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이 폴짝 의자에서 뛰어내렸다.“정말 우리 외할머니 맞아요?”“왜 엄마는 안 왔어요?”“엄마는 어디 있어요?”오는 내내 팔자에도 없는 할머니 노릇이 내심 탐탁지 않았던 여채아도 인형처럼 귀여운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렸다.‘특히 저 여자애는 우리 유희 어렸을 때랑 똑같게 생겼네. 아들들은…… 아빠를 닮은 건가?’한발 앞으로 다가간 여채아가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엄마는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 그러니까 얼른 가자.”한편, 여채아의 집에 있는 원유희는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 셋이서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게다가 주위 어른들 중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한 명 없었다니…….‘이제 겨우2살짜리 애들이 겁도 없어 정말…….’이때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연이어 머리를 빼꼼 내민 세 아이가 원유희의 얼굴을 확인하고 우르르 달려들었다.“엄마!”“엄마!”“엄마!”꿈에도 그리던 아이들을 품에 꼭 안은 원유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엄마가…… 우리 조한이, 상우, 유담이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우리도 엄마 보고 싶었어요!”“그래서 우리가 먼저 왔잖아요!”“정말 엄마다!”오는 내내 씩씩하던 세 아이들도 엄마 품에 안기니 긴장이 풀리며 서러움이 밀려드는지 울음을 터트렸다.어떻게든 품에 더 파고들려는 아이들의 모습에 원유희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어디 다들 얼굴 좀 보자…….”겨우 감정을 추스른 원유희가 아이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비록 떨어져 있었던 시간은 겨우 보름뿐이었지만 아이들이 곁에 없는 1분 1초가 원유희에게는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었다.“유담아, 이제 몸은 괜찮아?”“엄마 얼굴 보니까 다 나은 것 같아요!”콧물을 옷소매에 닦아낸 유담이 환하게 웃어보였다.그 모습에 원유희도 눈물을 글썽인 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그 동안 못했던 포옹이며 뽀뽀를 마구 퍼부었다.아이들 특유의 우유
여채아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원유희는 집을 나서기 전 카드를 몰래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아이를 맡기는 것도 미안한데 엄마 돈까지 쓸 수는 없었다.‘엄마도 그 동안 힘들게 사셨을 거야. 그나마 다시 재혼은 안 하신 게 다행인 건가?’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원유희는 아파트로 다시 돌아왔다.터덜터덜 걸어온 원유희가 테이블에 덩그러니 던져진 휴대폰을 들었다.‘휴, 다행히 문자는 안 왔네…….’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김신걸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를 풀어준 뒤로는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고 있지 않았다.‘영원히 나타나지 말았으면 좋겠어…….’어느새 시간은 7시를 가리키고 아침 햇살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원유희의 얼굴을 비추었다.‘이제 1주일만 있으면 여권을 받을 수 있어.’그녀가 원하는 바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져만 갔다.작은 변수 하나가 그녀의 계획을 망가트릴 수도 있었으니까…….정신없는 하루가 흐르고 퇴근 준비 중이던 원유희는 늦은 밤에 아이들을 보러 가는 게 맞는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역시나 착하게 말도 잘 듣고 얌전하게 있다는 엄마의 문자에 안심이 되면서도 바로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오고 싶은 욕심이 치밀었다.‘아니야. 괜히 갔다가 김신걸이 뭔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어떡해…… 어차피 1주일 뒤면 이곳을 떠나 매일매일 아이들 곁에 있을 수 있잖아…….’원유희가 갈등하던 그때 익숙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원유희, 너 아직도 여기 있어?”고개를 든 원유희의 시야에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손예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교하게 세팅된 손예인이 코웃음을 쳤다.“퍼펙트 성형회과도 이제 끝이네. 너 같이 예의 없는 직원을 자르지도 않고 말이야.”바로 그때 누군가 또 성형외과로 들어왔다.“당연히 유희한테서 받아야지.”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손예인은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공이 원수정인 걸 발견하고 바로 팔짱을 낀 채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차창 너머 성형외과를 나서는 원수정과 원유희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던 손예인의 머릿속이 번뜩했다.