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치러 가마.”부진환은 곧바로 방문을 열고 폭우 속으로 뛰어들었다.광풍이 불어 굉음과 함께 정원의 등불이 흔들렸고, 큰비가 내려 앞을 밝혀주지 못했다.낙요는 급하고 세게 오는 비를 보며 불안을 느꼈다.그러고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우산을 찾아 방문을 나섰다.부진환은 사다리와 옥상을 메꾸는 재료를 가져왔다.낙요는 우산을 들고 사다리를 붙잡아줬다.“조심하세요!”낙요는 크게 외쳤지만, 빗물에 목소리조차 묻히고 말았다.부진환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큰비에 온몸이 젖었고 앞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등불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퍼부었지만, 부진환은 곧바로 비가 새는 곳을 찾아 고쳤다.그렇게 온몸이 푹 젖어 방으로 돌아가 지붕을 보니, 더 이상 비가 새지 않았다.“제가 뜨거운 물을 끓일 테니 몸 좀 녹이세요. 감기에 들면 안 됩니다.”낙요는 급히 주방으로 향했다.바로 그때, 후원 문밖에서, 우산을 쓴 그림자가 조용히 빗속에 서 있었다.심녕은 정원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번개가 칠 때, 지붕 위의 익숙한 그림자도 보았다.심녕은 우산을 꽉 잡고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온 저녁 찾은 왕야가 여기에 있었다니!역시 왕야와 낙운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아니면 어떻게 이곳에서 밀회를 하겠는가!심녕은 자신이 소홀했다고 생각했다.그때 낙운을 처음 만났을 때 죽였어야 했다!-낙요는 뜨거운 물을 끓이고 목욕통에 넣었다.부진환은 연신 재채기를 했고, 낙요는 어서 몸을 녹이라고 재촉했다.낙요는 이 틈을 타 방의 누수를 깨끗하게 청소했다.그러고는 숯불을 피웠다.비와 함께 차가운 기운이 풍겼고, 숯불이 타오르자 방안은 곧바로 따뜻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진환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그러고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고개를 숙여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바라보았다.“누구 옷이냐? 작아 보이는구나.”낙요는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작지만 우선 입으세요.”“진소한의 옷입니다.”그때 진소한
낙요는 방문 앞으로 다가가 밖을 보며 말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나가보고 오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낙요는 우산을 들고 다시 방문을 나서 빠른 걸음으로 후원에 달려갔다.후원 문을 연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심녕과 쓰러진 심부설이 보였다.두 사람은 비를 무릅쓰고 있었다.심부설은 비를 너무 맞아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낙요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심부설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낙요는 앞으로 다가가 심부설을 업고 정원에 들어와 다른 방에 데려갔다.심녕은 뒤를 따랐다.부진환은 방에서 소리를 듣고 의문스러웠으나 옷을 입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심부설을 침상에 눕힌 후, 낙요는 맥을 짚어주며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뭐 하는 짓이오? 언니의 몸 상태를 모르는 것이오? 어찌 데리고 나와 비를 맞는단 말이오?”낙요는 참지 못하고 심녕을 꾸짖었다.심녕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언니가 왕야를 찾겠다고 해서 나왔소.”“왕야께서 여기에 계신 거, 맞소?”낙요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녕의 매서운 눈빛으로 보니, 이것도 심녕의 계략이었다.그러나 심녕이 이렇게까지 지켜볼 줄은 몰랐다. 부진환은 하룻밤 부에서 나온 것뿐인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또 어떻소? 무슨 상관이오?”“지금 왕야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단 말이오? 언니 목숨이 위태로운데.”심녕은 매서운 눈빛으로 낙요를 흘겨보았다.“왕야는 절대 이유 없이 사라지지 않소. 당신이 왕야를 데려간 게 분명하오!”“왕야는 쭉 건강이 좋지 않았으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소!”낙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뭔데 이런 말을 하는 거요?”“왕야께서 정녕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신이 간섭할 틈도 없을 것이오.”말을 마친 후, 낙요는 손수건으로 심부설 얼굴의 물을 닦아주었다.“당신!”심녕은 화가 났다.“어서 심 낭자 옷을 갈아입히시오! 꾸
