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너머 성형외과를 나서는 원수정과 원유희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던 손예인의 머릿속이 번뜩했다.휴대폰을 꺼내 원유희의 사진을 찍은 손예인은 자주 사용하는 흥신소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여자에 대해 알아봐. 언제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전부!”통화를 마친 손예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저녁, 집으로 돌아온 원유희는 하루 종일 그리웠던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응. 엄마 방금 퇴근했어…… 응, 엄마한테 오는 건 안 돼. 엄마가 오늘 좀 피곤하네. 오늘 말고 내일 갈게…… 착하지? 외할머니 말씀 잘 듣고…… 그래. 내일 봐.”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다시 스르륵 풀렸다.아무리 착해도 아이들은 이제 두 살. 한창 엄마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 그녀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건 그녀의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걸 원유희도 잘 알고 있었다.다음 날, 원유희는 퇴근 후 저녁 11시가 지나고 김신걸이 오늘은 그녀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고 나서야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휴대폰을 집에 두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아파트를 나선 원유희가 택시에 타고 낯선 봉고차 한 대가 몰래 그녀의 뒤를 따랐다.“똑똑똑.”원유희가 문을 두드리고 늦은 시간까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여채아가 바로 문을 열었다.조용히 아이들 방문을 연 원유희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원유희는 유담이의 배 위에 올린 조한의 다리를 내려준 뒤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이때 여채아가 다가왔다.“너 올 때까지 안 잘 거라고 버티다 결국 잠들었어. 내일 아침에 눈 뜨면 엄마 얼굴 볼 수 있을 거라고 달래니까 겨우 눕더라.”엄마의 말에 원유희의 마음이 저렸다.“엄마, 얼른 가서 주무세요. 전 애들이랑 같이 잘게요.”“그래.”침대에 오른 원유희는 유담이를 품에 안고 조한과 상우의 통통한 손을 꼭 잡았다.이 짧은 행복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원유희도 스르륵 눈을 감았다.다음 날 아
원유희가 세수를 하는 동안 세 아이는 익숙하다는 듯 알아서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깨끗하게 닦았어?”“네!”엄마의 질문에 세 아이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이때 욕실로 다가온 여채아가 세 아이를 불렀다.“자, 우리 강아지들도 이유식 먹자.”“네, 할미!”아직 말이 서툴러 할머니를 할미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에 원유희는 웃음을 터트렸다.잠시 후, 짧은 아침 식사시간을 가진 원유희는 출근을 위해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물론 이틀 뒤에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아이들과 약속 도장까지 찍고 말이다.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는 세 아이를 두고 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럴수록 마음 독하게 먹어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원유희가 아파트 단지를 나서려던 그때, 여채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우리집 열쇠야. 앞으로는 문 두드리지 말고 그냥 들어와.”“네.”아파트 단지 구석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파파라치는 바로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손예인에게 전송했다.사진을 확인한 손예인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전화를 걸었다.“이 사진은 뭐야?”“어제 하루종일 미행했는데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고 만난 사람은 저 여자뿐이었습니다.”“저 여자는 누군데?”“글쎄요. 이웃들한테 물었는데 혼자 사는 과부라고 합니다. 아마 먼 친척쯤 되겠죠.”“내가 이딴 거나 찍으라도 돈 주는 줄 알아? 남자랑 단둘이 있는 사진, 그런 걸 찍어오라고!”한바탕 소리를 지른 손예인이 거칠게 휴대폰을 내팽개쳤다.하지만 곧 기막힌 아이디어가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다른 남자가 없으면 만들어내면 되는 거잖아? 사진이라도 찍어서 오빠한테 보여주면 원유희는 바로 버림받을 거야. 아니지. 오빠 성격에 어쩌면 죽여버릴지도 몰라.’……그날 밤, 퇴근 후 성형외과를 나선 원유희는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다가온 남자가 손수건으로 원유희의 입을 틀어막았다.“윽!”자극적인 냄새가 숨결과 함께 느껴지고 원유희는 그대로 정신을
