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진 성연은 바로 침대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이튿날 깨어나니 무진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침실에서 자지 않았는데도 무진은 원기 왕성해 보였다.그에 반해 성연은 밤을 꼬박 새운 듯 온몸이 노곤했다.어젯밤에 해킹하다 지쳐서인지 숨도 쉬기 힘들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도 눈을 감은 채 겨우 아침을 먹고 학교로 향했다.교실에 도착하면 원래 정신이 좀 돌아올 줄 알았다.그러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는지 오전 수업을 듣는 내도록 잠이 덜 깬 상태였다.머리도 지끈지끈 아팠다.성연은 이미 수업 듣는 것 같은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그냥 책상에 엎드려서 잤다.성연은 오전 내내 잠만 잤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 수업을 마칠 시간이었다.완전 개운한 기분으로 기지개를 켰다.오전 내내 잠을 보충한 성연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느릿느릿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오후에는 체육 수업이 있었다. 오전 내내 책상 앞에서 풀려난 학생들은 점심 시간이 되자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운동장에서 즐겁게 뛰어다녔다.체육 선생님은 키가 크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데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어 꽤나 엄해 보였다.체육선생님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모두 수업이 끝난 것 못 봤어? 체육위원은? 집합할 생각도 안 하고 말이야. 너희들 자신을 돌아봐라. 모두 어떤 꼴인지? 체육 수업이지만 단체 규율을 지켜야지!”매우 우렁찬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야 반장이 서둘러 열을 정리했다.모두들 체육 선생님 앞에 가지런히 서 있었다.체육 선생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모두 우선 운동장을 세 바퀴 돈다. 그리고 체육위원은 몇 사람에게 농구공과 배구공을 가져오라고 해.”학생들은 불평하지 않았고, 체육위원은 모두를 데리고 달리기를 했다.이번 시간에 체육 선생님은 남학생은 농구, 여학생은 배구를 하게 했다.처음에는 선생님이 경기 규칙을 알려주고 시범도 보여 주었지만, 뒤에는 기본적으로 자유 활동이었다.체육시간을 성연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아침 내내 잤더니 몸이 잔뜩
성연은 대충 얼버무리려는 태도를 한눈에 알아챘다.눈을 가늘게 뜬 성연의 눈빛이 날카로웠다.“너희 집에서는 이렇게 사과하라고 가르치니?”성연의 명성을 줄곧 들어왔던 여시화는 성연을 한 번 만나고 싶었다.자신의 눈에는 시골뜨기에 불과할 뿐이다.성연을 당해내지 못하는 저들이 바로 바보 멍충이인 것이다.당연하다는 듯한 여시화의 태도는 자못 도도했다.“나는 늘 이렇게 사과해 왔어요.”성연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여시화의 눈이 의기양양해하는 빛으로 반짝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시골뜨기에 불과하니까 이렇게 빨리 수긍하는 거겠지.하지만 기분 좋은 것도 잠시, 성연이 손에 들고 있던 배구공을 바로 여시화의 얼굴 쪽으로 던졌다.동공이 수축되고 온몸이 굳은 여시화는 멍하니 제 자리에 선 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배구망만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성연은 아주 적절하게 힘 조절을 했다. 배구공은 여시화의 얼굴 옆을 스쳐 갔다. 다른 쪽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이 동작은 여고생 하나 겁주기에 충분했다.놀란 여시화는 바보처럼 멍하니 있었다.그런 여시화의 모습에 자신의 경고가 먹힌 것을 보며 성연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미안해요, 나도 고의가 아니었어요.”말을 마친 성연이 공을 주워 몸을 돌려서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려 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시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너, 거기 서.”이런 촌뜨기에게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정말 창피해.’그러나 그 순간, 만약 성연이 진짜로 때렸다면 자신의 얼굴은 아마 완전히 망가졌을 것이다.성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그러나 아무 말없이 눈썹만 치켜세웠다. 그 뜻은 매우 분명했다.‘또 용건이 남았니?’성연은 여시화의 목적이 무척 뚜렸하다고 생각했다.공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로 자신을 향해 그대로 날아왔다.분명히 고의로 자신을 괴롭힌 게 분명했다.여시화가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성연 또한 예상했다.그
