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을 받은 순간부터 오후 내내 연습을 하고 집에 돌아온 성연은 이미 후회막급이었다.탁자 위에 놓인 극본을 보면서 성연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한 마디로 스스로 벌을 찾아서 받고 있는 듯했다.대본의 막장 대사는 보기만 해도 이가 빠질 정도로 시큰거렸다. 이런 대사를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기까지 해야 하다니.이 동아리 회장은 진짜 괴짜였다. 자신은 난감한 스토리 때문에 하마터면 바닷가 저택에 틀어박히고 싶은 심정인데, 회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그녀는 이 사람들의 능력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대본으로 얼굴을 덮은 성연은 아무 미련없이 소파에 드러누웠다.무진 돌아왔을 때도 그녀의 한숨 소리는 계속 중이었다.집사에게 코트를 건넨 무진이 다가와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대본을 내리고 얼굴을 드러낸 성연이 원망의 눈길로 무진을 바라보았다. 무진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런 것 따위를 연기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즘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별일 아니에요.” 잠시 일어났다 다시 누운 성연은 옆으로 누운 자세로 대본을 읽었다.무진이 다가가서 성연을 일으켜 앉혔다.“누워서 보지 마. 눈에 안 좋으니까 일어나서 봐.”성연이 몸을 일으키자 손에 들고 있던 노트의 표지가 무진의 눈에 들어왔다. ‘극본’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는.무진은 속으로 호기심이 일었다.“너 극본에도 관심이 있었어?”“아뇨. 이건 우리 동아리 공연이에요. 내가 극 중의 한 역을 맡게 되어서 대사를 미리 익혀 놓아야 해요.” 성연이 좀 시무룩한 음성으로 말했다.“개교기념일에 공연하는 거야? 그냥 가서 참관만 한다고 하지 않았어?” 무진이 물었다.“동아리 회장이 내가 관심 있어 한다고 생각해서 역을 맡겼어요.” 성연은 극본 스토리에 질식할 것만 같아 무진에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더욱이 강무진이 이 사태를 초래한 주범이지 않은가 말이다.“정말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거야?” 그동안 바쁘게 지내던 성연이
무진의 말을 들은 성연의 몸이 경직되었다. 표정도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강무진이 직접 보러 온다고? 안된다고 해야겠지?’대본에는 키스하는 장면도 있었다. 실제로 키스하지는 않는다 해도 무진에게 보이기는 좀 난감했다.어쨌든 지금 자신의 신분은 무진의 약혼녀이니까.남자들은 좀 이상할 정도로 소유욕을 가지고 있었다.성연이 무진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다른 쪽에 앉아 완곡한 말투로 거절했다.“요즘 보니까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 같던데 무척 바쁘지 않아요? 나 혼자 할 수 있으니 보러 올 것까진 없어요. 어차피 어린애들 소꿉장난 하는 정도인데요, 뭘. 무진 씨가 관심 가질만한 수준이 아니에요.”고양이가 발톱을 세우고 있는 듯한 성연의 거절을 알아차린 무진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왜, 내가 보러 가는 게 싫어?”성연이 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말했다.“그게 아니라, 무진 씨가 너무 바쁘니까 그러는 거죠. 얼마나 힘든지 잘 아니까 말이죠.”이렇게 말해야 별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강무진이라면 더 이상 이 문제로 실랑이하지 않을 거라고.그런데 별안간 무진이 가까이 다가왔다.순간 성연은 소파에 갇힌 채 물러날 곳이 없었다.고개를 살짝 드니 위에서 내려오는 무진의 숨결이 느껴졌다.성연은 숨이 막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성연이 고개를 드는 순간 바로 부딪힐 만큼.성연의 몸이 완전히 굳어지며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이 되었다.무진이 어떤 동작을 하려한다는 생각이 들자, 성연의 머릿속에는 온갖 야한 장면들이 떠올랐다.하지만 그 다음을 생각하기도 전에 무진이 성연의 손에 들린 대본을 빼냈다.당황한 성연이 대본을 다시 빼앗으려 손을 내밀었다.하지만 어쩌겠나. 무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힌 상태인 성연은 무진이 대본을 가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는.대본을 손에 쥔 무진은 천천히 대본을 펼치고 한 장씩 읽어내려 갔다.그러다 ‘키스’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성연이 무엇을 숨기고 싶어하는지 결국 무진이 알게 되었다.이도 저
