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입술을 핥고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주소 찍어주시면 바로 갈게요.”이현은 카메라를 끄고 레스토랑 주소를 메시지로 전송했다.조건웅이 바로 심유진을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혼 여부를 열렬하게 토론했다.“진짜 이혼한 건 아닌가 봐요!”“심 매니저 진짜 너무 착한 것 같아요. 남편이 바람피웠는데 아직도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고 있다니.”“그럼 어떡해요? 요즘 사회 현상이 딱 이래요. 이혼한 여자는 남자보다 좋은 상대를 만나기 훨씬 바쁘다고 했어요.”“두 사람 아직 아기도 없는데, 차라리 이혼했으면 좋겠어요. 심 매니저님 이혼하면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엄청 많을 것 같은데요?”“그만해요. 오늘 우리끼리 한 말은 절대 비밀이에요.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회사에 소문나면 진짜 큰일이에요.”이현은 손을 저으며 동료들의 수다를 제지했다.**그 시각, 조건웅은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지난번 샤부샤부 가게에서 사고가 난 후, 우정아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몸조리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조건웅도 우정아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하며 우정아의 몸조리에 신경을 썼다.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생활할 때 사이가 아주 좋았다. 다툼도 거의 없었고, 서로의 온기에 취해 현실을 잊었다. 하지만 우정아의 집에서 함께 지낸 이후로 두 사람은 매일 같이 말다툼을 했다.조건웅과 심유진이 함께 생활했을 때, 두 사람은 집안일을 분담하기로 약속하고 가끔 조건웅이 프로젝트에 참석해 집에 빨리 돌아오지 못하는 날에는 심유진이 더 많이 분담하기도 했다.그러나 우정아는 사회 초년생이자 어려서부터 고생은 모르고 지냈다. 온실 속 화초인 그녀는 집안일은 할 줄 모른다고 선전포고를 했다.조건웅이 처음 우정아의 집에 갔던 날, 도둑이 든 줄로만 알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거실 소파에는 그녀의 옷들이 쌓여 있어 소파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입었던 옷 안 입었던 옷, 속옷, 겉옷이 모두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즐겨보는 패션
우정아가 퇴원을 한 후, 조건웅은 자신의 부모님을 고향 집으로 모셔가지 않고 더 큰 집으로 이사하고 부모님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러면 부모님도 우정아를 더 많이 신경 쓸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는 매일 퇴근하는 시간이 늦어지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도 점점 늦어졌다. 모든 업무를 끝내더라도 그는 우정아의 히스테리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야근도 자발적으로 했다.오늘도 마찬가지로 집에 돌아가기 싫은 밤이다.**조건웅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심유진의 직장 동료들은 거의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정신이 말짱한 몇 명만 남아 심유진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조건웅은 자신이 생각이 많았는지 아니면 예민했던 탓인지, 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경멸하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매니저님 데리러 오셨어요? 여기요!”그를 발견한 이현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심유진을 가리켰다.조건웅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바로 심유진의 상체를 일으켰다.브이넥의 얇은 스웨터를 입고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그녀의 하얀 목이 드러났다.조건웅은 심유진을 빤히 쳐다보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심유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다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녀의 예쁜 얼굴, 그녀의 농염한 몸에 마치 자석이라도 있는 것 마냥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녀가 침대에서 하는 행동은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녀와 잠자리를 하는 날이면, 항상 만족하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침대에서 뜨거운 불나방과 같은 우정아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었다.육체와 정신을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와 달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심유진한테서 더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우정아의 화려한 말재주와 아양을 떠는 목소리가 생각나, 심유진을 보면 역겨운 마음마저 들었다.조건웅은 가까스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손을 뻗어 심유
조건웅은 우정아와 싸우지 않고 싶지 않았기에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나 아직 회사야. 무슨 용건있어?”“건웅 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죠? 방금 당신 직장동료에게 물어봤는데 한 시간 전에 회사에서 나갔다는데?”“……”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어디에 있는지 당장 사실대로 말하라고! 설마…… 그 여자랑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거라면……”“아니야. 너야말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냥 오늘 일이 좀 힘들어서 친구랑 술 한잔 하기로 한것 뿐이야.”“아? 그럼 왜 나한테는 회사라고 거짓말을 한거죠?”우정아는 조건웅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조건웅이 누구겠는가. 심유진 몰래 우정아와 만났던 조건웅 아니겠는가? “내가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다고 하면 네가 괜히 걱정할까봐 그런거야. 넌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임기응변에 능한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정아의 물음에 답했다.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조건웅이 뛰는 놈이면 우정아는 나는 놈이었다.