휴대폰을 꺼내 원유희의 사진을 찍은 손예인은 자주 사용하는 흥신소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여자에 대해 알아봐. 언제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전부!”통화를 마친 손예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저녁, 집으로 돌아온 원유희는 하루 종일 그리웠던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응. 엄마 방금 퇴근했어…… 응, 엄마한테 오는 건 안 돼. 엄마가 오늘 좀 피곤하네. 오늘 말고 내일 갈게…… 착하지? 외할머니 말씀 잘 듣고…… 그래. 내일 봐.”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다시 스르륵 풀렸다.아무리 착해도 아이들은 이제 두 살. 한창 엄마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 그녀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건 그녀의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걸 원유희도 잘 알고 있었다.다음 날, 원유희는 퇴근 후 저녁 11시가 지나고 김신걸이 오늘은 그녀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고 나서야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휴대폰을 집에 두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아파트를 나선 원유희가 택시에 타고 낯선 봉고차 한 대가 몰래 그녀의 뒤를 따랐다.“똑똑똑.”원유희가 문을 두드리고 늦은 시간까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여채아가 바로 문을 열었다.조용히 아이들 방문을 연 원유희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원유희는 유담이의 배 위에 올린 조한의 다리를 내려준 뒤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이때 여채아가 다가왔다.“너 올 때까지 안 잘 거라고 버티다 결국 잠들었어. 내일 아침에 눈 뜨면 엄마 얼굴 볼 수 있을 거라고 달래니까 겨우 눕더라.”엄마의 말에 원유희의 마음이 저렸다.“엄마, 얼른 가서 주무세요. 전 애들이랑 같이 잘게요.”“그래.”침대에 오른 원유희는 유담이를 품에 안고 조한과 상우의 통통한 손을 꼭 잡았다.이 짧은 행복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원유희도 스르륵 눈을 감았다.다음 날 아
원유희가 세수를 하는 동안 세 아이는 익숙하다는 듯 알아서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깨끗하게 닦았어?”“네!”엄마의 질문에 세 아이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이때 욕실로 다가온 여채아가 세 아이를 불렀다.“자, 우리 강아지들도 이유식 먹자.”“네, 할미!”아직 말이 서툴러 할머니를 할미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에 원유희는 웃음을 터트렸다.잠시 후, 짧은 아침 식사시간을 가진 원유희는 출근을 위해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물론 이틀 뒤에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아이들과 약속 도장까지 찍고 말이다.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는 세 아이를 두고 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럴수록 마음 독하게 먹어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원유희가 아파트 단지를 나서려던 그때, 여채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우리집 열쇠야. 앞으로는 문 두드리지 말고 그냥 들어와.”“네.”아파트 단지 구석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파파라치는 바로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손예인에게 전송했다.사진을 확인한 손예인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전화를 걸었다.“이 사진은 뭐야?”“어제 하루종일 미행했는데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고 만난 사람은 저 여자뿐이었습니다.”“저 여자는 누군데?”“글쎄요. 이웃들한테 물었는데 혼자 사는 과부라고 합니다. 아마 먼 친척쯤 되겠죠.”“내가 이딴 거나 찍으라도 돈 주는 줄 알아? 남자랑 단둘이 있는 사진, 그런 걸 찍어오라고!”한바탕 소리를 지른 손예인이 거칠게 휴대폰을 내팽개쳤다.하지만 곧 기막힌 아이디어가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다른 남자가 없으면 만들어내면 되는 거잖아? 사진이라도 찍어서 오빠한테 보여주면 원유희는 바로 버림받을 거야. 아니지. 오빠 성격에 어쩌면 죽여버릴지도 몰라.’……그날 밤, 퇴근 후 성형외과를 나선 원유희는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다가온 남자가 손수건으로 원유희의 입을 틀어막았다.“윽!”자극적인 냄새가 숨결과 함께 느껴지고 원유희는 그대로 정신을
