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천둥과 번개의 흔적이 눈에 뒤덮였지만, 여전히 혈전을 겪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낙현책이 말했다.“파살문 우두머리가 도망쳤습니다. 정말 동하국과 결탁했다면 증거를 모조리 없앴을 것입니다.”다들 그럴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주락이 분부했다.“다들 흩어져 찾아보거라. 안전에 주의하고 혼자 있지 말거라.”다들 뿔뿔이 흩어져 파살문 전체를 뒤적거렸다.싸운 곳은 광장이기에 광장을 제외한 다른 마당과 방은 멀쩡해 보였다.대부분의 방은 옛 모습 그대로였지만 한 정원만 어지러워 보였다. 아마도 파살문 우두머리가 지내던 곳인 듯했다. 방 안의 물건은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마치 누군가 뒤져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그리고 마당 구석에는 편지와 글을 태운 흔적이 보였다.심면은 웅크리고 앉아 불에 탄 구덩이를 뒤적거리다 제대로 타지 않은 종이를 찾고 말았다.편지의 말미에는 약재를 천산으로 운반한다는 말뿐이었다.뒤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심면. 무엇을 찾은 것이냐?”유생이 궁금한 듯 물었다.심면이 불에 탄 조각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보십시오.”“천산은 지점인 듯합니다. 하지만 뒤에 있는 글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유생은 한참 살펴보다 저도 몰래 눈살을 찌푸렸다.“천산 절벽?”“며칠 전 마을 의관에서 약을 사며 천산 절벽을 들은 적 있습니다. 겨울에 접어든 후 산길이 워낙 미끄러워 약을 캐러 산을 오르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천산 절벽은 워낙 가팔라서 아주 맑은 날에만 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듣고 심면은 생각에 잠겼다.“누가 파살문에게 약재를 천산 절벽으로 옮기라 시킨 것일까요?”유생이 말했다.“동하국 사람일 수도 있다.”그 외에 파살문에서 다른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다들 먼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돌아가는 도중 생각에 잠겨 있던 심면이 주락에게 물었다.“이곳 의관의 외상약은 아주 부족한 상황입니다. 의관 일꾼의 말에 의하면 청주에서 사람을 보내 약재를 사 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단번에 이렇게 많은 질문을 듣고 흉터가 있는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진지하게 설명했다.“누구에게 약재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누군가 우두머리에게 약재를 주문했고 우두머리는 다른 사람을 시켜 약재를 구매했습니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한 것이 아니니, 어찌 된 일인지 잘 모릅니다.”“약재를 천산 절벽으로 보낸 것만 알고 있습니다. 겨울이라 산길을 오르기 힘들어 여럿 다친 적 있어 이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타다만 편지의 내용과 맞물렸다.천산 절벽.흉터가 있는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약재를 얼마나 산 것이냐?”상대는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열 상자는 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만들어진 외상약도 많았습니다.”“약재를 사는 것만 한 달이 걸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씀씀이가 시원시원한 편이라 약재를 산 돈을 제외하고 따로 사례금을 만 냥이나 줬습니다.”그 말을 듣고 다들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이렇게 많은 약재가 있어야 하는 것을 보니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천산 절벽에 간 적 있느냐?”주락이 물었다.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한 번 가본 적 있습니다.”“좋다. 그럼, 네가 길을 앞장서거라.”주락은 단서를 더 찾기 위해 내일 천산 절벽에 가보려 했다. 그는 어떤 자가 약재를 사들인 것인지 확인하려 했다.청주로 돌아간 후 다시 찾아오는 것은 시간을 너무 지체할 것이다.흉터가 있는 남자가 깜짝 놀랐다.“예? 천산 절벽을 간다고요? 안 됩니다. 제가 갔을 땐 가을이었습니다. 지금은 눈이 와서 산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워 산 아래로 떨어져 죽을 위험이 있습니다.”“이 날씨에 천산 절벽은 어찌 가는 것입니까?”주락이 싸늘하게 말했다.“죽고 싶지 않으면 앞장서거라!”남자는 어쩔 수 없이 승낙하였다.남자의 방을 떠난 후 주락이 입을 열었다.“내일 사람을 데리고 천산 절벽을 살펴볼 테니 객사에 남아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거라. 빠르면 오후 중에 청주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심면이 답했다.“저도 함께 갈 수 있
