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궐국.며칠째 병상에 누워있던 부진환은 정신을 차린 뒤 곧바로 경도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말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부진환은 재빨리 경도로 돌아갔고 곧바로 보고하러 갔다.서릉의 위협이 일단락되자 조정 사람들은 다들 기뻐했다.“이번에 대국사가 맞췄군. 섭정왕이 나서니 전쟁이 해결되었소.”낙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그제야 조금 달라졌다.“이번에 섭정왕이 또 공을 세웠소. 폐하께서 그에게 어떤 상을 내릴지 궁금하군.”...어서방.부운주는 서릉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에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했다. 그는 호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짐이 전해 듣기론 전장에 낙청연이 나타났다면서? 그게 정말이오?”음산한 목소리에서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부진환은 입을 열지 않았고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부운주는 뒷짐을 진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우선 낙청연이 가짜로 죽게 한 뒤에 그녀를 몰래 서릉의 국경으로 데려가 전쟁을 멈추는 대가로 그녀를 내준 것이오?”부진환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부운주는 이미 답을 확인했다. 그는 화가 나서 부진환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고 그 주먹에 부진환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자리에서 일어난 부진환은 입가의 피를 닦았다.“그러고도 당신이 남자오? 당신은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지 않소? 왜 여인으로 전쟁을 평정하려고 한 것이오? 정말 무능하군!”“천궐국의 체면이 당신 때문에 말이 아니오!”“게다가 모두를 속이고 낙청연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다니! 짐을 속인 죄를 어떻게 갚을 생각이오?”부진환은 평온한 얼굴로 덤덤히 말했다.“섭정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국경은 안정되었고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도 안전합니다. 폐하 또한 자리를 굳혔으니 이제 신이 보좌할 이유는 없습니다.”그 말에 부운주는 깜짝 놀랐다. 그는 부진환이 자리에서 물러날 줄은 몰랐다.“뭐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잘 생각해 봤소?”“네.”부운주는 부진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평온한 얼굴의 부진환이 무슨 생각을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의 곁을 지키고 싶지. 적어도 함께 있으면 후회가 남지는 않을 것 아니냐?”태상황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부진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부황, 저와 낙청연 사이에는 원한이 있어 불가능합니다. 길게 아플 바에야 짧게 아픈 것이...”그 말에 태상황은 미간을 구겼다.“뭐라고? 무슨 원한 말이냐?”부진환은 마음이 무거웠다. 이미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이젠 태상황을 그저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낙청연의 어머니가 모비를 속여 모비에게 무언가를 먹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 물건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태상황은 눈살을 찌푸렸다.“낙 승상의 부인이 네 모비를 속였다는 말이냐?”“누가 그런 소리를 한 것이냐? 낙 부인과 네 모비는 자매와 다름없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부진환은 살짝 놀라 대답했다.“그래서 제 모비를 속일 수 있었던 겁니다. 모비의 서신에 그렇게 적혀있었습니다.”태상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리가 없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낙 부인은 절대 네 모비를 해칠 리가 없다. 낙 부인은 네 모비를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사람이었다.”“짐이 듣기론 낙 부인은 병 때문에 세상을 떴다고 했다. 그건 어쩌면 당시 네 모비를 구한 일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네 모비는 널 낳을 때 난산 때문에 출혈이 심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었다. 그런데 낙 부인이 무슨 방법을 쓴 건지 네 모비를 구했다.”“네 모비의 말을 들어 보니 그 방법 때문에 낙 부인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하더구나. 그 뒤로 낙 부인은 크게 앓았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운명을 바꿨기 때문에 몸이 크게 상했다고 들었다.”“낙 부인이 그때 네 모비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낙 부인이 승상부에서 병으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부진환은 처음 알게 된 사실에 깜짝 놀랐다.“그게 무슨...”그렇다면 그 서신은 위조된 것일까?“부황, 저는 볼일이 있어 먼저 가야겠습니다.”부진환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격노한 부진환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낙정의 목을 조르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부진환은 화가 난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그게 무엇이오? 방법이 무엇이오?”낙정은 목이 졸려 숨이 막혔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왕야, 참지 마세요. 왕야는 절 죽일 수 없습니다.”“지금 아주 고통스럽겠지요. 절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 없으니 말입니다.”“하하하, 왕야가 절 죽인다면 아무도 성수의 통제를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왕야, 절 죽일 수 있겠습니까?”낙정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이 도발적이었다.부진환은 결국 그녀를 놓아주면서 연신 뒷걸음질 쳤고 피를 토했다. 