주위의 학우들이 입방아를 찧어대며 성연에게 손가락질을 했다.듣고 있던 성연은 그저 냉소만 나왔다.여시화는 연기도 훌륭했다. 머리도 좀 있는 편인지 여론을 이용해 일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줄 알았다.성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여시화의 공연을 지켜보았다.진우진도 소리를 듣고 왔다. 상황을 보던 그가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진우진을 본 여시화가 더욱 서럽게 울었다. 돈 들일 필요도 없겠다 눈물을 마구 흘렸다.눈시울이 붉어져 무척이나 가련해 보이는 모습으로 여시화가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저기서 배구를 하고 있었는데, 공이 날아갔어. 송성연 학우를 건드리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사과했어. 그런데 사과를 받아 주기는커녕 일부러 배구공으로 날 쳤어. 난 그저 실수였는데, 이러는 건 너무 지나치잖아.”여시화는 고의로 주객을 전도시켰다. 분명히 그녀의 태도가 잘못되어서 한 마디 한 건데, 지금 마치 성연이 지나치게 행동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입을 꽉 다물고 눈썹을 치켜세운 성연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여시화가 또 어떻게 나오는지 볼 생각이었다.여시화를 보고 있다가 성연이 보이자 진우진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결국 진우진은 성연을 위한 말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송성연 학우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야. 무슨 오해가 있는 게 아냐?”성연과 함께 보낸 시간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는 성연이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여시화는 설마 진우진이 송성연을 편들 줄은 생각도 못했다. 말도 못하고 주먹만 꽉 쥔 채 그 자리에 서 있던 여시화가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표정으로 진우진을 바라보았다.이때 여시화의 곁에 선 다른 아이들이 서로 나서서 말했다.“진우진, 너 송성연에게 속지 마라. 우리 모두 여기서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어? 시화가 말한 대로 송성연 일부러 그런 거야.”“그래, 모두 옆에서 봤어. 송성연의 행동을 모두 다 눈으로 봤단 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말을 한 후, 성연은 바로 배구공으로 여시화의 배를 때렸다.공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곧장 여시화의 복부에 꽂혔다.성연은 손목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공을 내려치긴 했지만 사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겁지 않았다.이렇게 한 까닭은 겁을 먹은 여시화가 좀 수그러들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자신도 당할 수만은 없었으니까.손바닥의 먼지를 턴 성연이 말했다.“봤지? 이게 고의야.”여시화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다.모두가 자신을 두둔하는 상황에서 송성연은 어떻게 감히 저럴 수 있지?여시화는 배에 약간의 진동만 느꼈을 뿐 별로 아프지 않았다.하지만 송성연이 이렇게 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는 없었다.성연이 얼마나 못된 행동을 했는지 모두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송성연의 이런 행실을 본 후에도 진우진이 그녀를 편들 수 있을까?여시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몸이 더 빨리 반응했다. 바로 허리를 구부리며 배를 가린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연출했다.“아, 아파, 배가 아파.”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아이 하나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성연을 비난했다.“송성연, 어쨌든 모두 한 곳에서 같이 공부하는 학우들인데 어쩜 이럴 수 있니?” “학우를 괴롭히기나 하고, 네 눈에는 도대체 학칙이 들어오기나 하니? 시화의 공은 너를 전혀 건드리지도 않았고, 또 너에게 사과까지 했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태도니?” “맞아, 너 너무하다. 어떻게 사람을 때리니? 만약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려고?”모든 아이들이 분노의 눈길로 성연을 보고 있었다. 이전에 성연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믿지 않았는데, 오늘 직접 보니 성연이 소문보다 더 제멋대로 굴며 날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집에 돈 있고 배경 있어도 저러면 안되지.] [교양이 전혀 없어. 정말 역겹다.]저들의 눈빛과 하는 말을 성연은 청구서 받듯이 그대로 다 받았다.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 꼿꼿이 서서 아이들의 말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이때 아이들 속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서한기가 담담하게 말하고는 여시화의 몸을 꼼꼼하게 검사하기 시작했다.검사가 끝난 후 서한기가 말했다.“별일 없는 것 같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이 상처 다 나아 있었을 텐데 말이야.”조금 전 쫓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본 서한기는 자기 보스가 문제를 일으킨 줄 알았다.하지만 보스는 항상 본분을 지킬 줄 알았다. 그러니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검사를 하면서 더욱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정말 속셈도 많아.’순간 깜짝 놀란 여시화가 서한기에게 물었다.“무슨 뜻이에요?”