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금여를 안무하면서 성연은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잊지 않고 생각해 두었다. 저녁을 먹은 뒤라 늦은 시간이었다.이 시간엔 더 이상 할 일이 남지 않아 주방 정리를 끝낸 고용인들은 각자의 방으로 쉬러 돌아갔다.방은 뒤편 별채에 있었는데, 바로 앞에 가서 소리를 질러야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이제, 거실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무진과 운경도 보이지 않았다.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고택의 관리집사만 남아 있었다.성연은 집사의 눈을 피해 휠체어에 앉은 안금여를 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다행히 집사는 아무것도 못 본 듯했다.너무 긴장한 탓인지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위층에 도착한 성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슬며시 문을 닫았다.하지만 꽉 닫지는 않고 약간의 틈을 남겨 두었다.그래야 누가 오면 알아차리기 쉬울 테니까.문을 잠그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사기 쉬울 것이다.아무튼, 아무도 성연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무진과 운경이 언제쯤 일을 끝내고 올 지 알 수 없고, 또 누가 언제 올 지 모르니 속도를 내는 것이 좋다. 할머니 안금여를 돌아본 성연이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침을 맞으면 아프실 텐데.’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가 잘못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은침으로 다른 곳을 찌르거나 부러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정말 큰일이다.의료용 은침은 그다지 단단하지 않은데다 매우 가늘었다.하지만, 성연이 사용하는 은침은 특수 처리를 거쳐 일반 은침보다 내구성이 뛰어난 편이다. 어찌되었든 한순간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니까!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되었다!결국, 성연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먼저 할머니를 재우는 게 좋겠다!’‘어떻게 하면 할머니가 주무실까?’미간을 접은 채 생각에 잠긴 성연.그러다 또 아이디어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엄마들은 아기를 재울 때 보통 자장가를 부르지 않는가.‘할머니는 아기가 아니지만 상황이 별단 다르지도 않지!’ 성연은 자신이 알고
안금여가 잠이 든 덕분에 성연은 어렵지 않게 침을 놓을 수 있었다.순조롭게 침을 놓은 후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너무 오래 끌 수도 없었다. 혹시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까. 그래서 최대 시간을 십분 정도만 잡기로 했다. 그러면, 효과를 보는 데도 그닥 방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는 시간도 줄어들 테니 말이다.혹시 누군가 이 쪽으로 올까 봐 걱정된 성연이 아예 문 옆으로 의자를 옮겨다 앉았다.휴대전화를 꺼내 연구소 상황을 살펴보았다.이쪽 방면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성연이었기에 독자적인 연구소를 세우고 보스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뿐만 아니라 연구소 직원 전용 앱을 개발하기도 했다. 앱을 통해 각종 데이터를 공유할 수도 있었다. 물론 성연의 연구소 연구원들에 한해서. 이 앱을 활용해서 성연은 수시로 연구 진행 상황을 체크하며 연구 상의 문제점에 신속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쉽고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다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도 적어 안전성을 자랑한다.설계 방면에서 성연은 전문가라 할 만했다. 도대체 못하는 일이 있기나 한지!성연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에서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그저 핸드폰에 빠져 있는 듯 보이지만, 성연의 눈에 담기는 것들은 모두 유용한 정보들이다.모두 할머니의 병세와 관련된 정보들.이렇게 열심을 다하는 까닭은 일말의 실수도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어느덧 십분이 흘렀다.휴대폰을 내려놓은 성연이 침을 뽑기 시작했다.다행히 그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운경과 무진도 잠시간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침을 절반쯤 뽑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순간.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성연의 몸이 순식간에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동시에 재빨리 손을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찰칵-문이 열리고 강무진이 들어왔다.성연이 얼른 작은 은침 가방을 외투 주머니에다 몰래 숨겼다.다행히 성연의 손이 무척 빨랐던 덕분에 들키
엠파이어 하우스로 돌아온 성연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완전히 기운이 빠진 듯하다. 거실로 나온 성연을 무진이 그제야 물었다.“어디 안 좋은 것 아니야? 기운이 없어 보여.”무진이 자신에게 관심을 줄 줄은 몰랐던 성연은 잠시 어리둥절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을 잘 못 자서 그래요.”매번 침을 놓을 때면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침술이다 보니 머리 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바짝 곤두선 느낌이다. 그러다 일단 긴장이 풀리기라도 하면 간신히 살아남은 느낌이랄까.그러니 그 피곤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터. 성연의 말에 무진의 날렵한 눈썹이 높이 솟아올랐다.별다른 생각없이 성연이 정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보다고 여기는 무진이다.