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뜩 정신을 차린 강유이는 거울로 자신의 뒤에 서있는 진예은의 모습을 확인했다.방금 씻고 나온 그녀 역시 옷을 갈아입으려는 듯했다. 기숙사에는 전신 거울이 딱 하나였고 마침 강유이가 점령하고 있었다.강유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아무 옷이나 집어 들고 말했다.“난 다 골랐으니까, 이제 네가 골라.”그녀가 막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때.“난 그 옷이 괜찮은 것 같아.”놀란 유이가 고개를 돌려 진예은이 가리킨 옷을 바라보았다. 그건 자신의 팔에 걸쳐진 베이비블루 원피스였다.강유이가 그 원피스를 빼내서 되물었다.“이거?”진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강유이가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옷을 말아 쥐고 서둘러 침실로 들어갔다.아홉시가 될 때쯤, 강유이는 학교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나오고 또 학교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십분을 넘게 기다려도 한태군은 나타나지 않았다.강유이가 자신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런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한태군이 아니라 리사였다.“어쩐 일이야, 강유이?”리사는 두 사람이 있을 때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다.순간 당황하던 강유이가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한태군 전화를 왜 네가 받아.”“한태군 전화를 왜 내가 못 받겠어. 한태군한테 볼일 있나 본데, 미안하게 됐어. 그가 나한테 널 상대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거든…”강유이는 리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이 덮쳐왔다. 몇 년 전, 한태군은 공항에서 그 말을 한 후, 냉정하게 그녀에게 등을 돌렸었다. 그녀는 현재 그때 느꼈던 감각이 자꾸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설마, 한태군이 정말로 그녀를 갖고 논 걸까?다른 한편, 전화를 받은 리사가 잔뜩 긴장한 채로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고용인들이 거실에 없는걸 확인하고, 한태군의 생일을 입력하며 비밀번호를 풀려고 시도했다.인증 실패.그녀가 이를 악물고 강유이의 생일을
강유이가 미처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진예은이 허리를 숙이며 아이를 안아주었다.“연서야, 나 보고 싶었어?”여자아이가 그녀의 목을 파고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쭈뼛쭈뼛거리며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진예은이 진연서를 베이비시터에게 건네주자 베이비시터가 아이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유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서… 설마 네 딸이야?”진예은한테 정말로 아이가 있었단 말인가!진예은이 고개를 돌리더니 유이에게 되물었다.“너도 그 소문 믿어?”강유이가 머리를 저었다.소문을 믿진 않았다. 하지만 아이와 그녀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다.아이는 이제 한 살 정도 되어 보였고 진예은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였다. 만약 정말 진예은의 아이라면 그녀가 열여섯에…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진예은이 팔짱을 꼈다.“쟤는 그날, 네가 봤던 그 남자의 딸이야.”강유이가 놀라 되물었다.“그 너한테 찝쩍거리던?”그녀가 집안으로 들어갔다.“그 남자는 내 오빠야.”강유이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현관으로 들어가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오빠라고. 그런데 왜…”그날 진예은한테 매달리던 남자는 꽤나 험악해 보였다. 때문에 절대 두 사람이 남매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진예은이 냉장고에서 주스 두 병을 꺼내 한 병을 그녀에게 건넸다.“웃기지. 난 그 남자 동생인데, 그 남자는 내가 자기가 남긴 오점을 처리해 주는 도구로밖에 안 보더라고.”그녀가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이런 남매 관계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녀한테 가족이란 절대 가슴 따뜻한 그런 게 아니었다.강유이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 잠시 후, 유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네가 휴학한 원인이 소문으로 떠돌던 그런 일 때문이 아니라, 네 오빠의 딸 때문이었어?”진예은은 느긋하게 주스를 마시며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어쩔 수 없었어. 오빠가 어떤 귀족 딸이랑 약혼을 했는데, 이 아이가 걸림돌이 되어버렸거든. 만약 이 아이를 인정
강유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숨을 고를 줄 몰랐던 그녀는 억지로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점점 빨개지고 당장 질식할 것만 같았다.한태군이 드디어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가 눈물을 잔뜩 머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미안해, 유이야.”잔뜩 서러웠던 유이가 결국 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트렸다.“미안하다 한 마디면 다야? 이 거짓말쟁이.”그가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너를 바람맞힐 생각은 없었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하필 한태군의 어머니한테서 척추 종양이 발견되어 떼어내야 한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종양을 떼내지 않으면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그가 유이한테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유이는 이미 그를 수신차단한 뒤였다.“사정이 있었으면 나한테 전화를 해야 할 거 아니야…”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옆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내가 뭐 그렇게 쪼잔한 사람인 줄 알아? 네 전화를 리사가 받게 하질 않나. 너 내가 그 애를 싫어하는 걸 알면서…”한태군의 눈빛이 싸해졌다. 그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네가 나한테 전화한 줄 몰랐어.”강유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휴대폰을 들고 집사한테 연락했다. 그의 안색이 어두웠다.“거실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녹화 영상, 지금 저한테 보내주세요.”그의 휴대폰에는 그녀한테서 걸려온 통화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건 분명 리사가 자신의 휴대폰을 건드린 것도 모자라, 함부로 그의 전화를 받고 기록까지 삭제했다는 말이었다.그의 휴대폰 비밀번호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보아하니 전에 그녀가 그의 노트북 비밀번호를 본 것 같았다.집사가 녹화 영상을 그에게 전송했다. 그가 영상을 확인하기 전에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 일은 내가 다음에 다 보상해 줄게.”그녀가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녀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다음은 없어.”한태군이 피식 웃었다.그는 휴대폰 속에서