다들 천산 절벽에 도착했을 때 몸에 온통 흰 눈이 덮여있었다.남자가 길을 안내하자 다들 등산을 시작했다.남자는 앞에서 걸으며 중얼거렸다.“이상하구먼. 누가 계단을 다시 팠나 본데? 한 겨울이라 다니기도 힘든데 누가 온단 말입니까?”“계단을 해놓으니 훨씬 오르기 쉽습니다.”“천산의 흙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아 나무가 많은 것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평소 산에 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길이 가파르다 보니 나무꾼도 점점 줄어들고 그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다니기 힘들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오늘은 운 좋게도 잡초와 관목이 모두 치워졌습니다.”그 말을 듣고 심면은 못내 속으로 의심스러웠다.“그 말에 따르면 산에는 지내는 사람이 없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약재를 이곳으로 옮기라 했단 말이냐?”남자는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습니다. 고용주의 요구니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심면이 물었다.“그럼 어떤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를 것 같으냐?”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렸다.“정말 모르겠습니다.”“하지만 아무도 산에서 지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에 올라갔을 때 숲속에 막사가 있는 것을 보았다.막사 여러 개가 마련되어 있었고 바닥의 풀도 치운 듯했다. 모닥불 위에는 가마가 놓여 있었고 누군가 얼마 전까지 불을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아무도 살지 않을 것이라 하지 않았냐?”심면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흉터가 있는 남자도 넋을 잃었다.“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누구란 말입니까?”남자는 궁금한 듯 막사 하나를 향해 걸어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하지만 걸어 들어가는 순간 비명이 들렸다.다들 깜짝 놀랐다. 심면이 달려갔을 때 장검 한 자루가 튀어나온 것을 보았다.남자는 순간 쓰러졌고 새하얀 눈밭에 온통 피범벅이었다.바로 그때 조용하던 막사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장검은 서늘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고 살기를 내뿜으며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다.막사 안뿐만 아니라 먼 곳에 있는
다들 일제히 손끝에 부적을 쥐고 진을 만들었다. 이내 찬 바람이 몰아치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저 작은 범위의 빗물일 뿐이었다.땅에 붙은 불을 끈 후 유생은 다시 땅을 얼게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부적이 타서 재가 되어 바닥에 닿자, 지면에 얼음이 만들어졌다.이런 술법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싸움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다.하지만 제자들이 많아 그만큼 힘도 강해졌다.싸움 중 적의 힘을 소진할 만하다.땅이 얼자 그제야 다들 몸을 가눌 수 있었다.주락은 이 기회를 틈타 여러 사람을 데리고 열심히 적을 상대했다.그는 검을 들고 그림자처럼 적들 사이를 누비며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지난 곳에 피가 튀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검은 날카로운 기운을 뽐내며 허공에서 번쩍이며 마치 피어난 꽃과도 같았다.얼마나 속도가 빨라야 그럴 수 있는지 다들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정말 대단한 검법이오!”낙현책이 감탄했다.심면이 말했다.“천하제일의 검객이오.”낙현책은 숭배의 눈빛을 비췄고 의욕도 넘쳤다.그는 힘껏 적을 상대했다.하지만 적을 아무리 죽여도 상대는 끊임없이 몰려왔다. 그 수는 적어도 300, 400명이 되는 듯했다.시간이 지나고 다들 체력 소모가 심해져 점점 적을 상대하기 어려워졌다.모두 힘들어할 때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산 위로 몰려왔다.게다가 그들의 사람이 아니었다.다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산 아래 사람들이 변을 당했단 말인가?다들 경계를 하다 손을 쓰려는 순간, 산을 오른 검은 옷의 사람들이 적을 죽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다들 실력이 뛰어났다. 백여 명이 되는 사람들이 공격을 퍼붓자, 도처에 피와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그들의 합류로 이 싸움은 더욱 빨리 끝날 수 있었다.이내 산 아래 사람들도 산을 올라, 주락에게 보고했다.“산 아래에서 습격당하는 바람에 늦게 왔습니다!”주락은 그들도 혈전을 벌인 것을 보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괜찮다. 죽은 부하가 있느냐?