평소 그녀는 학교 가는 길에서도 집에서도 틈만 나면 잠을 잤다. 여태껏 이 부분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너무 많이 자는 건 아닌가 생각할 뿐. 하긴 요 며칠 집안 일로 쫓아다니며 많이 힘들기도 했을 터.성연을 생각한 무진이 말을 꺼냈다.“어차피 이렇게 피곤한데 오늘 밤 침은 그냥 넘어가지. 가서 쉬어. 기력부터 회복해야지.”그도 그리 인정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성연이 손을 가로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누워요.”지금 성연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얼른 이 일을 끝내고 빨리 침대에 누워 자고 싶다는 생각뿐. 더 이상 묻지 않고 자리에 누운 무진은 성연이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성연이 천천히 침을 놓기 시작했다.침을 놓으면서 또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지금 침을 중단해선 안돼요. 그럼 이제껏 했던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게 돼요.”정말 피곤해 죽을 지경인 성연은 사실 꼼짝도 하기 싫었다.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의학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의술인으로서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다.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때도 이를 악물고 견뎠다.침을 놓으며 일부러 무진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너무
다음 날.몸에 붙은 습관에 의해 오늘도 일정한 시간에 잠이 깬 성연.평소 습관에 따라 먼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아니, 그러려고 했다.그런데 어째 오늘은 팔을 움직이려 해도 어딘가에 꽉 묵인 듯 움직여지지가 않았다.짜증스러운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단단한 턱이 눈에 들어왔다. 또 온몸이 따뜻하게 덥혀져 있었다. “깼어?” 얕은 잠이 들었던 무진은 성연이 깬 것을 금세 알아챘다. 매력적인 저음이 성연의 귀를 간지럽혔다.그제서야 자신이 무진의 품속에서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아직은 무진이 좀 불편했다.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연이다.그런데 어쩌자고 그의 품에 들어갔는지.속으로 여전히 불편했으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네, 일어났어요!” 얼른 무진 품에서 빠져나온 성연이 침대에서 내려섰다.무진은 그런 성연을 응시했다.성연의 눈에서 수줍은 빛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자 속으로 실망감이 드는 것도 사실.성연이 어떻게 나올지 좀 기대도 했었는데 이렇듯 무덤덤하니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얼굴조차 하나 안 빨개지다니.’그래도 희망이 좀 있다고나 할까. 결국 성연의 나이를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천히 가자, 사춘기도 안 끝난 애한테 무슨…….’‘이 아이는 우리가 그냥 말 그대로 단순히 잠만 자는 건 줄 아나 봐.’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다른 날과 같은 아침 메뉴. 매일 먹는 죽에 질렸던 차에 모처럼 국수가 식탁에 올라와 있었다.양념장을 붓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무진은 그런 성연을 보며 대체 맛은 느끼고 먹는지 궁금했다. 물론 아주 잠깐의 생각이었을 뿐, 성연을 힐끗 본 뒤 바로 시선을 돌렸다.살짝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먹는 단순한 동작조차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입안의 죽 맛이 그저 그런듯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너 저번에 밴드에 가입했다고 하지 않았어? 어때? 재미는 있어?” 무진이 그릇에 담긴
학교에서 성연은 해독제를 개발하느라 바빴다.잠시간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 모두 수업이 끝나자마자 성연이 보건실로 뛰어가는 일이 부쩍 잦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그래서 성연이 새로 온 보건 교사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잘생긴 서한기는 학교에서 인기가 높았다.서한기를 보기 위해 많은 여학생들이 갖가지 꾀병으로 보건실로 찾아가고 또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송성연은 이미 학교에서 유명인사였다.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알게 되었다.성연은 잠을 많이 잔다는 점 외에 별로 나쁜 게 없는 친구였다.수업시간에 그리 자는데도 성적이 좋은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 중 용기 있는 아이들은 모르는 문제를 들고 와서 성연에게 묻기도 했다. 그러면 성연은 매번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심지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까지 해주며 도움을 주기도 했다.그러자 성연에 대한 편견이 점차 사라졌다.게다가 얼굴까지 예쁘니 호감을 갖는 친구들도 많아졌다. 여학생들은 송아연보다 송성연을 더 좋아했다. 여자아이들은 성연의 가식 없고 털털한 모습을 좋아했다.어떤 아이들은 매점에 갈 때 성연을 부르기도 했다. 대부분 성연이 거절하기는 했지만.어쩌면 성연이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성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너무 바빠 도무지 시간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학교에서만 실험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니 일분 일초의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또 수업 중에 자고 있는 성연.그때, 누군가 그녀를 가볍게 흔들며 깨웠다.짜증이 난 얼굴로 성연이 눈을 떴다. 미처 다 지우지 못한 날카로운 눈빛으로.그 모습에 성연을 깨웠던 아이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말간 얼굴을 대면한 성연 또한 좀 얼떨떨했다.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며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무슨 일이야?”성연의 눈 앞에 여학생 둘이 서 있었다.성연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그제서야 안도하는 모습이다. 조금 전 성연의 눈빛은 정말 무서웠던 탓이다. 정말 놀
