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나려 할 때, 수현이가 입을 열었다.“한 번만 더 생각해봐. 이 나이의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안 돼. 그리고...”수현이의 눈빛이 마치 내 약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듯 반짝였다.“다람이를 떠나면 네 마음도 편할 것 같아?”순간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봤다.하지만 머릿속을 떠올리는 건 전부 희연이와 관련된 기억뿐이었다.희연이가 제일 좋아하는 채소는 토마토와 감자였다.음식을 가리는 법이 없었지만 유독 생강만은 손도 대지 않았다.하지만 문제는 없었다.나도 생강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희연이의 최애 색깔은 파란색.사실 바지보다 치마를 더 좋아하지만, 자존심이 세서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이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다람이와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난 고개를 들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네 덕분에 확실히 깨달았어. 이제 가야겠어. 우리 딸이 아직 밥도 못 먹었거든.”수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난 그 눈빛을 뒤로한 채 문을 열고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니 희연이는 이미 숙제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내가 돌아오자 희연이는 작은 다리를 쭉 뻗으며 부엌으로 달려갔다.그리고 나에게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내밀었다.“고마워.”난 죽 냄새를 맡으며 희연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장난스럽게 물었다.“뭐 안 물어볼 거야?”“뭐를요?”희연이는 TV에서 눈을 떼며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예를 들어, 그 애 때문에 널 버리지 않겠냐는 거?”“엄마가 그럴 거예요?”희연이는 당당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버렸다.“아니, 그럴 리 없지.”희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어요. 저 이제 잘게요.”난 살짝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내 품에 안겨서 같이 울어야 하는 거 아니야? TV에선 다 그렇게 하던데.”이미 침실로 들어간 희연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엄마, 차라리 공포영화를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학교에서 열린 부모
난 한숨을 쉬며 희연이에게 물었다. “함께 밥 먹고 싶어?”희연이는 거의 울 것 같은 다람이를 흘끗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엄마가 알아서 해요.”차 안에서 다람이는 조수석에 앉아 한껏 기뻐하며 가끔 나를 몰래 훔쳐보았다.내가 희연이와 대화를 나눌 때 입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예전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울진 않았다.확실히 예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졌다.하지만 사실 내가 다람이를 미워했던 이유는 단지 철없어서가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지금 다람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어른스러워졌기 때문은 아니었다.요 며칠, 수현이는 강주와 경주를 오가며 바빴다.그 사이 다람이는 집에 남은 집사에게 보살핌을 받았지만, 방과 후에는 종종 내 가게로 와서 식탁에 앉아 숙제하다 가게 문을 닫을 때쯤 떠났다.수현이는 이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고, 진씨 가문의 집사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곤 했다.하지만 이게 나한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천천히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내가 모성애가 넘쳐흐를 만큼 여유로운 사람도 아니다.오늘 다람이 생일을 함께 보내기로 한 것도 사실 그저 그들 사이에서 발을 빼기 위한 구실이었다.수현이가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심리전을 펼칠 만큼의 힘도 없었다.주차를 막 끝내려 할 때, 창문 밖으로 그림자가 비쳤다.바로 지아였다.지아는 말했다. “다람아, 이모가 생일 축하해 주려고 왔어.”결국 그 밥은 먹지도 못하고, 난 희연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희연이는 아직 어리다.가끔 공포영화를 보는 건 괜찮지만, 이런 불륜과 외도 이야기는 아직 접하기엔 이르다.우리가 차에 타려 할 때, 수현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의 위치를 누설한 비서를 나무라고 있었고, 다람이는 지아가 가져온 케이크를 바닥에 내팽개쳤다.“당신이 우리 엄마를 쫓아낸 거예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봐, 사람은 본능에 따라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어린아이도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법이다.내가
그날의 소동 이후, 학교는 여름방학에 들어갔다.수현이는 오랫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다람이도 더는 내 가게에 오지 않았다.난 그들 부자간의 감정싸움이 마침내 끝났다고 생각했다.이제야 드디어 나와 희연이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그날, 난 한 봉지의 새우를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희연이가 보이지 않았다.난 스스로 침착하라고 다독이며 휴대폰을 꺼내 희연이의 선생님과 자주 가는 서점에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모두 희연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불안감이 몰려와 난 당장 경찰에 신고하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때 마침 복도에서 장바구니를 든 옆집 박 아주머니를 만났다.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박희란이 물었다. “왜 그렇게 급해 보여, 무슨 일 있어?”“희연이가 없어졌어요.”내가 말하자 박희란은 나보다 더 놀란 듯했다.“정아야,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혹시 그 남자가 희연이를 데려간 거 아닐까?”난 순간 멍해졌다. “뭐라고요?”“맨날 차 끌고 네 가게로 오던 그 남자 말이야.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던데?”