남자들이 원유희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잔뜩 겁이 질린 얼굴의 원유희는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어깨가 제압당한 터라 꿈쩍도 할 수 없었다.원유희의 곁에 앉은 남자들이 그녀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내 몸에 손대지 마! 꺼지라고!”한편 어느새 휴대폰을 든 손예인이 촬영버튼을 눌렀다.“표정 좀 잘 지어 봐. 느낌이 잘 안 살잖아.”“손예인 너…….”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김신걸이었다.룸 안의 조명들도 김신걸의 어두운 그림자에 삼켜질까 두려운 듯 그를 스쳐지나는 듯했다.잘생겼지만 차가운 김신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에도 원유희는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김신걸이 그녀를 구해 줄 거란 확신이 없었으니까.후다닥 휴대폰을 숨긴 손예인이 물었다.“오…… 오빠가 여긴 어떻게?”터벅터벅 룸 안으로 들어온 김신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아니!”손예인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김신걸의 무시무시한 포스 때문일까 원유희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도 우르르 일어서 숨 죽인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유희가 스트레스 좀 풀고 싶다고 해서 같이 나왔는데 얘가 남자들한테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몰랐네.”자연스레 소파에 앉은 김신걸이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원유희를 바라보았다.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김신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자라면 환장하긴 하지.”‘누가 봐도 내가 억지로 당하고 있던 상황이잖아?’원유희가 미간을 찌푸렸다.김신걸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자 다시 의기양양해진 손예인이 쪼르르 김신걸 옆에 앉았다.“오빠, 유희랑 그 고모란 사람 진짜 너무한 거 알아? 저번에 성형외과에서 둘이서 나 를 괴롭히는데…… 오빠랑 결혼하면 쟤 절대 가만히 안 둘 거야!”손예인의 말에 원유희가 커다래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김신걸과 결혼? 하, 쟤도 정말 김신걸이 어지간히 좋은가 보네. 그런데 어쩌나? 넌 저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그리고 김신걸의 매
김신걸의 말에 말문이 막힌 원유희가 고개를 숙였다.“그래. 알겠어. 그래도…… 아까는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생각보다 쉽게 포기하는 원유희의 모습에 김신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내가 널 구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해?”“무슨 생각으로 왔던 네 덕분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네 모든 건 내 의지대로 움직여야 해.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용납할 수 없어.”김신걸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원유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모든 고통은 김신걸이 직접 줘야 한다는 말이겠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너무 심심할 테니까…….’“내가 그 천박한 여자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잖아. 말귀 못 알아들어?”김신걸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날 만나로 온 게 아니라 정말 상담받으시러 온 거야. 못 믿겠으면 직접 알아보든가.”원유희가 말한 건 전부 사실이었다. 요즘 눈주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보톡스에 대해 알아보고 갔으니까.“지금 한 말 사실이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김신걸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의 강력한 포스에 공기 분자마저 그를 피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문고리를 잡은 김신걸이 고개를 돌렸다.“뭐 더 바라는 거 있어?”그제야 정신을 차린 원유희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아니.”‘그래. 내가 무슨 자격으로 김신걸과 딜을 하겠어. 고모는 김신걸의 역린이야. 괜히 건드렸다간 나한테 더 미친 듯이 집착하게 될 거야. 이제 4일밖에 안 남았어…… 그 동안 조용히 지내다 소리없이 떠나는 거야…….”룸에서 나온 김신걸은 고건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를 지시했다.언제부터일까? 원유희의 휴대폰 위치 추적에 구멍이 생겼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챈 그였다.출장에서 오늘 돌아온 김신걸은 집이 아닌 바로 회사로 향했다.사무실로 들어온 김신걸이 아무렇게나 코트를 소파에 던져두었다.코트 안에 감춰졌던 블랙 셔츠가 드러나고 탄탄한 몸을 더 타이트하게 부각시켜주었다.