다음날,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성연은 오후가 되자 동아리에 끌려가서 연습을 했다.학교에서는 현재의 개교기념일을 매우 중시했다. 오후 마지막 수업 시간은 공연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연습 시간으로 해 줄 정도로 아주 협조적이었다.성연이 동아리 룸에 도착새서 막 연극 연습을 하려던 순간, 맞은편의 남자 주인공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사실을 발견했다.‘북성남고의 킹’이라 할 수 있는 진우진.흰 셔츠에 폭이 넓은 하의 차림의 진우진은 아주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 밝고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 아주 깔끔한 느낌이었다.딱 봐도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다.하지만 잘생긴 남자들을 워낙 많이 만나본 성연은 기껏해야 한 차례 흘깃거린 후 바로 고개 숙여 자신의 극본을 읽을 뿐이다.회장이 들어오자 그제야 질문했다.“남자 주인공은 왜 바꿨어요?” 성연이 이렇게 물을 줄 알았던 회장이 웃으며 대답했다.“전의 남자주인공은 성연 학우에게 어울리지 않았어요. 관객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서, 또 여자주인공의 외모와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교체한 거예요.”성연의 입꼬리가 삐죽거렸다. ‘전의 남자주인공도 회장 지가 뽑은 거면서?’‘자신의 안목을 스스로 헐뜯는 게 그렇게도 좋아?’성연의 표정을 본 회장은 성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변명했다.“성연 학우가 우리 연극에서 역을 맡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모든 게 여주인공인 성연 학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예요. 내 고심을 이해해 줘요.”그러더니 정말 그렇다는 듯 성연의 어깨를 톡톡 쳤다.성연도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었을 뿐이지, 남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어차피 똑 같이 상대해야 할 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누구든 똑같이 연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리허설이 시작된 후, 성연을 보는 진우진의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하지만 동아리 룸의 조명이 비교적 어두운 관계로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시작은 순조로웠다.그러나 너무 긴장한 탓인지 극 후반부 진우진의 왕자 연기가 아
무진은 퇴근하며 성연을 데리러 온 참이었다.그 참에 성연의 연습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고.북성남고의 대주주인 무진은 학교 안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직접 마중을 나온 교장이 무진을 데리고 학교 안의 이곳 저곳을 안내하기로 했다.그들 뒤로 교감, 주임 등 여러 보직의 선생들이 뒤따랐다.일렬로 늘어선 사람들은 마치 최고위급 인사가 시찰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무진은 단순히 자기 약혼녀가 보고 싶어 왔을 뿐인데.다른 생각은 없었다.이렇게 거창한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는 않았다.교장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면 곧 학교 내 모든 사람들이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그래서 손건호가 교장을 간신히 설득한 다음에야 무진은 혼자 성연의 동아리 방을 찾을 수 있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무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분노로 얼굴 빛이 흐려졌다.키가 큰 그가 입구에 서 있자 마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만 같았다.리허설을 하고 있던 학생들이 반사적으로 입구를 돌아봤다.모두의 시선을 따라 성연도 입구 쪽을 바라보니, 입구에 서서 차가운 기운을 온몸에서 내뿜고 있는 강무진이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동작을 돌아본 성연은 가슴이 철렁하며 속으로 재수 나쁨을 욕했다.어떻게 상황을 뒤집을지 속으로 궁리하면서.무진 때문에 깜짝 놀란 성연의 손이 미끄러지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몸을 지탱하려다 성연과 진우진의 거리가 더 좁혀졌다.무진에게 변명할 겨를도 없이 온통 붉어진 진우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아이는 아직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마치 제단에 바쳐진 한 마리 어린 양 같은 모습이다.또 청순한 그 모습은 성연의 동작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마치 불량소녀가 숫기 없는 미소년을 희롱하는 듯한 장면.성연은 즉시 진우진과의 거리를 벌렸다.주위의 분위기가 싸해지며 다소 어색해졌다.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성연은 알 수가 없었다.드물게도 손
구석에 서 있던 한 여자아이가 마치 천기라도 읽은 듯 옆에 있던 학우에게 음성을 낮추어 속삭였다.“정말 남매인 거 맞아? 어째 저 남자 태도가 마치 바람 피우던 아내를 딱 잡은 것처럼 느껴지지?”옆에 있던 동아리 멤버가 그 말을 듣고 웃었다.“무슨 생각 하는 거야. 오빠는 가장이야. 여동생과 다른 남자아이가 저러는 걸 보면 당연히 화가 나겠지. 송성연은 아직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란 말이야.”여자아이는 아무리 봐도 좀 이상했다.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강무진을 본 회장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성연 학우의 오빠셨군요. 집안 유전자가 정말 뛰어나네요.”성연에게 올케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감히 물을 수는 없었다.이런 남자는 카리스마 넘치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잘생겼다.