하지만 한태군은 허를 찌르는 쪽이었다. 겉으로는 온화한척하면서, 뒤로는 싹을 잘라낼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한재욱이었다면 적어도 그녀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어느 정도 감안해 줄 것이다.하지만 한태군은 겉으로는 한재욱의 체면을 생각해 주는 척하며, 뒤로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집사님,”한태군이 피터를 바라보았다.“저애에게 집안에서 가장 힘든 일을 맡겨주세요. 저희 가문은 쓸모없는 사람은 키우지 않습니다. 가사도우미 분들한테 저 애가 허튼짓을 하지는 않는지 주시하라고도 해주세요. 만약 잠깐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물 한 모금도 주지 마세요.”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리사는 뺨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신경 쓰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있을 뿐이었다.그녀는 예전에 집에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을 정도로 곱게 컸었다. 그런데 한 씨 가문에 들어온 이후로 못 해본 일이 없었다.한 씨 가문에서 그녀는 가사도우미만도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쫓겨나면 더욱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이대로는 안 된다. 그녀는 어떻게든 지금의 신세에서 벗어나야만 했다.-이튿날, 강유이는 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돌려주러 도서관으로 가는 중이었다.복도를 지나던 그녀가 문뜩 걸음을 멈췄다. 한태군이 해당화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하얀색 셔츠를 입은 모습이 깔끔하고 단정해 보였다.햇볕이 촘촘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그를 비추었다. 어렴풋하게 보이던 그가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강유이가 그에게 다가갔다.“여긴 어쩐 일이야?”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널 기다리고 있었어.”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미 수신거부도 풀었는데. 넌 전화할 줄도 모르냐?”이렇게 무작정 기다리다니. 만약 그녀가 오늘 외출하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나?한태군이 그녀한테 한걸음 다가가며 미소 지었다.“네가 화나서 내 전화 안 받으면 어떡해.”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자기 신발만 바라보았
한태군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왜?”유이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알았다면 뭐 라도 사 왔을 거 아니야. 빈손으로 병문안 오는 법이 어딨어.”적어도 꽃다발이나 과일 바구니라도 준비해 왔어야 했다.한태군은 조그마한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강유이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미래 며느리가 병문안 와준 걸로 충분히 기뻐하셨을 거야.”“미래… 뭐?”강유이가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가 토끼 눈을 한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며느리?”한태군은 눈썹만 찡긋거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강유이가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밀쳤다.“누가 너한테 시집간대? 이, 이 파렴치한 놈!”그녀가 황급히 뛰어가 버렸다.한태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무작정 앞으로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눈 깜빡할 새에 화요일이 되었다.반재신은 최근 졸업 논문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막 연구실에서 나오던 그의 귀에 한태군과 강유이가 사귄다는 말이 들려왔다.“진짜야? 반 씨 가문의 공주님과 한 씨 가문의 도련님이 진짜로 사귀어?”“내 이 두 눈으로 직접 두 사람이 주말에 같이 나가 노는 걸 봤다니까. 거짓말일 리가 있겠어?”반재신이 순식간에 두 사람 뒤로 다가갔다.“방금 그 말, 다시 한 번 해봐.”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소문을 전해 들은 반재신이 강유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연습실을 나온 강유이는 반재신이 벽에 기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오빠 논문 다 썼어?”반재신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쏘아보았다.“응. 내가 논문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한 뭐시기 그놈이랑 붙어먹었다 이거지?”강유이가 당황했다.“아… 아니야.”하지만 어쩐지 양심이 찔렸다. 그녀의 동요를 반재신은 정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이제 나한테 거짓말까지 한다 이거지?”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는 한태
