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은 성공적으로 조건웅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조건웅은 한참이 지나서야 파래진 얼굴로 겨우 한 마디 했다.“뻔뻔한 놈.”허태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34년을 살면서 그보다 더한 말을 훨씬 많이 들어왔다. “뻔뻔한 놈” 같은 건 전혀 그에게 대미지를 주지 못했다.“순진하면 사는 데 도움이 되나?”그가 반대로 조건웅에게 물었다.“뻔뻔해야 더 잘 산다는 도리는 나보다 거기 두 분이 더 잘 알 것 같은데.”그의 말에서 선명한 비꼼이 느껴졌다. 조건웅이 그걸 놓질 리가 없었다.“너!”조건웅이 발끈하더니 우정아를 놓고 그에게 달려들었다.그가 주먹을 꽉 쥔 채 허태준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불과 몇 센티를 앞에 두고 오히려 허태준한테 저지당했다.“주제넘네.”허태준이 코웃음을 치더니 조건웅의 손목을 꺾어 그의 몸을 반대로 휙 돌렸다.그가 조건웅의 뒷무릎을 발로 찼다.“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건웅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우정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처량한 비명을 내질렀다.“여기 사람 때려요. 살려주세요!”그녀의 날카롭고도 높은 비명 소리가 고요한 밤거리에 울려 퍼지며 유달리 귀를 찔렀다.허태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닥쳐! 아니면 너도 같이 맞을 줄 알아!”우정아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감히 당신이!”그녀가 애써 독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눈에 담긴 공포마저 가릴 수는 없었다.“내가 감히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따 보면 알게 되겠지.”허태준이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조건웅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종아리에 발을 디뎠다.그가 발끝에 힘을 실자 조건웅이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를 내질렀다.“정아야 경찰 불러!”그가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우정아가 번뜩 정신을 차리더니 손을 덜덜 떨며 가방을 한참이나 뒤적거려 겨우 휴대폰을 꺼냈다.그러나 그녀가 잠금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심유진이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렸다.“내 휴대폰!”우정아가 절망하며 소
조건웅은 절대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심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지난번의 통화를 마친 뒤, 여형민과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리친시아에 입주할 때까지 그와 그의 가족들은 한 번도 그녀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하지만 그래도 절대 방심할 순 없었다. 가까운 곳에 이사를 하고 출퇴근할 때에는 어떻게든 사람이 많은 곳으로 다니려고 노력했다.이틀 후, 총지배인이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총지배인의 표정은 아주 심각해 보였다.심유진은 최근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실수할 만한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지 않은 것 같다.그때,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 총지배인이 입을 열었다.“심유진 씨, YT 그룹의 우원정 대표와 아는 사이에요?”“YT 그룹 말씀이세요?”심유진은 몸에 있는 근육과 신경이 동시에 마비가 되는 느낌을 받았고,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우원정, 전 국민들조차 생소하지 않은 이름일 것이다. 70년대부터 부동산과 재개발을 통해 회사를 세우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각 분야에 손을 뻗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심유진이 경주에서 대구로 올 수 있었던 제일 큰 원인은 바로 YT 그룹... 아니, YT 그룹의 고위 임원들 때문이라 할 수 있다.YT 그룹에서 있었던 불쾌한 기억들은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런 YT 그룹과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지만 회사의 이름만 들어도 몸이 얼어붙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총지배인이 방금 말한 우원정은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우 씨는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성이라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모릅니다.”“무슨 일 있으세요?”그녀의 마음속에 적색 등이 깜빡거렸다.“진짜 모르는 사이 맞아요?”총지배인은 마치 심문하는 듯한 눈길로 캐물었다. 그는 눈빛 하나 만으로 그녀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어젯밤에 저한테 전화해서 아무 이유나 대고 심유진 씨를 자르라는 거죠?”총지배인은 객실 매니저