“알고 있어요. 잠깐만 하다가 넣을 거예요.”“네.”그때 뭔가 생각난 듯 원유희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저기…… 혹시 휴대폰 한 번 쓸 수 있을까요? 그게…… 사실 업무 시간에는 사적인 통화는 금지되어 있는데 급하게 가족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네, 쓰세요.”다행히 고객은 흔쾌히 휴대폰을 건넸다.“감사합니다!”휴대폰을 받은 원유희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오후에 시간 되면 새 휴대폰 하나 사줄래요? 비싼 거 말고 가장 싼 거면 돼요. 시간 되면 내가 가지러 갈게요.”통화를 마친 원유희가 휴대폰을 고객에게 돌려주었다.퇴근 후, 저녁 11시.샤워를 마친 원유희가 조용히 아파트 뒷문으로 나섰다.하지만 그 순간, 김신걸을 태운 롤스로이스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썬팅된 창문을 통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김신걸의 눈동자는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번뜩였다.“탁. 탁.”김신걸의 긴 손가락이 손잡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심장을 내리치는 듯한 섬뜩한 소리에 운전기사도 괜히 숨을 죽였다.한편, 아이들을 만나려는 생각뿐인 원유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택시에 올랐다.잠시 후, 여채아의 집 앞에서 내린 원유희가 빠르게 계단으로 올라갔다.저번에 엄마가 건넨 열쇠로 들어온 원유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새 휴대폰을 발견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먼저 아이들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녀는 이미 잠든 아이들의 포동포동한 볼에 뽀뽀를 한 뒤에야 만족한 얼굴로 거실로 나왔다.그녀가 새 휴대폰 포장을 뜯으려던 그때.“똑똑똑.”음산한 노크소리가 울렸다.고개를 홱 돌린 원유희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누구지? 이 야심한 밤에 도대체 누가…….’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소파 밑에 숨긴 원유희가 현관으로 다가갔다.“누구세요?”“문 열어.”위압감 가득한 익숙한 목소리에 원유희의 몸이 굳어버렸다.불안한 예감이 확신으로 이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김신걸…… 김신걸이 왜 여기에…… 설마 아이들 존재를 눈치챈 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하지만 김신걸은 이대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이때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깬 듯한 여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희야?”“안 돼!”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원유희가 본능적으로 김신걸의 탄탄한 허리를 끌어안았다.그 충격에 뒤로 살짝 물러선 김신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문틈으로 바깥 상황을 확인한 여채아 역시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그녀가 깜짝 놀란 이유는 다름이 아닌 조한과 상우와 똑같게 생긴 남자의 얼굴 때문이었다.저 남자가 바로 세쌍둥이의 아빠라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음산한 눈빛에 여채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엄마, 얼른 들어가세요!”혹시나 김신걸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두려웠던 원유희가 그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하지만…….”“괜찮아요. 괜찮아.”여채아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원유희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텔레파시를 보냈다.‘아이들부터 지켜주세요…….’그 눈빛을 읽은 걸까 말없이 문을 닫은 여채아가 부랴부랴 아이들 방문부터 걸어잠근 뒤 다시 현관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댔다.“남자 품에 안기는 게 그렇게 좋아?”정수리 쪽에서 들리는 음침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원유희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미…… 미안. 우,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무서워서…….”솥뚜껑 같은 손을 뻗어 원유희의 뺨을 움켜쥔 김신걸이 말했다.“너희 집 사정 따위에는 관심없어.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에 방해된다면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알아서 해!”턱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원유희의 가슴이 다시 불안감으로 뛰기 시작했다.“알, 알겠어.”“휴대폰은?”“휴대폰…….”주머니를 더듬거리던 원유희가 대답했다.“집에 두고 나왔나 봐…….”다음 순간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움켜쥔 김신걸이 그녀를 계단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악!”잔뜩 겁에 질린 원유희는 반항 조차 할 수 없었다.“살살 좀
육성현은 흠칫 놀랐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누구를 죽였다고 그래? 혜정아, 다 오해야. 나 지금 다 고쳤어. 진짜야, 어서 내려와. 물만두가 식겠다.”“오지 마!”엄혜정은 감정이 격해져서 소리쳤다.“다가오면 뛰어내릴 거라고 얘기했어!”“그래, 안 갈게.”육성현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혜정아, 진짜야.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우선 먼저 내려와. 내려오면 내가 다 설명해 줄게. 다 오해야.”“사실 처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냥 유희의 말이 날 깨닫게 했을 뿐이야.”엄혜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육성현을 바라보면서 얘기했다.“근데 나 지금 다 알게 됐어. 증거는 없지만 넌 김하준이잖아. 난 적어도 아이를 위해서 네가 달라질 거라 기대했어. 근데, 넌 어떻게 네 아이의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를 죽일 수 있어? 