“미안한데.”진예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나도 한태군에 대해서 잘 몰라.”그녀는 불과 몇 년 전에서야 한태군과 처음 만났었다.한태군은 어렸을 때 이미 한 씨 노부인의 박해를 피해 Z 국으로 보내졌었다. 그때도 그녀는 한태군을 잘 몰랐다.단지 한태군이라는 그녀의 사촌 오빠가 있는데 그녀와 생일이 한 달 차이 밖에 안 난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사촌 오빠라는 사람은 절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간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어른들은 그가 나이도 어린데 다방면으로 재능이 넘친다고 칭찬했다. 금융, 컴퓨터, 증권, 미디어 산업, 게임, 심지어 주얼리까지 각종 분야를 정통하고 있었다.내부인 중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 적 있었다. 한태군 정도의 자질이면 몇 년 내로 한 씨 집안이 재기에 성공할 거라고. 그리고 그는 그걸 하나하나 증명해 보였다.몇 년 전, 한재욱이 그를 데리고 각종 연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수많은 의심과 괴롭힘을 당했었다. 하지만 번마다 전혀 기죽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대처했다.상업계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서로 손을 잡아도 수틀리면 뒤통수를 치는 일이 끊이질 않았다. 똑똑하지 못하고 변화에 제때에 반응하지 못하는 놈은 잡아먹히는 게 이 바닥의 룰이다.한태군은 마치 쉽게 길들어지지 않는 한 마리의 야생마 같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그는 마치 적의 포위를 거침없이 뚫고 가는 적토마와 같아, 동종 업계 사람들이 아무리 막아내려 해도 막아낼 수 없었다.이대로만 큰다면, 경력도 더 늘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강유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진예은 조차 그를 모르는데 자신은…정말로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네가 한태군의 적도 아니고, 뭘 그렇게 걱정해.”진예은이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오빠가 너에 대한 애정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누가 누굴 손에 쥐고 흔들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는 거야.”강유이는 한태군의 예외에 속했다. 그
도대체 자신이 강유이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머릿속에 묘한 수가 떠올랐다.정연이 한희운의 팔짱을 끼고 귀빈들 앞에 나타났다. 몸조리를 잘 한 덕분에 정신도 맑았고, 예전처럼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가문에 시집간 제국의 공주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애롭고 친절한 평범한 가정의 현모양처였다.그녀가 샴페인 잔을 들더니 적극적으로 귀빈들을 향해 술을 권했다.한희운이 그녀를 배려해, 도우미한테 그녀의 샴페인을 주스로 바꾸어 달라고 부탁했다.“당신은 퇴원한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술은 마시지 마.”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조금은 괜찮아요. 제가 애도 아니고.”한희운이 그녀의 옆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내 눈엔 항상 애로 보여.”곁에 있던 사람들이 웃으며 두 사람을 놀려주었다.“가주님과 사모님께서는 결혼한 지 이렇게나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신혼처럼 알콩달콩 하시네요. 아주 깨가 쏟아집니다.”“자네도 남은 날을 즐겁게 보내고 싶다면, 돌아가서 자네 와이프와 한번 시도해 보게.”강유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자기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그녀의 엄마, 아빠 역시 결혼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질리지도 않는지, 시도 때도 없이 애정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유이는 그런 부모님들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하지만 나중에 같은 반 친구들한테서 들으니, 그들의 부모님들은 자신의 엄마 아빠와 사뭇 달랐다.어떤 이들은 이혼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매일같이 다투고,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어던 부모는 일하느라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하고, 불안정한 감정 때문에 재혼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친구들의 부모님은 아무리 서로를 미워하는 나날을 보내더라도 이혼을 택하지 않고 현재를 유지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오늘날 한태군의 부모님들이 저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나중에 자신도 결혼하게 되면 저들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고, 한 씨 가문에서 그녀를 학대한다고 생각할 것이다.중요한 건 한재욱은 이 일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한재욱은 최근 항상 바쁘다 보니 집에 온 시간이 적었다. 그녀는 한재욱이 자신의 모습을 보면 무조건 진상을 추궁할 것이라고 믿었다.사람들이 모여있는 지금이 그녀한텐 기회였다. 아무리 한 씨 가문에서 한태군의 입김이 세다고 해도, 가족의 체면을 생각하면 절대 자신을 더 이상 어쩌지 못할 것이다.한재욱한테 자신의 고충을 알려줘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그에게 독립을 요구해도 그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한태군의 공제에서 잠시 벗어날 수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자신이 있었다.그녀가 한재욱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버지 저… 전 그냥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한 것뿐인데. 혹시 제가 잘못한 건가요?”한재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조카며느리의 퇴원 기념 연회였다. 그런데 자신의 양녀인 리사가 저런 옷을 입고 나선 건 확실히 보기 좋지 않았다.“얼른 가서 옷 갈아입지 않고 뭐 해.”리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한태군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정연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는 한재욱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만약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게 된다면 한 씨 가문이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네 아버지 말씀 들어. 얼른 가서 옷부터 갈아입거라.”정연이 메이드에게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을 지시했다.리사가 메이드를 밀어내며 정연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울며 호소했다.“사모님, 저 태군 오빠가 저를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또 제 존재가 이 집안 체면을 깎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저 이 집에서 나가서 살아도 괜찮아요. 절대 다시는 태군 오빠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게요.”참으로 훌륭한 연기였다. 리사의 말속에 숨은 뜻을 모든 사람들이 눈치챌 수 있었다.한태군이 새로 들어온 양녀를 싫어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