드디어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는 심유진은 그날 밤 오래간만에 달콤한 잠을 이뤘다.아침 회의를 마치고 총지배인은 그녀를 따로 불렀다.지금 당장 짐을 싸라고 할 줄 알았으나 총지배인의 입에서는 완전히 예상 밖의 말이 흘러나왔다.“유진 씨, 그냥 출근해도 돼요.”“네?”심유진은 그 결과가 마냥 기쁘지 않았고 갑자기 계속 출근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조건웅과 우정아가 절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우원정 대표가 총지배인에게 설득당했을 리가 없다.“허 대표님한테 말씀드렸더니 상관하지 말고 유진 씨 그냥 출근시키라고 했어.”“허 대표님? 허태준?”총지배인의 입에서 예상외의 인물이 나왔다.그는 서둘러 서유진의 입을 틀어막았다.“내 앞에서 허 대표님 이름 함부로 불러도 되는데 밖에 나가서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만약 허 대표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짐을 싸고 나가야 할지도 몰라요! 그땐 나도 유진 씨 편 못 들어요!”심유진은 속으로 YT 그룹의 인물관계도를 그렸다.‘그러니까 허태준이 우원정 대표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이네?’‘허태준은 CY 그룹의 대표이자 YT 그룹의 고위 임원이란 말이겠지? 사람이 어떻게 두 회사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지? 쉬는 시간은 따로 있을까?’심유진은 불현듯 이런 고민을 하는 자신을 비웃고 싶었다.‘나랑 뭔 상관이지? 바쁘든 말든,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잖아.’“아니요, 허 대표님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요.”“총지배인님 밑에서 이렇게 잘 배웠는데 설마 일자리 하나 못 찾겠어요?”“하지만 계속 호텔 매니저 일을 하고 싶다면 로열 호텔보다 더 좋은 호텔은 다시 찾지 못할 거야.”총지배인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 흔들었다.그의 말이 맞다. 우리나라에 있는 7성급 호텔 두 곳은 모두 로열 호텔이기 때문이다.근무 환경이나, 급여 및 복리후생, 미래의 발전 가능성도 모두 로열 호텔보다 더 좋은 호텔이 없기 때문이다.이곳을 나가면 더 좋은 직장을 찾지
조건이의 목소리가 로비에 울리자 모든 손님들의 주의를 끌었다.“내가 어쩌다 한번 여자친구와 함께 대구에 왔는데, 호텔 비용도 못해줘? 그 돈 얼마나 한다고? 월급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도 시동생한테 쓰는 게 그렇게 아까워?”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심유진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로열 스위트룸 하룻밤의 가격은 100만 원, 조건이는 모두 이틀 밤을 예약했으니 200만 원이다.200만 원은 심유진 월급의 반이였고, 눈 깜빡하지 않고 펑펑 쓸 수 있는 금액도 아니었다.조건이가 형수 대접을 해주면서 태도가 좋았다면 눈 한번 딱 감고 호텔 비용을 내줬을 것이다. 조건이의 막무가내인 태도를 보고 심유진은 조금 후회를 했다.처음부터 너의 형과 이혼을 했으니 이제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다면 이런 곤란한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 말을 하려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호텔 비용도 결제하지 않았다. 이제 동료 직원들한테 쪼잔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그때, 한껏 꾸민 모습을 하고 트렁크 두 개를 손에 쥔 여자가 나타났다.그 여자는 조건이 옆에 다가와 심유진과 데스크 직원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아직도 체크인을 못했어?”여자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조건이를 쳐다보며 말했다.“왜 이렇게 오래 결려? 형수가 이곳에 출근한다고 하지 않았어? 미리 방도 예약해 주지 않았던 거야?”이 젊은 여자는 아마 조건이의 여자친구일 것이다.‘역시, 잘 어울리는 바퀴벌레 한 쌍이야. 싹수없는 것도 꼭 닮았네.’젊은 여자의 말에 조건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순한 표정으로 변했다.그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어르고 달래며 여자의 기분을 풀어주었다.심유진은 조건이가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오늘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방은 마련되어 있는데 돈을 먼저 내야 한다고...”조건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그럼 돈을 주면 되잖아.”그러자 조
