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후.반지훈은 강성연과 단둘이 먼저 서울로 돌아갔다. 강시언과 강해신은 강유이와 함께 군오에서 방학을 보내기로 했다.강유이는 조각 케이크를 들고 하정원을 만나러 화실로 왔다. 하정원은 마침 연필을 들고 인물화를 그리고 있었다.강유이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하정원이 누구를 그리고 있는지 할끗 봤다. 점점 선명해지는 사람의 얼굴에 강유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이거 우리 삼촌이죠?"하정원은 손을 흠칫 떨며 머리를 돌려 강유이를 바라봤다."아니거든. 누가 그래?"강유이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삼촌이랑 닮은 것 같은데...""말도 안 돼, 네 삼촌 아니거든."하정원은 단호하게 반박하고 머리를 돌렸다. 연필을 들고 있는 손은 또다시 흠칫 떨렸다. 강유이의 말대로 그림 속의 얼굴이 진여훈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이거 왜 이래? 난 절대 진여훈 그 자식을 그린게 아닌데... 그래, 유이가 갑자기 그렇게 말해서 비슷해 보이는 걸 거야.'하정원은 연필을 들고 그림을 수정하며 말했다."이제는 다르지?"강유이는 한쪽에 자리 잡고는 턱을 괴며 미소를 지었다."숙모, 우리 삼촌 보고 싶죠?"하정원은 연필을 내려놓으며 머리를 홱 돌렸다."내가 왜?"하정원은 자신이 진여훈을 보고 싶어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두 사람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 말이다.지난번 그런 일이 일어난 후, 진여훈은 어디로 갔는지 일주일 동안이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자신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지, 안 그러면 지금보다 더 어색했을 것이다."우리 아빠는 숙모 같은 사람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했어요.""너 계속 어른을 놀릴래?"하정원은 강유이가 분명 일부러 이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강유이는 소중히 들고 왔던 조각 케이크를 건네며 말했다."여기요, 이건 삼촌이 전해 달라고 한 케이크예요."하정원은 멈칫하며 물었다."진짜? 그 사람이 나한테 전해주라고 했어?"강유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하정원은 말문이 막힌 듯 멈칫하며 진여훈에게 물었다."언제부터 듣고 있었어?"진여훈은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서 거리를 좁혔다. 벽에 드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는 다정한 자세로 꼭 붙어있었다."네가 나를 그리고 있다고 말할 때부터.""그거 너 아니거든."진여훈은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정원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나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진여훈은 멀어져가는 하정원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고 없이 뒤로 당겨진 하정원은 중심을 잃고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는 하정원을 벽에 대고 머리를 숙여 입술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말했다."솔직하게 말해."하정원은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뭘?"진여훈은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물었다."나 어때?""네... 네가 뭐?"하정원은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진여훈은 두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며 또다시 물었다."그날 밤 나 어땠어?"하정원은 머뭇거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파르르 떨리는 눈초리로 말했다."장난치지 마.""장난 아니야."진여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끈질기게 물었다."나 진짜 어땠어?"하정원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동공 지진을 했다. 진여훈을 밀어내기 위해 그의 가슴에 놓인 손은 주먹 모양으로 잡혔다.솔직히 말하자면 하정원은 그날 밤 약간의 설렘을 느꼈다. 진여훈과의 스킨십도 싫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육진우 한 명만 바라볼 줄 알았다. 하지만 몸의 반응은 생각과 달랐다. 그녀는 약간 부끄러운 감도 들었다, 마치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하정원은 오랜 시간 동안 육진우를 향한 마음을 지켜왔다. 다른 사람의 방해는 받고 싶지도, 받을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정원은 진여훈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포기하고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아무렇지도 않았어.""확실해?"끝도 없이 질문하는 진여훈에 하정원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도대체 어쩌자는 거야!"진여훈은 하정원의 목을 감싸더니 예고 없이 입술을 겹쳤다
진여훈은 하정원의 마음을 얻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하정원은 멈칫하며 물었다."너 또라이야?""그건 인정하는 바야."진여훈은 피식 웃었다. 하정원은 이때다 싶어 몰래 옆으로 비켜서며 물었다."만약 내가 계속 너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내기할래?""무슨 내기?"진여훈은 또다시 하정원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과연 나를 좋아하게 될지 말지로 내기하자. 나는 좋아하게 된다에 한 표."하정원은 어이없는 듯 피식 웃으며 진여훈을 바라봤다."자신 있나 봐?""그럼, 넌 어디에 걸래?"하정원은 진여훈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유치하게 무슨 내기야. 안 해."진여훈은 피식 웃으며 또다시 하정원을 끌어안았다."나를 좋아하게 될까 봐 무서워?"하정원은 머리를 숙여 신발을 바라봤다."그냥... 별 의미 없는 것 같아서."진여훈은 하정원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기회를 주지 않았다."맞네, 무서워하는 거."하정원은 계속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진여훈의 따듯한 숨결이 그녀의 이마를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그녀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거든..."진여훈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가에 짧게 뽀뽀를 남겼다."나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무서워?""아니라고 했잖...!"진여훈은 또다시 예고 없이 입술을 겹쳤다. 조금 전보다 더욱 격렬한 움직임에 하정원의 입은 저절로 벌려졌다. 거침없이 파고드는 열정은 그녀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렸다. 얼마 후 진여훈은 천천히 머리를 들고 여운에 잠긴 채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었다."나 잘할 수 있어."