“맞아, 전에는 왜 이렇게 멋진 오빠가 있다는 말을 못 들었지?”“오빠 분이 너무 잘 생기셨어요. 송승연 학우랑은 별로 닮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아름다운 용모를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어요.”“…….”옆에서 재잘재잘거리는 소리들은 모두 강무진을 칭찬하는 말들이다.고등학생 주위에는 온통 풋풋한 애송이들이 천지였다. 그런데 언뜻 봐도 무진의 온몸에서 우아함과 귀티가 흐르는 것이 범상치 않자, 여자아이들의 마음에 봄바람이 살랑살랑했다.하지만 이런 칭찬들도 들리지 않는 듯 무진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그래도 모두 성연의 학우들이므로 많이 예를 차린 셈이었다.무진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미안해, 시간이 늦었어. 오늘 성연이의 연습은 여기까지입니다.”말이 마친 무진이 성연의 손목을 잡고서 데리고 나갔다.동아리방에서 나온 후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서 성연의 손을 놓은 무진이 비로소 물었다.“말해봐, 방금 전 무슨 상황이었어?”성연은 강무진이 이 문제에 이렇게나 집착할 줄은 몰랐다.방금 발생한 상황을 강무진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단지 리허설을 하고 있었을 뿐이예요. 걔가 연기할 줄을 몰라서, 내가 시연을 해
자신이 해명을 끝까지 듣고도 무진의 굳은 얼굴이 풀리지 않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자라는 동안 언제나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해 온 성연은 누구에게도 이처럼 해명을 해 본 적이 없었다.불쾌한 마음이 들자 말투도 다소 모가 났다.“믿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무진도 원래는 성연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밖에 나오니 제 정신이 들었다. 자신의 행동은 사실 유치했다.무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마음은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 더 컸다.성연의 말을 들은 무진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이 계집애, 그래도 자기 체면은 다 차리네.’아마 감히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성연 하나뿐일 것이다.그런데도 이상하리 만치 조금도 밉지 않은 게 오히려 꿀처럼 달게 느껴졌다.차츰 밝아진 기분을 가라앉힌 무진이 손을 들어 성연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아직 잘못했다는 반성은 조금도 안 들어?”잘못을 저지르고도 떳떳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그가 성연을 너무 내버려 둔 탓이다. 그래도 그는 성연의 이런 생기 넘치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을 피한 성연이 말했다.“무진 씨가 너무 소심한 거예요. 흥!”‘속이 바늘귀보다 더 좁은 것 같아.’어쨌든 그만한 신분과 지위의 사람이 이런 작은 일까지 따지고 들다니, 위신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몰라!’원망스러운 마음에 성연은 마음속으로 혼자 중얼중얼거렸다.무진이 성연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피를 토하고 싶었으리라.성연은 건들거리는 자세로 마음속으로 자신을 짜 넣고 있었다.무진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그래 나는 소심해. 어쨌든 지금 너는 내 사람이야.”귓가에 닿는 내뱉는 뜨거운 숨이 성연의 귓가를 달구었다.성연이 저도 모르게 귀를 비비자 귀바퀴에서 은근히 열이 올랐다.한 걸음 뒤로 물러난 성연이 무진과의 거리를 벌렸다.그녀는 딱딱한 음성으로 맞받았다.“누가 당신 사람이라는 거예요?”성연은 몰랐다. 비록 사위가 좀 어두워졌지만, 무진의
성연은 몸이 한창 자라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식당의 음식이 유난히 입에 맞는 듯 많이 먹었다. 입맛이 아주 좋았다. 무진 앞에서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고 싶은 대로 먹었다.성연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던 무진도 덩달아 입맛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성연이 집는 음식마다 무진도 한 두 모금 맛을 보았다.뭔가 색다른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두 사람은 따뜻한 분위기 가운데 저녁 식사를 했다. 서로 악수하고 화해한 셈이었다. 성연도 무진의 행동을 더 이상 탓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도 잘못한 점이 있었으니까.저녁식사 후 집으로 돌아온 성연은 잠시 쉰 후 조종기를 잡고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무진은 옆에 앉아서 서류를 보았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꽤나 다정했다.문득 문 앞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며 집사가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평소 무진이 있는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성연은 좀 궁금했다.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뜻밖에도 연경훈이 서 있는 게 아닌가.