난 누군지 바로 알았다.그렇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부정하려 했지만, 박희란은 계속해서 말했다. “요즘 재혼할 때도 애들 생각 많이 한다던데? 혹시 그 남자도 너랑 잘해보려고 희연이부터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 거 아닐까? 혹시 모르니까 전화 한 번 해봐.”박희란의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난 그 말 속에 담긴 의도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난 그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다람이는 어렸을 때부터 버릇없이 자랐다.요즘 다람이가 내가 희연이에게 입가를 닦아주거나, 넥타이를 고쳐주고, 디저트를 만들어줄 때마다 눈가에 그리움과 슬픔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그런데 다람이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난 차갑게 대했다.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이 빨리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정말 그들이 희연
난 수현이의 속마음을 모른 척하며 물었다. “왜? 혹시 이 차 조수석에 다른 여자가 앉은 적이라도 있어? 지아인가?”수현이는 당황한 듯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정아야, 내가 잘못했어. 근데 나한테 기회를 한 번도 안 줄 수는 없잖아.”“지난 2년 동안, 나도 많이 반성했어. 그리고 다람이도 이제 예전처럼 고집 세지 않아. 그래서...”“그래서 2년이 지난 지금도 지아가 케이크를 들고 경주에서 여기까지 와서 다람이 생일을 챙겨준 건 다 지아 혼자만의 착각이란 말이야?”수현이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목이 메는 것 같았다.“그날 이후로, 지아는 내 아이를 가졌어.”“근데 난 지아한테 낙태하라고 했어.”난 그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지더니 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이 몰려왔다.처음으로 9년 동안 수현이를 사랑했던 그 정아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내가 그때 받은 상처를 다시 떠올리라는 거야?”“아니면 다른 여자의 불행을 끌어와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려고 하는 거야?”“아니야.”수현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난 그냥 네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난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만이 네 아이를 낳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야?”수현이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멍하니 답했다.“내가 너한테 다람이를 낳게 해선 안 됐어. 그때 강하게 밀고 나갔어야 했어.”그 순간, 오래전 다람이를 임신했을 때 유산 위기를 겪었던 기억이 떠올랐다.병원에서 의사가 나한테 낙태약을 먹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난 내 아이를 해치려는 마음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단호히 말했다.다람이를 낳고 나서 난 수현이에게 이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거냐고 물었다.수현이는 다람이를 보는 눈빛에 아무런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아주 무심하게 말했다.“다람, 진다람.”난 당황하며 물었다.“이름이 너무 성의 없지 않아?”“이름은 예쁘잖아.”난 수현이의 말을 믿었다.
출발하기 직전, 다람이가 창문에 얼굴을 붙인 채 조용히 눈이 빨갛게 충혈된 상태로 나를 바라봤다.“엄마, 나중에 엄마가 보고 싶으면 전화해도 돼요? 엄마가 많이 바쁘면 한 달에 한 번만 할게요.”그 순간, 난 다람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수현이의 아버지가 벌을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손자 중에는 다람이가 유일했다.이번에 돌아가는 것도 다람이를 진씨 가문의 후계자로 제대로 키우기 위한 것이다.차라리 진씨 가문에서 자라는 것이 다람이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차는 점점 멀어지다가 다른 차들 속으로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그때 희연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엄마, 진다람이 레고 일부러 부쉈어요. 내가 봤어요.”난 잠시 멍해졌지만 곧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그 녀석, 아버지보다는 똑똑하네.”“역시 내 유전자가 섞인 덕이지.”희연이는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저녁은 뭐 먹어요?”“마라탕.”“그건 절대 싫어요!”진수현의 이야기.어머니가 투신하던 날, 난 바로 그 아래에 있었다.내 눈앞에서 한 사람이 순식간에 고깃덩이로 변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사람들은 모두 어머니가 진 사모님에게 시달리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하지만 난 어머니를 죽인 것은 나라고 생각했다.진 사모님은 돈을 주며 어머니에게 나를 진씨 가문에 남겨두고 해외로 떠나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그 이후로 어머니는 사흘 동안 울기만 했고 눈은 토끼처럼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수현아, 엄마는 너 없으면 못 살아.”난 여러 번 어머니를 설득했다.내가 돈을 벌면 어머니를 데려올 거라고, 이건 잠깐의 선택일 뿐이라고.어머니를 혼자 외국에 두고 내버려둘 리 없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어머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그럼 나도 어쩔 수 없어.”내가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난 말을 남기고 나섰다.그리고 다시 어머니를 본 건 68층 건물 옥상이었다