너무 아파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마음속의 분노가 그의 강렬한 반항심을 일으켰다.낙정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차갑게 웃었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아쉽군요.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되다니, 너무 늦었습니다. 낙청연은 침서에게 끌려갔습니다.”“그녀가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는 저도 모릅니다.”“어차피 침서의 손에 죽은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낙청연 한 명 더 죽여도 상관없지요. 다만 과정이 조금 괴로울 수는 있겠지만요.”그 말이 부진환을 분노케 했다.하지만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참아야 했다. 그는 낙정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낙정은 그와 거리를 좁히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일부러 낙청연이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해놓고 그녀를 숨겨둔 건 절 현혹하기 위해서였지요? 제가 낙청연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몰래 그녀를 옮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아쉽지만 그녀는 왕야의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그녀는 왕야를 죽도록 미워해 침서와 함께 떠난 것입니다.”“왕야가 직접 그녀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은 것이지요!”낙정은 득의양양하게 조롱했다.극도로 화가 난 부진환은 피를 토했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낙정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본왕은 당신을 죽일 수 없지만 당신을 죽일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부진환은 씩씩거리면서 비틀거리며 떠났다.
“당신은 그녀를 얻었지만 그녀를 죽게 했고 난 그녀를 원했지만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소.”부운주는 탄식했다. 그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부진환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폐하께서는 오랫동안 참고 있었지요. 처음부터 낙청연을 위해서였습니까?”“아니요, 처음에는 황위를 위해서였습니다.”“이미 황위를 얻었는데 뭐가 또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말을 마친 뒤 부진환은 단호히 돌아섰다.부운주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황위가 목적이었고 선택할 기회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낙청연은 산속에서 며칠간 몸조리했다. 그러다가 몸이 조금 좋아졌다 싶으면 숲속에 들어가 검을 연습했다.꽃샘추위가 지나자 날씨가 점점 따뜻해졌다.낙청연은 침서와 함께 하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침서는 꽤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인내심이 강했고 감히 그녀를 화나게 만들 수도 없었다.그날, 그들은 길에 올랐다.하산한 뒤 한참을 이동해서야 겨우 여국의 도성에 도착했다.드높은 기세를 갖춘 성을 바라본 낙청연은 심경이 복잡했다. 오랜만이었지만 익숙했다.그녀는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살았고 또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그녀는 아직도 당시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알지 못했다.어쩌면 고묘묘일 수도 있었다. 침서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아주 분명했고 고묘묘는 침서가 다른 여인에게 한 번이라도 더 시선을 준다면 그 여인을 죽이려는 사람이었다.하지만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대제사장의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일 수도 있었다.이번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때의 진실과 자신의 원수를 찾을 생각이었다.침서는 그녀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갔다.성안에 들어서자 한 대열이 그들을 맞이했다. 철갑옷을 입은 금군이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뒤를 따라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말에 앉아있는 사람은 진익(秦翼)이었다. 그는 고묘묘의 오라버니이고 여국의 황자였다.“침서, 이번에는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것 같소.”“대군을 모아 천궐국을 공격한다더니 겨우 여인 한 명을 데리고 온
“침서 장군이 알고 있는 것보다 제가 알고 있는 게 훨씬 많습니다.”진익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연약해 보이는 여자의 입에서 이렇게 오만방자한 말이 나오다니.“눈 밑이 어둡고 안색이 안 좋으신 것으로 보아 황자께서는 어떻게 하면 무공을 더 정진할 것인지 고민이 깊으신 듯합니다.”낙청연이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청아하고 고운 목소리였지만 내뱉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한 진익이 차갑게 말했다.“잠시 정체기를 겪고 있는 것뿐이다!”낙청연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정체기는 누구나 겪지요. 하지만 5년 이상 정체기를 겪는 사람은 드뭅니다.”느릿한 말투가 진익의 아픈 곳을 찔렀다.사람들 앞에서 감히 이런 불손한 말을 입에 담은 그녀가 괘씸했다.“닥쳐!”그러면서도 침서도 모르는 일을 이 여자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놀랍고 궁금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침서도 순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비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5년? 여국의 황자가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말은 들었소만,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구려!”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진익이 분노에 찬 시선으로 침서를 노려보았다.침서는 도발적인 시선으로 진익을 마주 보며 말했다.