남자들이 원유희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잔뜩 겁이 질린 얼굴의 원유희는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어깨가 제압당한 터라 꿈쩍도 할 수 없었다.원유희의 곁에 앉은 남자들이 그녀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내 몸에 손대지 마! 꺼지라고!”한편 어느새 휴대폰을 든 손예인이 촬영버튼을 눌렀다.“표정 좀 잘 지어 봐. 느낌이 잘 안 살잖아.”“손예인 너…….”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김신걸이었다.룸 안의 조명들도 김신걸의 어두운 그림자에 삼켜질까 두려운 듯 그를 스쳐지나는 듯했다.잘생겼지만 차가운 김신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에도 원유희는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김신걸이 그녀를 구해 줄 거란 확신이 없었으니까.후다닥 휴대폰을 숨긴 손예인이 물었다.“오…… 오빠가 여긴 어떻게?”터벅터벅 룸 안으로 들어온 김신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아니!”손예인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김신걸의 무시무시한 포스 때문일까 원유희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도 우르르 일어서 숨 죽인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유희가 스트레스 좀 풀고 싶다고 해서 같이 나왔는데 얘가 남자들한테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몰랐네.”자연스레 소파에 앉은 김신걸이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원유희를 바라보았다.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김신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남자라면 환장하긴 하지.”‘누가 봐도 내가 억지로 당하고 있던 상황이잖아?’원유희가 미간을 찌푸렸다.김신걸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자 다시 의기양양해진 손예인이 쪼르르 김신걸 옆에 앉았다.“오빠, 유희랑 그 고모란 사람 진짜 너무한 거 알아? 저번에 성형외과에서 둘이서 나 를 괴롭히는데…… 오빠랑 결혼하면 쟤 절대 가만히 안 둘 거야!”손예인의 말에 원유희가 커다래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김신걸과 결혼? 하, 쟤도 정말 김신걸이 어지간히 좋은가 보네. 그런데 어쩌나? 넌 저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그리고 김신걸의 매
김신걸의 말에 말문이 막힌 원유희가 고개를 숙였다.“그래. 알겠어. 그래도…… 아까는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생각보다 쉽게 포기하는 원유희의 모습에 김신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내가 널 구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해?”“무슨 생각으로 왔던 네 덕분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네 모든 건 내 의지대로 움직여야 해.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용납할 수 없어.”김신걸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원유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모든 고통은 김신걸이 직접 줘야 한다는 말이겠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너무 심심할 테니까…….’“내가 그 천박한 여자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잖아. 말귀 못 알아들어?”김신걸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날 만나로 온 게 아니라 정말 상담받으시러 온 거야. 못 믿겠으면 직접 알아보든가.”원유희가 말한 건 전부 사실이었다. 요즘 눈주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보톡스에 대해 알아보고 갔으니까.“지금 한 말 사실이길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김신걸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의 강력한 포스에 공기 분자마저 그를 피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문고리를 잡은 김신걸이 고개를 돌렸다.“뭐 더 바라는 거 있어?”그제야 정신을 차린 원유희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아니.”‘그래. 내가 무슨 자격으로 김신걸과 딜을 하겠어. 고모는 김신걸의 역린이야. 괜히 건드렸다간 나한테 더 미친 듯이 집착하게 될 거야. 이제 4일밖에 안 남았어…… 그 동안 조용히 지내다 소리없이 떠나는 거야…….”룸에서 나온 김신걸은 고건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를 지시했다.언제부터일까? 원유희의 휴대폰 위치 추적에 구멍이 생겼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챈 그였다.출장에서 오늘 돌아온 김신걸은 집이 아닌 바로 회사로 향했다.사무실로 들어온 김신걸이 아무렇게나 코트를 소파에 던져두었다.코트 안에 감춰졌던 블랙 셔츠가 드러나고 탄탄한 몸을 더 타이트하게 부각시켜주었다.
