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백을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장미선과 윤설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원유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말이 진짜인지 어떻게 믿죠? 갑자기 나타나서 아버지 친동생이라고 하면 우리가 덜컥 믿을 줄 알았어요? 게다가 진짜 친동생이라면 더더욱 이래서는 안 되죠. 아버지가 멀쩡할 때는 얼굴 한번 비추지 않더니 인제야 나타난다고요? 그런 알량한 선심 따위 필요 없어요! 아버지도 아버지 가족이 있고 딸이 있어요!”육성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때 장미선이 냉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원유희,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가족이라며 나타나는 거 봤어? 만약 진짜 가족이라면 보러 오는 게 당연하잖아! 딸이랑 형제랑 같아? 네 아버지도 예전 일 때문에 마음 속에 응어리가 맺혀있을지 모르는데 풀어 줄 생각을 해야지 대체 뭐 하자는 거야?”그녀의 말에도 원유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더니 육성현을 바라봤다.“우리 아버지는 책임감 있는 분이어서 절대 남한테 빚지고 살 분이 아니에요. 비즈니스를 할 때도 누구보다 신용을 중요시하는 분이세요. 그런 분이 대체 어떤 일을 했기에 육씨 가문에서 그토록 매정하게 아버지를 쫓아내고 지금껏 연락 한번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당신이 아버지 친동생이라면 아마 잘 알 테죠?”“나도 그건 잘 몰라, 그때 너무 어렸거든. 아버지가 식구들이 큰아들을 언급하지 말라고 명령하기도 했고. 여기 온 것도 나 혼자 결정한 거야.”육성현은 말 하면서 원유희를 빤히 쳐다봤다.“만약 상세한 걸 알고 싶다면 육씨 저택으로 찾아가도 돼.”“제가 왜요?”원유희는 눈살을 찌푸렸다.“전 그쪽 아버지가 큰아들이 결혼하고 애 낳은 걸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연락 한번 없는 사람인데 제가 뭐 하러 찾아가요? 아버지가 가족을 찾을 생각이 없다면 전 아버지 뜻 거역하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장미선이 언짢은 듯 끼어들었다.“네 아버지가 가족을 찾지 않는 건 체
원유희의 마음은 어머니의 말에 심하게 요동쳤다.‘그러게. 아버지가 대체 왜 집에서 쫓겨나 온갖 고생을 다 했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가족과 인연을 끊고 고아로 살았지?’“그런데 그 사람이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 이상해요.”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원유희가 입을 열었다.“왜? 네가 말했잖아. 가족이 사고가 났으니 와 보는 건 당연하잖아.”“육성현이라는 그 사람이 본인입으로 말했잖아요. 아버지가 집을 떠날 때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그런데 무슨 감정이 있겠어요? 아무 감정이 없으면서 가족 모르게 아버지 보러 왔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아요?”“감정은 없다고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 그 사람 아버지가 집에서는 절대로 네 아버지 일을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잖아. 사람은 보지 못한 것이거나 사람에 호기심 생기기 십상이야.”듣고 보니 가능성 있는 추측인지라 원유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가족이라니까 왠지 나랑 윤설이 떠오르네.’그녀와 윤설도 친자매지만 가족이라기보다는 원수에 더 가까웠으니 말이다.하지만 어찌 됐든 그쪽에 접근해 아버지와 육씨 가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육성현이라는 사람도 진짜로 가족을 보러온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접근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원유희 가방에 있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하지만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이대로 모른 척 받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김신걸이야?”원수정은 딸의 표정을 보자 바로 눈치챘다.“저 먼저 방에 들어갈 테니 일찍 쉬세요.”“뭔데 나를 피하는 거야?”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한편, 원유희가 방에 들어왔을 때 벨 소리는 이미 끊겼다. 때문에 그녀는 할 수 없이 다시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연결되기 바쁘게 전화 건너편에서 김신걸의 위협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쳐들어갈까?”“아니, 절대 그러지 마. 나