기옥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주락이 웃으며 답했다“자네인 줄 알았소.”“오랜만에 만나는데 문파가 더욱 커졌소.”기옥은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천천히 주락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이곳에 온 지 한참 되었습니다. 심면을 구하려 했지만, 그 아이들이 그렇게 대단할 줄 몰랐습니다. 파살문까지 없애다니요.”“낙 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이곳을 떠나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파살문의 단서를 알아내게 되어 이리 남아있었습니다.”그 말을 듣고 주락은 궁금한 듯 물었다.“무슨 단서요? 파살문의 배후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맞소?”기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제가 알아낸 증거입니다. 동하국 사람이 파살문의 배후에서 경영을 돕고 있었습니다.”“그동안 파살문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왔습니다. 완성하기 어려운 일은 스스로 돈을 보태는 한이 있더라도 해왔는데, 명성을 떨치고 사람을 더 늘여 고수를 더 들이기 위한 것입니다.”“그동안 파살문의 장사는 늘 적자였습니다.”“오늘 천산 절벽에서 매복하고 있던 사람들도 동하국 사람입니다.”“이미 살아있는 자를 잡아다 물었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고옥언입니다.”그 말을 듣고 주락은 살짝 놀랐다.“고옥언의 사람이라니? 고옥언은 이미 잡혔는데, 그의 부하가 계속 임무를 하고 있단 말이오?”기옥이 답했다.“아마 그들도 고옥언과 마찬가지로 여국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이번 매복을 통해 현학서원과 제사장족의 뛰어난 제자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것입니다.”주락은 차를 들고 살짝 마셨다.“그럼 젊은이들을 너무 얕보았소.”기옥이 웃으며 말했다.“예. 파살문을 없애다니, 저도 참 의외였습니다.”“낙 언니가 사람을 구하라 편지를 쓸 만합니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원 밖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두 사람을 가로막는 것이 보였다.기옥은 손을 흔들었다.“들어오게 하거라.”심면과 낙현책이 앞으로 걸어와 궁금한 표정을 지
두 사람은 귀한 선물에 깜짝 놀랐다. 금을 받아보니 위에 금옥량연이라는 글자가 두 글자로 나뉘어 새겨져 있었다.“고모. 위에 글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정성껏 만드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주셔도 되는 것입니까?”심면은 참다못해 한 마디 물었다.기옥이 설명했다.“혼사를 올리는 지인에게 선물하려 만든 것이다. 하지만 장인이 늦게 만드는 바람에 혼기를 놓쳤고 이미 다른 선물을 보낸 터라 이 물건은 남겨두어도 쓸모가 없다.”“너희들이 받거라. 가져다 팔아서 좋아하는 물건을 사도 좋다.”심면과 낙현책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뒤 금덩이를 받았다.“고맙습니다!”말을 마치자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주인님. 잡아 온 여자가 또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낙현책을 찾겠다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당을 태우겠다 소란입니다.”그 말을 듣고 다들 깜짝 놀랐다. 낙현책을 찾겠다니?기옥이 말했다.“나는 그동안 줄곧 이곳에 있었다. 얼마 전 부하들이 남녀가 의관 밖에서 수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보고 행여나 불리한 짓을 저지를까 봐 잡아 오라고 명했다.”남녀?심면과 낙현책은 갑자기 두 사람이 떠올랐다.심면이 물었다.“그녀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기옥은 사람을 명하여 그 여인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역시나 서월이었다!서월은 애타게 낙현책을 바라보았다.“두 사람 다 무사하지 않소? 나도 약속한 일을 해냈소! 대체 언제 약속을 지킬 것이오?”“엽순은 이미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롭힘을 당했소!”심면은 살짝 놀랐다. 한동안 마을에서 지냈지만, 서월이 그들을 찾아오지 않아 이상하다 했었다.알고 보니 왕생방에 잡힌 것이었다.낙현책은 주락과 기옥에게 상황을 알려주었고 기옥은 사람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리고 낙현책과 심면은 엽순을 보러 갔다.그의 외상은 거의 나은 상태였다. 하지만 몸 안에 있는 악귀가 발작을 일으켜 엽순의 머리를 깨어질 듯이 아프게 했다.낙현책은 바로 악귀를 꺼내려 했으나 심면은 경계하며 낙현책을 붙잡고 조