김하준, 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세상에 어떻게 너 같은 괴물이 다 존재해?”“혜정아, 내려와서 천천히 얘기하자, 응? 거긴 너무 위험해.”“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기분을 모르지? 너도 한번 느껴봐야 해.”엄혜정은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안돼!”육성현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하지만 엄혜정의 옷자락도 미처 잡지 못했다.그는 엄혜정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밑에 서 있던 하인 중 그 누구도 엄혜정을 받아내지 못했다.“다 죽일 거야!”육성현은 미친 듯이 달려갔고, 눈에 거슬리는 하인들을 모조리 걷어차 버렸다. 그는 엄혜정 옆으로 기어가 부드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혜정아, 혜정아. 병원에 데려다줄게. 아무 일도 없을 거야!”엄혜정은 눈을 떴다. 그녀의 머리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초점이 점차 사라지는 눈으로 육성현을 바라보았다.“김하준, 다음 생이 있다면, 난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거야…….”이렇게 한마디만 남기고 엄혜정은 숨을 끊게 되었다.“그래, 만나지 마,
퇴원한 후, 엄혜정은 방에 혼자 남았을 때 원유희에게 연락했다.“유희야, 괜찮아? 김명화가 널 납치했다고 들었는데, 구출됐다고?”“응, 괜찮아. 지금은 집에 도착했어.”“다행이다.”원유희는 그녀의 정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부모님이 돌아가신 일 말이야. 나 다 알게 됐어.”원유희는 순간 멈칫했다.‘다 알았다고?’“미안해 혜정아, 숨기는 게 아니었는데.”“괜찮아, 나랑 아이를 생각해서 숨긴 거잖아.”엄혜정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네가 김명화를 죽였어?”“아니. 그날에 크루즈에서 김명화가 도망쳤거든. 우리가 김명화를 찾았을 땐 이미 주검으로 됐어. 그 주검도 바다에서 건져낸 거야.”“육성현도 있었지?”“응, 얘기해줬어?”엄혜정은 덤덤하게 물었다.“육성현을 의심해 보지 않았어?”원유희는 흠칫했고 아무런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김명화를 죽인 사람, 그리고 우리 부모님을 죽인 사람 말이야…….”“그럴 리가?”원유희는 당황했다. 그녀는 엄혜정이 왜 육성현을 의심하게 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무슨 단서라도 발견한 거야? 아니면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유희야, 저 사람 진짜 육성현이 아니잖아. 김하준이라고. 나 그 사람 잘 알아.”엄혜정은 목이 메였지만 울먹이면서 끝까지 말했다.“난 그 사람 고칠 줄 알았어, 적어도 아이를 위해서…….”“혜정아, 아직 조사하고 있어.”“그럼 너희들도 육성현을 의심하고 있다는 얘기잖아, 맞지?”“오해일 수도 있어.”“오해일 리가 없어.”엄혜정은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원유희가 다시 전화를 걸어오자 그녀는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그리고 시체처럼 무기력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엄혜정은 서재에서 나온 육성현을 보면서 얘기했다.“나 물만두 먹고 싶은데, 사다 줄래? 예전에 빈민가에서 자주 사주던 물만두 말이야.”“그래.”육성현은 엄혜정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먼저 우유 좀 마시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육성현은 엄혜정을 끌어안았다.“김명화가 죽었대. 복수한 셈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네가 무사히 지내야 장인어른 장모님이 안심하시지 않겠어? 침착해.”엄혜정은 울면서 그의 품에 쓰러졌다.그러고는 배가 간간이 쑤시자, 엄혜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렀다.육성현은 그녀의 상황을 바로 눈치채고 기사에게 소리쳤다.“얼른 병원으로 가!”“얼른!”염민우도 재촉했다. 그는 얼른 엄혜정의 손을 잡았는데, 그녀의 손이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을 발견했다.“누나, 아직 나도 있잖아. 그러니까 아무 일도 생기면 안 돼. 누나, 꼭 버텨줘.”엄혜정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그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난 부모님을 가질 자격이 없는 걸까……?’엄혜정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병원에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졌다.육성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금 안정을 취해야 한대.”엄혜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민우는?”“밖에 있어. 너무 걱정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엄혜정은 육성현의 손에서 자기 손을 뺐다.“두 사람 너무해. 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나한테 숨길 수가 있어? 평생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육성현, 우리 부모님의 목소리를 합성해서 나랑 통화하게 했어? 네 아이디어지? 넌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잖아!”“혜정아,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너한테 알려준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네 옆에는 나랑 아이가 있고, 민우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너밖에 없어. 너한테도 무슨 일이 생기면, 민우는 더 고통스러워질 거야.”엄혜정은 말을 하지 않았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엄혜정도 염민우가 더 고통스러워질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때 엄혜정은 염민우가 갑자기 엄청나게 말라갔던 것이 생각이났다. 엄혜정은 염민우의 일이 바쁜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염민우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울지 마. 의사가 지금은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했어.”
