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진의 상태는 정말이지 낙관할 수 없었다.무진의 조광증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성연은 자연히 이런 상태도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성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많은 난치병들을 치료했었다.증상이 드러나야만 그 증상에 맞는 약을 쓸 수 있다.늦은 시간이었지만 안금여, 강운경 그리고 조승우까지 모두 달려왔다.모두 잔뜩 걱정스런 얼굴들이다.고모 운경이 먼저 물었다.“성연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멀쩡하던 무진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이때 침대에 누워있던 무진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불긋불긋한 얼굴이 보기조차 안스러웠다. “그러게. 성연아, 무진이 평소 꽤 건강했잖니?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이리 몸이 펄펄 끓는 거야?”옆에 있던 안금여도 질문을 했다.성연은 무진의 발작이 시작된 과정을 간단히 설명했다.“저도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조금 전 자신이 진단했던 무진의 상태를 강운경과 안금여에게는 아직 말할 수가 없었다.강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자신은 그저 의술을 조금 알고 있는 정도이지 전문 의료인이 아니었으니까. “에효, 간신히 좀 좋아지나 했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안금여가 휴 한숨을 내쉬었다.모두들 성연이 온 후로는 무진이 더 이상 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니 이번 발작이 그전보다 더 심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예전에는 발작이 지나가면 무진도 서서히 회복되었다. 이번 같은 고열은 없었다.하느님이 무진을 불쌍하게 여기길 빌 밖에. 부디 양친 부모를 잃은 무진이 더 이상 이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해주길 빌었다.“장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켜 볼게요.”고모부 조승우가 장모 안금여를 위로하며 말했다. 의료 상자에서 청진기를 꺼내 무진을 진찰했다.진찰을 마친 조승우의 안색이 어두웠다. “어때요?” 강운경은 초조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지만 무진을 자극할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별로 안 좋아. 무진이 열이 심한데다 몸이
철이 든 성연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잘 알았다.하지만 안금여는 성연의 마음을 거절했다. 성연의 손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무진을 돌보는 일은 집사와 고용인들에게 맡기면 된다. 너는 내일 학교에 가야지. 학습을 우선을 해야 하는 게 옳아.”비록 성연이 이미 자신들 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지만, 제대로 공부를 해 둬야 앞으로 사회에 나갔을 때 좀 더 쉽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런 일로 성연이 공부를 방해해서는 안되지.’ “학교 수업은 제가 충분히 따라갈 수 있어요, 할머니. 제가 여기서 무진 씨를 돌보게 해주세요. 안그러면 제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성연은 기어코 학교에 가려 하지 않았다.안금여와 다른 사람들은 성연의 학업 성적을 잘 모르기에 자연히 일반학생처럼 생각했다.북성남고를 다니는 건 단지 학창 생활을 체험하기 위한 것일 뿐, 고등학교 졸업장에 준하는 증서를 이미 손에 넣은 성연이다.더 중요한 것은 무진의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아직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만약 이대로라면 만일의 하나 안 좋을 수도 있었다.어쨌든 자신이 무진에게 침을 놓은 것이니까.늘 이렇듯 철이 든 성연은 윗 어른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알았다.강운경과 안금여를 너무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말려도 또 말렸지만 결국 성연은 무진 곁에 남았다. 기왕 성연이 남은 이상 안금여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무진의 약혼녀인 성연이 남아서 돌보는 것도 당연했다.지금이 저들 젊은 부부의 감정이 발전하기 좋을 때이기도 하고.그리하여 그날 저녁, 집사는 안금여가 묵을 방을 준비해 주었고 몇 사람도 엠파이어 하우스에 남아서 쉬었다.운경은 잠도 자지 않고 무진의 방에 남아 성연을 도왔다.그동안 성연은 거의 30분 간격으로 무진의 체온을 쟀다.밤새 왔다갔다하며 수건을 물에 적셔 무진의 이마에 올리고 또 손과 몸을 닦아주며 체온을 낮추려 애썼다. 마치 뱅글뱅글 끊임없이 도는 팽이처럼 멈추지 않았다.성연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옆에 있던 운경은 더