“황자, 내가 데려온 사람은 바보가 아니오. 이 아이의 능력은 여국의 그 어떤 제사장보다 강하다오!”이토록 오만방자한 말은 침서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하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하면서 낙청연은 더 많은 적을 두게 되었다.진익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침서, 굳이 이 여인을 여국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면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오.”“저 여인이 죄수들을 길들인다면 내 부황께 청해서 도성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소. 하지만 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목을 칠 것이오! 여국 제사장이 평소에 하는 일이 죄수를 훈육하는 일이잖소.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하지 않겠소. 저것들을 길들여만 주시오. 시험에 통과해야 황실에서 저 여자를 인정하고 도성에 머물도록 허락해 줄 수 있소.”낙
십대 악인들의 악명에 대해 들어본 적 있었다. 하지만 전부 이곳에 잡혀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그리고 이들을 길들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하나 같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낙청연에게 주어진 시간은 7일.7일 안에 이들을 길들이고 자신의 목숨도 보전해야 한다.죄수들은 성수를 마실 자격을 박탈당했으니 낙청연 체내의 사상환도 별 효과를 낼 수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가 입고 있는 망토가 바람에 나부끼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사람이 죽었다는 방 앞에 도착해서 방문을 열자 차가운 기운이 얼굴을 덮쳤다.바닥에 쓰러진 시체가 보였다.사지가 절단되고 피가 사방에 튄 처참한 광경이었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기에 놀라서 뒤로 자빠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현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혹했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시체를 관찰했다. 죽은 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치명상은 흉부와 복부 사이. 칼은 정면으로 찔렀고 사지는 피해자가 죽은 뒤에 절단했다.다른 곳을 살펴보았지만, 반항하거나 몸싸움을 벌인 상흔은 보이지 않았다.가만히 서 있는 상태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는 얘기였다. 반항하면서 생길법한 타박상이나 멍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시체를 조사하던 그녀의 눈에 어깨 쪽에 있는 낙인이 들어왔다.그것은 부문이었다.낙청연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금혼부(禁魂符).이 부문에 당한 자는 혼백이 시체에 갇혀 환생조차 할 수 없게 된다.이런 잔인한 부문이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되다니.그리고 이때, 등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다가오더니 곧바로 뼈를 파고들었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얼음같이 차가운 기운은 독사처럼 쉬지 않고 그녀의 사지에 퍼져 나갔다. 사지가 마비되는 느낌이 조금 들었다.낙청연은 홱 하고 뒤돌아섰다.반투명한 남자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남자의 혼백이 미친 듯이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혼령의 침입 의도를 느낀 낙청연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깊은 밤의 고요를 깨뜨리려는 듯, 이상한 기운이 응집되고 있었다.낙청연은 짙은 불길한 기운에 눈을 번쩍 떴다.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어깨를 눌러 제압한 뒤, 그녀를 끌고 방밖으로 나갔다.낙청연은 거칠게 바닥에 내쳐졌다. 온몸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마당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아홉 명의 악인이 한가하게 주변에 둘러앉아 있었다.한쪽에서 책을 읽는 남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악인들은 맹수의 눈빛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두풍진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손으로 낙청연의 머리카락을 홱 잡아당겼다.“이번에는 병약한 미인을 보냈구만 그래….”두풍진은 꽤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어딘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는 욕망이 득실거리는 눈빛으로 낙청연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다.“나만 먼저 재미를 본다고 투덜대지 말고 이번에는 누가 먼저 할래?”두풍진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일행에게 물었다.나머지가 말이 없자 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이런 맛있는 떡이 굴러들어 왔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아? 그럼 나도 사양하지 않을게.”말을 마친 그는 손가락으로 낙청연의 턱을 치켜들었다.“그럼 이번에도 내가 먼저 맛볼게.”그는 순식간에 낙청연의 옷깃을 잡아 찢어버렸다.찍!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옷이 찢어지고 하얀 등이 바깥으로 드러났다.낙청연은 눈물을 머금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이러지 마세요….”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가냘픈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악인 중 한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제대로 된 경험도 쌓아보지 못한 초보 제사장인가 보네. 겁도 없이 천자호를 자기 발로 들어오다니.”두풍진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겁에 질린 낙청연의 얼굴을 감상했다.“나는 이런 애가 더 좋아.”말을 마친 그는 낙청연의 몸에 걸친 옷을 찢기 시작했다.낙청연은 다급히 몸을 피하며 몸부림쳤다.“이러지 마세요… 여기서는 싫어요.”