오후 수업 시간이 되자 다시 교실로 돌아온 성연. 발끝에 힘을 주며 들어섰다.평소에도 늘 그런지라 선생님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지각도 아니고 게다가 오후 쉬는 시간인지라 이런 학생들이 비일비재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오후의 첫 수업이 하필이면 이윤하의 수업이었다.느릿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성연을 본 이윤하는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성연이 자리에 앉고 수업이 절반정도 진행되었을 때 이윤하가 입을 열었다.“일부 학우들은 어린 나이에 못된 것만 배워서 몸 가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것 같군요. 시골내기는 자기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같네요. 학교에서 달콤한 말에나 넘어가기나 하고. 나중에 다른 학우들이 졸업해서 사회에서 잘 나갈 때, 모 학우는 집에서 애나 키우고 있을 것 같군요.” 이상야릇한 이윤하의 말투는 명백한 조롱기를 담고 있었다.송성연을 콕 찍어 하는 말에 반 아이들 모두 성연을 돌아봤다.느닷없이 이윤하의 입에서 나온 폭탄 발언이었다.성연이 화가 난 표정으로 일어나서 물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인가요?”“무슨 뜻이라니? 송성연, 네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잘 몰라? 그리고, 학생 여러분들에게도 경고하는데, 학교에서 연애하지 마세요. 만약 나에게 들키는 시엔 바로 여러분 부모님께 말씀드려 집에서 직접 훈육시키게 할 겁니다. 그리고 송성연,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지 않으면, 아무리 집에 돈이 많은들 무슨 희망이 있겠니?”그리고는 경멸의 시선으로 성연을 쳐다보았다.‘학교에 이미 소문이 다 났는데 설마 또 누명을 씌웠다고 하지는 못할 테지.’‘선생님도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송성연은 한 마디로 학교의 문제아야.’ “선생님, 증거를 가지고 말씀을 하셔야지요. 아무 근거 없이 사람을 모함하는 게 선생님의 일관된 스타일인가요?” 성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선생이 수업 시간에 수업은 안하고 아이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나 떠들고 있다니 정말 한심스러웠다.그럴 시간에 제발 자기계발에나 힘쓰지, 쓸 때
성연과 서한기에 관한 소문은 전교 학생들을 넘어 무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수하로부터 보고를 들은 무진의 기분이 가라앉았다.“나가서 손건호 들어오라고 해.” 손을 휘휘 저은 무진이 수하를 내보냈다.수하가 인사하고 물러난 지 얼마 뒤 손건호가 들어왔다.눈썹을 찌푸린 무진이 고개를 들고 손건호를 보았다.“그 새로 온 보건교사는 뭐야?”보스의 기색을 살피던 손건호는 보스의 심기가 썩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냥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질투를 하는 거야?’속으로만 추측할 뿐,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한 채 말이다.무진에게 사실대로 말했다.“새 보건교사가 작은 사모님과 아주 가까운 건 확실합니다.”무진이 어두워진 눈을 내려 깐 채 미간을 찌푸렸다.“교장한테 전해. 만약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보건선생은 더 이상 학교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이 어떤 건지 명확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성연과 서한기의 관계를 오해하는 것도 아니었다.남녀 간의 감정에 대해 관심이 없는 성연인지라전혀 걱정되지 않았다.그러나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합의한 형식상의 결혼이라 해도 성연이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이런 불미스러운 소문이 외부로 퍼지면 그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내가 이러는 건 단지 체면 때문이야.’무진이 드디어 평소와 다른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만한 이유를 찾아냈다.손건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무진이 지시하는 일은 보통 바로 즉시 가서 해결했다.설마 보스가 사모님을 진짜 마음에 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아직 어린 미성년이었다.‘보스의 눈이 겨우 이 정도야, 하긴 송성연도 보통이 아니긴 하지.’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손건호는 금세 머릿속의 잡생각들을 떨쳐냈다.‘그만. 이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사무실을 나간 손건호가 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십니까?” 이전에도 이 번호를 본 적이 있는 교장이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물임을 알고 바로 표시하고 저장해 두
교장은 사무실에서 왔다갔다하며 서성거렸다.그는 사리 분간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력이 뛰어난 보건교사 서한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단순한 소문으로 사람을 해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교장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성연의 집안 배경이 이런데 또 누가 감히 상대할 수 있겠는가.결국 교장은 서한기를 불러 직접 물어보기로 결정했다.“교장선생님,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10분 후, 서한기가 교장 앞에 섰다.서한기를 한 번 훑어보았다. 확실히 여학생들한테 인기 많을 외모이긴 했다.“이렇게 된 마당이니 그냥 묻겠습니다. 송성연 학생과 연애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송성연 학생은 아직 어려서 감정을 컨트롤 할 수가 있는 나이가 아닙니다. 