성연이 하는 모든 동작들을 운경이 눈에 담았다.이렇듯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자 운경은 속으로 성연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 성연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점차 내려놓았다.무진은 성연의 정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성연의 보살핌으로 무진의 열이 서서히 내렸다.무진의 체온을 마지막으로 재니 날이 밝아왔다.체온계에서 이미 내려온 온도를 확인한 성연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눈물이 날 뻔했다.드디어 열이 내렸다.밤새 정신없이 간병했던 성연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어지간히 피곤한 게 아니었다. 무진의 열이 내리며 성연의 큰 돌덩어리가 내려앉은 듯했던 마음도 자연히 좀 가벼워졌다.침대 옆에 엎드려 정신없이 잠들었다.성연이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진이 깨어났다.눈을 뜨니 침대 옆에 엎드려 잠든 성연이 보였다.마침내 깨어난 무진을 본 운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진 곁에 다가가 춥거나 덥지는 않은지 살폈다.“무진아, 지금 좀 어때? 어디 힘든 데는 없니?”무진은 여전히 기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발작을 하고 또 고열을 앓았으니 몸 안의 거의 모든 기운을 다 쏟아낸 상태.무진의 안색이 창백했다.그러나 말없이 고개만 돌린 무진의 시선이 성연이에게로 향했다.성연을 보는 운경의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졌다.“성연이 얘, 어제 밤새도록 너를 간병했어. 네 체온을 재고, 물을 먹이고, 얼마나 세심하게 돌보던지.”애초 처음 만났을 때의 성연에 대해서는 그저 어린 여자아이라는 인상만 받았다.나이도 어려서 무진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진이 돌봐야 할 것 같았다.그러나 어젯밤 정성껏 무진을 돌보던 성연을 보며 자신은 성연만큼 잘 돌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성연의 몸에는 젊은 애들 같은 경박스러움이 전혀 없었다.생각해 보니 성연이 강씨 집안에 온 지도 꽤 되었지만 성연에 대해 일반적인 대우 밖에 해준 게 없었다. 하지만 무진은 오늘 같은 간병으로 성연을 귀찮게 하고 있으니, 운경은 속으로 무척 미안하고
운경이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내가 옆에서 지켜보니 성연이가 진짜 고생했어. 네가 회복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지. 가서 네 고모부 보내서 네 상태를 좀 살펴보라고 해야겠다.”말하면서 운경이 밖으로 나갔다.무진이 고모를 만류했다.“고모님, 그만 두세요. 온몸에 기운이 좀 없는 것 외에는 큰 문제 없어요. 그냥 배가 좀 고프네요.”운경은 즉시 주방에 연락해서 먹을 것을 가져오게 했다.무진의 상태 때문에 엠파이어 하우스의 모든 고용인들이 항시 대기 중이었다.무진에 깨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이미 죽을 쑤어 놓은 상태였다.죽을 가져왔을 때는 이미 먹기 좋은 온도로 맞춰져 있었다.운경은 무진에게 떠먹여 주려 하자 무진은 실소를 터트렸다.“고모,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안 그러셔도 돼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조금 전 성연을 안아 눕힐 정도의 기력이 있었던 걸 생각하니, 자신의 동작은 확실히 좀 과한 듯도 했다.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에 앉아서 무진 죽을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말 고모부가 보지 않아도 되겠니?”여전히 걱정이 걱정스러운지 운경의 미간이 접혀 있다. “괜찮아요, 고모. 저 정말 괜찮아요.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무리하지 않을 게요.”무진이 운경을 달랬다.운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무진이 죽 한 그릇을 비우자 운경이 빈 그릇을 받으며 물었다.“더 먹을래?” “배불러요, 고모. 그만 먹을래요.”무진이 좀 기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고모 운경은 그를 마치 어린아이 돌보듯 살폈다.하긴 무진이 부모를 잃을 때부터 줄곧 운경이 자기 아들처럼 보살폈으니.자식에 대한 여타 부모들의 애정 못지 않게 무진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쏟았다. “그까짓 죽 조금 먹어서야 되겠니? 너 몸이 많이 약해져서 좀 더 보충해야 돼. 안 그러면 어디 기운을 차리겠니? 널 좀 봐, 항상 성연이더러 너를 돌보게 해서야 웃음거리가 아니고 뭐겠니?”운경이 무진을 나무라듯이 흘겼다.결국 운경의 설득을 못 이긴 무진이 죽 한 그릇을 더 비