약재를 가진 후, 낙요는 방을 나서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그러고는 주방에 약을 달이러 갔다.약을 달이고 방에 들어가자, 심녕이 이미 심부설의 옷을 갈아입혔다.그러나 심부설은 비를 맞아 온몸이 차가웠다.낙요는 또다시 방에 숯불을 피웠다.심녕이 다시 추궁했다.“왕야께서 여기에 계신 게 맞소?!”낙요는 짜증 섞인 듯한 눈빛으로 심녕을 흘겨본 후 말했다.“언니의 생사보다 왕야가 더 중요하단 말이오?”“심녕, 친언니까지 이용하는 것이오?!”심녕은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낙요는 차가운 눈빛으로 심녕을 보며 말했다.“무슨 말인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 거요!”심녕은 화가 잔뜩 난 채 문을 박차고 나갔다.낙요는 심녕이 부진환을 찾으러 간 걸 알았지만, 막을 수 없었다.심녕이 심부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는 건, 이미 부진환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숯불을 피운 후, 낙요는 침상 옆에 앉아 심부설에게 이불 한 채를 더 덮어주고 손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그렇게 심부설도 서서히 눈을 떴다.“낙 낭자…”심부설은 허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어났습니까? 마침 약도 달여졌으니 약부터 드세요.”낙요는 앞으로 다가가 심부설을 부축해 앉혔다.그러고는 약을 먹여주기 시작했다.“뜨거우니 조심하세요.”심부설은 멈칫하더니 약을 먹으며 문밖의 비를 바라보았다.그러면서 무거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왕야를 찾으러 왔습니다.”“여기에 있는 게 맞습니까?”“비가 세게 오는데 무사합니까?”“왕야도 몸이 좋지 않아 양 의관이 종종 진귀한 약재를 찾아 달여서 먹이곤 합니다.”이 말을 들은 낙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무사합니다.”“우선 심 낭자 걱정부터 하세요.”“어찌 저녁에 나와 왕야를 찾는 겁니까?”이 말을 들은 심부설은 한시름 놓은 듯하더니 난감한 안색으로 밖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심녕은 보이지 않았다.심부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심녕이 왕야께서 실종되었다고 무슨 일이 생긴
심녕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왕야, 어찌하여 이리도 냉정하십니까? 저희는 왕야를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큰 공은 못 세웠더라도 저희가 고생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부진환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거라. 무례를 범하고도 감히 이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빗줄기가 가녀린 심녕의 몸을 내리치고 차가운 밤바람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몸이 시린 것에 비해 시린 마음이 더 아팠다.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뒤돌아섰다.심녕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뒷문을 통해 저택을 나갔다.그리고 비를 맞으며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낙요는 그녀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잠그고 방으로 돌아갔다.“심녕이 떠났습니다. 아마 충격이 큰가 봅니다.”낙요가 말했다.부진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양반다리를 하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다만 몸에 맞지 않는 의복차림을 하고 있어서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사람을 그렇게 귀찮게 할 줄 알았으면 애초에 그들 자매를 찾지도 않았을 거다.”낙요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앉았다.“좀 귀찮긴 하네요. 조용히 지내려고 했는데 말이죠.”부진환은 안쓰러운 얼굴로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속상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오늘은 너랑만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완벽했던 계획이 일그러진 탓에 부진환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 아무도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자꾸나.”부진환은 지금 당장 낙요를 데리고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만족의 영토에 가보고 싶습니다. 그곳 경치가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너무 멀어요. 지금 떠나도 아마 몇 달이 걸릴 거라고 하더군요.”“그럼 일정을 조정해서 시간 날 때 한번 가보자꾸나.”“예.”날이 밝기 시작하면서 비가 그치고 화창한 날씨가 도래했다.낙요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밤새 내린 비가 다 마른 뒤였다.그녀는 눈을 감고 시원