수현이와 이혼하던 날, 법원에서 나올 때 하늘은 당장에라도 비를 쏟을 것처럼 어두웠다.“정아야.”수현이는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집까지 데려다줄게.”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뒷좌석에서 다람이가 손목시계를 내밀었다.“아빠, 이모가 오늘 저녁에 탕수육 해주신다고 했잖아. 장 봐서 집 앞에 계신대.”수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림이를 힐끗 봤다.“먼저 타.”다람이는 나를 잠깐 흘겨보고 억울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괜찮아.”난 단호히 말했다.“너희 방해하고 싶지 않아.”수현이는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저녁에 네가 제일 좋아하는 샤브샤브 먹으러 가도 돼...”“수현아.”난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우리 이혼했어.”수현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다가 잠시 눈가가 붉어지더니 금세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그래... 근데 헤어져도 잘 지내자고. 게다가 우리 세 식구가 오랫동안...”“그 식당 두 달 전에 문 닫았어.”난 차분하게 대답했다.“내가 그때 얘기했었잖아.”그 식당은 우리가 대학 시절부터 자주 가던 곳이었다.두 달 전, 가게 주인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SNS에 올렸을 때도 난 두 번이나 말했다.하지만 수현이는 바빴다.그리고 수현이가 시간이 생겼을 때는 이미 가게는 문을 닫았고, 우리 9년의 관계도 그 사이 끝나버렸다.“수현아, 너랑 다람이 잘 지내. 더는 방해하지 않을게.”그 말을 남기고 난 짐을 챙겨 택시에 올랐다.짐은 많지 않았지만,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이였다.그렇게 난 경주를 떠났다.수현이의 외도를 처음 알게 된 건 동창 모임 이후였다.우스운 건 그 상대가 다름 아닌 대학 시절 내 룸메이트였던 지아였다는 사실이다.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일을 끝낸 상태였다.수현이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고, 지아는 내 아들과 함께 레고를 맞추고 있었다.마침 해적선의 마지막 조각을 끼우던 다람이는 지아의 얼굴에 뽀뽀하며 신 나게 말했다.“이모 최고예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모예요!”지아는
지아는 나와 다람이를 번갈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엄마가 돌아왔으니까, 이모는 이제 가야 해.”그러자 다람이는 바닥에 앉아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엄마 나가! 난 이모가 엄마였으면 좋겠어! 이모가 엄마가 돼줘!”겨우 4살인 다람이가 철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그 순간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아팠다.지아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애들은 원래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곁에 있던 수현이가 바닥에 앉아 있는 다람이를 차갑게 끌어올리며 말했다.“다시 그런 말 하면 밖에 나가서 한 시간 동안 벌 서야 할 줄 알아.”수현이의 목소리에는 냉정한 위압감이 담겨 있었고, 다람이는 순순히 품에 안겼다.조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거실은 다람이의 훌쩍거림만 남아 조용해졌다.난 눈앞에 펼쳐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며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떠올랐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유지하며 이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수현이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난 여전히 전업주부로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지아 역시 여전히 내 고민을 들어주며 도와주는 친구로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리고 다람이, 지금은 제멋대로 굴지만 결국 내가 낳은 아들이니 언젠가는 내 편이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수현이를 바라보며 난 내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운 단호한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수현아, 우리 이혼하자.”그렇게 난 고향 강주로 돌아왔다.고향이라 부르긴 했지만, 그곳에서 나를 반겨줄 이는 보육원 원장님뿐이었다.“정아야.”원장님은 내 손을 꼭 잡고 눈물 글썽이며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려고 그래?”난 원장님의 손을 감싸 쥐고 발아래 고인 작은 웅덩이를 바라보며 차분히 대답했다.“다 잘 될 거예요.”정말 그럴까?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남편, 아들, 그리고 절친.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웠던 세 사람이 단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라져버렸다.어린 시절처럼 난 다시
저녁에 희연이가 베개를 안고 내 방문을 두드리며 물었다.“같이 자도 돼요?”난 희연이를 침대로 들어 올렸고, 그때 희연이가 살짝 떨고 있다는 걸 느꼈다.“무슨 일 있어?”희연이는 이불 속에서 눈만 내밀며 답했다.“엄마가 말한 그 영화 봤는데... 좀 무서웠어요.”순간 멍해졌다가 나도 모르게 크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희연이는 이불을 더 끌어올리며 말했다.“웃지 마요. 엄마.”그날 이후로 희연이는 자주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희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희연이가 누군가와 싸웠다는 전화를 받았다.학교로 가는 길에 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희연이는 또래보다 성숙한 아이였고, 감정 조절도 남다른 편이었다.내가 희연이와 함께 지낸 이후로 흔들렸던 순간은 공포영화 사건 딱 한 번뿐이었다. 항상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여온 아이가 어떻게 싸움을 벌였을까?교실에 도착하니 선생님은 이미 두 아이를 떼어놓고 있었다.선생님은 사건의 경위를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새로 전학 온 남자아이가 희연이의 전화 시계 화면을 보고 그 배경에 있는 여자가 자기 엄마라고 우겼다는 것이었다.그러다가 시계를 빼앗으려 했고, 결국 싸움이 벌어진 것이었다.희연이는 내가 오자마자 펜을 내려놓고 책가방을 챙겨 나에게 다가왔다.희연이가 다치지 않았고 감정도 차분한 모습에 안도했다.그때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달려들며 외쳤다.“엄마!”희연이는 짜증 난 듯이 그 아이의 옷깃을 잡아채며 뒤로 밀어냈다.“야, 콧물 엄마 치마에 묻었잖아.”그제야 난 방금 엄마라고 부른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비록 앞니가 빠지고 키가 많이 컸지만, 내 아들 진다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다람이는 울어서 눈이 부은 상태로 나를 가리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분이 내 엄마야. 내 엄마를 돌려줘!”희연이는 똑같이 단호한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