여시화는 서한기가 이처럼 빨리 알아차리지는 못할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서한기는 여시화가 여전히 연기하는 걸 지켜보았다.서한기가 코웃음 치며 자못 꽤나 딱딱하게 말했다.“방금 내가 눌렀던 부위 몇 군데가 공에 맞았던 데 맞아? 분명히 아니잖아? 공의 작용점은 이 범위 내야. 또 네 배는 벌겋게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아파?”자신의 연기가 들통나자 여시화가 얼굴을 붉혔다.서한기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이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여시화에게 향했다.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여시화는 얼굴이 더 화끈거리는 듯했다.평생토록 이렇게 창피한 적은 없었다. ‘모두 송성연 때문에 망했어. 모두 쟤 때문이야!’아까 여시화를 거들어 주던 아이가 그녀의 표정을 본 뒤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시화의 뒤에서 따지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진짜 시화가 일부러 그런 척한 거야? 아니, 왜 그런 건데? 설마?] [맞아, 아무 이유도 없이 시화는 송성연을 왜 모함한 거야? 둘 사이에 무슨 원한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평소에 그렇게 착해 보이던 시화가 이런 애라고? 송성연 뒤에 대단한 후원자가 있다더라. 교장도 그녀에게 관여하지 않는데 보건교사 한 명 매수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뭐.] [하긴, 전에 보건교사와 송성연이 연애한다는 소문도 있었잖아? 이런 상황에
여시화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새파랗게 질렸다. 서한기가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그럼 뻔한 거 아냐? 여시화가 거짓말하고 있다잖아?] [자기 직업으로 농담을 할 사람은 없을 거야.]서한기가 다시 물었다.“너, 나와 같이 병원에 가서 검사 받을 용기는 있기나 하니?”여시화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만약 정말 간다면, 그녀가 거짓말을 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겠는가?그녀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만약 가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송성연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을 뿐인데, 사태가 이 지경까지 발전하게 될 줄이야. 여시화는 일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결국 일개 여고생에 불과한 여시화는 그리 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말 세말 하더니 곧 본 모습을 드러냈다.모두 그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여시화의 이런 모습은 보기만 해도 제 발 저린 모습이 아니가. 설마 진짜 송성연을 모함한 거란 말인가?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여시화를 바라보며 그녀의 해명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이때 한 여자아이가 사람들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아이는 평소 겁이 많고 말을 좀 더듬었다.그래서 학교에서 자주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드물게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온 여학생이 성연을 위해 증언했다.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니 긴장하고 불편한 마음에 말을 더듬으면서도 또박또박 증언했다.“방금, 여시화가 못되게 굴었어. 먼저, 먼저 송성연을 공으로 쳤어. 그리고…… 사과하는 태도 때문……. 성연이가 그래서 여시화에게 그런 거야.”갑자기 밝혀진 진실에 여시화는 한 대 호되게 얻어맞은 듯했다.이제 와 다시 여시화를 보니 한 떨기 수련화를 연출한 것에 불과했는데, 그동안 모두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군중 속에서 여시화에 대한 비난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평소 내가 보기에 여시화 괜찮은 아이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조금
성연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좀 늦은 시간에 동아리 방에 가서 연습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진우진과 거리를 두었다.진우진은 몇 번이나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성연의 태도에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성연은 대본을 들고 동아리 회장을 찾았다.“회장, 이 대본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은데?”성연이 부르자, 회장이 엉덩이를 실룩이며 걸어왔다.“왜요? 대본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성연이 바로 말했다.“필요 없는 애매한 부분은 삭제해도 되잖아요? 손만 잡는 걸로 해요. 다른 스킨십은 안 할 거니까.”무진의 어두운 표정을 떠올린 성연은 모모 씨가 잔뜩 흐린 얼굴로 다가와서 자신을 붙잡지 않도록 규칙을 좀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원래 제기하려고 했던 의견이긴 했으나 여시화의 일이 추진 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여시화는 진우진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진우진과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욕심 부리다 밑천도 못 건지고 도리어 자신이 손해를 본 셈이니.