성연의 동공이 살짝 수축되며 마음도 덩달아 조여 들었다. 억지로 침착한 척하며 계속 게임을 진행했다.아예 연경훈을 못 본 척했다.“도련님, 연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경훈을 거실로 안내한 집사가 물러갔다.고개를 들어 경훈을 보는 무진의 눈에는 그다지 놀란 빛이 없었다.경훈이 오기 전에 이미 그에게 소식을 보냈던 터였다.손에 든 서류를 놓은 무진이 옆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경훈은 무진의 옆에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는 성연을 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형수님, 안녕하세요.”경훈이 부르는 호칭에 성연의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온몸이 불편했다.이 호칭이 연경훈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너무 어색해서 엄청 불편했다.‘아, 이상해. 이상해.’그리고 전에 연경훈이 구애한 일도 있으니…….생각할수록 성연은 연경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무척 바쁜 척하며 대충 인사했다.“안녕하세요.”그리고 바로 고개를 돌려 게임 화면만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성연
곁눈으로 성연의 동작을 보았지만 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은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연경훈은 그야말로 천둥이 내려치자마자 알아서 할 생각은 없이 내쳐 강무진에게 달려와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고 있었다.‘내가 숨어도 고생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이런 생각을 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이 어리바리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말았어야 했는데.’그에게 어떤 착각을 주었나 보다.돌로 자신의 발을 찧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성연은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그런데 무진이 입을 열었다.“여자들은 모두 부끄러움이 많으니 서두르지 마.”성연은 조금 전 무진의 말이 그다지 달갑지 않게 들렸다.‘강무진은 어째서 뭐든 다 안다는 투야?’원래 경훈이 나 죽었소, 하고 고백하던 상황에 강무진이 거기에 끼어든 셈이었다.‘이 사람 너무 한가한 거 아니야? 할 일도 없이.’‘회사 업무가 그다지 안 많은 거야, 뭐야? 다른 고백까지 자기가 참견하고?’성연도 진심 승복했다! 강무진은 평소에도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던가.화가 난 성연은 현재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게임 조종기를 내던진 성연이 위층으로 올라가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졸려요. 씻고 잘 거예요.”성연은 남은 두 사람이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쿵쿵 소리를 내며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무진의 눈에 새카만 빛이 돌았다.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건 일부러 빈틈을 드러내는 걸까?’무진의 안색을 보던 경훈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몇 분이 지나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형님, 형수님 왜 그러시는 거예요?”성연이 방금 떠나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에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설마 내가 화나게 한 건 아니겠지? 아무것도 안 했잖아.’“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성질을 부리는 것뿐이야.” 생각이 돌아온 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경훈은 무진의 침착함에 탄복했다. 궁금증이 인 경훈이 물었다.“형님, 저 나이의 여자애들은 기분 맞추기 너무 힘들지 않아요? 정말
북성, 이씨 가문의 저택.눈앞의 연계진을 살펴보는 이상효의 마음이 한바탕 복잡해졌다.유난히 얌전하게 홍차를 우려낸 소지연이 이상효 앞에 공손하게 차를 들고 왔고, 곧바로 손님에게도 차를 내주었다.마치 노예처럼 마음속으로 무수한 괴로움을 겪었지만, 소지연은 발버둥칠 수도 없었다.입덧을 꾹 참은 채, 언제든지 차를 추가할 수 있도록 찻주전자를 들고 옆에서 조심스럽게 기다려야 했다.‘나를 이렇게 쓰라린 처지로 만든 건 바로 송성연이야.’ 소지연은 수없이 분노하고 저주하면서 성연이 일찍 죽기만을 기원했다.“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기회만 있다면 독사처럼 목덜미를 물어뜯겠어.”소지연의 마음은 이미 완전히 비뚤어졌다. 만약 뱃속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성연과 함께 죽을 생각도 수없이 많이 했다.지금 이상효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느꼈다. 당대에는 견줄 만한 바가 없던 결혼식에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강씨 가문의 넓은 인맥과 막강한 권세였다.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이상효가 강씨 가문을 번거롭게 만드는 걸 반대하고 나섰다.