심부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분부대로 하겠습니다.”“그래.”그 말을 끝으로 부진환은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방문이 닫히는 순간 심부설의 공허한 두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낙요는 조심스럽게 방 문을 열었다.부진환은 여전히 침상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그녀는 소리를 죽이고 침상으로 다가가서 잠든 듯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주무시고 계신가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커다란 손이 뻗어나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침상 위의 사내는 언제 잠들었나 싶게 몸을 뒤집어 일으키더니 두 팔로 낙요를 감싸 안았다.“왜 이리 늦게 왔느냐?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이대로 밖에 나갈 뻔했다.”잠기가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낙요는 생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그렇게 급하면 그대로 입고 나가시지 그러셨습니까. 어차피 수치는 왕야의 몫이니까요.”부진환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웃으며 말했다.“난 네 사람이니 수치도 응당 너의 몫이지 않겠느냐.”둘은 침상에서 한참이나 뒤척이다가 의복을 입고 아침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식탁에 마주앉은 낙요가 입을 열었다.“참, 심부설은 아직 자고 있을까요? 제가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입에 먹다 만 만두를 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부진환이 그녀의 팔목을 잡고 말했다.“자고 있으니까 아직도 방에 있는 거겠지. 일단 밥부터 먹자꾸나.”낙요는 조용한 그녀의 방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그럼 먹을 것을 따로 남겨야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새 접시를 가져다가 만두를 따로 담았다.부진환은 진지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화도 안 나느냐?”낙요는 멈칫하며 고개를 들고 의뭉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어서 밥이나 들자꾸나.”말을 마친 그는 낙요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었다.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심부설이 있는 방 쪽으로 돌렸다.한편, 방 안의 심부설은 이미 눈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낙요를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었다.식사를 마친 뒤, 낙요는 다시 심부설의 방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부진환이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아마 조금 이따가 사람이 올 거야. 넌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부진환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기에 낙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왕부로 돌아간 뒤, 부진화는 남은 공문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그후로 하루가 지나도록 낙요는 심부설과 심녕을 만나지 못했다.그날 밤, 궁에서 심부름꾼이 왕부에 방문했다. 태상황이 낙요를 궁으로 불렀다는 내용이었다.“나랑 함께 가겠느냐? 태상황께서 네가 많이 보고 싶나 보구나.”낙요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별일은 없는 듯하니 혼자 가겠습니다. 별일 있었으면 왕야를 호출했겠지요.”“처리할 공문도 많으니 저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되도록 일찍 돌아오겠습니다.”부진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둘은 서재 앞에서 한참을 부둥켜 안고 있었다.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감이 재촉해서야 낙요는 밖으로 나갔다.그들이 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시각이었다.태상황은 한가롭게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바둑을 두고 있었다.낙요를 본 그는 반갑게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어서 오너라. 혼자 하루종일 바둑알만 만지고 있었느니라. 너랑 같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불렀다.”낙요는 공손하게 다가가서 태상황의 앞에 마주앉았다.“급한 일로 부르셨다더니 같이 바둑을 두려고 부르신 거였습니까?”“짐과 바둑을 두는 일인데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더냐?”태상황이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낙요는 잠깐 침묵하다가 바둑알을 집어들었다.몇 수가 오간 뒤, 태상황이 입을 열었다.“요
태상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짐은 그럴 생각이다만 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서 불렀다. 다만 녀석이 필요한 건 의원이 아니라 너야. 그 녀석에게 살아갈 의지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낙요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폐하께 제가 누군지 밝히고 낙청요의 신분으로 치료를 해드리라는 뜻이옵니까.”태상황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 물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다.”낙요는 잠깐 고민했다. 사실 맨 처음에 입궁하여 부운주를 치료하자고 마음먹었을 때는 진짜 신분을 밝힐 생각이었다.