성연이 일어났을 때 무진도 잠에서 깼다.무진이 성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뭐 하러 갈려고?”성연은 무진이 이렇게 빨리 깰 줄 몰랐다.“씻고 올게요.”무진이 성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다시 힘껏 잡아당기자 성연이 그의 품 안에 떨어졌다.성연을 끌어안은 무진의 눈에 만족의 빛이 차올랐다.“좀 더 자, 어젯밤에 별로 못 잤잖아.”성연은 발버둥을 쳐서 간신히 무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안돼요. 수업하러 학교 가야 돼요.”잠은 학교에 가서 보충할 수 있었다.무진이 좋아졌으니 그녀가 옆에 있을 필요도 없고.그러나 성연을 껴안고 놓지 않던 무진이 그 틈에 성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두 손이 잡힌 성연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그리고 점점 무진의 키스에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심리적으로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성연은 자신이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싶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이 사람, 어젯밤 발작하던 그 남자 맞아?’이 남자, 일부러 자신의 병을 이용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뭐가 이렇게 뻔뻔해?’성연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세게 자신의 입술을 빡빡 문질렀다.얼굴이 맞닿아 있는 남자를 향해 화를 내며 말했다.“강무진, 일부러 그런 거죠?”‘진짜 내가 자기 속셈을 못 알아차릴 아나?’‘남자들은 역시 다 똑같아!’“뭐? 일부러 그랬다고?” 무진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성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에 무진 씨가 어땠는지 잊었어요? 지금 기운 차리자마자 이런 짓이나 하고, 보니까 병도 심각하지 않네, 뭐.”무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네가 내 옆에 있어야 잘 회복할 수 있지. 네가 가면 내가 잠을 잘 수 없어.”애초부터 확실히 무진은 성연을 자신의 치료제로 여겼다.성연이 있어야 제대로 잘 수 있다는 사실은 가까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성연에게 자신과 같은 방에서 자자고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
무진의 말에 성연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자신이 계속 강무진 옆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무진의 말을 듣고서야 성연은 이해가 되었다.업무를 보며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다른 사람은 피곤하면 쉽게 잠이 들지만, 무진은 피곤하면 오히려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장시간 자연스러운 생리 순환에 위배되는 반대의 생활을 해왔다. 그러면서 결국 기를 상하게 되었을 터.그리고 성연의 짐작에, 무진은 잠이 들어도 꿈을 많이 꾸며 숙면을 취하진 못했을 것이다.생각을 거듭하면서 성연은 무진의 건강을 제대로 관리할 필요를 느꼈다.‘이 병이 이렇게 좋아진 것도 그야말로 기적인 셈이다.’무진은 품에 안은 성연의 습윤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이 틈에 또 다시 입술을 훔친 무진은 기분이 좋은 듯 물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무진의 품에 갇힌 성연은 이제 더 이상 실랑이하지도 않은 채 무진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성연이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어떻게 그런 기괴한 병을 앓게 됐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오래 전부터 앓았어. 그때 이미 치료하기 시작했지만 소용이 없었지. 너를 만날 때까지 말이야.”무진이 성연의 이마에 턱을 올렸다. 그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꼭 내가 무진 씨 잠들게 하는 도가 같은 느낌이야.” 성연이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무진이 어떤 대답을 할지 듣고 싶었다.“아니,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무진이 그윽한 눈동자로 성연을 바라보았다.성연도 무진의 이 말 이면에 깔린 소리를 알아들었다.‘여러 가지 의미에서 당신을 만난 뒤…….’성연은 아주 약간, 감동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강무진은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무진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을 때보다 훨씬 더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성연은 이마부터 볼까지 온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주체할 수가 없다.‘강무진, 도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거야?’‘아, 진짜 사람 잡겠네.’