낙청연은 너덜너덜해진 옷을 찢어 두풍진의 입을 틀어막았다.모든 처리가 끝난 뒤, 그녀는 검은색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여기저기 뜯긴 옷을 가렸다.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냉랭한 눈길로 두풍진을 응시했다.“서른 명이 넘는 여자를 겁탈한 역겨운 놈. 너 같은 걸 길들이는 건 나도 사양이야.”두풍진은 그제야 자신이 그녀의 연기에 속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악에 받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껏 몸부림쳐도 속박을 벗어날 수 없었다.낙청연은 비소를 꺼내 그의 옷을 찢었다.아니나 다를까.어깨 쪽에 아까 보았던 것과 똑같은 금혼부 낙인이 보였다.왜 이들은 같은 낙인을 새기게 된 걸까.여국에 중죄를 지은 노비들을 가두는 곳이 있다고 들은 적 있었다.그중에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악질 죄수들도 있었는데 심지어 여국을 배신한 대역죄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죽지 않고 그곳에 갇히게 된다.이곳의 십대 악인들도 그곳에서 도망 나온 자들일까?하지만 그들의 악명은 오래전에 여국 곳곳에 퍼졌다.정상적인 절차대로라면 제사장이 이들을 길들인 뒤에 다시 그곳으로 보내야 맞다.정신을 차린 낙청연은 두풍진이 얼굴에 쓴 가면을 손으로 찢어 버렸다.한층, 또 한층 벗겨내자 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선이 굵은 사내다운 얼굴이었다. 낙청연이 상상했던 것처럼 추악하고 음침한 얼굴이 아니었다.눈빛에 넘실거리던 음란한 기운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원망만 가득 찬 눈빛이었다.남자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낙청연을 찢어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낙청연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나를 본 적 있어? 왜 나를 이토록 증오하는 거지?”두풍진의 눈빛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숨기고 있던 비수로 밧줄을 끊어냈다.밧줄이 풀린 순간, 낙청연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두풍진이 차가운 빛이 번뜩이는 날카로운 비수로 낙청연을 향해 찔렀다.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그녀는 손으로 날카로운 비수를 잡고 장풍으로 칼날을 부러뜨렸다. 날카로운 칼끝이 방향을 바꿔 두풍진의 복부에 꽂혔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상대가 안 되오.”낙요는 고개를 돌려 바둑판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당신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바둑을 두며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요.”부진환은 바둑알을 하나하나 거두었다.낙요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햇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러고 보니, 나의 답답함을 풀 사람은 당신뿐이오.”“심시몽은 어의원의 심사를 통과하고 정식으로 어의원에 들어가게 되었소. 그리고 강소풍의 집안에서도 그들의 혼사를 승낙하여 두 사람은 곧 혼사를 올릴 것이오.”“갑자기 심면과 낙현책도 혼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소.”부진환이 웃으며 말했다.“일찍이 혼인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이들도 조급해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오?”낙요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여유롭게 말했다.“걱정하지 않소. 대소사를 모두 당신이 걱정하고 있지 않소? 초경의 수위가 있으니, 몇 년이 지나도록 용모가 변하지 않았소. ”“나 같으면 그렇게 걱정을 많이 했으니, 일찌감치 늙었을 것이오.”몇 년 동안 부진환은 그녀를 도와 적지 않은 조정의 일을 분담했다.그녀도 부진환의 동반에 습관이 되었다.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진환을 바라보며 손바닥에 턱을 괴고 물었다.“이 나이가 되니,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을 후회하오?”“걸을 수 없을 정도로 늙었을 때, 다른 사람의 자식들이 단란히 모여있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오? ”부진환은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후회하지 않소.”“사람은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오.”“게다가 당신은 여제요. 당신이 늙었다고 해도 누가 감히 푸대접하겠소?”“당신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면 난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오. 초경의 수위로 늦게 늙는다고 하지 않았소? 앞으로 당신이 늙으면 내가 당신을 부축하고 업고 다닐 것이오.”낙요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참 좋소.”이듬해 가을.심시몽은 강소풍과 혼사를 올렸고 어의원 5품