그래야만 부운주가 치료에 협조적으로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부운주 자신이 살아갈 의지를 가지는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자신을 향한 부운주의 집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녀는 그 집념에 아무런 응답도 줄 수 없었다.부운주의 병을 치료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나, 마음의 병까지 치유해 줄 수는 없었다.“돌아가서 왕야와 상의해 보겠습니다.”태상황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섭정왕부.깊은 밤, 시종이 서신을 들고 서재를 찾았다.“왕야, 심녕 낭자의 서신이옵니다.”부진환은 서신을 받아 봉투를 뜯었다.여태 돌봐준 것에 감사하다는 것과 언니와 함께 날이 밝으면 경성을 떠나겠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심부설에게 여한이 남지 않게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으니 일품루로 와달라는 내용도 같이 적혀 있었다.서신을 확인한 부진환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어찌됐건 가서 얘기라도 들어줄 생각이었다.일품루에 도착했더니 내각은 이미 다른 손님을 물린 상태였다.그는 심부름꾼의 안내에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에서 기다리던 둘은 부진환을 보자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었다.“왕야,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심부설이 기쁨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부진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고는 담담히 말했다.“어디로 갈지는 정했느냐? 내일에 사람을
부진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본왕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심부설은 살짝 멍해 있더니 바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이 왕야와의 마지막일 거 같아서 마시겠습니다.”이 말을 끝내더니 바로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한숨에 들이켰다.부진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에 놓인 잔을 쳐다보더니, 마지못해 잔을 들어 마셔버렸다.“또 볼일이 있느냐?”심부설은 웃더니 아쉬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왕야, 그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일 왕야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인정합니다. 왕야께서 저를 살려준 그날부터 저의 마음은 이미 왕야의 것이 되었습니다.”“또한 천진난만하게 아름다운 꿈도 꿨지만, 어제서야 완전히 단념했습니다.”“다만 저는 여전히 너무 궁금합니다. 왕야, 낙운은 도대체 누구입니까?”심부설은 약간 억울했다.자신이 왜 이렇게 철저하게 패배했는지 알 수 없었다.만일 왕야와 낙운 사이에 옛정이 없었다면 왕야는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하지만 부진환은 그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녀가 누구든지 네가 신경 쓸 바 아니다.”“물어볼 필요 없다.”심부설은 웃으며 말했다. “대답을 못 들을 줄 알았습니다.”“왕야께서 어제 얘기한 조건을 저와 심녕은 이미 상의했습니다.”“왕야 덕분에 저와 동생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색다른 인생을 체험해 본 걸로 이미 만족합니다.”“태풍상사는 처음부터 왕야의 돈으로 설립한 것이고, 저와 동생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태풍상사를 독차지할 이유는 없습니다.”이 말을 하며 심부설은 일어나 궤짝 안에 넣어두었던 나무 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것은 태풍상사의 모든 장부 및 금고 열쇠와 전장의 은표입니다.”“모든 물건은 여기에 다 있습니다. 모두 정리되었습니다.”“요 며칠 심녕이 번 돈도 우리가 생활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태풍상사의 돈은 한 푼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왕야께서 확인해 보십시오.”부진환은 이
묵계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뱀독이 확산하여 썩어가는 송천초의 피부를 보니, 그녀는 못내 싫어졌다.시간이 흐르면 뱀독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그러다 오장육부를 다치면 이 몸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묵계는 갑자기 방법이 떠올랐다.“좋다. 진법을 거두거라. 나오겠다.”묵계도 조금 조급해졌다.“약속하거라. 너에게 다른 몸을 찾아줄 테니 절대 다른 짓 하지 말거라.”낙요가 말했다.“그래. 어서!”두 사람은 드디어 의견이 맞았다.낙요가 진법을 없애자, 묵계도 순순히 송천초의 몸에서 나왔다.낙요는 특별히 두 가닥의 혼이 모두 나왔는지 확인했다.낙요는 얼른 부적을 송천초의 몸에 붙였고 묵계는 다시 송천초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하지만 묵계는 낙요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낙요가 가까이 오자 바로 낙요의 미간을 파고들었다.그녀는 순식간에 낙요의 몸속으로 들어갔다.낙요는 심한 충격을 입은 듯 휘청이며 뒤로 물러서서 의자를 붙잡고 그제야 안정을 찾았다.