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하, 그래요? 그럼 같이 술 마신다는 친구 좀 바꿔줘봐요.”조건웅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반응에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는 잠시 후 허공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정아가 너보고 전화 좀 받으래!”3초 후 그는 목소리를 변조해 답했다.“무슨 전화로 보고까지 해?”“에이, 그러지 말고 형님 좀 살려줘라!”“아 싫어! 나 이런거 싫어해.”“미안 정아야. 친구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 전화는 힘들 것 같아.”우정아는 핸드폰 넘어로 들려오는 그의 발연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하…… 조건웅, 넌 지금 나를 심유진 취급 하는 거야? 내가 바보도 아니고 지금 그 발연기를 믿을 것 같아?”“누가 연기를 한다고 그래?”“내가 30분 줄테니까 그 시간 안에 내 눈앞에 나
심유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건웅에게 여러번 전화를 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어느덧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됐고, 퇴근한 심유진이 아파트 대문을 지나가려던 찰나 어떤 사람이 그녀의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끽—“그녀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갸냘픈 두 팔이 뛰어든 사람의 성별을 알려주었다.심유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를 갓길에 세우고 고개를 돌려 여자가 있던 쪽을 보았다. “어라?”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헛것을 봤나?”그 순간 갑자기 조수석 문을 강하게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잠겨있자 여자는 더욱 흥분한듯 창문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문 열어! 문 열라고!” 여자는 목에서 쇳소리가 날 정도로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가로등 빛도 어둡고 길게 풀어헤친 여자의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저거 뭐야…… 설마 귀신이야?’심유진은 섬뜩한 여자의 모습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도대체 누구세요!” 심유진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여자를 보았다.그 여자는 심유진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창문을 더욱 거세게 두드렸다.“문 열라고! 문 열어!”여자가 어찌나 힘이 좋은지 차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심유진은 여자와 말이 통하지 않자 시동을 다시 걸고 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차가 움직이자 밖에 있던 여자는 더욱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끈질기게 그녀의 차를 쫓았다.“문 열어! 문 열라고! 내 말 안 들려?”심유진은 계속해서 따라오는 여자를 무시하며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대문이 열리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려 경비원을 보았다.“죄송합니다. 입주자님, 현재 차 옆에 서계신 여성분이 아파트 주민이 아니셔서 대문을 열 수 없습니다. 문을 열면 뛰어들어갈게 뻔하기에…… 정말 죄송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10분 전에 경찰을 불렀으니 금방 도착할 겁니다.”리친시아에는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등 프라이버시를
경비원의 완강한 태도에 우정아는 어쩔 수 없이 노선을 틀었다.“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제발 저를 들여보내 주세요! 정말 생사가 걸린 중대한 일이라니까요? 오늘 꼭 삼촌을 만나야 해요. 저 정말 죽어요!”우정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경비원에게 애원했다.경비원은 그런 우정아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규정은 규정이기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우정아는 들고 있던 가방을 경비실에 던져넣더니 경비원에게 다가와 큰 소리로 말했다.“정말 빡빡하게구네! 가방 안에 내 핸드폰, 지갑, 신분증이 다 들어있다고! 됐지? 나 진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니까?”경비원은 그녀의 가방을 집어와 다시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죄송하지만, 규정은 어길 수 없습니다.”마침 심유진의 차 뒤로 다른 차가 왔다.“빵빵—”심유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숨만 푹 내쉬었다.심지어 경비원은 우정아에게 붙잡혀서 심유진 뒷차에게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잠시 후 심유진의 백미러에 한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그 남자는 경비실과 심유진의 차 사이에 멈춰 섰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냉담한 목소리에는 짜증이 많이 섞여 있었다.‘저 목소리는……’심유진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허 대표님, 오셨습니까!”경비원은 경직된 표정으로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우정아 역시 허태준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어떻게 당신이?!”“여기서 이렇게 뵙네요."허태준의 입꼬리가 한쪽만 싱긋 올라갔다.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경비원이 허태준에게 다가가 물었다.“두 분 서로 아는 사이십니까?”“그렇다고 볼 수 있죠.”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우정아는 이때다 싶어서 허태준의 팔에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여기 허 태표님하고 나하고는 잘 아는 사이라고! 이제 그만하고 대문을 열어주지?”허태준은 우정아의 태도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녀를 밀어냈다.경비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더니 허태준에