강소풍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오. 어머니께서는 마음에 들어 하셨소.”설명할수록 강소풍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심시몽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그를 위로했다.“자네의 뜻을 알고 있소. 설명할 필요 없소.”“시몽... 미안하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방법을 강구하여 어머니에게 자네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오. 분명 어머니도 자네를 받아들일 것이오. ”그 말에 심시몽은 살짝 놀라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나와 헤어지려는 것이 아니었소?”심시몽은 강소풍이 특별히 그녀를 찾아와 이 일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그녀와 연을 끊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니요. 그럴 리가 있소.”“나는 단지 이전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뿐이오. 이번 달 안에 혼담을 꺼낼 수 없을 텐데, 나를 기다려줄 수 있소?”“말재주가 좋지 않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소. 어머니께서는 자네가 연약하고 힘없다고 생각하시오. 앞으로 내가 출정하면 자네가 홀로 집안을 지킬 텐데, 우리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하시오. ”이 말을 듣고 심시몽은 대충 뜻을 알아차렸다.“어머니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며느리를 원하고, 자네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서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기를 원하시오.”“나는 비록 무공을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소.”고개를 들어 올린 심시몽의 눈빛은 밝았다..강소풍은 놀라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정말이오? 여전히 나와 함께 있고 싶소?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심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어찌 쉽게 포기할 수 있소? 자네가 포기하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강가는 장군 집안이라 분명 우리 언니와 같은 여인을 좋아할 것이오. 난 비록 언니와 비길 수 없지만 그래도 노력할 것이오.”“여제께서 나에게 약옥을 주었소. 만약 순 의원과 의술을 배울 수 있다면 어의원에 들어갈 기회가 있소.”“성공
이 말을 듣고 심시몽은 약간 의아해했다.“공주는 저를 탓하지 않습니까...”“그분은 공주시다. 천하를 품고 있는데, 어찌 네가 범한 작은 잘못을 추궁할 리 있냐?”“지금 너의 변화를 보면 공주도 더 이상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려야 할 예의는 없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나면 공주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거라.”심시몽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예. 내일 가겠습니다.”“저는 먼저 약옥을 넣고 의관에 가겠습니다.”심시몽은 기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고, 의기양양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금도 방금의 의기소침함이 없었다.심면도 기뻤다.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 같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강소풍이 집에서 어머니와 싸우고 있었다.“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너를 현학서원에 보내 양성하는 것도 앞으로 네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너도 마땅히 너와 어울릴 만한 부인을 얻어야 한다. 너와 전장을 누비며 적을 죽이는 그런 사람 말이다.”“힘없이 연약하게 집안에서 서방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평범한 아가씨는 안 된다.”“이전에 그 심시몽을 위해 집안의 빙천영지를 훔쳤고, 심지어 벌을 받고도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난 그때부터 심시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그 아이와 혼사를 올리려는 것이냐?”“말도 안 된다!”강부인은 단호한 태도로 조금도 말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강소풍은 내키지 않는 듯 반박했다.“심시몽이 평범하다니요? 어떻게 평범하다는 말입니까? 심시몽은 그저 무공이 부족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예를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하물며 그녀의 언니는 이미 태자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니 심시몽도 좋은 아가씨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강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언니는 언니이고, 심시몽은 심시몽이다. 어찌 동일하게 논할 수 있겠냐?”“강가는 권세에 빌붙지 않고, 심시몽의 언니가 태자라는 것을 봐서 그녀를 맞이하려