그녀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하하. 다른 몸을 찾을 필요 없다. 네 몸이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혼을 빼앗는 것에 난 도가 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를 대신하여 여국의 여제가 될 것이다.”낙요는 안정을 찾고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동하국에 너무 오래 있어, 바깥세상을 본 적 없는 모양이구나.”“아무나 너에게 혼과 몸을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제사장족의 대제사장들을 들어본 적 있느냐?”묵계는 낙요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제사장족? 동하국 사람한테서 들은 적 있다. 그때 나를 공격한 젊은이들도 제사장족 사람들이었다.”“그들이 쓰는 진법은 네 진법과 다를 것이 없다. 보아하니 너도 제사장족이구나.”“잘됐구나. 네가 강할수록 너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묵계는 아직도 기뻐하고 있었다.낙요가 난감한 듯 웃었다.“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구나.”“너처럼 순진한 요괴는 처음 보
백서는 바로 방에서 물러나 방문을 닫았다.조영궁 밖이 조용해지자, 병풍 뒤에서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초경이었다.그는 쓰러져 있는 송천초를 품에 안고 있었다.낙요는 안색을 굳히고 다급히 앞으로 걸어갔다.“어찌 된 일입니까?”초경은 송천초를 연탑에 눕히고 설명했다.“동하국에서 괴물을 만났습니다...”초경은 사건의 경과를 간단히 설명했고 묵계의 신분도 알려주었다.그의 말을 듣고 낙요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렇습니까?”“방법이 있습니까? 그 괴물은 천초의 몸을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독을 없애서 깨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천초가 위험할 것입니다!”초경은 몹시 조급했다.낙요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급해하지 마십시오. 방법이 있습니다.”“천초 몸 안에 있는 묵계의 혼을 뽑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밖을 지키고 있으세요.”초경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낙요는 여국에서 제일 강한 대제사장이었으니, 분명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천초는 괜찮을 것이다!“예. 밖에 있겠습니다.”초경은 바로 방에서 나가 정원을 지키고 있었다.낙요는 피로 진을 그려 송천초의 몸을 뒤덮었다.그리고 송천초 몸 안의 혼을 빼내기 시작했다.물론 묵계가 그녀의 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아, 과정이 쉽지 않았다.손을 세게 쓰면 송천초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약하게 하면 묵계를 꺼낼 수 없었다.“넌 누구냐? 감히 나를 상대하려는 것이냐?”묵계의 낮고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국과 오랫동안 싸웠는데, 여국의 여제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낙요는 가소롭다는 듯 답했다.그 말을 듣고 묵계는 깜짝 놀랐다.“여국 여제? 평범한 사람을 위해 이 진까지 쓰는 것이냐?”“이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난 너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나와 손을 잡지 않겠느냐?”낙요가 가볍게 웃었다.“보아하니 넌 사람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사랑도 모르고 우정도 모른다.”“네가 몸을 원한다면 더 좋은 몸을 찾아주겠다. 얌전히 송천
“대체 뭘 하려는 거냐!”초경이 매섭게 물었다.“나는 살고 싶다. 나를 풀어주면 안전한 곳에 가서 이 여자를 풀어주마.”그 말을 듣고 초경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너를 풀어주면 천초를 놓아줄 것이라 믿지 않는다.”묵계가 담담하게 웃었다.“비록 웅황주가 나를 몰아냈지만, 이미 이 여인의 몸에 혼을 한 가닥 남겼다. 지금 두 가닥의 혼이 몸에 들어있으니, 7일 후 혼을 잃고 나의 몸이 될 것이다.”“이 몸은 이제 내 것이다.”“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얘기할 자격도 없다. 내 말대로 해야 이 여자는 살 기회가 있다!”“나를 놓아주거라!”묵계의 위협에 초경은 주먹을 꽉 쥐고 분노를 억눌렀다.“가거라.”“3일 후, 반드시 천초를 만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널 찾아 죽일 것이다.”묵계가 입꼬리를 올렸다.“좋다!”말을 마치고 묵계는 약사의 몸을 끌고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낙현책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정말 이렇게 풀어주는 것입니까? 천초 고모를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초경은 묵계가 떠난 방향을 빤히 보며 말했다.“괜찮다.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낙현책은 살짝 놀랐다.이내 다들 그녀를 따라갔다.그들은 바닷가 암초에서 묵계를 따라잡았고 그녀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유생은 그녀가 중독된 것을 알아차렸다. 발목을 보니, 어느새 뱀에게 물려 있었다.