“매니저님, 긴급 상황입니다. 빨리 직접 오셔서 처리해 주세요.”이현의 목소리가 아주 다급해 보이자 심유진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호텔로 향했다.이현은 이미 주차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자 바로 운전석 문을 열어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에요?”심유진은 차에서 미처 내리지도 못하고 물었다.“어젯밤에 2510호에 입주한 손님께서 한 시간 전에 저희 안내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와 목걸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희 청소 직원이 가져간 거 아니냐고 해서 제가 아주머니들한테 물어보니 청소할 때 목걸이는 아예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손님께서 경찰에 신고까지 한 상황이고 매니저님보다 일찍 도착한 경찰관들이 지금 호텔방에서 상황을 알아보고 있습니다.”이현은 심유진의 바로 뒤에 붙어 걸으며 상황을 설명했다.“2510호?”심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2510호는 조건이와 그의 여자친구가 묵고 있는 방이다.25층에 도착한 심유진은 바로 두 사람을 발견했다.3명의 경찰관과 호텔 객실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 2명과 함께 있었다.심유진이 방 문을 노크하자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그녀는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죄송합니다 여러분. 저는 로열 호텔의 매니저 심유진입니다.”어젯밤 안내 데스크에서 심유진을 만난 적 있는 소아름은 바로 그녀를 기억해 냈다.“로열 호텔 매니저? 조건이의 형수?”소아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바로 씩 웃음을 지었다.“잘 됐네요.”그녀가 호텔 청소 아주머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몸 수색을 해봐야겠어요. 사물함도 같이 뒤져보면 더 좋고요.”“네, 가능합니다.”소아름의 제안에 심유진은 바로 동의했다.“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그녀는 바로 동의를 했으나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무슨 조건이죠?”“몸 수색을 하고 사물함도 뒤졌는데 손님 목걸이를 찾지 못했다면 저희 직원들한테 사과하세요.”객실에 꼿꼿한 자세로 서있는 심유진
조건이의 이런 반응을 심유진은 미리 예상하고 있어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너희들의 요구를 우린 충분히 만족시켰어. 목걸이는 우리 청소 직원이 훔친 게 아니야. 그러니까 모든 비난은 모욕과 비방이 되었지. 우리 호텔의 명성과 우리 직원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우린 너희 두 사람을 모욕죄로 기소할 거야.”그녀의 말에 소아름과 조건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러자 심유진은 바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물론, 너희들이 그렇게 악질 고객이 아니라 교도소까지는 아니고 그냥 배상 정도만 하게 될 거야.”조건이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지고 이를 갈았다.갑자기 그가 탁자 위에 놓인 유리로 만들어진 재떨이를 심유진한테 집어던졌고 심유진은 날아오는 재떨이에 오른쪽 어깨가 부딪쳤다.“아!”어깨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지자 그녀는 숨을 한 모금 들이켰다.“매니저님!”이현과 청소 아주머니가 서둘러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살폈다.“매니저님, 많이 다치셨어요? 빨리 병원에 가요!”유리로 만들어진 재떨이는 아무 살점이 없는 심유진의 어깨에 부딪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뼈가 고스란히 감당했다.심하게 다쳤는지 뼈가 부러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오른쪽 어깨를 조금도 들지 못할 뿐이다.조건이의 잘못을 따질 시간조차 없었던 그들은 바로 심유진을 부축하고 병원으로 향했다.“빨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응급실에 도착하자 의사는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하라고 했다.토요일 저녁의 응급실은 여전히 사람이 많다.엑스레이 대기실에서 심유진은 30분을 기다려야 엑스레이를 찍을 수 있었고 모든 검사를 마치고 다시 응급실에 돌아온 심유진은 눈이 너무 내려왔다.의사는 심유진의 엑스레이를 보며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가리켰다.“뼈가 조금 부러졌어요. 간단하게 고정할게요.”의사는 심유진의 어깨를 고정하는 기기를 가져와 당부했다.“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 최대한 오른쪽 어깨를 쓰지 마세요. 잠을 잘 때도 각별히 조심해야 돼요.”너무 졸려...심유진은 어깨에 전해지