비록 성연이 손해를 본 건 아니지만, 진우진과 너무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엔 아무것도 없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연의 말을 들은 회장이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것들을 삭제하면 볼 만한 게 뭐 있다고?”요즘 고등학생들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들먹이며 회장이 끝까지 설득하려 했다.요즘 애들은 이런 몽롱하고 애매한 느낌을 좋아한다.자신의 사심이기도 하지만 이 시나리오의 포텐 지점이었다.그녀는 이미 수없이 상상했었다. 진우진과 송성연을 대상으로 해서. 얼마나 아름다운 화면인가.성연이 없애라고 해서 없애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게 된다.극 전체가 별로야. 전부 이 장면에 기대고 있는데 말이지.성연은 회장이 이 극본을 위해 많은 힘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준비를 하고 왔다.회장에게 말했다.“극본이 완성되면 관중들의 감정을 더 끌어올릴 수 있어. 봐, 여기를 좀 더 늘리면
성연은 그렇게 말을 한 후에도 심리적 부담감은 전혀 가지지 않았다.진우진 스스로 고민하라지. 자신이 그를 대신해서 의혹을 풀어줄 책임은 없으니까.모처럼 시간이 나자 성연은 자연스럽게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했다.책상다리를 하고 소파에 앉아 완전히 몰입한 상태로 게임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한쪽에서 성연이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던 무진은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무진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물었다.“대본은 안 외워도 돼?”성연은 게임을 하면서 동시에 정신을 분산시키며 대답했다.“안 외워도 돼요. 어차피 대본 수정하고 있으니까요.”“왜?” 무진이 되물었다.성연은 연극 동아리의 극 줄거리 문제를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무진은 물어본 후에야 성연이 극본을 쓴 학우에게 극본 수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무진의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가 작은 호선을 그렸다.일부러 성연에게 물었다.“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했는데?”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하나 튀어나오며 왠지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홱, 하고 고개를 돌린 성연이 다소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당연히 귀찮아서죠. 누가 또 화 낼까 봐요.”이 밴댕이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성연은 극 줄거리를 수정하는 방법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왜 그런지는 자신도 모르겠다. 무진의 기분이 저조하면 왠지 자신의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는다.‘이해할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돼.’무진이 눈썹을 치켜세운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대범하게 자신의 태도를 인정하고 자신의 불쾌함을 부결하지 않았는데, 그는 확실히 불쾌했다!성연이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그가 어떻게 두 눈 빤히 뜨고 볼 수 있겠는가?성연은 나이가 어리고 놀고 싶은 마음도 강할 것이다. 아직 어리니까, 항상 자극적인 일을 찾아 헤맬 것이다.함께 지내는 동안 ‘소년소녀가 남몰래 정이 들다’, 이 말이 그냥 듣기에는 참 아름답게 들린다.하지만 무진은 이런 일이 발생하기
말을 마친 사무는 옆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뚱뚱한 남자를 재빠르게 발견했다.“아저씨, 바로 저 사람이 사진이를 이렇게 다치게 했어요!”사무는 우렁찬 목소리로 방금 엘리베이터를 나온 남자를 가리켰다.팍!쿵!서한기가 재빨리 깔끔하게 손을 쓰자, 남자의 커다란 몸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심지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남자는 온몸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 아이들은 네가 감히 건드릴 수도 감당할 수도 없어! 꺼져!”피에 굶주린 듯 핏발선 눈으로 쏘아보면서, 서한기가 나지막하게 외쳤다.쓰러져 있던 남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의 통증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나려던 남자는 등줄기의 시큰한 통증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아!”다시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결국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다른 쪽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무진은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동에 시선이 향했다.