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은 젖은 옷을 벗고 따듯한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개운하게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상쾌함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똑똑-”허태준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잠시만요.”“밥 먹으러 가야하지 않아?”심유진은 꼬르륵 소리나는 배를 움켜쥐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밖에 있던 허태준은 그녀가 문을 열지 않자 다시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뭐해?”“아무것도 아니에요.”“밥 먹어야 하지 않냐고.”“먹어야죠 같이 먹을까요?”“아니 난 배고프지 않아. 혼자 먹고 와.”“아……”심유진은 허태준의 차가운 대답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순간 마음이 얼어붙었다.**심유진은 볶음밥 2인분을 시켜 하나는 혼자 먹고 하나는 포장해서 방에 가지고 갔다.비록 허태준이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지만 운동량이 그렇게 컸는데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돌아온 그녀는 허태준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허태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허 대표님 거기 계십니까?”그녀는 허태준이 듣지 못할까 봐 큰소리로 물었다.방안이 유달리 조용했고, 심유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허 대표님!”불길한 예감이 갈수록 짙어지자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암막 커튼으로 시커먼 방 안에는 숨소리만 가득했다.“아…… 잠들었구나.”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거실 탁자 위에 볶음밥을 올려놓은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잠에서 깨어나자 저녁 6시가 됐다그녀는 지긋이 허태준의 방문을 보았다. 문은 아직도 굳게 닫혀있었다.“허 대표님! 식사는 하고 주무셔야죠!”그녀의 목소리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녀는 그가 너무 걱정된 나머지 텔레비전을 보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배가 꽤 고플텐데? 저 사람은 저녁도 안 먹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그녀는 그의 방문을 열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불을 들췄다.큰 몸집의 남성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있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심유진의 심장 박동이 갑자기 빨라졌다.‘아니야…… 설마 내 이름이겠어? 내가 잘못들었겠지. 유진이가 아니라 유정이라고 한거야! 암 그렇고 말고!’심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그 순간 허태준의 표정은 마치 가위에 눌린듯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유진아, 가지 마!”순간 허태준이 큰소리를 질렀다.그의 외침은 처참하고 절망적이었다.심유진은 악몽을 꾸는 듯한 그의 슬픈 표정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허태준은 손을 뻗어 끊임없이 손가락을 벌렸다가 꼭 쥐는것이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것 같았다.무의식적으로 심유진은 손을 내밀었다.허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힘을 다해 그녀를 붙잡았다.심유진은 옅은 신음소리를 내며 아픔을 꾹 참았다.그녀의 손을 잡자마자 그의 표정은 안정적으로 변했고, 심유진은 그의 옆에 기대앉아 수건으로 조금씩 얼굴의 땀을 닦았다.그런 그를 보는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이상하고 복잡했다.“띵동-”바깥에서 초인종이 울렸다.아마 데스크에서 부른 의사가 왔을 것이다.심유진이 손을 빼려고 하자 허태준은 손을 더 꽉 잡았다.“가지 마.”그는 조용히 속삭였다.그녀가 손을 빼려고 할 수록 그는 그녀를 붙잡았다.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빨리 나가봐야 했지만 허태준이 놓아주지 않자 심유진은 안절부절했다.“안 갈 겁니다. 그러니 놔줘요.”“거짓말이잖아.”잠자던 허태준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코를 찡그리는데 모습이 유달리 슬퍼보였다.‘허 대표를 아프게 한 여자가 있는 모양이군……’심유진은 아직도 그가 부르는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거짓말 아니니까 걱정말아요. 안 가요.”심유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허태준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태준 씨. 제발 이것 좀 놓아주겠어요?”그녀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허태준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입술을 오므리더니 천천히 손을 놓았다.그 틈
허태준의 차가운 말투에 심유진뿐만 아니라 옆에 준비하고 있던 의사도 겁에 질려 손에 쥐고있던 주삿바늘을 땅에 떨어뜨렸다.심유진의 몸은 순간적으로 굳어졌고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다. .허태준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왜 내 방에 들어왔냐고.”심유진은 허태준의 물음에 정신이 들어 의사를 가리키며 말했다.“당신이 열이 나서 의사를 불러왔어요.”허태준은 그제야 그녀 뒤에 남자가 청진기를 목에 걸고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여기 체온계 줄게요. 이걸 겨드랑이에 넣고 체온을 재야 해요.”“아, 힘 없어서 나혼자는 무리인데. 좀 도와주지?”허태준은 당당하게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심유진은 의사와 그를 방안에 남기고 나와버리고 싶었지만, 그가 열이 펄펄 끓는 환자라는 사실에 충동을 꾹 참고 그의 옆에 앉았다.“그럼 단추 풀게요.”허태준은 그녀에게 자신을 맡긴듯 가만히 있었고, 심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잔뜩 긴장을 한 듯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행여 그가 들을까 얼굴을 푹 숙이고 그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빨리 좀 하지?”그녀는 겨우 맨 윗단추 세 개를 풀었고, 허태준은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팔을 움직였다.벌어진 잠옷 사이로 보이는 그의 분홍빛 어깨는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심유진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재빨리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얼굴을 돌렸다.“5분 동안 그러고 있어요.”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자신의 휴대폰으로 5분 후 알람을 맞췄다.의사는 심유진과 자리를 바꾸어 허태준의 침대 옆에 섰다.“목이 아프거나 설사를 하나요?”“아뇨.”“그럼 아픈 곳은 어디죠?”“없어요.”의사의 물음에 허태준은 대충대충 대답했다.“띠리링-” 마침 그녀가 맞춘 알람이 울렸고 의사는 손을 뻗어 그의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빼려고 했다.“아, 내가 직접 뺄테니까 제 몸에 손 대지 말아요.”의사는 지금까지 이렇게 비협조적인 환자를 본 적이 없었던지,
