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의 차가운 말투에 심유진뿐만 아니라 옆에 준비하고 있던 의사도 겁에 질려 손에 쥐고있던 주삿바늘을 땅에 떨어뜨렸다.심유진의 몸은 순간적으로 굳어졌고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다. .허태준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왜 내 방에 들어왔냐고.”심유진은 허태준의 물음에 정신이 들어 의사를 가리키며 말했다.“당신이 열이 나서 의사를 불러왔어요.”허태준은 그제야 그녀 뒤에 남자가 청진기를 목에 걸고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여기 체온계 줄게요. 이걸 겨드랑이에 넣고 체온을 재야 해요.”“아, 힘 없어서 나혼자는 무리인데. 좀 도와주지?”허태준은 당당하게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심유진은 의사와 그를 방안에 남기고 나와버리고 싶었지만, 그가 열이 펄펄 끓는 환자라는 사실에 충동을 꾹 참고 그의 옆에 앉았다.“그럼 단추 풀게요.”허태준은 그녀에게 자신을 맡긴듯 가만히 있었고, 심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잔뜩 긴장을 한 듯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행여 그가 들을까 얼굴을 푹 숙이고 그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빨리 좀 하지?”그녀는 겨우 맨 윗단추 세 개를 풀었고, 허태준은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팔을 움직였다.벌어진 잠옷 사이로 보이는 그의 분홍빛 어깨는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심유진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재빨리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얼굴을 돌렸다.“5분 동안 그러고 있어요.”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자신의 휴대폰으로 5분 후 알람을 맞췄다.의사는 심유진과 자리를 바꾸어 허태준의 침대 옆에 섰다.“목이 아프거나 설사를 하나요?”“아뇨.”“그럼 아픈 곳은 어디죠?”“없어요.”의사의 물음에 허태준은 대충대충 대답했다.“띠리링-” 마침 그녀가 맞춘 알람이 울렸고 의사는 손을 뻗어 그의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빼려고 했다.“아, 내가 직접 뺄테니까 제 몸에 손 대지 말아요.”의사는 지금까지 이렇게 비협조적인 환자를 본 적이 없었던지,
허태준은 고개를 저으며 입맛이 없다고 했다.“그럼 물 좀 마실래요?”그녀는 그의 입술이 까슬할 정도로 마른 것을 보았다.“응.”그녀는 냉장고 안에 있는 생수를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넸다. “힘이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어.”“그럼 제가 일으켜 드릴게요.”그녀는 그의 목 뒷부분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침대 위로 30도 정도 끌어올렸다.허태준은 그녀의 품에서 물을 마시더니 피곤하다는 듯 다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좀 더 잘래요?”그는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심유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이용해 심유진을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다.“아니, 잠이 안오네. 옆에서 얘기 좀 해줄래?”심유진은 황당항 그의 요구에 당황했다.“무슨 얘기요?”“아무 말이라도 좋아.”그녀는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몰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여형민 씨에게 부탁해서 여기로 와달라고 할까?’심유진이 한참 말이 없자 허태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됐고, 지금 몇 시야?”“8시 43분이요.”“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니.”허태준은 여기까지 와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넌 저녁 먹었어?”“저녁…… 먹었죠.”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뭐 먹었어?”“볶음밥이요.”“맛있었어?”“그냥저냥 괜찮아요.”…모두 영양가 없는 얘기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꾸준히 대화를 이어갔다.심유진이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자 허태준이 졸리냐고 물었다.그녀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졸리지 않다고 했다.“피곤할 텐데, 졸리면 가서 좀 자. 어차피 한 시간은 더 남았으니까.”“됐어요.”심유진은 두 눈을 크게 떴다.“괜찮아.” 허태준은 링거를 놓지 않은 왼손으로 침대 옆자리를 툭툭 쳤다.“여기 자리 있어. 그냥 여기서 자.심유진은 그의 말에 졸음이 확 달아났다.한 번도 동침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의식이 멀쩡한 상태로 그의 옆에 눕는 것은 처음이었다.“아니요. 하나도
심유진은 색색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허태준은 고개를 돌리고 실소를 터뜨렸다.‘안 졸리다고 하더니. 결국 이렇게 잠이 들었네.’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다가 멈췄다.‘됐다. 그냥 자게 두자.’**“띠리링- 띠리링-”갑작스러운 핸드폰 벨소리가 방안의 정적을 깨뜨렸다.심유진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자기가 맞춘 알람인줄 알고 데스크 전화 쪽으로 걸어갔지만, 핸드폰 벨소리는 알람이 아니라 조건웅의 담당 간호사에게 온 전화였다.“음…… 여보세요?”조건웅의 담당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 씨. 혹시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줄 수 있어요?”“아뇨. 제가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급한 일인데!”“제가 지금 외부라 갈 수가 없어요.”“음…… 오늘 조건웅 씨 사망하셨어요!”간호사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심유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뭔가 터진 것 같았다.심유진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언제요?”“조건웅 씨 사망하셨어요. 30분 전에.”“왜요?”“자살이요. 뛰어내렸다고 하더라고요.”그녀는 간호사가 조건웅은 반신불수일뿐 생명의 위험이 없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예사롭지 않았다.“죽기 전까지 당신만 찾다가…… 갑자기 병원 창밖으로 뛰어내렸어요.”“자살이라고요? 게다가 어떻게 병원 밖으로 뛰어내려요? 다리를 못 움직이잖아요!”“두 팔로 난간을 짚고 올라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병원이 발칵 뒤집혔어요. 지금 당장 와줄 수 있어요?”심유진의 호흡은 점차 불안정해졌고 눈앞도 흐릿해졌다.