사람들 속에서 처참한 모습의 마케팅팀 팀장과, 그 앞에 서서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뒤를 바라보았다.“아이들이 아직 안 갔어?”그리고 무진이 엘리베이터 문을 나설 때, 손건호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서한기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들 두 사람은 예전 진성 조직의 공동 대장이었다. 여러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인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지난 일 때문에 서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이 가슴이 찢어질 듯한 느낌도 그들 두 사람만 알 수 있을 뿐...왜인지는 모르지만 서한기의 망설임이 느껴지자,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아직도 안 가보고 뭐 해?”‘저 두 아이는 뭔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머릿속에서 어떤
아직도 물린 곳에 통증을 느끼고 있던 마케팅팀 팀장은, 갑자기 사무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심적으로 위축되었다.‘어린 애가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방금 전에 행동은 치밀하게 생각하고 한 건가?’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던 마케팅팀 팀장은 곧 한숨을 돌렸다.‘내가 뭘 무서워하는 거야? 기껏해야 아이일 뿐인데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했다.“이 조그만 녀석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렇게 버릇없게 말이지!”사무는 코웃음을 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이 버릇없는 새끼가 감히 욕을 해! 보아하니 너는 혼나는 걸로도 부족하겠어!”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줄곧 말을 하지 않던 무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됐어, 너희 두 아이는 빨리 나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때문에 너희 엄마가 회사의 징계를 받게 돼.”사무는 무진의 얘기하는 모습을 힐끗 보았다. 전혀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볼 뿐.‘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보면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이런 아버지라니! 얼마나 마음이 독한 사람인지 충분히 알겠어.’‘오늘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결코 잘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사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마케팅팀 팀장을 흘겨보기만 했다. ‘얼마나 더 웃을 수 있는지 보겠어. 조금 있다가 한기 아저씨가 시원하게 혼내 줄 테니까!’조심스럽게 여동생을 일으켜 세운 사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사진아, 가자!”사진도 지금은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문 채 오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입구로 걸어가던 사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무진도 마침 사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무진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그러나 무진이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린 사진은 오빠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마침내 소동이 마무리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두 아이는 쌍동이겠지. 한 네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아.’‘아이들 나이와 지금 상황을 보면...’‘혹시 이 두 아이가 정말 보스와 사모님 사이의 아이인 거야?’‘사모님이 낙태한 뒤 출국한 게 아니라, 모두를 속이고 아이들을 낳은 건가?’너무나 엄청난 상상이라서, 손건호는 곧 뭔가 큰일이 닥칠 거라는 느낌마저 들었다.지금은 원래 마케팅팀 팀장이 보고하면서 무진의 눈에 들 기회를 찾던 중이었다.그러나 오늘 보고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무려 30분 동안이나 저기압인 대표의 기세에 눌려 있던 상태였다.‘지금 대표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면 칭찬을 받겠지.’눈빛을 빛내던 남자는 손을 비비면서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너희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해!”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면서, 마케팅팀 팀장이 사진의 여린 팔을 꽉 쥐었다.“어린 애들이 함부로 아빠라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도대체 부모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이게 얼마나 심한 장난인지 알기나 해?”마케팅팀 팀장은 거칠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무방비 상태였던 사진은 그저 팔이 꽉 잡힌 채 끌려갈 뿐이다.사진은 본능정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사진의 발버둥은 결국 전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오빠, 오빠, 사진이 너무 아파!”“아아, 아파...”팔의 통증에 몸부림치던 사진은 기어이 기회를 틈타서 남자의 팔을 물었다.갑작스럽게 팔에 통증을 느끼자, 남자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뒹굴었다“아! 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었어!”잔뜩 살이 찐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으름장을 놓았다.갑자기 바닥에 떨어졌지만, 사무는 별다른 이상 없이 일어섰다.하지만 팔을 물린 남자는 사진을 떨쳐내려고 거칠게 밀쳤다.결국 힘에 밀린 사진은 의자에 이마와 팔을 부딪혔다. 부딪친 곳은 바로 빨갛