두사람이 연애를 한다고 해도 미래가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일찌감치 정리하세요.”교장이 난감하다는 듯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교장은 숨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서한기에게 말했다.교장의 말을 듣던 서한기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이 사람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렇게 삐뚤어진 생각까지 하다니, 참 나.’두 눈 멀쩡한 사람이라면 자신과 성연을 하나로 엮지 않을 것이다.더구나 서한기는 그럴 배짱도 없었다.할 수 없이 서한기가 설명하기 시작했다.“사실이 아닙니다. 정말 너무 억울하군요. 송성연 학생은 심각한 기면증이 있습니다. 마침 제가 그 방면 치료 경험이 있어서 치료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사실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그럴싸한 핑계를 찾아내야 했다.사실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요 며칠 거의 하루 종일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이런 것들에 주의하지 않았다.연구실에서 나와보니, 지금 이렇게 교장실에 불려와 있는 것이다.교장도 난처하긴 마찬가지다.“확실합니까?”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않은 채 교장이 다시 물었다.“물론입니다, 교장선생님. 송성연 학생은 아직 미성년자입니다.
미스 샤넬이 성연의 팔을 잡아당기자 성연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성연의 반응이 너무 커서 곧 사레가 들릴 지경이 되자, 샤넬이 황급히 성연의 입을 막았다.물속에서 말하기가 불편한 미스 샤넬은 입모양으로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점차 침착함을 되찾은 성연이 미스 샤넬의 동작에 따랐다.미스 샤넬이 성연을 끌면서 점점 강가로 헤엄쳐 갔다.강가에 거의 도착한 미스 샤넬이 힘을 써서 먼저 성연을 보냈다.옆에서 누군가가 즉시 와서 도와서 성연을 끌어올렸다.미스 샤넬도 따라서 천천히 강기슭으로 올라갔다.강가에 서서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구조된 것을 본 사람들이 곧장 환호성을 질렀다.“정말 운이 좋았어요. 다행이에요, 괜찮아서 다행이에요.”그때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고 다가왔다.그녀는 성연과 샤넬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천만에요. 다음에는 아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예요.” 성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겁에 질려서 여전히 떨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성연과 샤넬이 없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아이를 데리고 내려가서 잘 달래 주세요. 오늘 같은 상황에 아이가 분명히 많이 놀랐을 거예요.”성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연의 옷은 젖어서 축축했다.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아이를 구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누나, 고마워요.” 아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성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맑은 목소리에 성연도 마음이 점차 누그러졌다.“괜찮아, 네가 괜찮으니 됐어.”“두 분 아가씨, 제 제가 돈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돈이라도 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불
“누가 물에 빠졌어요.”“빨리 와요, 사람 살려요.”“빨리 여기 구조대에게 연락해서 빨리 사람을 구하러 오게 해.”주위에서는 모두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성연은 물에 빠지는 순간 바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다행히 호수의 물이 깊어서 바닥에 부딪치지는 않았다.그러나 갑자기 물살에 충격을 받자 현기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아래의 물살이 좀 급해서 물살에 말려들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성연은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짙은 무력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성연의 몸은 천천히 계속해서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이럴 수가, 누구 수영을 할 줄 알아요?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주세요.” 구조된 소년의 어머니도 옆에서 소리쳤다.자신의 과실로 인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비록 자기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몹시 조급해진 목현수는 몇 번이나 아래로 바로 뛰어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게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주위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갔지만, 구조대는 한참이나 오지 않고 있었다.“이걸 어떡하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아니면 구급차를 불러서 구해달라고 해.”“여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CCTV도 있지 않아? 왜 이렇게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직접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었다. 성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물에 뛰어들 용기는 부족했다.자기 자식이 잘못된 걸 본다면 뛰어들었겠지만 말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던 미스 샤넬이 주저함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러나 옆에 있던 목현수가 눈치 빠르게 붙잡았다.“샤넬, 뭘 하려는 거야?”성연 한 명이 빠진 걸로 이미 충분히 애