허태준은 고개를 저으며 입맛이 없다고 했다.“그럼 물 좀 마실래요?”그녀는 그의 입술이 까슬할 정도로 마른 것을 보았다.“응.”그녀는 냉장고 안에 있는 생수를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넸다. “힘이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어.”“그럼 제가 일으켜 드릴게요.”그녀는 그의 목 뒷부분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침대 위로 30도 정도 끌어올렸다.허태준은 그녀의 품에서 물을 마시더니 피곤하다는 듯 다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좀 더 잘래요?”그는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심유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이용해 심유진을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다.“아니, 잠이 안오네. 옆에서 얘기 좀 해줄래?”심유진은 황당항 그의 요구에 당황했다.“무슨 얘기요?”“아무 말이라도 좋아.”그녀는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몰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여형민 씨에게 부탁해서 여기로 와달라고 할까?’심유진이 한참 말이 없자 허태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됐고, 지금 몇 시야?”“8시 43분이요.”“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니.”허태준은 여기까지 와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넌 저녁 먹었어?”“저녁…… 먹었죠.”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뭐 먹었어?”“볶음밥이요.”“맛있었어?”“그냥저냥 괜찮아요.”…모두 영양가 없는 얘기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꾸준히 대화를 이어갔다.심유진이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자 허태준이 졸리냐고 물었다.그녀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졸리지 않다고 했다.“피곤할 텐데, 졸리면 가서 좀 자. 어차피 한 시간은 더 남았으니까.”“됐어요.”심유진은 두 눈을 크게 떴다.“괜찮아.” 허태준은 링거를 놓지 않은 왼손으로 침대 옆자리를 툭툭 쳤다.“여기 자리 있어. 그냥 여기서 자.심유진은 그의 말에 졸음이 확 달아났다.한 번도 동침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의식이 멀쩡한 상태로 그의 옆에 눕는 것은 처음이었다.“아니요. 하나도
심유진은 색색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허태준은 고개를 돌리고 실소를 터뜨렸다.‘안 졸리다고 하더니. 결국 이렇게 잠이 들었네.’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다가 멈췄다.‘됐다. 그냥 자게 두자.’**“띠리링- 띠리링-”갑작스러운 핸드폰 벨소리가 방안의 정적을 깨뜨렸다.심유진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자기가 맞춘 알람인줄 알고 데스크 전화 쪽으로 걸어갔지만, 핸드폰 벨소리는 알람이 아니라 조건웅의 담당 간호사에게 온 전화였다.“음…… 여보세요?”조건웅의 담당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 씨. 혹시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줄 수 있어요?”“아뇨. 제가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급한 일인데!”“제가 지금 외부라 갈 수가 없어요.”“음…… 오늘 조건웅 씨 사망하셨어요!”간호사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심유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뭔가 터진 것 같았다.심유진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언제요?”“조건웅 씨 사망하셨어요. 30분 전에.”“왜요?”“자살이요. 뛰어내렸다고 하더라고요.”그녀는 간호사가 조건웅은 반신불수일뿐 생명의 위험이 없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예사롭지 않았다.“죽기 전까지 당신만 찾다가…… 갑자기 병원 창밖으로 뛰어내렸어요.”“자살이라고요? 게다가 어떻게 병원 밖으로 뛰어내려요? 다리를 못 움직이잖아요!”“두 팔로 난간을 짚고 올라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병원이 발칵 뒤집혔어요. 지금 당장 와줄 수 있어요?”심유진의 호흡은 점차 불안정해졌고 눈앞도 흐릿해졌다.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을 힘들게 한 그를 죽도록 미워했다. 하지만 반신불수가 됐다는 그의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미움은 점점 사그러들었다.그와 우정아는 각자의 자리에서 벌을 받았기에 이제 심유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조건웅이 죽길 바란 적도 있었는데…… 막상 죽었다고 하니…… 이 감정은 뭐지?’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허태준이 자기를 보고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두 사람은 가까이 있었고, 방안은 조용했기에 그는 방금 그녀가 간호사와 통화한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가봐야 해?”“아니요.”심유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허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여기서 어떻게 가요. 갈 방법도 없고, 이제 그 사람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그 사람이 죽어서 슬퍼?”“아무 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심유진은 솔직했다.“그래도 그는 너 몰래 밖에서 딴짓을 했던 사람이잖아. 너를 그렇게 아프게했던 사람인데 아직도 감정이 남은 거야?”심유진은 안 그래도 마음이 힘든데 허태준이 자극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이제 이 얘기는 안 하면 안 될까요?”“너를 찬밥 신세로 만든 사람이 죽었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냐? 