일이나
“감사해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구태우가 한 말을 곱씹자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았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여력이 없어.”‘미안해요, 소지태 씨.’이서는 평생 지태에게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었다.병실 문을 열자, 아침 식사를 들고 있는 이천이 보였다.“또 아침 식사를 가져오신 거예요?”‘역시 사모님이야!’놀란 이천은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지환이 보였다.이서가 그를 마주하고도 표정이 구겨지지 않자, 이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사모님, 같이 드실래요?” “이 비서님, 말씀드렸잖아요.”“앞으로는 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이서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천은 곧장 지환의 안색을 살폈는데, 과연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괜히 사모님께 식사하자고 해서 또 대표님의 기분을 나쁘게 했으니까!’ “그래도 아침은 같이 먹을게요.”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놀란 이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요.”이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식사하시겠다고?! 경사네, 경사야!’이천은 바삐 이서를 붙잡고 지환의 병실로 향하며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니, 윤 대표님께서 같이 식사하시겠답니다!” “그래.”지환의 낯빛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자리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이런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 만인 거지?’ “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이천이 음식을 내려놓고 말했다.“맛있게 드십시오. 부족하시면 더 사 오겠습니다.”이서는 멀어져가는 이천의 뒷모습을 보며
“이 꽃차를 장기간 이용할 경우, 중추신경이 손상돼서 심하면 치매를 일으킬 수 있어요.”“강력한 성분이 꽤 많이 들어 있더군요.”“음... 제 예상대로라면, 대략 보름 정도 사용하면 치매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놀란 이서가 다시금 물었다.“그러니까, 제가 보름 동안 이 꽃차를 복용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거란 말씀이세요?”“네, 그래서 지인이 준 게 맞냐고 물었던 거예요.”의사가 설명서를 보고 말했다.“설명서에도 다른 나라 언어만 있잖습니까.”“그래서 그분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에요.”“윤이서 씨, 이 꽃차를 복용하기 시작한 건 아니죠?”“그게...”이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고 팀장은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를 수 있겠어?’‘오히려 잘 알아서 이 꽃차를 사 온 걸 거야.’ 하지만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팀장님이 왜... 나를 해치려 한 거지?’ ‘설마, 하도훈이 보낸 사람인 건가?’“윤이서 씨?”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설마 벌써 며칠간 드신 겁니까?” 별안간 정신을 차린 이서가 말했다.“아니요, 딱 한 번 마셨어요.” 의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딱 한 번만 마셨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이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내 건강보다도 회사를 걱정할 때야.’‘고이서, 당신... 대체 누구야?!’의문을 품은 이서는 병실로 돌아간 후, 하늘에게 고이서의 모든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하늘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나, 곧장 고이서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이서는 한 장씩 뒤적거렸으나, 결국 고이서의 이력서에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지 못했다.‘지금 당장 고이서를 해고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 왜 나를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을 거야.’ 이서는 별안간 지태의 곁에 있는 구태우를 떠올렸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구태우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서는 우물쭈물하다가 차 안에 있는 지환을 향해 말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 사람을 처리해 줘서?”“네.”“참,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요? 왜 날 죽이려고 한 거죠?”“설마... 하도훈의 사람이었던 거예요?” 지환은 이서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하은철의 죽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만, 하도훈은 우리 두 사람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죽여서 분풀이하려던 거야.” 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요? 누가 하지환 씨에게도 해를 가한 거예요?”“응.”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이서의 심장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괜찮아요?”그녀가 간신히 입을 뗐다.지환은 그런 이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날 걱정하는 거야?” 이서는 붉게 물든 얼굴로 화를 냈다.“우... 우리는 지금 협력 관계예요! 하지환 씨한테 사고가 나면, 내가 어떻게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지환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난 괜찮아. 어둠의 호리병이 있으니, 하도훈조차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거든.” “하지만...”이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어둠의 호리병은 한 사람이잖아요. 만약 하도훈이 동시에 두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요?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 거라고요.” “걱정하지 마. 우리 곁에 고수가 있다는 걸 안 이상, 하도훈은 당분간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도훈은 지금 여자를 찾아 하씨 가문의 후계자를 만드느라 바쁠걸?”이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하도훈이 찾는 여자한테 손을 쓸 수는 없을까요?”“무슨 뜻이야?” “하도훈은 대를 잇는 것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출신은 전혀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욱 중요시하는 건 상대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가 하는 거겠죠.”“만약 우리가 먼저 하도훈의 조건에 맞는 여자를 골라낸다면, 그 여자를 하도훈의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