사진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제 오빠 컴퓨터에서 아빠의 사진을 봤을 때도 천하제일 미남인 아빠 모습에 감탄했지만!오똑한 콧날에 굳게 닫힌 두 입술, 단정한 헤어 스타일에 온몸에 남성미가 가득한 건장한 모습!지금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경외심이 들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 모든 아우라는 바로 책상 앞에 앉은 무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야!’‘우리한테 이런 멋진 아빠가 있다니!’ 지금 사진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아빠!”두 아이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갔고, 사진이 크게 외쳤다.가뜩이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에 ‘아빠’라는 소리가 들리자, 무진은 미간을 점점 찌푸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두 아이를 훑어보았다.“어디서 온 애들이야?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게 됐지?”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뒤로 젖혔다.“게다가 아무 데서나 아빠라니?”기쁨에 겨워 아빠에게 다가가려던 사진은 무진의 바로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났다.애절하게 흐느끼면서 사진이 말했다.“아빠, 바로 우리 아빠잖아! 우리는 오늘 특별히 아빠를 찾으러 온 거야.”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무진은 마치 가슴속이 꽉 막힌 듯했다. 당황한 무진은 얼른 내선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두 아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하는 무진의 목소리에는 왠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너희들 아빠가 아니야. 거짓말하면 안 돼. 얼른 너희 엄마한테 가야지.”잠시 후, 수화기에서 시원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네, 보스.]무진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들어와서 두 아이를 데려가.”[아이들요?] 손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응.”무진은 단지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아빠는 우리가 그렇게 싫어요?”갑자기 사진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이지만
사무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그래야 해?”다시 한 번 우유 막대사탕을 입에 넣은 채, 사진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그럼, 오빠 그건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데?”“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설마 네 오빠가 뛰어나지 않다는 거야?”사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사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 빌딩을 바라보았다.“우리 그래도 일을 해야지. 사람들이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올라가게 할까?”웃음을 거둔 사무는 입술을 꼭 닫은 채 앞을 보면서 진지 모드로 돌입했다.“당연히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할 거야.”“그럼 어떡해?”사진은 바로 풀이 죽었다.‘이미 집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정말 피곤해.’다음 순간.사진은 익숙한 오빠 손에 이끌려서 따라갔다.사무가 앞에 서고 사진은 따라서 함께 빌딩의 옆쪽의 작은 문으로 걸어갔다.입구에 선 두 아이는 작은 키 때문에 아주 순조롭게 입구의 경비원 순찰을 피할 수 있었다. 한바탕 민첩하게 왔다 갔다 한 끝에 이미 계단 앞에 도착했다.고개를 든 두 아이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입을 삐죽 내민 사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텔레비전에 나오는 회장 사무실은 모두 맨 꼭대기층에 있어. 오빠, 아빠도 꼭대기층에 있는 건 아니겠지.”사무도 이 많은 계단을 보자 약간 풀이 죽었다.그래도 앳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로 사무가 나지막히 말했다.“그 점은 드라마도 틀리지 않았어.”“아!” 오빠가 말을 하자 사진의 작은 다리는 벌써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만약에 이렇게 높은 층을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늘 내 다리는 아마 망가지겠지?