심면은 바로 응했다."물론입니다."다들 기옥의 별채에서 하루 쉬었다. 하지만 큰 눈이 내리는 날씨에 다들 주변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것을 금치 못했다.심면과 낙현책은 호숫가 정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낙현책은 연달아 몇 판을 지고 저도 몰래 머리를 긁적였다.“정말 바둑을 잘 두지 못하나 보오. 어찌 또 졌단 말이오?”마침 강소풍과 임계천이 그곳을 지나갔다. 임계천은 바둑판을 보고 흥이 났다.“내가 한판 겨루어도 되겠소?”낙현책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켜섰다.“자, 자네가 한판 겨루게.”“난 검이나 연마해야겠소.”낙현책의 말에 강소풍도 흥이 났다.“낙 공자. 그날 밤 파살문에서 우리가 도착하기 전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소. 자네의 실력은 정말 강하오. 자네와 겨루어보고 싶소.”누군가 함께 검을 연마하니 낙현책은 아주 기뻤다.“좋소.”두 사람은 바로 정원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게 선을 잘 지키고 있었다.심면과 임계천은 바둑을 두면서 간간이 살기가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두 사람은 바둑에 정신을 몰두하고 있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총 네 판을 겨루었고 각각 두 판씩 이겼다.“심 처녀가 이렇게 바둑을 잘 둘 줄은 몰랐소!”임계천은 진심으로 칭찬했다.“바둑으로 성격을 보아낼 수 있소. 심 처녀는 내가 만난 상대 중 유일하게 전체를 신경 쓰는 여인이오. 걸음마다 신중했고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소.”“심 처녀의 스승은 누구요?”그 말을 듣고 심면은 살짝 멈칫하다 웃으며 말했다.“스승이 없소.”“할아버지께서 바둑을 가르쳐주셨고 그 후 할아버지의 서적을 보면서 배웠소.”“할아버지께서 명사의 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셨소. 나도 워낙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여 스스로 배웠소.”“자네한테 비하면 보잘것없소.”임계천은 매우 놀랐다.“스승도 없이 이렇게 바둑을 잘 둔다는 말이오? 정녕 천재가 따로 없소.”“나는 어릴
섭정왕부(攝政王府).동상방(東廂房) 내 꽃무늬가 새겨진 침상 주위에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낙청연(洛清淵)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침상 위의 난잡한 흔적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햇빛이 빨간색의 흔적을 또렷이 비추고 있었다. 어젯밤 신방(新房)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왔던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한번 수치심과 모욕감이 울컥 치밀어올라 돌연 그녀를 견딜 수 없었고 굴욕으로 인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왜 우는 것이냐? 드디어 네 바람대로 섭정왕부에 시집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낙청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의자 위에 정좌로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위엄 있으면서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차가우면서도 냉담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낙청연은 그의 시선이 칼이 되어 살을 에이는 것 같았고 온몸이 피 칠갑이 된 것 같았다.낙청연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내 가슴 부근이 꽉 막힌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왕야(王爺)… 줄곧 여기 계셨습니까?”남자는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너와 내가 혼인을 올린 날인데 본왕이 여기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그 순간, 낙청연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어젯밤 신방에 쳐들어왔던 남자들과 도처에 남겨진 어지러운 흔적들에 그녀는 수치스러웠고 분했는데 그녀와 함께 첫날밤을 보내야 했던 남자는 그 방 안에서 밤사이 그 남자들이 어떻게 그녀의 옷을 찢어발겼는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왜입니까? 제가 그렇게나 미우십니까?”정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낙청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분통을 터뜨렸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첫날밤 하인들더러 그녀의 순결을 빼앗게 했고 그녀의 몸과 마음을 더럽혔다.낙청연은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를 경모했었고 당시 태황태후(太皇太后)는 두 사람이 금동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