“육성현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아?”남자의 말에 원유희는 일순 멍해졌다.“그 사람 알아?”“찾아봐 줄 수 있지.’원유희는 이내 김신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육성현을 몰랐지만 그의 권력으로 그 사람을 조사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게 어렵다면 김신걸도 이토록 신심에 찬 말투로 말을 꺼내지 않을 테니까.그제야 원유희는 얌전해졌다.“뭐 조사한 거 있어?”“도착하면 말해줄게.”롤스로이스는 익숙한 오피스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원유희는 그들이 도착한 곳이 어전원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한 오피스텔 아래에 멈춰서기 바쁘게 원유희는 김신걸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원유희는 고개를 돌려 차고로 들어가는 롤스로이스를 멍하니 바라봤다.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위해 이곳에서 오피스텔 하나를 사줬다. 하지만 그녀가 그 집에서 살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그런데 그때.“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김신걸이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하지만 원유희는 그에게 일일이 설명할 마음이 없었기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내뱉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김신걸이 그녀의 손목은 잡아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알고 싶어.”그는 원유희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고 반항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그녀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열이 내려 이곳을 떠나던 날 마침 아버지를 봤거든, 그때 생각이 나서.”열이 나던 날을 생각하자 그와 관련된 일련의 일들이 갑자기 김신걸의 뇌리에 밀려들었다.심지어 원유희가 한 거짓말까지.표정은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김신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가했다.가느다란 팔이 그의 손아귀에서 점점 비틀려지자 고통이 점점 전해졌다.이 상태로 더 있다가 뼈가 부러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원유희는 끝내 입을 열었다.“뭐 하는 거야? 아파…….”원유희가 작게 버둥대자 김신걸은 그제야 그녀를
“아저씨에 관한 일은 육씨 가문에서도 쉬쉬하고 있더라고. 시간이 촉박하여 그저 육성현에 관한 소문만 알아내고 아저씨에 관한 건 알아낸 게 없어. 상세한 걸 알려면 더 조사해 봐야 해.”김신걸의 말에 원휴희는 사진을 빤히 쳐다봤다.“이 두 분이 내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셔?”“응.”“아버지와 육성현이라는 사람 나이를 보면 이때 이미 태어났을 텐데 왜 그 사람은 사진에 없어?”“아저씨의 아버지한테 아내가 두 명 있어.”원유희는 그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와 육성현도 그녀와 윤설처럼 배다른 형제라는 뜻이었다.하지만 현재 확실한 건 육성현이 그녀의 친삼촌이 맞다는 사실이었다.“다른 일 더 없으면 나 이제 가 봐도 되지?”“여기까지 왔으면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김신걸은 어둡고도 위험한 눈빛으로 원유희를 바라봤다.하지만 그런 눈빛에도 원유희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도발했다.“난 안 가도 된다지만 신걸 씨는 안 가면 안 되지 않나? 윤설이 어전원에서 기다릴 텐데. 아니면 나를 여기로 데려올 필요도 없었겠지. 이런 걸 집에 미인을 감춰둔다고 하던가?”김신걸은 음산한 눈빛으로 원유희를 빤히 쳐다봤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얼른 돌아가. 애들 곁에 엄마도 없는데 아빠까지 없으면 안 되잖아…….”원유희는 말하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신걸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온 덕에 그녀는 그대로 김신걸 다리 위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아! 지금…….”“애들은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내가 어디 있을지는 내 마음이야.”김신걸은 말하면서 원유희의 턱을 움켜쥐었다.원유희는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 손을 뿌리치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어찌나 들어갔는지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나 이럴 기분 아니야. 나 피곤하니까 자게 놔두든가 아니면 집으로 가게 해주든가 해.”김신걸은 그녀의 들어안은 채 욕실로 걸어갔다.“조금만 더 있으면 그럴 마음이