“알았어요…….”염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입구에 서 있는 엄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누…… 누나. 여긴 어쩐 일이야?”엄혜정은 멍하니 거기에 서서 염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금 얘기하고 있던 사람을 봤다.“하늘나라라뇨? 저희 부모님이 왜 하늘나라에 계셔요?”“아니야,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고 있었어.”엄혜정은 두 사람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엄혜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다급하게 핸드폰을 찾았다.핸드폰을 못 찾자 바로 차로 뛰어갔다.“누나!”염민우는 엄혜정을 쫓아갔다.“뭐 하려고 그래?”“엄마 아빠한테 전화할 거야.”“지금 여행 중이시니까, 방해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엄혜정은 그를 보면서 물었다.“사실대로 얘기해줘. 엄마 아빠 왜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은 거야? 거짓말하지 마! 사실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임신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계속 안 오시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두 분 무슨 일이 생긴 거 맞지?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거야?”염민우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 참고 말했다.“더 이상 묻지 마…….”“염민우! 계속 우물쭈물 얘기 안 하면, 나 이젠 널 안 봐!”염민우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집에 오는 게 아니었어, 그나저나 아저씨는 왜 또 그런 허튼소리를 해서 참…….’“맞아, 누나 임신 3개월쯤 되었을 때,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셨어.”엄혜정은 몸이 휘청거렸다. 염민우는 바로 그녀를 부축했다.“침착해요! 엄마랑 아빠는 누나가 무사하기를 원하셨을 거야. 난 누나가 못 받아들일 것 같아서 장례식 때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어.”엄혜정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염민우를 바라보았다.“너 이러고도 내 친동생이 맞아? 어떻게 안 알려줄 수가 있어! 아기만 중요하고 부모님은 안 중요할 것 같아? 너…….”너무 충격 받은 엄혜정은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더니 기절을 하고 말았다.“누나!”
육성현이 다가와 물었다.“유희야, 괜찮아?”원유희는 고개를 저었다.“너 안색이 안 좋은데, 왜 그래?”“김명화가 죽었어요.”김신걸이 얘기했다.“해독제는 찾았어요?”원유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쉽네. 그럼 감염된 사람들은 우선 좀 참아야겠어.”원유희는 갑자기 뭐가 생각나 바로 김신걸을 밀쳤다.“날 만지지 마!”육성현은 그제야 원유희의 볼 아래의 병변 부위를 발견했다.“유희야, 김명화가 너한테도 독을 썼어?”김신걸은 미간을 찌푸렸다.“상관없어.”“안돼. 우리 둘다 아이들하고 접촉하지 않으려 한다면 애들이 걱정할 거야.”원유희는 거절했다.김신걸은 줄곧 원유희와 스킨쉽이 있었다. 원유희는 그도 감염되지 않을까 걱정했다.“방금도 널 안았는데, 감염되면 진작에 감염됐어.”김신걸이 말했다.원유희는 그래도 싫었다.“아니, 그래도 만지지 마.”해독제도 못 가진 상황에 김명화는 의문스럽게 죽었다. ‘여기 김명화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 있었단 말이지?’김신걸은 김명화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바다에 던질 일은 더더욱 없었다.그럼 분명 다른 사람이 한 짓이었다.‘무슨 목적으로? 김신걸도 감염되면 배후의 사람을 어떻게 잡아내지?’‘다른 조직의 사람도 이곳에 숨어 있을지도 몰라.’원유희는 말을 하지 않았다.“내려가자.”김신걸은 원유희의 말대로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원유희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떠날까 봐서 걱정이었다. 김신걸은 더 이상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원유희는 김신걸을 따라 떠났다.육성현은 먼 곳에 있는 김명화의 시체를 봤다. 그리고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떠났다.이제 아무도 김명화를 죽인 사람이 육성현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엄혜정은 이미 임신 5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지금 어떠한 사고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육성현은 잠깐 해독제가 없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은 후 다시 생각하려 했다.엄혜정은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배는 이미 많이 나