“나중에 자네가 신의가 될지도 모르오.”심시몽이 웃으며 말했다.“자네의 좋은 말대로 되길 바라오.”모두 술을 마시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심면이 임계천에게 물었다.“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소?”“나라에 보답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소.”임계천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기에 그저 궁의 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다들 기분이 좋았고 투지가 넘치고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술을 너무 늦은 시각까지 마셔서 그들은 심가에서 묵었다.오전이 되자, 각 집안의 하인들이 부랴부랴 사람을 찾아왔다. 몇 사람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집으로 끌려갔다.궁에서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강소풍은 금군 기사영 통령으로 봉해져 도성과 황궁의 안위를 지키게 되었다.임계천은 형부로 전근되었다.소우청과 봉함선은 수주의 군영 부장군으로 명을 받았다.소우청의 행처는 그의 아버지 소진오가 좋은 경험을 하기를 바라며 부탁한 것이다.낙요는 봉함선이 여인이기에 그녀를 그렇게 멀고 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동적으로 수주에 갈 것을 청구했다.봉함선이 말했다.“여국은 역대로 여 장군이 없었습니다. 저는 첫 번째 여장군이 되고 싶습니다.”“만약 힘들고 험한 곳이 아니라면 어찌 제가 포부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낙요는 그녀의 담력과 야심을 높이 사고 그녀의 청을 승낙했다.“나는 네가 여국의 첫 번째 여장군이 되기를 기대한다.”이들 외에 현학서원의 다른 학생들도 그들로 하여금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행선지를 얻었다.유독 심시몽에 대해, 낙요는 따로 안배를 해주지 않았다.백서가 걱정했다.“어찌 유독 심시몽만 얘기가 없으십니까? 심시몽이 알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낙요가 웃었다.“아니다. 이미 심면을 시켜 심시몽에게 한가지 물건을 보냈다.”백서는 살짝 놀랐다.“일찍이 계획이 있으셨군요.”이때의 심시몽은 홀로 넋을 잃고 연못가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흩날리는 낙엽처럼 어수
유생이 드디어 알아차렸다.“그랬구나. 내가 어찌 이걸 잊은 것이냐.”“난 정말 운이 좋은 것 같구나. 이렇게 운 좋게 제사장 자리를 주울 수 있으니.”심면이 답했다.“아닙니다. 전에 제가 청주 전쟁에서 조난했을 때, 제자들을 통솔해 적과 싸우지 않았습니까? 현책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났습니다.”“사저가 소제사장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듣고 유생은 쑥스러워하며 낙현책을 힐긋 쳐다보았다.“네가 이렇게 말하면 낙현책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낙현책이 웃으며 답했다.“그녀가 말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너는 나보다 대제사장이 더 잘 어울린다.”“나는 무학에서 너보다 좀 나을 뿐이다. 정말 대제사장이 되려면 너보다 잘할지 모를 일이다.”“다만 제사장 일족의 심사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하물며 나도 대제사장이 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단지 여제가 기뻐하기를 바랄 뿐이다.”이 말을 듣고 유생은 마음이 놓였다.“불쾌하지 않았다면 다행이구나. 권력과 지위 앞에서 네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구나!”“한 잔 권하마!”유생이 술잔을 들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대문이 열렸고,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목소리가 들렸다.“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왜 벌써 마시는 것이오?”“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니, 의리가 없소!”몇 사람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강소풍과 임계천이 술병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오늘 밤 다들 왔구나!”“자, 심면과 유생을 위해 한 잔 하세!”모두 자리에 앉아서 잔을 들어 함께 마셨다.그렇게 한참 마시다 보니 술에 취한 강소풍이 흥분한 듯 입을 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심가에 겹경사가 닥칠 것이오.”모두 멍해졌다.강소풍은 낙현책과 심면을 바라보았다.“여제가 두 사람의 일을 인정했으니, 언제 혼사를 치르는 것이오?”심면은 갑자기 얼굴을 붉어지며 황급히 강소풍에게 술을 따라주었다.“술을 마셔도 자네의 입을 막지 못한 것이오?”