옷을 꺼내자마자 등 뒤에서 김신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지 마!”원유희는 그 소리에 짜증이 치밀어 올라 눈살을 찌푸렸지만 최대한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하기 싫다고 했잖아.”“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자고 가.”차갑게 내뱉은 김신걸의 말에 원유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그를 바라봤다.그런 그녀의 눈빛을 무시한 채 김신걸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하지만 땅바닥에 고인 물자룩을 본 순간 그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바닥 깨끗이 닦아!”“싫어. 닦으려면 직접 닦든가.”원유희는 잠옷을 소에 든 채로 버젓이 그의 곁을 지나쳐 욕실로 들어가더니 아예 문까지 걸어 잠갔다.그 순간 김신걸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하지만 원유희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바닥의 물기는 이미 깨끗하게 닦였다.‘김신걸이 직접 바닥을 닦았다고?’그 시각 김신걸은 잠옷 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그녀를 차갑게 바라봤다.오피스텔 내에는 욕실만 3개가 있었는데 보아하니 그녀보다 먼저 샤워를 끝낸 모습이었다.당연히 방도 여러 개 있었지만 원유희가 혼자 방 하나를 차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녀가 침대에 기어 올라가는 자세로 한쪽 다리를 바닥에 붙이고 있는 그때 김신걸이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내리눌렀다.“아! 오늘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잖아…….”“내가 건드리는 게 그렇게 싫어? 응?”김신걸은 말하면서 원유희의 귀를 짓씹었다.갑자기 전해지는 통증에 원유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이거 놔…….”“알았어. 그냥 이대로 자자.”김신걸은 끝내 타협하더니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얌전히 굴었다.그러자 원유희는 김신걸 옆 정해진 위치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아까보다는 충분히 괜찮아졌으니까.그러면서 윤설 일은 천천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그날 김신걸은 한밤중에 깨어나 욕실로 향하더니 찬물 샤워를 했다.그 때문에 원유희도 깨어났지만 이내 다시 잠들었다.그리고 아침이 되어서야 김신걸의 낯빛이 어제보다도 더 어둡다는
환한 미소를 지은 원유희의 모습이 어찌나 빛나는지 김신걸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아침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 엄마는요?”유담의 말에 원유희가 피식 웃었다.“엄마도 아직이야.”“마침 잘됐네요. 애들과 같이 드세요.”“자, 밥 먹으러 가자.”해림의 말에 김신걸이 유담을 품에 안았고 원유희는 아들 둘을 각각 한 손으로 잡은 채 식탁으로 향했다. 그제야 원유희는 집안에 윤설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아마 김신걸의 말대로 어제저녁 간 모양이다.어전원의 아침상은 매우 풍성했다. 큰 식탁을 반쯤 메운 음식은 어찌나 많은지 마치 뷔페를 연상케 했다.하지만 원유희도 이곳에서 처음 식사를 하는 게 아니기에 이미 익숙했다.맛나게 음식을 먹는 세 아이를 보는 원유희의 눈은 만족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러던 그때.“엄마, 어젯밤 아빠랑 데이트한 거예요?”유담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원유희는 아이의 말에 곧바로 변명거리를 찾아 부정하려고 했지만 김신걸이 한발 빠르게 대답했다.“맞아.”“데이트에서 뭐 했어요?”“뭐 했을 것 같아?”불쑥 끼어든 조한의 물음에 이번에는 대답 대신 반문을 던졌다.“음, 나 알아요! 엄마한테 맛있는 거랑 재밌는 거 사줬죠?”“그래.”유담의 말에 김신걸이 짤막하게 긍정하자 세 아이는 곧장 원유희에게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그 눈빛에 원유희는 포기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그래, 마음대로 말해. 내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우린 어느 때 같이 갈 수 있어요? 우리도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거 놀고 싶은데.”“아빠, 엄마. 우리도 데려가면 안 돼요?”“당연히 되지!”상우와 유담의 말에 조한이 불쑥 끼어들었다.기대에 찬 세 아이의 표정에 원유희는 끝내 거절의 말을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다.‘우리 다섯 식구가 같이 다니자고?’한 번도 있은 적 없는 일이었다.유일하게 찾아왔었던 기회도 그녀가 핸드폰을 보지 못해 놓쳐버렸으니.‘그런데 김신걸이 동의할까?’원유흰가 한