그러나 이상효는 강력한 적일수록 베어 먹는 이익은 더욱 감동적이라면서 반박하는 의견을 제기하였다.이씨 가문의 세력은 너무 작아서 이렇게 큰 운성시에서는 전혀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야심은 반드시 강력한 세력에 의지해야만 실현될 수 있었다.의심의 여지없이 지금의 연계진은 아주 좋은 기댈 만한 세력이다.연씨 가문이 이번에 남방에서 손을 썼는데,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연씨 가문이 이미 재정비하고 일어섰다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주 명확한 태도를 취했다. 물론 연씨 가문이 생각처럼 그렇게 약하지 않아서, 함께 협력하면 강씨 가문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이상효에게도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연계진이 그렇게 준수하고 깨끗하게 생기지 않았다면, 이상효는 좀 더 신임했을 것이다.“연계진 씨, 예전에 강씨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서 죽기 살기로 싸웠을 때, 당신은 왜 그 기회를 틈타 뭔가
샤넬 가문의 보살핌은 꽤 괜찮았다.샤넬의 오빠는 심지어 저명한 의사들을 초청해서 무진과 성연에게 전신 검사까지 받게 했다.큰 문제가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가주의 자격으로 며칠 더 묵으라고 열정적으로 초청했다.그러나 무진은 실혼전의 위협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성연을 데리고 서둘러 국내로 돌아가려고 했다. 자신의 본거지인 북성에서만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쉽게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목현수는 샤넬과 함께 공항으로 가서 무진과 성연을 배웅했다.성연의 눈은 예리했다. 샤넬의 아랫배가 이미 좀 커진 것을 발견하자, 자기도 모르게 한쪽으로 데리고 간 뒤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정말 빠르네요. 얼마나 됐어요?”“얼마 안 됐어요. 한 달 남짓 밖에 안 됐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성연 씨도 얼른 아기를 가지세요.”샤넬은 볼그스름하게 혈색이 좋아 보여서, 지금은 약간 탈바꿈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여자는 일단 생명을 잉태하면 순식간에 성숙해지는 모양이야.’“나도 아이를 좋아해서 빨리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결국 할머니 쪽에서도 재촉하시잖아요.” 성연은 가볍게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샤넬을 포옹했다.“자신을 잘 보살펴야 해요. 내가 의사라는 걸 잊지 말아요. 만약 모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내게 물어보면 돼요.”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무진도 목현수와 악수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절친한 친구처럼 담소를 나누었다.앞으로 강씨 가문은 유럽에서 견고한 관계의 동맹 가문을 갖게 되었다. 무진은 귀국 후 유럽 시장을 다시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샤넬 가문의 협조가 있으니 더 빛나는 성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전용기에서 성연이 잠시 쉬고 있을 때, 무진은 국내의 경제 뉴스를 보고 있었다.갑자기 뉴스 하나가 무진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연운그룹 남부 지역 시장 진출 시작, 투자 총액 8조 원을 초과.]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이름에 무진은 경계심이 들었다.‘북방의 연씨 가문은 이미 몰락하지 않았어? 20
“그때 스승님께서 갑자기 저를 쫓아내려고 하셨기에, 나는 감정이 바로 무너졌어요. 울면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 그러지 말라고 빌었지요.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그러나 스승님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단지 내가 물건을 정리하고 출국할 수 있게 조치하셨어요. 또한 앞으로는 평생 스승님의 이름을 거론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요.”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목현수의 표정은 무척 복잡했다. 아마도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억울하게 생각하는 듯했다.목현수의 설명을 끊지 않기 위해서 무진과 성연은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나중에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가게 되었어요. 그때는 정말 고통스러워서 이국땅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지요.”“하지만 스승님이 조치해 주신 사람이 줄곧 나를 보살펴 주었기에, 천천히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서 배운 의술을 사용해서 가난하고 낙후된 마을 사람들을 돕고 치료하기 시작했어요.”“몇 년 후에 나는 스승님이 왜 나를 아프리카로 보내셨는지 깨닫게 되었어요. 내가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러신 거예요!”목현수의 눈빛은 서서히 고무된 기색을 담고 있었다.