“알고 있어요. 잠깐만 하다가 넣을 거예요.”“네.”그때 뭔가 생각난 듯 원유희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저기…… 혹시 휴대폰 한 번 쓸 수 있을까요? 그게…… 사실 업무 시간에는 사적인 통화는 금지되어 있는데 급하게 가족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네, 쓰세요.”다행히 고객은 흔쾌히 휴대폰을 건넸다.“감사합니다!”휴대폰을 받은 원유희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오후에 시간 되면 새 휴대폰 하나 사줄래요? 비싼 거 말고 가장 싼 거면 돼요. 시간 되면 내가 가지러 갈게요.”통화를 마친 원유희가 휴대폰을 고객에게 돌려주었다.퇴근 후, 저녁 11시.샤워를 마친 원유희가 조용히 아파트 뒷문으로 나섰다.하지만 그 순간, 김신걸을 태운 롤스로이스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썬팅된 창문을 통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김신걸의 눈동자는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번뜩였다.“탁. 탁.”김신걸의 긴 손가락이 손잡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심장을 내리치는 듯한 섬뜩한 소리에 운전기사도 괜히 숨을 죽였다.한편, 아이들을 만나려는 생각뿐인 원유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택시에 올랐다.잠시 후, 여채아의 집 앞에서 내린 원유희가 빠르게 계단으로 올라갔다.저번에 엄마가 건넨 열쇠로 들어온 원유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새 휴대폰을 발견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먼저 아이들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녀는 이미 잠든 아이들의 포동포동한 볼에 뽀뽀를 한 뒤에야 만족한 얼굴로 거실로 나왔다.그녀가 새 휴대폰 포장을 뜯으려던 그때.“똑똑똑.”음산한 노크소리가 울렸다.고개를 홱 돌린 원유희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누구지? 이 야심한 밤에 도대체 누가…….’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소파 밑에 숨긴 원유희가 현관으로 다가갔다.“누구세요?”“문 열어.”위압감 가득한 익숙한 목소리에 원유희의 몸이 굳어버렸다.불안한 예감이 확신으로 이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김신걸…… 김신걸이 왜 여기에…… 설마 아이들 존재를 눈치챈 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하지만 김신걸은 이대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이때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깬 듯한 여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희야?”“안 돼!”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원유희가 본능적으로 김신걸의 탄탄한 허리를 끌어안았다.그 충격에 뒤로 살짝 물러선 김신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문틈으로 바깥 상황을 확인한 여채아 역시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그녀가 깜짝 놀란 이유는 다름이 아닌 조한과 상우와 똑같게 생긴 남자의 얼굴 때문이었다.저 남자가 바로 세쌍둥이의 아빠라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음산한 눈빛에 여채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엄마, 얼른 들어가세요!”혹시나 김신걸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두려웠던 원유희가 그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하지만…….”“괜찮아요. 괜찮아.”여채아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원유희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텔레파시를 보냈다.‘아이들부터 지켜주세요…….’그 눈빛을 읽은 걸까 말없이 문을 닫은 여채아가 부랴부랴 아이들 방문부터 걸어잠근 뒤 다시 현관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댔다.“남자 품에 안기는 게 그렇게 좋아?”정수리 쪽에서 들리는 음침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원유희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미…… 미안. 우,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무서워서…….”솥뚜껑 같은 손을 뻗어 원유희의 뺨을 움켜쥔 김신걸이 말했다.“너희 집 사정 따위에는 관심없어.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에 방해된다면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알아서 해!”턱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원유희의 가슴이 다시 불안감으로 뛰기 시작했다.“알, 알겠어.”“휴대폰은?”“휴대폰…….”주머니를 더듬거리던 원유희가 대답했다.“집에 두고 나왔나 봐…….”다음 순간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움켜쥔 김신걸이 그녀를 계단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악!”잔뜩 겁에 질린 원유희는 반항 조차 할 수 없었다.“살살 좀