성연은 정말 깜짝 놀랐다. 깨어나서 보니 사람들에게 포위된 자신을 발견했으니.그리고 모두 집안 어른들이었다.어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난처했다.얼른 일어나 앞에 있는 어른들에게 인사를 한 뒤 고개를 숙인 채 한쪽에 섰다.무진과 함께 잠든 건 정말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안금여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에는 무진이 이렇게 사람을 껴안지 않았는데, 역시 성연일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야.”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아 보이니 어른들로서는 기꺼운 마음이었다.무진이 나이가 차니 집안에서 맞선을 종용하기도 여러 차례였다.비록 병을 앓는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뭐라 해도 무진은 강씨 집안 적장자였다.그러니 딸을 내미는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그러나 무진은 누구에게도 이처럼 가깝게 대하지 않았다.그전엔 여자를 보면 항상 무슨 병균을 대하듯이 피해 다니지 못해 안달이었다.지금 성연과는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안금여의 말을 듣고 있는 성연은 그저 난감할 뿐이다.하지만 성연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확실히 무진은 자신을 좀 더 특별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대답하지 않고 무진을 바라보던 성연이 물었다.“무진 씨가 왜 아직도 안 일어날까요?”강씨 집안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 곤란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혹 무진에게 또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자신이 아주 깊이 잠들긴 했지만 죽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설마 기척이 있었는데도 못 들은 건 아니겠지?’운경은 옆에서 말해줬다.“무진이 깼었어. 밥도 먹고 약도 먹었어. 약에 수면 효과가 있어서 깊이 잠들었을 뿐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그제야 마음이 놓인 성연은 더 이상 무진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무진 씨는 잠을 많이 자는 게 좋아. 몸도 좀 보양하고.’깨어 있을 때보다 수면 상태에서 더 쉽게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게다가 무진이 상한 것은 정신이다. 오래동안 힘들었던 사람이니 이
오후, 성연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무진을 간병했다. 안금여와 운경과 함께 대화도 나누면서.성연의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이왕 늦은 이상 아예 가지 않은 것이다.가서 해명하는 시간도 아까웠고.그런데 하필 자신의 반 담임은 여전히 이윤하였다. 만약 이윤하가 자신이 결석계를 내고 또 집에 가는 것을 본다면 또 어떤 문장을 쓸지.‘차라리 그냥 집에 있는 게 나아.’무진은 출근하지 않고 강운경 혼자만 출근했다.본가에서 지금 회사에 나와 있는 사람은 강운경 혼자였다.강상철의 사무실.사무실에 들어서는 강일헌의 눈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할아버지, 저쪽의 정보에 따르면 그 분이 또 병으로 쓰러졌답니다. 꽤 심각한 모양이랍니다.”강일헌의 입에서 나온 그 분이 누구인지는 그들 모두 잘 알고 있다.강상철이 바로 냉소를 지었다.“그러게 내가 말했지 않느냐? 그 병자가 어떻게 회사를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있다는 건지, 원. 아마 조만간 일 날 거라고 했지?”강무진은 확실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그러나 그 죽어가는 몸이 문제였다.요 몇 년 동안 계속 명의를 찾고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이런 놈이 자신들과 싸워서 회사의 지배권을 빼앗으려고 해?’‘큰집 장손이면 다야?’그 놈이 죽으면 결국 회사에 남는 것은 우리 둘째, 셋째 일가뿐 아닌가?’그는 강무진의 의기양양한 기세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맞습니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회사를 운영한다고요. 곧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숨을 질질 끌며 살아남아서 맞서다니.” 강일헌은 무진 얘기가 나오자마자 화가 치밀었다.강무진이 회사 실권을 쥐며 그가 맡은 계열사의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모두 잘려 나갔다.수익도 예전보다 못했다.그가 강무진을 미워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강무진 그 놈은 미친 놈에 불구일 뿐인데, 무슨 자격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있단 말인가.자신의 어디가 강무진보다 못하다는 건지.‘강무진만 끌어내릴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앉게 되는 사람은 바로 나야!’“너, 성질
남은 일정 내내 성연은 미스 샤넬, 목현수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북성 주위의 관광 명소들은 전부 한 바퀴 돈 셈이다.무진의 당부를 새기며 최대한 깊은 물이 있는 곳은 피하면서.또 성현은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을 위해 온갖 명소들을 방문해서 즐길 계획을 짰다.성연은 하룻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그래도 무진의 말을 잘 따른 셈이다. 위험한 곳들은 가지 않았으니까.오늘 그들이 함께 온 곳은 커플들을 위한 테마파크였다. 주위에는 온통 팔짱을 낀 젊은 커플들이었다. 공기 중에는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반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의 사이에 혼자 낀 성연은 눈치 없는 들러리 같았다.성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미스 샤넬과 목현수 두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말이다.그러나 지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닭 털을 날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성연 자신이 피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성연은 속으로 후회했다. ‘괜히 사서 고생한 거 아냐?’‘진즉 알았으면 무진 씨를 데리고 올 걸 그랬지.’“샤넬, 저기 아이스크림 파는데, 먹을래요?”성연은 핑크색으로 장식을 한 건너편의 가판대를 가리켰다.성연과 미스 샤넬은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성연은 미스 샤넬이나, 샤넬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해서 그냥 바로 이름을 불렀다.“나도 먹어요.” 미스 샤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목현수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낮 시간.하지만 건녀편에는 그늘이 전혀 없었다.목현수는 양산을 두 사람에게 건네며 말했다.“두 사람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내가 사올 게. 무턱대고 저쪽으로 갔다가 더위 먹으면 어떡하려고?”고개를 살짝 끄덕인 성연은 목현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샤넬,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야?” 목현수가 먼저 미스 샤넬에게 물었다.“다 괜찮아요, 당신이 사 주는 거랴면요.”