성연이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데리고 온 관광지는 교외에 있었다.산과 물을 끼고 곳곳에 푸른 풀이 깔려 있어서 생동감이 넘쳤다.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관광지에는 또 전문적으로 설계된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넓은 숲의 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어서 또 그 속으로 소풍을 갈 수도 있다.미스 샤넬이 앞으로 걸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이곳의 공기는 정말 좋네요.”“맞아요, 내가 오기 전에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순수하고 천연적이라고 했어요. 원래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은 채 약간만 손을 댔을 뿐이니, 진정한 원래의 생태 관광지인 셈이죠.”성연은 설명할 때, 미스 샤넬이 일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봐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미스 샤넬은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성연 씨, 아는 게 정말 많네요.”“아니에요, 이런 관광지는 우리 A국에 아주 흔해서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어요. 유럽 각지에 정통한 미스 샤넬을 난 따라가지도 못하는 걸요.”각기 장점이 있다. 성연은 북성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서 기본적인 상식을 좀 알고 있는 것이지, 칭찬할 건 아니다.“성연 씨가 그렇게 전면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가요, 우리 저쪽으로 가 봐요.” 샤넬 양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성연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미스 샤넬의 뒤를 따라가면서 목현수와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목현수는 성연이 자신을 계속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됐어, 성연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샤넬 양과의 관계는 정말 잘 생각해봐야 해.’그들은 다리 위로 걸어갔다. 아래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호수였다.미스 샤넬이 포즈를 취하고 성연이 사진을 찍었다.성연은 여러 장면을 잘 포착해서 찍었다.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미스 샤넬이 달려왔다. “어떤 지 내가 한번 볼게요.”성연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미스 샤넬은 한 장 한 장 살펴보면서 감탄했다.“성연 씨, 사진 촬영 기술이
눈썰미가 좋은 미스 샤넬은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같이 손을 잡고 가던 성연도 덩달아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목현수가 물었다. “왜 그래?”미스 샤넬이 사실대로 말했다.“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안진검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미스 샤넬을 보았다.미스 샤넬이 자신을 알아봤음을 눈치 챈 안진검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계속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지만 그래도 좀 낭패스러웠다.속으로는 정말 놀랐다.샤넬 가문의 장녀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빌어먹을?’‘그녀가 나를 말했을 지도 몰라.’‘미스 샤넬이 정말 내 이름을 말한다면, 내 신분 배경이 드러나면서 전체 계획에 차질을 줄지도 몰라.’안진검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앞으로 계속 동정을 살피면서 들켰는지 어떤지 지켜보는 수밖에.’‘만약 진짜 내 신분이 드러난다면, 계획을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어.’간신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안진검은 정말 달갑지 않았다. ‘계획이 이렇게 틀어지다니!’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낀 성연도 바로 물었다.“누군데요?”미스 샤넬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잘못 본 거겠죠.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이 이곳 북성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목현수가 옆에서 바로 말했다.“잘못 본 게 분명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맞아요, 나는 여전히 성연 씨가 나를 데리고 놀러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 샤넬은 다시 성연의 손을 잡았다.그들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손건호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을 관광지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았기 때문.무진에 대해서는 목현수도 자료를 좀 조사한 적이 있었다.손건호가 무진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이번에 손건호가 성연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양이군.’그러나 강무진이 직접 자신을 예의 감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마음을 놓았음을 의미했다.목