김명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진선우는 킬러들과 격투하고 있었고, 매번 그들의 치명적인 곳을 공격했다.진선우가 실력이 없었다면, 킬러들은 진작에 그를 해결했을 것이다.김명화는 무엇을 깨닫고 손을 돌려 원유희를 잡으려 했다.원유희는 후퇴하는 동시에 다른 힘에 의해 품에 안겼다.“이거 놔!”원유희는 낯선 남자인 줄 알고 발버둥 치려 했다.“유희야.”원유희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고, 익숙한 얼굴을 보자 아주 기뻤다.“김신걸?”“나야.”김명화는 서로 애틋한 두 사람을 보자 화가 더 났다.“원유희, 역시 김신걸에게 단서를 남긴 사람, 너였어.”김명화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그쪽이 너무 방심한 탓이죠.”‘내가 예전에 김신걸의 곁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일이 김명화에게 착각을 준 거야?’“왜, 날 죽이려고? 네까짓 게?”김명화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다른 출구로 달려갔다.하지만 경호원들은 이미 그곳에 서서 그를 막았다.김명화는 총을 꺼내 쏘자, 한 경호원은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경호원은 얼른 옆으로 비켜 숨었다.일반인들은 그 출구를 포기했을 것이다. 김신걸의 사람들이 숨어있었기에, 그 출구는 아주 위험했다.하지만 김명화는 기어코 사격을 하면서 길을 텄다.안에 숨어 있던 경호원들은 피하면서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경호원들의 반격에 김명화는 하마터면 맞을 뻔했다. 그러다가 몇발 더 쏘고는 바로 달렸다.김명화는 크루즈에 오래 있었다. 하여 갓 크루즈에 올라온 김신걸의 사람들보다 이곳을 훨씬 더 잘 알았다.몇 개의 모퉁이를 돌면 은폐하기 적합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김명화는 다시 부하들에게 연락했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제야 김명화는 김신걸의 사람들이 진작에 올라왔고, 자기 쪽 부하들은 아마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도망치지 못한다면 김신걸에게 잡힐 것이 뻔했다.김명화는 죽어도 김신걸에게 잡히고 싶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한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김명화는 본능적으로 총을 들었다
원유희는 지금 약 때문에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크루즈 곳곳에는 CCTV가 있었다. 방에 들어올 때, 그 윗부분에 CCTV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몰래 뭔가를 찾아보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김명화는 일찌감치 그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원유희는 떠나기 전에 김신걸에게 단서를 남겨주었기에 그가 곧 이곳을 찾아올 거라 믿었다.다만 김신걸의 속도가 이렇게 빠를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날이 밝는 무렵, 원유희는 헬리콥터 소리를 들었다.이어 문이 펑 하고 열렸고, 원유희는 반응하기도 전에 멱살이 잡혔다.“연락을 어떻게 한 거야?”말을 마치고 원유희의 몸을 수색하려 했다.“아! 미쳤어요? 나 핸드폰 없어요!”“김신걸이 왔다고 널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해? 죽어서 지옥에 내려가더라도 널 끌고 갈 거야. 가자!”“아니…….”원유희는 힘 없이 밖으로 끌려 나갔다.김명화는 원유희를 다른 방으로 보냈다.“우린 여기서 김신걸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원유희는 고개를 들어봤다. 입구에는 많은 폭탄이 놓여있었다.그걸로 부족한지 김명화는 원유희의 몸에 폭탄을 묶었다.“미쳤어요?”김명화는 원유희의 얼굴을 꽉 쥐었다.“김신걸이 널 어떻게 구할지 구경이나 하려고 그런다.”원유희는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김신걸이 왜 이렇게 왔을까? 너무 눈에 띄잖아.’다시 들어보니 이미 헬리콥터 소리가 나지 않았고, 밖에는 다른 인기척도 없었다.한 남자가 와서 말했다.“헬리콥터가 지나갔어요. 그냥 순찰하다가 지난 것 같아요.”김명화는 멍하니 서 있었다.원유희는 그를 비웃었다.“저 소리에 이렇게까지 놀랐단 말이에요?”“닥쳐!”김명화의 표정은 엄청나게 나빴다.“난 신걸이랑 아이들이 감염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연락하지 않을 거고요. 배고픈데 이 폭탄들이나 좀 뜯어줄래요?”김명화가 경각심을 낮추었을 때, 크루즈 밑에서 잠수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10명 좌우로 보이는 사람들은 갈고리를 가드레일에 던지고 밧