하정원은 뒤늦게 정신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이건 반칙이야!"진여훈은 미소를 짓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정원은 후다닥 화실 안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아버렸다. 밖에 가둬진 진여훈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어차피 그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니까.강유이는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여훈이 화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뒤늦게 정신 차린 하정원은 한혜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먼저 돌아가요.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요."한혜숙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하정원은 애써 진여훈을 무시하고 말했다. 한혜숙은 그냥 기분이 나쁘겠거니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난 먼저 갈게. 너 혼자 조심해."하정원은 한혜숙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머리를 돌렸다. 진여훈과 단발머리 여자는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정원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몰래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카페 앞까지 왔다.하정원은 약간 현타가 오기도 했다. 진여훈이 누구와 만나든 그녀가 상관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만 따라다니고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강유이가 갑자기 말했다."숙모!"하정원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유이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강유이는 밀크티를 든 채로 활짝 웃었다."오빠랑 삼촌이랑 다 같이 쇼핑 나왔다가 삼촌은 친구 만나야 한다고 해서 헤어진 참이었어요."강유이는 또 카페를 바라보며 말했다."친구라고 한 사람이 여자였구나..."하정원은 강유이의 이마를 살짝 밀며 말했다."어린애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강유이는 이마를 만지작대며 입을 삐죽였다."제가 뭘 어쨌다고요. 근데 숙모... 여기까지 몰래 따라온 거예요?""아, 아니거든! 누가 따라왔다고 그래! 나도 그냥 우연히 발견한 거야."하정원이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고 강유이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진짜 엄청난 우연이네요.""강유이, 솔직히 말해. 너 삼촌한테서 뭐 받았지? 요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아니에요, 숙모. 오해예요."강유이는 커다란 눈으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화실에서는 삼촌이 저한테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예요. 또 삼촌이 샀다고 하면 숙모가 싫어할 것 같아서 제가 샀다고 했단 말이에요.""너 좀 의심스러운데."하정원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말하자, 강유이는 머리
하정원은 순간 표정 관리를 실패하고 말았다."나 질투 안 했거든!""누가 질투했어?"하필이면 이때 진여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유이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삼촌, 볼일은 끝났어요?"진여훈은 하정원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된 채 머리를 끄덕였다.단발머리 여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카페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진여훈의 곁으로 걸어오며 미소를 지었다."여훈 씨."단발머리 여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진여훈을 부르는 것을 듣고 하정원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미소로 위장하며 말했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진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유이가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우연이요? 숙모 여기까지 쫓아온 거 아니었어요?"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 들키게 생기자, 하정원은 다급한 말투로 부정했다."내가 미쳤다고 쟤를 쫓아오게? 군오는 작은 곳이라 원래 재수 없으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거야."하정원은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가 진심으로 화난 것을 보고 강유이는 진여훈을 향해 말했다."삼촌, 장난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에요?""괜찮아, 내가 잘 달래면 돼."진여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하정원을 따라갔다. 그의 곁에 있는 여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단발머리 여자는 긴장한 기색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진여훈의 직원으로 오늘은 일일 배우로 섭외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연기에 능숙하지 못했던지라 줄곧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강유이가 그녀의 불안을 보아내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수고 했어요.""그래, 네 숙모가 나를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네.""괜찮을 거예요~"하정원은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그녀가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강한 힘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진여훈은 하정원을 꼭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화났어?""왜 또 미친 짓이야? 화 안났어"하정원은 그를 밀쳐내고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하지만 진여훈이 먼저 손을 뻗어 차 문을