멈칫하던 김신걸이 묘한 눈동자로 원유희의 배에 있는 흉터를 바라보았다.다급하게 손으로 흉터를 가린 원유희가 말했다.“아, 1년 전에 맹장수술 받았었거든…….”흉터는 복부 중앙이 아닌 살짝 옆으로 비껴나간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여전히 탄탄하고 하얀 피부는 아무리 봐도 아이 셋 엄마라고는 볼 수 없었다.제왕절개 수술 자국으로 보일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원유희의 심장은 터질 듯 콩닥거렸다.김신걸이 살짝 멈칫하던 그 순간, 아파트 아래에서 펑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그리고 다음 순간 건물 전체에 귀청이 째질듯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미간을 찌푸린 김신걸의 눈동자에 순간 살기가 스쳤다.“내가 김명화를 너무 과소평과했네.”이때 바닥에 벗어둔 재킷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울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소파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원유희를 힐끗 바라본 김신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여보세요.”“대표님, 명화 도련님께서 차로 복도를 들이받으셨습니다. 그 충격으로 차 앞 범퍼에 불이 났고 그래서 경보음이 울린 것 같습니다. 명화 도련님께서는 의식을 잃으신 상태입니다.”전화를 끊은 김신걸이 차가운 눈동자로 원유희를 바라보다 코웃음을 쳤다.“너 때문에 목숨까지 걸 줄은 몰랐어. 언제까지 이렇게 나올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갑작스러운 사고에 흥미가 사라진 걸까 말을 마친 김신걸이 집을 나섰다.문이 닫히고 나서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원유희는 힘없이 소파에 드러누웠다.떨리는 손으로 흉터를 만지던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휴, 다행이야.’사실 김신걸과 관계를 가지는 건 별로 두렵지 않았다.뭐든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니까.하지만 2년 전 그날 밤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게다가 지금 김신걸은 미친 듯이 그녀를 증오하고 있는 상태. 악마 같은 김신걸이 어떤 식으로 그녀를 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한참을 누워있던 원유희가 벌떡 일어났다.‘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명화가 뭘 어떻게 했길래 경보음
“이 정도 다쳐서 형을 막은 거면 싸게 먹힌 거지 뭐.”그녀를 위로하려는 듯 밝은 김명화의 목소리에도 원유희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어제는 왜 왔어?”“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지. 내가 가서 다행이었지 뭐. 아, 여권은 어떻게 됐어? 정말 내가 안 도와줘도 되겠어?”“여권은 이미 재발급 신청했어. 이틀 뒤면 나올 거야.”“하루라도 빨리 형한테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꼭 그렇게 될 거야.”‘꼭 그렇게 될 거야. 아이들이랑 김신걸이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숨어버릴 거야.’“언제 떠날 거야? 내가 비행기 티켓 알아봐줄게. 걱정하지 마. 형이 알아낼 수 없는 안전한 티켓으로 구할 테니까.”“그래, 고마워.”통화를 마친 원유희는 기대감에 부풀었다.끝없는 터널을 걷다 드디어 빛 한 줄기가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오후쯤, 여채아는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틈을 타 다급하게 원유희의 아파트로 향했다.원유희가 미리 알려준 비밀번호로 아파트에 들어간 그녀는 딸이 부탁한 휴대폰을 남기고 조용히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아파트를 나서던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여자의 그림자가 보였다.‘원수정?’여기서 원수정을 만나게 될 거라 생각지 못한 여채아가 다급하게 덤불 뒤로 몸을 숨겼다.장을 봤는지 식재료를 잔뜩 든 기사와 함께 아파트로 들어가는 원수정을 바라보던 여채아가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원수정과 만나는 건 아직 안 돼…….’얼마 후, 퇴근하고 아파트로 돌아온 원유희는 문을 열자 왠지 이상함을 느꼈다.맛있는 음식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자극하고 곧이어 주방에서 원수정이 달려나왔다.“고모?”“왔어? 마침 잘 왔네. 식사 준비 다 끝났으니까 얼른 손 씻고 와.”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원수정이 미소를 지었다.고모가 아파트를 찾아온 것도 모자라 식사까지 차려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원유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씻고 식탁 앞에 앉았다.원유희가 상다리 부러질 듯한 진수성찬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그녀의 맞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