이튿날 출근하던 무진은 푹 안심한 마음으로 성연에게 목현수를 방문하라고 했다.미스 샤넬이 있는 목현수가 자신의 여자에게 다른 시도를 할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성연은 차를 몰고 호텔로 가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찾았다.하루 종일 집에서 심심했던 그녀는 목현수와 미스 샤넬이 북성에 오자 마침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똑똑똑.” 성연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한참 기다렸지만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성연은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핸드폰을 꺼내 목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목현수가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목현수가 전화를 받았다.성연이 즉시 말했다.“사형, 미스 샤넬하고 어디 나갔어요?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바로 룸 앞에 와 있는데.”“방 앞에 있다고?” 그제야 잠에서 깬 목현수는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2분가량 지나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문을 열어 줄게.”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성연이 목현수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미스 샤넬은?”“아직 일어나지 않았어...”목현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성연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어제 유럽에서 왔으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아주 정상이죠 뭐.”목현수가 곧장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성연은 소파에서 기다렸다.10분 뒤에 미스 샤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성연을 보자 눈을 살짝 떴다.“성연 씨, 왔네요.”성연은 미스 샤넬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데리고 관광을 나갈 생각이에요.”“곧 나올게요.” 다시 방에 들어간 미스 샤넬은 화장을 마치고 나왔다.그런데 미스 샤넬의 옷 사이로 옅은 붉은 색 흔적들이 성연의 눈에 들어왔다.경험한 적이 없지만 본 건 있는 성연.그 흔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형과 미스
로얄 스위트 룸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룸 내부 구석구석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스위트 룸에 들어서자 마자 은은한 향이 났다.“나 먼저 샤워하러 갈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묙현수의 볼에 키스를 한 미스 샤넬은 목현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목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30분 후.찰칵, 소리가 났다.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스 샤넬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무심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던 목현수.눈앞의 장면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물빛 실크 가운을 걸친 미스 샤넬의 허리에는 얇은 띠 하나만 걸쳐져 있었다.실크 가운 사이로 풍만한 가슴 계곡과 희고 긴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했다.그녀가 천천히 목현수를 향해 걸어오자, 가운 안의 나신이 슬쩍 드러났다.목현수의 머리가 띵해 오기 시작했다.한 호텔 룸 안에서 내보이고 있는 샤넬의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건강한 성인 남자인 목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미스 샤넬은 목현수에게 다가가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들었다.자신의 몸까지 드러내며 이렇게 다가가는데도 자신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목현수.점점 서운한 마음이 커지는 미스 샤넬.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현수 씨, 당신은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목현수도 미스 샤넬이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미스 샤넬은 항상 씩씩하고 쾌활한 사람이어서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목현수 자신도 깜짝 놀랐다당황한 목현수가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그냥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몰랐을 뿐이야.”미스 샤넬이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유혹하려는 거죠!”그녀의 눈에 원망과 질책의 빛이 들어찼다. 또한 짙은 실망감도.목현수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
성연은 수시로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음식을 먹으면서 성연이 농담처럼 물었다.“사형, 사형은 미스 샤넬과 언제 결혼할 거예요?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예쁜 미인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사형을 따라다니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요?”성연은 그저 슬쩍 물어보았을 뿐이다.지난번에도 물어봤지만 매번 이 문제를 회피하는 목현수였기에.“곧 할 거야. 다음 달 즈음에 돌아가서 결혼할 거야.”그런데 목현수가 이렇게 대답할 줄은 정말 몰랐던 성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무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옆에서 목현수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두 달이면 목현수가 유부남이 된다는 말이지?’‘엄밀히 말해 지금 미스 샤넬은 목현수의 약혼녀.’‘이제는 목현수도 더 이상 성연이에게 매달릴 수 없다는 거지.’무진은 이제야 정말 위기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그도 옆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그럼 이게 신혼여행인가요?” 그 말을 들은 목현수가 눈을 치켜 떴다.‘하, 내가 강무진 네 놈의 얄팍한 생각을 모르는 줄 알아?’‘성연이를 내가 뺏을까 봐 겁이 났던 거 아니야?’‘이제 내가 결혼한다고 하니 강무진의 태도가 완전히 변했어.’“그런 셈이지요.” 목현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무진은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슬쩍 가렸다.주문했던 음식들을 다 먹자, 디저트가 나왔다.이 음식점의 주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A국 특유의 디저트였다.미스 샤넬은 방금 먹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랄 만큼 맛있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디저트로 나온 이 케익들.동물을 본떠 동그랗게 만든 모양이 무척 사랑스러웠다.미스 샤넬은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포크를 들었다.“이 케익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성연이 손을 흔들었다.“모두 먹는 것들이에요. 미스 샤넬. 많은 생각하지