그 후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목현수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목현수의 이름을 알게 된 유럽의 부유한 사업가들도 그를 유럽으로 초청해서 환자를 치료하게 했다.이를 통해서 목현수는 많은 돈을 벌었고 유럽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사문에서 쫓겨난 지 7년이 지난 뒤 마침 19세가 된 목현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스승님께서 친필로 쓰신 편지였다. 일년 내내 스승님의 처방전을 보고 있었기에 사부님의 필체임을 알 수 있었다.사부님은 편지에서 마침내 예전의 원수를 찾았다고 언급하면서 스승님의 여생의 신념은 복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사문에서 축출한 것은 목현수를 잘 보호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을 뿐이라고 언급했다.그 편지를 본 목현수는 비통하게 울었다. 스승님이 자신에게 남긴 것은 오직 의술로 병을 치료해서 사람을 구하
도착한 목현수는 성연과 무진에 정이 두터운 모습이었다.“너희들 괜찮아? 그 실혼전의 캐서린은 정말 미친 X이야!”무진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실혼전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성연도 목현수를 보면서 캐서린이 스승과의 관계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연이 지난 몇 년 동안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말한 적이 없었기에.무진에게도 그렇게 오랫동안 숨겼다가, 결혼 후에 마음이 안정된 뒤에야 비로소 털어놓았다.‘캐서린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알게 된 걸까?’“실혼전은 유럽에서 강력한 비밀 조직으로, 조직의 인원은 적지만 각자의 실력은 아주 강해요.”“유럽에서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암살 사건이 발생했는데, 모두 실혼전에서 한 거예요. 그들은 심지어 일부 국가의 수사기관에서 추격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체포되지 않았어요.”목현수의 표정은 점점 가라앉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성연이는 내가 너하고 유럽에서 만났을 때를 기억할 거야. 사실 그때는 내가 바로 실혼전의 단서를 쫓고 있었을 때야.”“너한테 찾아온 그 여자는 MS 가문에 속할 뿐만 아니라 실혼전의 사람이기도 해. 그 여자는 야누스 같은 여자야. 수시로 정보를 팔아 큰 이윤을 얻으면서 가끔 손을 쓰기도 해.”목현수의 이 말을 듣자, 성연은 그때 자신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깨닫게 되었다.무진은 또다시 놀랐다.“성연아, 언제 있었던 일이야?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성연이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처음 유럽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그때 나는 비밀이 너무 많아서 무진 씨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무진씨가 걱정할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에요!”“그렇지만 절대 다음에는 그러면 안 돼!” 무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강력한 적이 성연이를 바로 찾지 못해서 다행이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거야.’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목현수에게 계속 말하라고 했다. ‘캐서린이 도대체 어떤 신분인지 정말 궁
예중천, 그 이름은 정말 무진을 놀라게 했다.북쪽 연경시의 최강 가문인 예씨 가문의 천재, 예중천. 어렸을 때부터 전설적인 인물로 6살 때부터 이미 시를 지었고, 13살 때는 전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 진학했다. 나중에는 유학을 하기 위해서 출국했다.귀국한 뒤에는 한손으로 강력한 기업을 세워서 예씨 가문이 정상에 오르도록 이끌었다. 그 시기에 강씨 가문은 중간 규모의 가문일 뿐이었고, 무진도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무진은 예중천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었다. 자신이 아직 소년일 때, 아버지 주변의 많은 친구들은 항상 ‘예중천이 살아 있다’는 말로 무진을 평가했다. 그때 무진은 전혀 모르면서도 다른 사람의 대타처럼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승복하지 않았다.바로 그 전설 속의 인물이 뜻밖에도 ‘신의’고학중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예전에 예씨 가문의 몰락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 같았어.’‘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어. 다만 거대했던 가문이 빠르게 추락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지.’‘예씨 가문의 후손들은 모두 마치 인간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어.’‘이런 사람이 내 아내와 관계를 맺었다니.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성연아, 빨리 말해줘. 애초에 어떻게 예중천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 거야? 그가 아직 살아 있다니!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야!”무진은 마음속으로 몹시 흥분했다.성연은 추억에 잠겨 있어서 남편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저는 여덟 살 되던 해에 스승님을 만났어요. 그때 날은 어두컴컴하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언덕 위에서 피와 진흙 범벅이 된 스승님을 발견했어요. 저는 정말 무서웠지만 스승님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그래서 마을 사람을 찾아서 스승님을 집안으로 옮기도록 도왔지요. 후에 스승님은 우리 집에 머무르면서 의술로 자신의 병을 치료하셨고, 제게도 의술을 가르쳐 주셨어요. 또 제게 여러 고전 명작들을 읽게 하셨고 정식으로 저를 제자