그 시각, 주방 입구에 서 있는 메이드릐 눈빛이 반짝거렸다.그 여자가 바로 윤설이 포섭한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녀가 받은 건 윤설의 번호가 아닌 장미선의 것이었다. 그것도 사실은 만일의 경우에 윤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었다.장민선은 소식을 듣기 바쁘게 곧바로 윤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걸 들은 윤설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앞에 놓인 음식 그릇을 바닥에 던져버렸다.“원유희! 감히 내걸 빼앗아? 죽여버릴 거야!”“화내지 마. 그런 년 때문에 화내면 너만 손해야!”장미선의 말에 윤설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어제 신걸 씨한테 전화했을 때 바쁘다고 해서 진짜 바쁜 줄 알았더니 원유희 그년한테 홀랑 넘어가 버린 거였네! 그때 원유희가 바로 옆에서 분명 나 비웃고 있었을 거야! 아!”윤설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식탁 위에 놓인 컵과 수저를 모두 바닥에 쓸어내렸다.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아닐 거야. 내연녀 주제에 걔가 무슨 낯짝으로 널 비웃어?”“세상에 낯짝 두꺼운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요. 원유희도 그중 하나일 거고!”장미선의 위로에 윤설은 눈에서 독을 내뿜었다.“나 절대 그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 다섯이 언제 나가는지 알아내서 날짜를 알려달라고 해요!”“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일러둘 테니까.”마음 속으로 계획이 서자 윤설은 많이 평온해졌다.지난번에 절에가 향을 피우는 거로 그들을 방해했다면 이번에도 똑같이 그들을 방해할 생각이었다.원유희는 김신걸이 계획한 날이 언제 올지는 몰랐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렇다면 일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미리 해놓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송욱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액정에 뜬 이름을 본 순간 원유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설마 아버지가 깨어났나?’“유희 씨, 어머님더러 휴식하라고 하세요. 이러다가 쓰러지실 수도 있어요. 지금 제대로 휴식하지 않아 위태로워 보이는데 몸이 망가지면 안 되잖
엄혜정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기가 무사하다는 걸 알아차렸다.방금은 그저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유정 대표가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곧장 바닥에 널브러진 계약서를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그때.“괜찮아요?”낮은 목소리와 함께 손 하나가 그녀 앞에 쑥 나타나 계약서를 줍는 걸 도와줬다.“괜찮습니다.”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었기에 엄혜정은 상대한테 시비를 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남자는 방금 주운 계약서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예쁜 손을 타고 올라가자 손목에 차 있는 값비싼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엄혜정은 이내 눈길을 거두고 고개를 들며 인사했다.“감사합니…… 아!”하지만 남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 때문에 겨우 주운 계약서가 또다시 바닥에 흩어졌다.엄혜정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이 혼비백산하여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어찌나 놀랐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고 몸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육성현은 그런 그녀를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왜 그러시죠?”“아니…… 그럴 리가 없어! 당…… 당신 죽었잖아…….”엄혜정은 말까지 더듬으면서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뒤로 움직였다.“저를 아세요?”육성현은 여자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오…… 오지 마! 오지 마!”엄혜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치자 육성현은 걸음을 멈춘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안 다가갈게요. 그런데 앞을 막고 있으면 다른 차량이 들어서지 못하는데 일어나는 게 어때요?”그의 말에도 엄혜정은 주위를 살피지 않고 오직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너무 똑같아!’가까스로 희미해졌던 악몽 같은 기억이 다시 그녀를 덮쳐 일순 불안에 떨었다.그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앞으로 다가왔다.“사장님, 저 여자는 제가 처리할 테니 차에 앉아계세요.”육성현은 엄혜정을 힐끗 보더니 눈살을 찌푸린 채 다시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그가 떠나가자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