하정원은 미래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진여훈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도 아프고 불편했다.하정원은 심호흡하며 말했다."나 돌아갈래.""또 피하는 거야?"진여훈은 하정원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그는 하정원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을 벌인 것은 단지 그녀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이토록 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지만...하정원은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다. 세상을 뜬 육진우는 아직도 그녀의 마음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설레는 것은 '배신'으로 간주 되었다. 설사 설렜다고 해도 그녀는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하도록 다그치는 것은 반작용만 일으킬 뿐이었다.진여훈은 최대한 조심했는데도 역시 급했던 모양이다. 그는 하정원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알겠어. 더 이상 다그치지 않을게."하정원은 눈에 띄게 멈칫했다. 진여훈은 천천히 이어서 말했다."그래도 네가 내 진지한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 사람을 대신하겠다는 게 아니야. 네가 나한테 호감 있다는 말 하나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하정원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내가 호감 있으면 뭐? 있던 호감도 마이너스 치게 생겼는데...""그 여자는 우리 회사 직원이야. 내가 친한 척 연기 해달라고 부탁했어."진여훈은 하정원의 입꼬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정원은 그의 손을 사정없이 뿌리치며 물었다."연기?"하정원의 화난 얼굴은 질투하는 여자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진여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그래, 너를 위한 연극이라고 할 수도 있지."하정원이 넋이 나간 것을 보고 진여훈의 미소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네가 화났다는 건 그래도 나를 신경 쓴다는 뜻이겠지?""미친놈...""그래, 나 미쳤어. 네가 치료해 줘.""꺼져!"진여훈이 또다시 하정원의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손을 빼내려고 했던 하정원은 손목에서 전해진 차가운 감
하정원은 육진우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16살부터 유학을 시작하면서 연애를 일찍 시작하기도 했다. 기껏해야 포옹과 키스이기는 하지만 보는 게 많은지라 동년배보다 훨씬 일찍 도를 텄다.외국의 개방적인 교육 방식 덕분에 서로 마음이 생긴 성년 남자는 순정 따위를 제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요즘 국내에도 이런 사람이 많이 생기는 추세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목적으로 연애를 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다.하정원을 좋아하는 남자 중 대부분이 다 그녀의 몸매에 눈독을 들인 타입이었다. 그래서 육진우의 순수함이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정원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한 번도 함부로 대한 적 없었다. 키스하는 것도 먼저 허락받는 사람이니 말이다.육진우는 언제 어디서나 하정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 이는 하정원이 지금껏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진여훈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진여훈은 육진우와 완전히 달랐다. 육진우에게 믿고 기댈 수 있는 안정감이 들었다면, 진여훈에게는 알고 싶어지고 점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이튿날, 하늘에서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하정원의 손이 빨갛게 얼었다. 그녀는 손을 입가에 대고 연신 입김을 불었다.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운 진여훈은 검은색 우산을 들고 걸어왔다. 그러고는 하정원의 앞에 멈춰서서 우산을 그녀에게로 향해 기울였다."추운데 왜 밖에서 기다렸어?""빨리 올 줄 알고..."하정원은 10분이나 일찍 밖으로 나왔다. 진여훈은 차갑게 얼어버린 그녀의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마음이 급했어?""아니거든."하정원은 손을 빼내며 부정했다. 진여훈은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서 그녀의 목에 둘러줬다. 갑자기 풍겨오는 진여훈의 냄새에 그녀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뭐... 따듯하기는 하네.'진여훈은 하정원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차 앞으로 데려갔다.
하정원은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꽃다발 속에는 빨간색의 작은 선물 상자도 있었다. 선물 상자를 열어보자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보였다. 진여훈이 그 새로 반지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는지라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너 혼자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사실 하정원은 아직 진여훈과 재혼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진여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지난번에 결혼할 때 반지 하나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었어. 그래서 이건 지난번의 결혼반지라고 생각하면 돼.""지난번의 결혼반지라고?"진여훈은 상자 속에서 반지를 빼내더니 하정원의 앞으로 걸어갔다."사이즈가 맞는지 껴보자."진여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하정원은 그렇게 어리둥절한 채로 반지를 꼈다.하정원은 한참 지난 후에야 이상함을 눈치챘다. 진여훈이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의 수에 넘어간 게 틀림없었다."너 이거 사기야!"진여훈은 하정원을 안아 올려 자기 무릎을 내려놓더니 뻔뻔하게 말했다."사기 아니야. 난 얼마나 진지한데.""이거 사기 결혼이라고!"진여훈은 그녀가 바둥거리지 못하게 꼭 잡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기 결혼이라니, 재혼이라고 해야지."진여훈은 그녀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뜻은 아니야. 천천히 생각해 보고 네 마음을 알려줘. 거절한다고 해도, 그게 네 마음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어.""내가 거절하면 포기하겠다는 뜻이야?"진여훈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정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 네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이야. 계속 연애를 하는 것도 난 나쁘지 않거든."청혼하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나기 마련이었다. 과거의 진여훈은 자신이 하정원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두 사람이 정략결혼으로 인해 묶였을 때, 진여훈은 하정원을 피하기에 바빴다. 두 사람 다 이 결혼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서로에 대한 편견도 풀 새 없이 점점 커져가기만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