무진의 의견을 받아들인 성연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 성연이 무진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기 때문에 목현수는 무진이냐고 물었다.[어떻게 됐어요? 성연이 소식은 있어요?]“사형, 저예요.” 목현수의 초조한 목소리에 성연의 마음이 따뜻해졌다.잠시 멍하니 있던 목현수가 재빨리 대답했다.[성연아, 너 괜찮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목현수 쪽의 사람들도 여전히 찾고 있었지만, 시종 성연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성연이 곤경에서 벗어날 줄은 몰랐어.’‘성연이가 강무진과 함께 있다면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사실 별일 아니에요. 사형, 제가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성연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무슨 문제인데?] 성연이 이렇게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사형, 청혈진주를 아세요?” 성연은 마음속의 그 문제를 물었다.맞은편의 목현수는 말이 없었다.목현수도 모른다고 생각한 성연이 말했다.“사형, 저를 찾아온 사람은 실혼전의 사람이었어요. 그들이 저한테 청혈진주의 행방을 물었지만, 저는 전혀 몰랐어요.”성연이 설명해도 맞은편의 목현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성연도 입술을 꾹 닫은 채 따라서 침묵을 지켰다.한참동안 말이 없던 목현수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곧 너한테 갈 테니까 만나서 다시 이야기하자.]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우리는 지금 샤넬 가문의 본부로 가는데 사형도 직접 거기로 오세요. 거기서 만나면 돼요.”말을 마치자 전화가 바로 끊어졌다.성연은 목현수의 태도가 좀 의아했다.‘이런 일은 전화로도 충분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직접 오겠다는 거지?’‘그렇게 시달리고도 피곤하지 않은 건가?’“어때? 목현수가 뭐래?” 성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무진이 입을 열었다.휴대전화를 건네주면서 성연이 말했다.“사형이 이따가 나한테 오겠다고 했어요. 뭔가 아는 것 같아요.”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속도를 좀 더 올리라고 할게.
무진이 뒤에서 성연을 꼭 안았다.“무슨 생각을 해?”성연은 고개를 저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좀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캐서린조차도 상대하지 못했어.’“이건 당신하고 상관없어, 당신 문제가 아니야.”무진이 조용히 위로했다.“그런데 스승님은 정말 행방을 모르는 거야? 캐서린과 스승님은 또 무슨 관계야?” 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모든 일이 좀 이상했고 정상이 아니라고 느껴졌다.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는 무진도 알 수 없었다.성연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까닭 없이 불의의 재난을 당했지만, 성연도 그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성연이 천천히 말했다.“사부님이 사라지신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어요. 캐서린이 그렇게 젊은데 스승님과 무슨 껄끄러운 관계가 될 수는 없을 거예요. 아마도 그 청혈진주 때문인 것 같아요.”하지만 그 청혈진주는 스승이 성연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그럼 그 물건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아니면 그쪽에 전해오는 헛된 얘기일 뿐일까?’성연은 알 수가 없었다.‘캐서린을 그렇게 미칠 정도이니 그 청혈진주의 가치가 아주 높다는 걸 말해주고 있어.’‘캐서린이 본 적이 있고, 그래서 계속 이렇게 쫓아다녔다는 걸 의미하기도 해.’‘그런데 왜 성연은 금시초문인 거지?’무진도 고개를 저었다.“나는 정말 그런 걸 들어 본 적이 없어.”그의 기억 속에는 청혈진주라는 존재는 전혀 없었다.양대 조직에서 모른다면, 외부인이 더 잘 알 수는 없을 것이다.성연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모든 일이 오리무중이야.’‘캐서린에게서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하지만 캐서린은 절대 말하지 않을 게 분명해.’“나도 모르겠어요. 사부님이 이런 어려운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셨네요.” 성연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사부님이 지금 계셨다면 모든 난제들이 쉽게 풀렸겠지.’‘그러나 지금은 사부님이 안 계신 건 고사하고 편지 왕래조차 없어.’‘지금은 스승님이 어떻게 되셨는지도 모