유생이 고개를 돌려 초경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초경이 한 일인 것 같았다.초경은 놀라지 않고 마음 아픈 표정으로 송천초를 안았다.“천초를 데리고 먼저 돌아갈 테니 너희들은 부 태사를 돕거라.”“예!”이내 초경은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다들 부 태사를 도우러 갔다.부진환은 병사를 이끌고 동하국을 공격했다. 비록 동하국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방어에 강한 성벽과 무기가 없었고 선박뿐이었다.여국 병사들이 끊임없이 섬에 오르고 있으니, 동하국이 멸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초경은 송천초를 안고 청주로 돌아와 묵계의 혼을 어떻게든 몰아내려고 했지만, 줄곧 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금색 진법이 나타나 묵계를 진법 안으로 가두었다. 귀를 뚫을 듯한 그 노랫소리는 진법 속에 가로막혔다.흰옷을 입은 제사장족 제자 수십 명이 하늘에서 나타났다.그들은 복숭아나무 위에 가볍게 서서 열 손가락으로 진법을 그렸고 손끝에는 금빛 부문이 흐르고 있었다.묵계는 깜짝 놀란 후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송천초를 바라보았다.“너구나!”송천초가 차갑게 웃었다.“설마 내가 혼자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묵계는 굳은 표정으로 분노에 찬 듯 말했다.“괘씸하구나! 너에게 속다니!”그때, 밖에서도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송천초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부 태사가 사람을 데리고 동하국을 공격했으니, 당신은 도망가지 못할 것입니다.”“차라리 순순히 잡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그녀는 어젯밤 묵계를 만난 후 막사로 돌아가 바로 이 일을 부진환에게 알리고 대책을 논의했다.부진환은 그 여자가 동하국 약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초경도 분명 그 여자의 손에 있을 테니 그에 따른 계획을 세웠다.그녀가 혼자 묵계를 만나러 간 것도 다른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다들 기관선을 이용해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묵계가 뱀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송천초는 웅황을 가득 챙겨 몸을 지키려 했다.묵계는 진법 속에서 절망하여 초경을 바라보며 말했다.“너와 나도 동족이라 할 수 있다. 나한테 한 짓을 다시 너한테도 할 것이다! 사람은 절대 믿어선 안 된다!”“정말 저 사람들을 도우려는 것이냐?”“초경. 난 너를 죽이려 한 적 없다!”초경은 한숨을 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의 처지가 안쓰럽지만, 우린 동족이 아니다.”“우린 다르니, 같다고 하지 말거라.”“너의 딱한 처지를 보아, 솔직히 말하마. 동하국은 곧 멸망할 것이니, 너도 원수를 갚은 셈이다. 마음 놓고 떠나거라.”그 말을 듣고 묵계는 넋을 잃고 그들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죽으려면 함께 죽겠다!”묵계는 하늘을 향해 소
“그는 감금되었다. 우리는 그를 구할 수 없다. 그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너의 몸과 나의 힘을 합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기회가 있다.”그 말을 듣고 송천초는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입니까?”묵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나와 하나가 될 수 있느냐? 그를 구할 수도 있고 그와 같은 수명을 가질 수도 있다.”“두 사람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하지만 대가로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할 수 있느냐?”송천초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색에 잠겨 대답하지 않았다.묵계가 말을 이었다.“이곳은 동하국이다. 그들이 설치한 함정에 나는 들어갈 수 없고 평범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들어가도 그를 구할 수 있겠느냐?”“우리가 힘을 합치면 할 수 있다! 잠시 힘을 합쳐 그를 구하고 다시 방법을 생각해 떨어지는 것이 어떠냐?”묵계가 한참 말을 한 뒤에야 송천초는 그녀의 말을 허락했다.“좋습니다. 허락하겠습니다.”그 말을 듣고 묵계는 기쁠 따름이었다. 송천초가 이렇게 쉽게 넘어올 줄은 몰랐다.만약 이 몸을 빼앗는다면 초경에게 청신요를 쓰지 않아도 된다.“좋다. 바로 자리를 옮겨서 시작하자.”송천초는 고개를 끄덕이고 묵계를 따라 복숭아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갔다.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복숭아나무였고 다른 것은 없었다.송천초는 묵계의 말에 따라 다리를 꼬고 앉았다.묵계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와 손바닥을 마주하고 있었다.“시작할 것이다. 조금 불편할 테니 참거라.”묵계는 말을 마치자마자 시작했다.송천초는 괴로워하며 눈살을 찌푸렸고 온몸의 기운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옆에 있던 복숭아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밀실에서 독을 없애려 애쓰고 있던 초경은 순간 송천초의 존재를 느꼈다.그는 번뜩 눈을 뜨고 송천초가 주위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게다가 그녀는 지금 위험하다!초경은 마음이 초조했다. 그는 송천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독을 없애기도 전에 다급히 밀실 문을 부수고 뛰쳐나갔다.묵계의 혼이