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을 힘들게 한 그를 죽도록 미워했다. 하지만 반신불수가 됐다는 그의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미움은 점점 사그러들었다.그와 우정아는 각자의 자리에서 벌을 받았기에 이제 심유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조건웅이 죽길 바란 적도 있었는데…… 막상 죽었다고 하니…… 이 감정은 뭐지?’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허태준이 자기를 보고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두 사람은 가까이 있었고, 방안은 조용했기에 그는 방금 그녀가 간호사와 통화한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가봐야 해?”“아니요.”심유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허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여기서 어떻게 가요. 갈 방법도 없고, 이제 그 사람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그 사람이 죽어서 슬퍼?”“아무 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심유진은 솔직했다.“그래도 그는 너 몰래 밖에서 딴짓을 했던 사람이잖아. 너를 그렇게 아프게했던 사람인데 아직도 감정이 남은 거야?”심유진은 안 그래도 마음이 힘든데 허태준이 자극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이제 이 얘기는 안 하면 안 될까요?”“너를 찬밥 신세로 만든 사람이 죽었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냐? 눈물을 왜 흘려?”심유진은 그에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손등에 꽂힌 링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을 보며 괴로워했다.그는 그녀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녀에게 위로 한 마디를 할 수는 없었다.마침 심유진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의사 불러야겠네요.”그녀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의사는 5분 만에 왔다.“여기를 꾹 눌러줘야 해요.”그는 솜을 뜯어 심유진에게 주었다.심유진이 솜으로 그의 손등을 누르자 허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고, 심유진은 그의 행동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손을 뺐다.솜이 침대에 떨어졌고 바늘 구멍에서는 검붉은 피가 졸졸 흘러나왔다.“뭐 하는 거죠?”의사는 심유진을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고열로 생사를 오가던 사람입니다!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생사” 라는 단어는 심유진을 혼란스럽게 했다.의사는 그녀에게 다시 솜을 주었고, 그녀는 다시 허태준의 손등을 꾹 눌렀다.허태준이 이번에도 그녀의 손을 잡았으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의사는 심유진에게 체온계를 주면서 한 시간마다 체온을 재보고 밤에
허태준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믿지 않았다.학교에서는 친구조차 없었으며 자신의 부모도 믿지 않았다.그의 부모는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두 부류만 있다고 가르쳤다.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실과 득을 따졌다. 그러니 사람들과 깊이 교제하지 못했고 또 그들과 감정도 나누지도 못했다.기쁨, 슬픔, 행복, 절망, 좌절 등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온갖 기분이 그에게는 사치품 같았다.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가업을 물려받기 위한 기계에 가까웠다.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가 최고의 경영자가 될 것이라며 칭찬했다.그는 어떠한 잘못도, 어떠한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심유진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일밖에 모르는 그런 기계같은 사람이었다.어쩌면 심유진을 만난 것이 그에게는 큰 사고일지도 모른다.그는 지금까지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게 서투르고 당황스러웠다.심유진로 인해 그는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그녀가 힘들어 할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그 슬픔에서 꺼내주고 싶었다.아직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서툰 그는 그녀를 배신한 조건웅에게 그녀가 동정심을 갖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배신한 조건웅이 자살이라는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옳은 일이라고 여겼다.어쩌면 허태준은 조건웅을 질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유진은 허태준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기에, 그가 그저 자신을 비아냥거리고 한심하게 여기는 줄만 알았다.그런 그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그녀는 당황스럽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몰랐다.“미안해…… 이건 진심이야.”허태준은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 이래서 잘생기면 용서가 된다는 거구나.’그녀는 빚어 놓은 것 같은 새초롬한 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풀렸다.방금까지는 그의 태도와 말에 화가 났지만, 그의 진심어린 사과에 심유진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허태준은 그런 그녀의
