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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더는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한때는 그들을 사랑했기에 기꺼이 뭐든지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이상, 내가 무엇을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수현이를 만나러 갔을 때 여전히 전화하고 있었고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수현이가 바쁘게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내 말을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집에 혼자 남은 희연이가 배고파할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속에 이제는 신경 써야 할 것이 생겼기에 모든 게 하찮게 느껴졌다.

“진 대표.”

난 수현 앞에 서서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수현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고, 상대에게 몇 마디를 더 하고 전화를 끊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응?”

난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잖아. 그게 뭐 이상해? 근데 진 대표는 왜 경주에 있는 아들 두고 여기에 와 있는 건데?”

수현이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나를 깊이 쳐다보았다.

나 역시 차분히 수현이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흐른 뒤, 수현이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다람이가 널 보고 싶다고 계속 보챘어.”

난 살짝 웃었다.

“걔한테 이미 지아가 있잖아. 날 만나서 뭐 하려고?”

수현이는 갑자기 내 팔을 붙잡고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정아야, 나 지아랑 결혼 안 했어. 그때 딱 한 번뿐이었어.”

수현이의 말은 나를 두 해 전 그 밤으로 되돌려 놓았다.

지아는 내가 임신했을 때 입었던 검은색 망사 원피스를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수현이는 지아의 얼굴을 베개로 덮어주고 열심히 몸을 섞고 있었다.

그리고 지아는 말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속일 필요가 있어?”

수현이는 대답했다.

“정아의 흉터를 볼 때마다 혐오감이 들어.”

그날 이후, 수현과 나는 사실상 끝이었다.

설령 같은 침대에 누워도 그건 그저 의무를 다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난 담담히 말했다.

“그건 한 번, 두 번의 문제가 아니야. 네가 그 일을 한순간, 우리 사이는 끝난 거야.”

수현이와 난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첫날에 만났다.

오해는 말아 줘.

그건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게 아니었어.

오리엔테이션 도중, 수현이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고, 난 바로 옆에 있었기에 심폐소생술을 해주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의사는 제때 조치를 취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현이는 고마움에 나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돈을 주려 했다.

밥은 먹었지만 돈은 받지 않았다.

성격이 무뚝뚝한 수현과 나도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우리는 그냥 밥만 먹고 헤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수현이는 집안 형편이 좋았고 외모도 준수해서 캠퍼스 내에서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우리 사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룸메이트였던 지아는 날마다 이것저것 캐물었다.

하지만 난 나와 수현 사이에 특별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걸 확신했다.

우리는 가정환경도 너무 달랐고 성격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로 대학교 1학년을 보냈다.

2학년이 시작된 후 수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

수업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저녁에 운동장에 나가 산책할 때도 수현이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캠퍼스에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다.

수현이의 어머니가 다른 가정에 끼어든 사람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수현이는 어떤 그룹 이사의 사생아라서 어머니가 본처에게 발각되어 결국 외국으로 보내졌다는 이야기였다.

더는 이곳에서 공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난 수현이에게 몇 번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내 마음은 답답했고 무슨 일을 해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테인리스 창틀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문득 수현이가 떠올라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답장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휴대폰이 두 번 진동하며 수현이의 답장이 도착했다.

[나랑 술 한잔해 줄래?]

수현이의 어머니는 정말로 다른 가정을 파괴한 여자였고 본처에게 발각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외국으로 떠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자살했다.

수현이는 공허한 눈빛으로 그저 병나발을 불며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취하지 않는 걸까?”

난 수현이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수현이의 눈에 비친 건 나뿐이었다.

“정말 취하고 싶어?”

수현이의 목젖이 움직였고 난 수현이의 입술을 덮었다.

그날 밤, 난 눈물을 흘리며 고통 속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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