식당 안.미스 샤넬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앞접시에 가득 담았다.그러나 목현수는 음료수 한 잔만 손에 쥔 채 미스 샤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의아하게 쳐다보던 미스 샤넬이 물었다.“안 먹어요? 왜 날 쳐다보고 있어요?”오늘 목현수가 좀 이상했다.“많이 먹어. 부족하면 더 시켜줄 게.” 정상적인 대화이긴 하지만, 목현수의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진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조금 전에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이전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 목현수였다.미스 샤넬의 오늘 모습은 목현수로서는 정말이지 좀 새롭게 보였다.주스를 한 모금 마신 목현수가 입을 열었다.“미스 샤넬, 오늘 왜 굳이 성연을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어? 설마 네도 위험하게 될 줄 몰랐어?”목현수의 눈에 미스 샤넬은 늘 연약하기만 한 존재였다.그런데 위급한 상황에 제일 먼저 강에 뛰어들어 성연을 구한 사람은 미스 샤넬이었다. 목현수의 물음에 잠시 멍해 있던 미스 샤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송성연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어요. 만약 그때 그러지 않고 송성연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생 자책하며 살 테죠. 그래서 나는 반드시 송성연을 구해야 했어요.”그러니까 미스 샤넬은 목현수 때문에 송성연을 구했다는 의미.만약 송성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을 터였다.미스 샤넬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어 말했다.“공교롭게도 내가 한 수영하잖아요? 그러니까 내려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감히 그런 용기 못 냈지.”미스 샤넬의 유머러스한 표현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순간 목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목현수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미스 샤넬.목현수 자신이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목현수가 진지한 음성으로 미스 샤넬에게 약속했다.“이전에는 정말이지 결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미스 샤넬 당신과 기꺼이 결혼할 거야.”미스 샤넬의 눈에
민박집에 들어오기 전에 성연은 이 일을 무진에게 알리지 말라고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이미 괜찮아졌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이 걱정만 할 뿐이니까.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손건호는 자신의 보스에게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진도 알게 되었다.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무진은 당장 성연 일행이 간 관광지로 달려갔다.지금 성연은 이미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상태였다.성연이 무사한 모습을 본 무진은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그는 미스 샤넬을 보고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스 샤넬, 성연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미스 샤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성연 씨는 제 친구인 걸요.”“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일어난 상황을 생각한 무진은 두려웠다.자신이 성연의 곁에 없었기에 성연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 상상하기가 더 어려웠다.“괜찮아요. 배고파요, 현수 씨.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미스 샤넬은 목현수를 끌고 나가면서 성연과 무진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다.방안은 곧 조용해졌다.성연을 보는 무진의 표정은 심각했다.성연은 감히 무진의 얼굴을 볼 생각도 못한 채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 밑만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거 알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무진은 결국 차마 책망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성연이 소리치며 말했다.무진은 하마터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진이 성연의 어깨를 잡은 채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먼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야지?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무진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저리를 쳤다.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걸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성연은 무진의 어깨를 다시 안고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지금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이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잠시 잊었다.‘언제나 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데
목현수도 한숨을 돌렸다.방금 성연에게 일이 생기자 목현수는 바로 손건호에게 알렸다.원래 다른 곳에 있던 손건호가 그제서야 달려왔다.“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성연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손건호의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난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던 성연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건호에게 당부했다.“이 일은 무진 씨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손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옷을 갈아입게 민박집을 좀 잡아주세요. 자칫하다 감기에 걸리겠어요.”이 관광지는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근처에 민박집들이 많이 있었다.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성연이 미리 조사한 사항들이다.“예.” 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모두 차에 올랐다.차에 올라탄 성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미스 샤넬, 고맙습니다. 오늘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물속에서의 질식감을 떠올린 성연은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했다.“괜찮아요. 당신은 내 친구니까 구할 수 있었어요. 물론 내가 구하긴 했지만 마음에 두지 말아요. 친구끼리는 서로 도와야지요.” 미스 샤넬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대범하게 말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연은 그전에 미스 샤넬과 적지 않은 오해를 겪었다.그런데도 그녀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미스 샤넬의 손을 잡은 성연은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곧 그들은 손건호가 잡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목현수가 미스 샤넬과 성연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은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올 게.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그래요.” 미스 샤넬은 별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목현수가 옷을 사 주겠다고 하자 성연은 아무래도 좀 어색했다.예전엔 별일 아니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자란 성인들이었다.성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나, 나는 필요 없으니까 미스 샤넬만 사주면 돼요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