허태준의 단호한 거절에 우정아의 걸음이 멈췄다.‘저 남자 뭐야? 외투까지 벗어줘 놓고는?’우정아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허태준을 보았다.“왜 그러시는 거죠? 이 추운 날……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도 아니…….”그러나 허태준의 눈에는 그의 앞에 서있던 차가 점점 멀어지는 것만 보였을뿐 우정아가 묻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심지어 여형민의 차가 그의 옆에 다가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빵!빵!”여형민의 경적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고, 우정아는 여전히 차 밖에 홀로 서있었다.여형민은 우정아가 입은 외투를 힐끗 보고는 허태준에게 말했다“저거 엄청 비싼 코트 아닌가? 와~ 허 대표님은 저 정도 금액의 옷은 그냥 달라고 하면 주시나봐요~”“……”“대표님 역시 통이 크셔! 그럼 대표님, 연말 보너스 기대해봐도 되는건가?”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여형민을 보았다.“못 들어주겠네.”여형민은 멋쩍은 표정으로 허태준을 보았다.“에이, 허 대표 보너스는 됐고, 나중에 저런 옷들 좀 나눠줘~”“나중에 내가 내놓은 쓰레기 더미에서 몇 개 집어가시던가.”사실 허태준과 여형민은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여형민은 허태준이 심유진에게 감정이 있다는 약점을 내세워 항상 그를 자극했다.“그나저나 방금 앞에 있던 차는 심유진 씨 차 아닌가? 이야~ 대표님 심유진 씨 보는 앞에서 외투를 벗어주다니, 혹시 심유진 씨가 오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 안 되시나?”“……”허태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내가 왜 그래야 하지?”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태준을 태운 차량이 대문을 지나 들어갔다.그는 창밖을 보며 심유진을 떠올렸다.‘심유진, 어쩜 그렇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 거니……’**허태준이 우정아를 도와주고 외투를 빌려준 장면을 본 심유진은 어딘가 모르게 답답했다.‘내가 허태준 씨랑 어쩌다 하룻밤을 보낸 건 사실이지만, 나와 그의 사이는 기껏해야 아는 사이일 뿐이니까…… 그가 무슨 일을하고,
심유진은 커튼을 걷어 바깥 동태를 살폈다.그녀의 눈에 경찰차 두 대가 들어왔고, 경찰차는 그녀가 살고 있는 동을 지나 뒷쪽으로 갔다.이십 분이나 지났을까 경찰차는 다시 그녀가 살고 있는 동 쪽으로 되돌아왔다.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핸드폰에 아파트 단체 톡방에서 어제 있었던 소란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지금 몇 시입니까? 지금 이 시간에 누가 소리를 지릅니까?][그러게요. 여자가 우는 것 같은데……][경찰 불렀습니다. 다들 조금만 참아봅시다.]심유진은 단체 톡방에 대화들을 읽다가 문득 우정아가 떠올랐다.“설마…… 우정아겠어?”그녀는 의심가득한 표정으로 단체 톡방의 대화를 천천히 읽어보았다.[아무래도 25층 사람을 찾는 것 같던데.][25층이면 YT그룹 우원정 대표?][우 대표 얼마 전에 여기 매매하고 이사를 갔잖아요? 누가 찾아온 거죠?][YT그룹 우 대표, 뇌물 수수 사건하고 횡령 건으로 감옥간 거 아니었나요?][200억 가까이 해먹었다고 하던데, 10년은 감옥에 있을 듯 하네요.][YT그룹 임원들도 싹 교체된다던데, 어떻게 되려나 모르겠네요.]심유진은 톡방 내용을 가만 보다가 머리가 지끈거려 핸드폰을 잠시 탁자에 내려두었다.우원정 대표의 횡령 사건은 심유진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사실 YT그룹의 몰락을 전혀 예상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심유진은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느끼고 헛웃음이 났다.십여 분 정도 흘렀을까. 그녀의 전 시어머니가 호텔로 그녀를 찾아왔다.전 시어머니는 전과는 다르게 호텔 로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심유진이 나오자마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심유진은 깜짝 놀라 뒷걸음을 치다가 회전문 양쪽에 놓여진 나무 화분을 쓰러뜨릴 뻔했다. 그녀의 전 시어머니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손목을 꽉 움켜줘고는 놓지 않았다.“유진아! 우리 건웅이 좀 살려줘!”심유진은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있었다.“아프니까 이거 먼저 놓으세요!”조건웅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조건웅의 어머니는 세번이나 머리를 조아렸고, 처음보는 광경에 심유진도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조건웅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보았다.“유진아 건웅이 병원에 있어. 한 번만 가서 들여다 봐……”심유진은 팔에 닭살이 돋았다.‘결혼 생활 내내 이름 한 번 따듯하게 불러준 적이 없으면서 자기 필요할 때만 이러네.’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을 보니 조건웅이 어떤 병에 걸렸든 큰병에 걸린 게 틀림없을 것이다. ‘설마 뭔 불치병에 걸린 거 아냐? 나보고 골수 이식같은 걸 부탁하려고?’심유진은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싶지도 않았고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게다가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을 힘들게 했던 전 시어머니의 부탁에 기가 차고 기분이 언짢았다.“제가 왜 거길 가요? 안 가요.”심유진이 거절하자 그의 어머니가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유진아! 제발 부탁이야! 이전에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은 다 잊고 딱 한 번만 도와줘라……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빌게!”“지금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조건웅하고 저는 이미 끝났어요! 남이라니까요?”“살 맞대고 산 사이가 어떻게 남이 되니! 유진아 그렇게 모질게 굴지 말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부탁하마.”“조건웅 지금 우정아랑 살고 있는 거 아닌가요? 왜 저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우정아한테 가보세요.”“그 계집 이름은 꺼내지도 마!”우정아 얘기에 그녀의 안색이 바뀌더니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소란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행인들은 자초지종을 모르고 심유진을 손가락질했다.“저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노인더러 무릎을 꿇게 하다니.”“그러게! 딱 봐도 엄마 뻘인데 말이야.”“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쯧쯧.”심유진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몇 사람은 핸드폰을 들어 두 사람을 촬영하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