눈물을 왜 흘려?”심유진은 그에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손등에 꽂힌 링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을 보며 괴로워했다.그는 그녀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녀에게 위로 한 마디를 할 수는 없었다.마침 심유진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의사 불러야겠네요.”그녀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의사는 5분 만에 왔다.“여기를 꾹 눌러줘야 해요.”그는 솜을 뜯어 심유진에게 주었다.심유진이 솜으로 그의 손등을 누르자 허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고, 심유진은 그의 행동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손을 뺐다.솜이 침대에 떨어졌고 바늘 구멍에서는 검붉은 피가 졸졸 흘러나왔다.“뭐 하는 거죠?”의사는 심유진을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고열로 생사를 오가던 사람입니다!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생사” 라는 단어는 심유진을 혼란스럽게 했다.의사는 그녀에게 다시 솜을 주었고, 그녀는 다시 허태준의 손등을 꾹 눌렀다.허태준이 이번에도 그녀의 손을 잡았으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의사는 심유진에게 체온계를 주면서 한 시간마다 체온을 재보고 밤에
허태준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믿지 않았다.학교에서는 친구조차 없었으며 자신의 부모도 믿지 않았다.그의 부모는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두 부류만 있다고 가르쳤다.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실과 득을 따졌다. 그러니 사람들과 깊이 교제하지 못했고 또 그들과 감정도 나누지도 못했다.기쁨, 슬픔, 행복, 절망, 좌절 등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온갖 기분이 그에게는 사치품 같았다.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가업을 물려받기 위한 기계에 가까웠다.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가 최고의 경영자가 될 것이라며 칭찬했다.그는 어떠한 잘못도, 어떠한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심유진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일밖에 모르는 그런 기계같은 사람이었다.어쩌면 심유진을 만난 것이 그에게는 큰 사고일지도 모른다.그는 지금까지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게 서투르고 당황스러웠다.심유진로 인해 그는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그녀가 힘들어 할 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그 슬픔에서 꺼내주고 싶었다.아직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서툰 그는 그녀를 배신한 조건웅에게 그녀가 동정심을 갖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배신한 조건웅이 자살이라는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옳은 일이라고 여겼다.어쩌면 허태준은 조건웅을 질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유진은 허태준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기에, 그가 그저 자신을 비아냥거리고 한심하게 여기는 줄만 알았다.그런 그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그녀는 당황스럽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몰랐다.“미안해…… 이건 진심이야.”허태준은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아, 이래서 잘생기면 용서가 된다는 거구나.’그녀는 빚어 놓은 것 같은 새초롬한 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풀렸다.방금까지는 그의 태도와 말에 화가 났지만, 그의 진심어린 사과에 심유진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허태준은 그런 그녀의
천장이 열리고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허태준이 기침을 했다.기침소리에 정신이 든 심유진은 그에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주더니 리모콘으로 천장을 닫으려고 했다.“추우니까 빨리 이불 덮어요!”“괜찮아. 닫지마.”“뭐가 괜찮아요! 이러다가 또 열나면 의사 선생님한테 혼나는 건 나라고요!”“그래도 잠깐이니 괜찮아. 예쁘잖아. 그치?”허태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정말 예뻐. 그치?”“아……”그의 손길에 깜짝 놀란 심유진은 침대 위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심유진은 허태준과 누워있는 순간 만큼은 조건웅이 죽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그녀는 핸드폰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찍었다.눈으로 보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사진에도 별들이 아름답게 찍혔다.“이전에 팔공산에 한두번정도 와봤지만 이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은 없었어요.”“맞아. 나도 몇 번 와봤는데, 이런 적은 없었어. 그래서 더 특별해.”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허태준이 연신 기침을 해댔다.심유진은 그의 오른쪽 탁자에 놓여진 리모콘을 가져가기 위해 그의 몸 위로 살짝 올라왔고, 그녀의 가슴이 허태준의 얼굴에 살짝 닿았다.허태준이 아무리 기운이 없다고 해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참았다.‘앞으로 천천히 알아가자……’그는 무의식적으로 불끈 솟아오르는 또 다른 자신을 억눌렀다.**심유진은 의사의 말대로 시간마다 그의 체온을 쟀다.“38도……”그녀는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와 핸드폰으로 알람을 여러 개 맞췄다.심유진은 자신도 편하게 눈 좀 붙여야겠다고 생각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잠시 후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유진아! 유진아!”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허태준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허태준은 또 열이 나는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더웠는지 덮고있던 이불을 걷어찼다.“유진아...유진아!”그의 표정이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