송천초는 깜짝 놀랐다.그 여자는 분명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송천초를 향해 걸어오는 도중 옷과 머리카락이 말랐다.송천초는 위험을 감지하고 바로 사람을 부르려 했다.그녀가 있던 곳에 마침 암초가 있어 그 여자의 모습을 막았다. 옆에 바로 청주군의 막사가 있었는데 이렇게 대담하게 이곳으로 오다니!송천초가 사람을 부르려는 그때, 여자가 입을 열고 그녀를 저지했다.“나는 적의가 없다. 그저 너를 찾으러 왔다.”“저요?”송천초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송천초라 하느냐?”묵계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본 기억 속의 그 여자와 똑같이 생겼다.“어떻게 아는 것입니까?”묵계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묵계라고 한다. 초경이 위험에 처해 있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송천초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졸이며 저도 몰래 앞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무슨 일입니까?”“당신은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어찌 당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묵계 뒤에서 뱀 꼬리가 나타났다. 송천초는 깜짝 놀랐다.“나는 그와 동족이다. 그가 너를 찾아오라 한 것이다.”“만약 그를 구하고 싶다면 오늘 밤 홀로 이곳에 오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너를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가겠다.”그 말을 듣고 송천초가 물었다.“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동하국입니까?”“그곳 말고 더 있느냐?”“오직 너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거라. 초경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내가 시킨 대로 하거라.”말을 마치고 묵계는 경계하며 막사를 힐긋 보고 몸을 돌려 바다로 사라졌다.송천초가 추궁하기도 전에 묵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그녀가 무슨 사람인지 말한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종일 불안했던 것을 생각하면, 초경에게 정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병사가 상황을 보러 왔다.“방금 이쪽에서 인기척이 있길래 보러 왔습니다. 무슨 일 없는 것입니까?”송천초는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그 노랫소리는 그의 의식을 흐릿하게 했다. 그는 애써 소리를 막으려고 했지만, 자꾸 귀를 파고들었다.초경은 한참 몸부림치다가 결국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머리를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바닥에 쓰러졌다.묵계는 그 모습을 보고, 그제야 그에게 다가갔다.“너를 상대하기가 참 어렵구나. 하지만 나를 너무 얕본 것 같구나. 인어족의 청신요는 죽어가던 사람도 깨울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현혹해 행동을 조종할 수도 있다. 쉬이 사용하지 않던 방법인데 이렇게 너에게 쓰게 됐구나.”묵계는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웅크리고 앉아 손을 뻗어 초경의 얼굴을 스쳤다.“청신요로 너의 기억을 바꾸면 오늘부터 나의 명을 따르며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거부하지 말거라. 자칫 잘못하면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묵계는 웃으며 말을 마치고 손을 초경의 머리 위에 얹은 후 청신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맑은 소리가 주문처럼 초경의 귓가에 맴돌면서 바늘처럼 그의 머리를 파고들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묵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애먹였다.그녀는 의지력이 이렇게 강한 사람을 본 적 없었다.묵계는 싸늘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지 봐야겠구나!”그녀의 손끝이 초경의 미간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실패의 원인을 찾았다.그의 기억 속에는 온통 다른 여자뿐이다.그것도 평범한 여자였다.청신요의 통제를 받지 않고 기억을 지우지도 못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니.묵계는 내키지 않았다. 그 여자가 자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은 원인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고작 수십 년의 수명만 갖고 있어 결국 늙어 죽기에 그들과는 다르다.감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의 육체가 다치지 않았다면 청신요를 쓰는 것도 애먹을 리 없었을 것이다.보아하니 이 방법으로는 그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그럼...묵계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묵계는 초경을 업고 돌아가 밀실에 가두었다.묵계는 그녀가 자리를 비웠을