“저희가 어찌 가족입니까?”“50냥의 이득을 본 걸 후회한다면서요?”이 말이 나오자 다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들은 그제야 유생이 그날 밤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어쩐지 상자를 도둑맞았더라니.유룽은 체면을 깎으며 사과했다.“유생아, 우리는 한 가족이니 티격태격하는 것도 정상이다. 그러나 다들 나쁜 생각은 없다.”“이전의 일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이렇게 너희들에게 사과하마!”“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자. 너를 위해 잘 경축해야지 않겠느냐!”둘째아버지와 셋째 아버지도 모두 따라서 사과했다.집안 재산을 나누겠다고 얘기한 그날 그들이 각박한 만큼 지금 아주 자상했다.“유생아, 집으로 가자. 지나간 일은 잊고, 우리 가족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떠냐?”“그래. 가족이 함께 지내면 얼마나 시끌벅적하냐? 따로 이곳에서 지내면 쓸쓸하지 않으냐?”“우리 집에 좋은 술도 두 병 간직하고 있는데, 유생을 축하하러 오늘 꺼내마!”유생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차분하고 차갑게 말했다.“다들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집안 재산을 나누고 연을 끊었는데, 어찌 번복할 사람이 있겠습니까?”“잘살든 못살든 더 이상 유가와 관계가 없습니다.”“다들 가시지요. 굳이 우리 집 앞에서 매달리려 한다면, 관아에 신고할 것입니다.”말을 마치고 유생은 방안으로 돌아와 차갑게 문을 닫았다.문밖의 사람들은 후회에 휩싸였다.게다가 둘째는 첫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형님 탓입니다. 제사장 자리가 발표되기도 전에 넷째네를 쫓아내더니, 지금은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셋째도 불평했다.“유생은 앞으로 대제사장이 될 것이오. 앞으로 유생 덕을 보긴커녕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앞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할 수도 있소...”유롱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어찌 또 내 잘못이 되었냐?”“애초에 심사 결과가 나오자, 다들 하나하나 달려와서 유생네가 끝났다고, 그들 일가를 헛되이 잘해줬다고 하지 않았냐? 너희들이 모두 동의했기 때문에 넷째 일가를 쫓아낸 것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유가 사촌들은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유생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왜 제가...”왜 낙현책이 아닌가?장 총관이 웃으며 말했다.“어서 명을 받으시지요. 소제사장”유생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기뻐하며 얼른 명을 받고 고마움을 전했다.장 총관은 자리에 있던 병사들을 힐긋 보고 유생에게 친절하게 물었다.“소제사장,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제가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까?”유생은 웃으며 말했다.“필요 없습니다. 고맙습니다!”“어찌 사양하십니까? 제가 필요한 곳이 없다면, 이만 궁으로 돌아가 명을 전해야 합니다.”“예. 바래다 드리겠습니다.”유생은 장 총관을 골목 밖까지 배웅했다. 장 총관이 의미심장하게 일깨워주었다.“아가씨는 아직 소제사장의 권력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도성에서 제사장의 권력은 여제와 대제사장에 버금갑니다.”“태자와 동등한 권력입니다.”“이런 사소한 일은 직접 처리할 필요도 없으니, 제게 한마디만 분부하면 됩니다.”유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일깨워 줘서 고맙습니다.”“오늘 여제께서 태자도 정하셨습니까? 심면입니까?”장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심가에 뜻을 전하고 왔습니다.”장 총관을 떠나보내고 유생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선택받을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낙현책한테 졌기 때문이다.심면도 태자로 봉해져서 참 좋았다.오늘 밤 심면을 찾아 축하하려면,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밖으로 돌아갔다.병사들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바꾸어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소제사장, 오늘 분명 오해일 것입니다. 저희는 먼저 떠나겠습니다.”유생이 차가운 소리로 호통을 쳤다.“멈추거라!”그들은 뻣뻣하게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땀을 뻘뻘 흘렸다.제사장의 말 한마디에 그들은 직무를 잃을 수도 있다.“수사를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오? 안 하시오?”“저희가 감히 소제사장의 집을 수색할 용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