사진이 자신의 짧은 다리를 위해 ‘묵념’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사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자, 위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2층.지금은 출근 시간이라서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느라, 오히려 두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진 오빠의 이전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면, 내가 했던 짓도 모두 드러나지 않을까?’예민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느꼈다.‘약효가 줄어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거야.’ ‘안 돼.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런 상황이 절대 일어나게 해서는 안 돼.’찢어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무진을 보자, 예민주의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그 약을 다시 한번 더 먹여도 될까?’‘하지만... 하지만 또 복용하면, 나도 잊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겨.’‘이거 어떻게 해야 해?’일시에 모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머릿속에 맴돌면서, 가뜩이나 초조한 예민주는 머리가 터질 듯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돌린 무진의 눈은 전혀 초점도 맞지 않은 채 암울해 보였다.걸음을 떼고도 마음의 피로로 인해서 이미 얼마나 붕 떠있는지도 몰랐다.무진이 예민주의 곁으로 다가가자, 예민주가 무의식중에 무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촉을 원하지 않는 듯이 아주 교묘하게 예민주의 손길을 피했다.차로 향하면서 예민주에게 단 한 마디만 남겼을 뿐이다.“좀 있다가 너 혼자 돌아가. 오늘 일은 잠시 미루자.”그리고 곧바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남겨진 예민주만 어수선한 심정이었다.이어진 며칠 동안 무진은 여전히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빴다. 낮에는 업무를 볼 뿐만 아니라 접대도 해야 했다.그날, 산기슭의 별장 2층.위층에서 성연의 차가 점차 사라지는 걸 본 두 아이는 신속하게 작은 숄더백을 꺼냈다.사진은 동그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사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오빠, 정말로 이렇게 할 거야?”고개를 끄덕이는 사무의 눈에는 확고한 결의가 가득했다.“응, 엄마가 그날 돌아온 뒤 요 며칠 상태가 어떤지 못 봤어? 엄마는 분명히 아버지를 만났을 거야.” “내가 이미 아버지 위치를 알아냈어. 우리는 곧 아버지를 찾아갈 거야!”지금 집에 두 아이들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성연은 낯선
“그렇게 트집을 잡겠다고?”“나는 단지 이 옷을 매우 좋아할 뿐이에요. 나와 무진 오빠의 결혼식에서 입고 싶은데 당신들도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랐는데요?”억울한 듯한 예민주의 얼굴.임서희는 마음이 우울했다. ‘무슨 이런 여우 같은 년이 다 있어? 그야말로 겉만 번드르르한 년이네!’“2억2천만 원! 빨리 카드 결제해요!”말을 마친 성연이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예민주는 마치 성연이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성연의 앞을 막았다.짝!성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얼굴의 통증을 느끼자 예민주는 무의식적으로 직접 만든 독약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연은 이미 진작부터 예민주가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성연의 오른손에 갑자기 가는 은침 하나가 나타나더니, 예민주의 팔에 바로 박히면서 순식간에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좋은 개는 길을 막지 않는 법이야!”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지금 성연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면서 온몸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서희야, 가자!”말이 끝나자 성연은 임서희를 데리고 웨딩 숍을 나섰다.오른쪽 얼굴의 화끈한 통증과 주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느끼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화가 난 예민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무진 오빠!”그러나 다음 순간, 곧바로 문밖으로 나간 무진은 차의 시동을 걸고 바로 성연을 따라갔다. 울부짖는 예민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방금 회사를 나섰던 성연은, 임서희를 먼저 회사로 돌려보낸 뒤에 자신은 혼자 차를 몰고 떠났다.차 안.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는 무진을 발견하자, 성연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뭘 하려는 거야?’마음이 초조하자, 액셀러레이터를 바로 끝까지 밟았다. 성연의 차는 넓은 도로 위를 나는 듯이 달려갔다.고가도로 위.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진의 차가 성연의 차에 부딪치면서 곧바로 멈추게 만들었다.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관성에 의해서 부딪친 것이다.성연은 입가가 찢어지면서 끈