무진이 갑자기 성연을 품에 꼭 안았다.“미안해, 너를 다치게 만들었어.”성연은 웃으면서 무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괜찮아요,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자책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을 쉽게 믿은 내 탓이기도 해요.”“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무진은 성연이 줄곧 신중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캐서린을 모르는 상황이라면 절대 캐서린과 같이 가지 않았을 거야.’그 말을 들은 성연이 쓴웃음을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캐서린이 내게 스승님 소식이 있다고 말했어요. 순간 내가 너무 흥분해서 스승님이 정말 계신 건지 보고 싶어서 캐서린과 함께 간 거예요.”이는 성연의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기에 빚어진 결과였다.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무진은 성연의 스승이 성연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연이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보, 보스.” 갑자기 들어왔던 한 부하가 성연과 무진이 꼭 안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말을 더듬거리면서 바로 돌아섰다.성연은 그가 아수라문의 부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무진을 가볍게 밀어 떼어놓고 말했다.“무슨 일이야?”부하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말했다.“보스, 실혼전에서 손뼈가 부러졌던 그 친구가 지금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성연은 침대에서 일어났다.“빨리 나하고 가 보자.”‘내 부하 중 그 누구라도 내 앞에서 희생하게 둘 수는 없어.’‘특히 실혼전이라면 더더욱.’‘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해. 두 번은 있을 수 없어.’무진도 성연의 몸 상태가 걱정이 되었지만, 성연의 성격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자신의 부하도 보러 가지 못하게 한다면, 이후에 성연은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나를 원망할 거야.’무진도 뒤를 따라서 그 부하가 머물고 있는 객실에 도착했다.아수라문의 부하들이 그 부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침대 위의 부하는 고통에 계속 울부짖었다.척 봐도 정말 답답한 분위기였다.성연이 천천히 다가가
전용기에서 성연도 어렴풋이 눈을 떴다.쓰러지기 전에 정신이 혼미했기에 한동안은 몹시 혼란스러웠다.‘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그러나 이제 눈을 떠서 무진의 모습을 보자, 성연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진 씨.” 힘겹게 입을 연 성연이 갈라진 목소리로 무진을 불렀다.무진은 바로 물 한 잔을 가져와서 성연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먼저 물을 좀 마시고 목부터 축여.”물을 마시고 나자 성연은 비로소 좀 나아졌다고 느꼈다.다만 온몸에 난 상처와 마른 핏자국이 무진의 눈에 들어왔다.“괜찮아? 문제는 없는 거야?”성연을 잡고 있는 무진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캐서린이 도대체 성연에게 어떤 비인간적인 고문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고문을 당한 성연이 떡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게다가 캐서린에게 긁힌 그 긴 흉터는 보기만 해도 몸서리칠 정도였다.성연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괜찮아요, 좀 쉬면 돼요.”“무슨 약이 필요해? 비행기가 착륙하면 바로 치료할 수 있게 미리 준비하라고 할게.”무진은 성연을 바라보면서 어떤 말로 자신의 아픈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지금 비행기에는 단지 상비약 정도만 구비되어 있었다.성연 자신이 지혈하고 약도 하나 먹은 상태였다. ‘내가 잘 처리했으니까 구급약은 필요 없어.’“필요 없어요.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성연이 캐서린을 따라간 곳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지금 왜 비행기에 있는지 모르겠어.’“우리는 지금 우선 샤넬 가문의 본부로 가고 있어. 거기에는 필요한 것들이 다 있으니까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고 나서 이야기하자.” 무진이 성연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그래요.” 성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앞서 성연도 무진이 샤넬 가문과 협력하게 된 일을 알고 있었다.‘지금 유럽에서 적어도 강력하게 감싸줄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야.’‘캐서린도 샤넬 가문은 꺼릴 거야.’“캐서린 그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