“너네 A국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현수 씨한테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죠. 첫 번 째로 성연 씨를 보러 온 거예요.” 미스 샤넬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어떤 의미에서는, 목현수가 자신을 A국으로 데려온 것 자체가 자신을 인정한 거라고 생각하는 미스 샤넬.미스 샤넬이 따라온 걸 본 무진은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성연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아무 내색 없이 슬그머니 풀렸다.미스 샤넬과 성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앞장서 걸었다.목현수와 무진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서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공항 밖을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무진이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무진은 목현수와 미스 샤넬을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음식점으로 데려갔다.북성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점인 이 곳은 언제나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하지만 이곳의 VIP고객인 무진은 얼굴을 보이자마자 곧바로 특실을 준비해 주었다.음식점의 총지배인이 직접 메뉴판을 가져와서 무진 일행의 주문을 받았다.살짝 허리를 숙인 채 아주 정중한 자세로 지배인이 말했다.“강 대표님, 최근 저희가 아주 참신한 신 메뉴 하나를 선보였는데, 평이 아주 좋습니다. 한번 맛보시겠습니까?”“이곳의 특선 메뉴들을 하나씩 내오세요.” 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지배인이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특실 안에는 성연과 무진이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샤넬과 목현수가 나란히 앉았다.북성이 처음이라 연신 두리번거리던 미스 샤넬은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이게 바로 A국 스타일? 정말 예뻐요. 유럽과는 정말 다르군요.”“미스 샤넬, 여기가 마음에 들면 자주 오세요.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요. 특히 미스 샤넬 같이 아름다운 외국 여성에게는 더요.” 성연이 미스 샤넬에게 차를 한 잔 따라 주며 놀리듯이 말했다.성연의 칭찬에 미스 샤넬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정말요?”“비행기 시간을 알려주면, 제가 그 시간에 마중 나갈게요.”전화를 받다가 의자에서 일어선 성연의 음성에 기쁨이 철철 넘쳐 흘렀다.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무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폰 건너편 음성이 남자 같은데...’무진이 무의식 중에 한마디를 꺼냈다.“누구?”성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사형인데 벌서 북성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네요. 나보고 마중나와 달라는데, 무진 씨도 같이 갈래요?”마음이 좀 불편해진 무진이 미간을 찡그렸다.‘그 자식은 왜 또 튀어나오는 거야? 사형이면 사형답게 행동해아지. 왜 자꾸 성연에게 들러붙는 거야?’성연이 혼자 목현수를 마중 나간다면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 않을 터.잠시 고민하던 무진이 이내 대답했다.“음, 내가 같이 가지.”“무진 씨 일은 안 바빠요? 바쁘면 나 혼자 가도 돼요.”그냥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것이니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성연은 생각했다.무진이 바쁜 시간을 짜내 가면서 자신과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괜찮아, 내가 같이 갈게.” 무진이 노트북을 닫았다.고개를 끄덕인 성연이 따라 일어섰다.“시간이 거의 다 됐어요.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면 딱 맞을 거예요. 가요.”무진이 성연의 뒤를 따랐다.잠시 후, 북성의 공항.비행기 도착 시간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성현과 무진. 목현수가 탑승한 비행기는 아직 착륙하기 전이었다.두 사람은 함께 대합실에서 목현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목말라?” 무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성연이 고개를 저었다. 무진이 움직이는 순간, 성연은 그가 물을 사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성연이 무진의 팔을 잡아당겼다.“귀찮게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형이 곧 도착할 거예요.”무진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래.”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던 성연이 투덜거렸다“나올 때가 됐는데...”성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국 게이트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다시 고개를 숙여 시간을 확인하니 바로 목현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