이곳의 웨딩드레스는 모두 디자이너의 작품들로, 이 웨딩드레스도 당연히 하나밖에 없다. 이걸 예민주가 가져가면, 자신은 당연히 다른 웨딩드레스를 찾을 수밖에 없다.‘게다가 이건 분명히 우리가 먼저 보고 결정했어.’임서희가 무의식적으로 막았다.“아가씨, 이 옷은 우리가 방금 이미 고른 거예요. 면사포도 모두 골랐는데, 아가씨의 이런 행동은 우아하지 않은데요?”임서희는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하지만... 예민주는 임서희의 태도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호호, 당신이 어떻게 먼저 골랐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 웨딩드레스는 이미 오랫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예요.”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이건 원래 일찍부터 내 소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예민주는 임서희의 반응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피식 비웃으면서 다시 직원에게 그 웨딩드레스를 가져오라고 했다.직원이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고 고민하자, 예민주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어? 빨리 안 움직여?”직원은 양쪽의 손님들 사이에 낀 채 난처한 표정이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야?’‘이 두 손님들은 척 봐도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지금 웨딩드레스 하나를 놓고 서로 싸우려는 기세인데, 우리는 이쪽을 도와도 안 되고, 저쪽을 위해도 안 돼.’“저는...”직원은 순간 말을 더듬으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래 좋은 기분이던 성연은 예민주에게 방해를 받자, 아예 신용카드를 꺼내서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이 웨딩드레스는 우리가 사겠어요. 카드로 결제할게요.”성연의 목소리에는 말참견을 용납하지 않는 힘이 실려 있었다.성연의 이 말은 또 마침 직원도 정확한 답안을 제시할 수 있게 도왔다. ‘옷을 입어보는 목적은 옷이 어울리는지 보기 위한 것이고, 어울리면 사는 거야.’‘하지만 이들은 지금 입어보는 단계를 건너뛰고 구매하겠다고 하니 가장 명확한 답이겠지.’“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포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말하면서 직원이 은행카드를 받으려고 했다.“잠깐만
지금 직원의 설명을 듣자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어때? 직원에게 한번 입어보게 가져오라고 해볼까?”임서희가 정말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눈치챈 성연이 다가와서 건의했다.가게 앞.바로 같은 시간에 한 쌍의 남녀가 밖에서 들어왔다. 여자는 앙증맞은 표정으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매달려 있었다.“무진 오빠, 이 브랜드의 웨딩 숍은 운성에 이곳 한 곳밖에 없어요.” “이 가게 웨딩드레스가 정말 예쁘다고 해요. 심플한 스타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좀 화려한 스타일이 좋을까요?”예민주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했다. 마치 꼬리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웨딩 숍 안으로 들어섰다.예민주가 팔을 꽉 잡고 있어서 무진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천천히 팔을 풀었지만 눈빛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좀 심플한 스타일로 해. 그렇게 화려한 걸 입을 필요는 없어.”예민주는 사실 결코 온화한 사람이 아니지만, 무진의 곁에 있으면서 오히려 많이 순해졌다.하지만 평생에 한 번 밖에 없는 결혼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무진의 말이 떨어지자, 예민주는 무의식 중에 그 말에 반박하려고 했다.“하지만...”‘지금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저건... 송성연이잖아?’머릿속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다시 자세히 보니 정말 성연이 맞았다.말을 하다가 만 예민주가 마치 뭔가에 시선이 고정된 듯이 바라보자, 무진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예민주의 시선을 따라갔다.‘왜 또 저 여자야?’성연을 보는 순간, 무진은 다시 한번 참기 힘든 두통을 느꼈다.‘왜, 왜 매번 저 여자를 볼 때마다 냉정을 유지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 또 익숙한 느낌도 있지만, 분명히 저 여자를 만난 적도 없잖아.’또각또각!무진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예민주는 성연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갔다. 이미 조금 전처럼 놀라지 않았고, 온통 거만한 표정을 지으면서.“공교롭게도 이런 데서 만나게 되다니.”임서희와 함께 면사포를 고르고 있던 성연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눈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