천장이 열리고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허태준이 기침을 했다.기침소리에 정신이 든 심유진은 그에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주더니 리모콘으로 천장을 닫으려고 했다.“추우니까 빨리 이불 덮어요!”“괜찮아. 닫지마.”“뭐가 괜찮아요! 이러다가 또 열나면 의사 선생님한테 혼나는 건 나라고요!”“그래도 잠깐이니 괜찮아. 예쁘잖아. 그치?”허태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정말 예뻐. 그치?”“아……”그의 손길에 깜짝 놀란 심유진은 침대 위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심유진은 허태준과 누워있는 순간 만큼은 조건웅이 죽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그녀는 핸드폰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찍었다.눈으로 보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사진에도 별들이 아름답게 찍혔다.“이전에 팔공산에 한두번정도 와봤지만 이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은 없었어요.”“맞아. 나도 몇 번 와봤는데, 이런 적은 없었어. 그래서 더 특별해.”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허태준이 연신 기침을 해댔다.심유진은 그의 오른쪽 탁자에 놓여진 리모콘을 가져가기 위해 그의 몸 위로 살짝 올라왔고, 그녀의 가슴이 허태준의 얼굴에 살짝 닿았다.허태준이 아무리 기운이 없다고 해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참았다.‘앞으로 천천히 알아가자……’그는 무의식적으로 불끈 솟아오르는 또 다른 자신을 억눌렀다.**심유진은 의사의 말대로 시간마다 그의 체온을 쟀다.“38도……”그녀는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와 핸드폰으로 알람을 여러 개 맞췄다.심유진은 자신도 편하게 눈 좀 붙여야겠다고 생각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잠시 후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유진아! 유진아!”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허태준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허태준은 또 열이 나는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더웠는지 덮고있던 이불을 걷어찼다.“유진아...유진아!”그의 표정이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
심유진은 허태준을 꼭 안아 재웠다.그의 험상궂던 표정이 그녀의 품안에서 사랑스럽게 변했다.밤중에 비가 포슬포슬 내렸다. 허태준의 체온이 어느정도 떨어지자 답답했던 심유진은 천장 덮개를 열었다.가느다란 빗줄기가 지붕에 부딪치면서 후드득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별들은 비 때문에 노랗게 번져보였다.기온이 떨어진 탓에 비는 점차 눈으로 변했다.눈이 천장을 덮자 방안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그 속에서 심유진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허태준이 정신을 차린 것은 오전 9시 무렵이었다.그가 눈을 뜨자마자 심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허태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심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조용히 손을 올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체온계를 집어들었다.“체온 좀 잴게요.”밤새도록 땀을 흘린 허태준은 체내의 수분이 심하게 빠져 피부가 푸석했다.그는 잠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밤새 여기에 있던 거야?”“네. 어젯밤에 악몽을 꾸신 것 같더라고요. 유진이인지 유정이인지 아무튼 제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부르며 힘들어하시길래 옆에 있어드렸어요.”허태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또 그 꿈을 꿨군. 아…… 심유진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겠네.’허태준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고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배고프지 않아요? 뭐 먹고 싶은 건 없어요?심유진이 그에게 물었다.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그였기에 배가고파 죽을 것 같았다.“배가 고프네.”심유진은 식당에 전화를 걸었다.“여기 허 대표님 방인데요. 죽 두 그릇 부탁해요.”“두 그릇?”“그럼 혼자 먹게요? 내 입은 입도 아닌가?”“너 죽 싫어하잖아?”허태준의 입에서 불쑥 저 말이 튀어나왔다.심유진은 조금 의아했다.“제가 죽을 싫어한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안 거죠?”그녀는 담백한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극적이고 매콤한 음식을 선호하는 그녀는 허태준의 말에 놀랐다.‘내가 죽을 싫어하는
허태준이 샤워를 하러 간 틈을 타서 심유진은 자기 방으로 갔다.핸드폰을 집어 든 그녀는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에 놀랐다.병원에서 온 전화 한 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소한 전화번호였다.‘왠지 예감이 불길해.’그녀는 부재중 전화 역시 조건웅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그녀는 핸드폰을 밖에 두고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허태준이 있는 욕실과 심유진이 있는 욕실은 벽을 하나만 두고 있었기에 그가 씻는 소리가 그녀에게 다 들렸다. 심유진 역시 피곤한 몸을 녹이기 위해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허태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땀으로 흠뻑 젖었던 옷을 다시 입기 싫었는지 아랫도리에 목욕 수건만 둘른 채 밖으로 나왔다.그 사이에 심유진은 준비 된 죽을 꺼내 먹고 있었다.그가 나온 것을 보고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머리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그녀의 눈에 거슬렸다.물방울은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미끄러져 그의 가슴과 등,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어제까지만해도 열이 많이 났잖아요. 머리 안 말리면 안돼요.”심유진은 헤어드라이어를 찾아 플러그를 꽂고 허태준을 소파에 앉혔다.그녀는 그의 몸 옆에 반쯤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드라이어를 들고,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금방 마를 거니까 걱정마요.”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두피를 쓰다듬고, 따뜻한 바람이 그의 귀로 불어오자 그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허태준은 금방이라도 심유진을 소파 위로 넘어뜨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속으로 원주율을 외웠다.심유진은 그런 그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리 말리기에 집중했다.“다 됐다!”그녀가 드라이기를 두고 그를 보았다.“얼굴이 빨개요. 또 열 나는 건가?”그녀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짚자 허태준은 부끄러운 듯 몸을 뒤로 뺐다.그 순간 심유진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전화 좀 받고 올게요.”심유진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을 보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