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궁을 나가려던 참이다. 함께 가자.”유생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심면을 찾으러 가는 것이냐?”“심사 결과가 나온 후, 심면을 만나지 못했구나.”“심면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낙현책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그런가 보구나.”“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거라.”“그래.”두 사람이 함께 궁으로 나온 후 유생은 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낙현책은 심면의 집으로 향했다.유가의 골목에 도착하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관아의 사람들이 유생의 집 앞을 막고 그녀의 부모님을 잡고 그들을 관아에 데리고 가려 했다.옆에는 그녀의 사촌들이 있었다.안색이 바뀐 유생은 다급히 달려갔다.“그만하시오!”“뭐 하는 것이오?”유생은 바로 부모님을 뒤에 감쌌다.유롱은 화가 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하냐니? 집안 재산을 나누었으니, 유가와 이젠 연이 없는 것이다. 집안 재산도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찌 유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냐? 그 상자에는 족히 수십만 냥이 있다!”“감히 너희랑 아무 연관도 없다고 할 수 있느냐?”유생은 그들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고, 관리에게 고소할 줄도 몰랐다.“우리가 훔쳤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증거도 없이 저희를 잡다니, 법을 따르셔야죠.”유롱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유가 사람들이 네가 돌아온 것을 봤다!”“변명하지 말거라. 할 말이 있으면 감옥에 가서 변명하거라!”물건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유일하게 의심하는 사람은 유생이다.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은 그 돈을 되찾으려 했다.“내가 돌아갔다고 돈을 훔쳤다는 것입니까? 농이 심하십니다!”“관청에 따라서 갈 수 있지만, 저희 부모님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사람을 잡을 수 없습니다!”유롱이 화를 냈다.“네 아버지와 어머니도 한패다! 당연히 관아로 데려가야 한다!”“나으리, 그들은 수십만 냥을 훔쳤습니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나리께서 반드시 돈을 되찾아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조영궁.심사 결과가 나온 후 오랫동안 기다리던 낙요는 드디어 낙현책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여제.”낙현책은 고개를 숙이고 여제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심사 결과가 나온 지 오래됐는데, 어찌 이제야 나를 찾아온 것이냐? 잘 고려한 것이냐?”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여제를 실망하게 했습니다!”이 말을 듣고 낙요는 그의 결정을 알아차렸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낙현책은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여제의 가르침을 저버렸습니다. 저는 대제사장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낙요는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의외는 아니었다.“잘 생각했느냐? 이 일은 번복한 기회가 없다.”낙현책이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오랫동안 심사숙고한 후 내린 결정입니다.”“제가 여제를 실망하게 했습니다.”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했고 최종 심사에서 1등까지 하였는데, 여제를 실망하게 했다.낙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일으켜 세웠다.“실망하지 않았다.”“네 실력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어찌 실망했겠느냐?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말거라. 마음을 놓고 네 목표를 향해 가거라.”“나는 네 결정을 존중한다!”여제가 화를 내지 않자, 낙현책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그는 감동에 겨웠다.“고맙습니다.”낙요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동안 심면을 만나지 않았겠구나? 어서 네 결정을 알리러 가거라.”낙현책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을 나갈 준비를 했다.그동안 심면도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있어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누군가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낙현책이 궁을 나서려는데 제사장족 제자가 그를 가로막았다.“유생이 궁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소.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소.”“급한 일? 알겠소.”유생은 그동안 궁에 있지 않았다. 갑자기 궁으로 찾아온 것을 보아, 중요한 일이 있는 듯했다.먼저 그녀를 만나고 궁을