“매일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는 거야?”야단을 치는 듯한 그의 말투에 심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어깨가 불편해서 어쩔 수 없이 배달시켜 먹는 거예요.”“어깨를 다쳤어?”허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어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가 입고 있는 겉옷을 통해 그녀의 어깨를 투시할 수 있는 사람처럼.“오른쪽 어깨 뼈가 조금 다쳤어요.”심유진은 자신의 다친 어깨를 조심스럽게 가리켰다.“괜찮아요. 며칠 쉬면 괜찮아진다고 했어요.”“어쩌다 다쳤어요?”여형민도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평소의 부드러운 모습인 그와 전혀 상반되는 표정이었다.심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벽에 부딪쳤어요.”하지만 여형민은 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다.“진짜 혼자 부딪쳤어요? 아니면 전 남편 가족들과 상관있는 일이에요?”심유진은 그의 물음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자신을 수상하게 쳐다보는 눈빛과 심문하듯이 몰아붙이는 말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가 이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사실대로 말해요. 진짜 전 남편 가족이 그랬다면 폭행으로 증거를 남겨 배상금을 물게 할 거예요.”조건이는 조건웅의 친동생이 맞지만, 이번 일은 조건웅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저도 더 많은 배상금을 받고 싶지만 아쉽게도 저의 부주의로 다쳤어요.”심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그래요.” 여형민은 더 캐묻지 않고 심유진의 손에 쥐어진 배달 주머니를 쳐다보았다.“매일 배달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저와 태준이가 집에 아주머니를 고용했어요. 매일 저녁마다 밥을 차리고 돌아가는데 저녁이라도 같이 먹는 건 어때요?”심유진은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매일 기름진 음식과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 음식들을 먹으니 집밥이 사무치게 그리웠다.하지만 이렇게 높으신 분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 사레에 들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밀려왔다.“아니요. 이제 거의 괜찮아졌어요. 조금만 더 괜찮아지면 배달음식
병원에서 검사를 마친 심유진은 바로 택시를 타러 길가에 나갔다.병원 앞에 있는 큰 길은 항상 꽉 막힌 상태여서 택시들도 이곳에 잘 오려고 하지 않는다.심유진은 앱으로 겨우 택시를 잡고 조수석의 문을 열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반대편 택시 뒷자리 문을 열었다.“빨리빨리! 여기야! 빨리 타!”그 사람은 목이 찢어지게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심유진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뒷좌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그 사람은 그녀의 전 시아버지이자 조건웅의 아버지였다!시아버지가 아직 대구에 남아 있다면 전 시어머니도...역시, 멀지 않은 곳에서 조건웅의 어머니가 한 손에 짐을 챙겨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우정아를 부축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우정아는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좀 천천히 가요!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빨리 걸으면 아픈 거 몰라요?”그러자 조건웅의 어머니는 바로 발걸음을 늦추고 우정아를 돌아보며 사과했다.“미안해! 미안해! 아버지가 재촉하시잖아! 나도 마음이 급해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어. 아프면 천천히 걸어도 돼. 택시도 이미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니 천천히 가도 돼.”그 모습을 본 심유진은 마음이 씁쓸했다.조건웅의 어머니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 씨 가문에서 그의 어머니는 절대적인 권력자였다.그들은 한순간도 심유진을 자신들의 며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녀가 조건웅의 앞날에 큰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고 말하며 항상 그녀를 비하했다.조건웅이 그녀를 처음 집에 데려간 날, 그녀는 평소 엄두도 내지 못했던 영양제를 가득 샀다. 결국 조건웅이 부모님은 자신이 사 온 영양제를 다락방에 쑤셔 넣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하물며, 그녀의 외모부터 지적하기 시작하더니 가정 환경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혀를 끌끌 찼다.그러더니 처음 집에 방문하는 심유진을 흘겨보며 가정부 대하듯이 대했다.손님인 그녀한테 과일을 깎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닥을 밀고 세탁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