원유희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김명화가 갑자기 뒤에서 무슨 짓을 할까 봐, 원유희는 그를 등지고 누울 수가 없었다.“너 기억나? 어릴 때 김신걸이 널 괴롭히면 넌 우리 집에 달려와서 내 침대에서 잤잖아.”“기억 안 나요.”“기억하는 거 다 알아. 난 그때 정말 널 도와주고 싶었어.”원유희는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반박하지 않았다.그녀는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이전의 김명화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요.”김명화의 표정은 어두워졌다.“우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내가 제일 아끼는 사람을 죽이고,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죠? 죽어서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원유희는 지금의 김명화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아무리 유년 시절이 불행해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낙으로 삼으면 안 되죠!”“정말 고상한 척하네. 김신걸은 사람은 죽인 적이 없대? 육성현은 없대? 왜 걔네들이 사람을 죽인건 용서하면서, 난 용서하지 못하는 건데? 그 사람은 네 남편이고 네 가족이니까? 비겁하고 이기적인 건 너도 마찬가지야.”“참, 너도 사람을 죽였잖아. 네가 죽인 사람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아들이야.”원유희는 기분이 착잡해졌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명화는 원유희의 반응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그러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그냥 쉽게 쉽게, 편하게 살자.”“이렇게 예전의 저질렀던 일을 합리화하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명분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요?”원유희는 김명화를 바라보면서 물었다.“당신을 용서하기 싫은 거 아니에요. 근데 지금까지 자기의 잘못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해요? 차라리 해독제를 그냥 줘요. 시장에 유통하지 말고요. 그러면 예전에 있었던 일은 없던 거로 할게요.”“정말?”김명화는 원유희를 보면서 물었다.“물론이죠.”원유희는 김명화의 말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했다.미래의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래. 해독제를 줄 수 있어. 근데 대신 넌 나랑 평생 같이
“밥 안 먹으면 너만 손해야.”김명화는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말했다.‘맞네,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 무슨 힘으로 김명화를 상대하겠어?’잠시 후, 납득이 간 원유희는 젓가락을 들고 생선을 먹기 시작했다.김명화는 그녀가 고기를 입에 넣는 것을 보고 물었다.“어때?”“설마 그쪽이 한 거예요?”원유희는 귀찮다는 듯이 그를 한번 힐끗 쳐다봤다.“맞아, 내가 직접 했어.”‘이게 뭐 자랑할 일인가?’“수고했네요,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다니.”“내가 힘들 것 같으면 같이 할까?”“할 줄 모르는데요.”“정말 상전 팔자구먼.”김명화는 원유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원유희는 김명화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원유희는 김명화가 자신을 괴롭히고, 김신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이곳에 데려온 줄로 알았다.근데 직접 밥도 해줄 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설마 요리에 무슨 수작을 부린 거 아니죠?”원유희는 젓가락을 멈추었다.김명화는 손에 있는 젓가락을 흔들었다.“나도 먹고 있잖아.”“먼저 해독제를 먹었겠죠.”“그런 거 아니야.”“그럼 내가 묻힌 진물은? 그건 어떻게 해결한 거죠?”원유희가 물었다.“해독제가 있으니까 괜찮은 거잖아요.”“해독제 가지고 싶어?”“줄 생각은 있고요?”“착하면 줄게.”원유희는 의심스러웠지만 말하지 않았다.어차피 금방 왔으니 당장 해독제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하여 원유희는 일단 참고 해독제를 발견하면 김명화를 바로 제압하는 것을 선택했다.밥을 다 먹고 나머지는 부하가 다 치웠다.“같이 샤워할까?”김명화가 물었다.원유희는 그를 차갑게 보며 말했다.“아니요. 먼저 씻어요.”원유희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원유희는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침착하자고 했다. ‘근데 자는 건 어떡하지? 정말로 같이 자야 해?’원유희는 침대를 봤다. 두 사람이 자고도 넉넉한 침대였고, 중간에 뭘 놓을 수도 있었다.김명화가 만약 자기 몸에 손을 대면 원유희는 같이 죽을 각오도 했다.10여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