묵계는 이 남자를 죽이기 아까웠다.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나긴 수명을 갖고 있어 함께 수련할 수 있었다.이런 사람을 또 찾기 어려울 것이다.초경은 그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다.“그럼, 너는 진정한 약사가 아니냐?”묵계가 콧방귀를 뀌었다.“물론이다. 그 여자는 이미 죽었다. 나의 몸을 망가트렸으니, 그녀가 바다로 들어간 기회를 틈타 그녀를 죽이고 몸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뱀의 기운은 무슨 수를 써도 사라지지 않았다.”“그동안 약사의 신분으로 동하국에서 지내며 바다에서 보물을 발견하여 일반인과 다른 힘을 얻었다고 그들을 속이고 바다에 들어가 보물을 찾게 했다.”“이로써 그들의 내전을 일으켜 영원히 평화로이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나의 한을 풀었다!”초경은 그제야 이유를 깨달았다.“여국 바다에 있는 진도 네가 깬 것 같구나.”초경은 부진환에게서 여국과 동하국의 전쟁에 관해 많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다들 대진이 깨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동하국 사람은 여국 땅으로 침입할 수 없다.하지만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눈앞에 있는 이 괴물은 할 수 있었다.역시나 묵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물론 나다.”“내가 아니었다면 동하국 사람은 평생 여국 땅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초경이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복수를 하고 싶지만, 동하국 사람을 모두 죽이지 않았다. 살생을 저질러 화를 입고 싶지 않은 것이구나.”“그래서 대진을 파괴하고, 동하국 내전을 일으키고 그들을 선동하여 여국을 공격한 것이냐? 그들이 전쟁으로 죽게 만들려는 것이냐?”“아주 완벽한 계획이구나. 하지만 전쟁을 일으켰으니, 결국 운명의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묵계가 만족스럽게 웃기 시작했다.“나의 계획을 알아차리다니 정말 똑똑하구나.”“그들이 싸우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대진이 사라졌다 해도 여국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나와 상관없다.”“내가 화를 입는다 해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말을 마치고
그는 이내 약사를 찾으러 갔다.그러나 도림을 벗어나기도 전에 초경은 앞에 길이 없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자리에 멈춰 서서 사방을 관찰하다 이곳이 미로라는 깨달았다. 그는 손바닥을 들었지만,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자세히 맡아보니, 바람 속에 복숭아 꽃향기와 옅은 약재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독이 있다!뒤에서 여유로운 발소리와 묵계의 웃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왜 앞으로 가지 않습니까?”초경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묵계는 무서운 표정이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득의양양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초경은 가슴이 떨려왔고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네가 바로 약사냐?”묵계가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먼 곳에서 나를 찾아왔는데, 약사라는 이름만 알고 계십니까? 제 이름도 모르는 것입니까?”“다들 저를 자릉약사라 부릅니다.”“이곳에 온 순간부터 알아차렸습니다. 비록 신분을 모르지만, 홀로 이곳에 온다는 건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겠지요. 그래서 도림에 손을 조금 썼습니다.”“도림에 들어선 후부터 이미 중독되었습니다. 이곳에 오래 있을수록 독은 더욱 세질 것입니다.”“그리고 이 독은 사족을 겨냥한 독입니다.”묵계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초경을 바라보았다.초경은 슬쩍 내공을 써봤지만, 사지가 무기력했다. 무언가가 갑자기 그의 경맥을 막은 것처럼 내공이 안정을 잃고 통제하기 어려웠다.그는 손을 움켜쥐고 불편함을 참으며 내색하지 않았다.“사족? 나를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냐? 넌 대체 누구냐?”초경은 의아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이상할 것 없이 평범한 사람 같았다.묵계가 가볍게 웃자, 뒤에 환영이 나타났고 그녀의 꼬리가 보였다.하지만 재빨리 사라져 버려서 초경은 뱀 꼬리인지 아닌지를 똑똑히 보지 못했다.“공자, 우린 같습니다. 저를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주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묵계는 흥미진진하게 초경을 훑어보았고 눈빛에는 탐욕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초경의 강한 수위를 탐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